LV.22 한국인 이복동 - [2]
가온은 방금 자신이 제대로 들었는지 의심했다.
“전쟁 막는 걸 도우시겠다고요?”
“그렇소. 무익한 전쟁놀이에 계속 어울려줄 수는 없지.”
아타락시아의 말에 가온은 계속해서 기겁했다. 런던을 불태우고 처칠을 구워버린 이 드래곤이 전쟁의 무익함을 말하다니?
잠시 아타락시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정말이지 이 드래곤을 묘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워낙 유명한 드래곤인 것이다.
복수의 상징쯤 되는 레드드래곤. 분노의 화신.
몇 달 전 의도치 않게 참여한 주전파들의 모임에서 이 레드드래곤은 누구보다 당당히 서 있었다. 그 자리에서 국가원수며 종족의 수장들과 동등하게 말을 섞었다.
그 자리와 그녀가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아타락시아가 사회적 위치로 따지면 일개 기업인에 불과하다는 사실, 2차 대전과 비교할 수 없이 항공전력이 발달한 21세기에 그녀는 전력으로 활약할 수도 없으리란 사실은 그 자리에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그녀는 신에게도 경의를 표하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사실은 이 드래곤이 주전파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간디가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외치는 셈이요, 언데드 리치가 죽은 자는 안식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인데.’
가온마저도 그녀에게 나름의 경의를 품고 있을 지경이었다. 자신의 원수 중 하나를 그녀가 불태워주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지금 가온이 받은 충격은 컸다.
“대체 무슨······ 당신, 진짜 아타락시아가 맞습니까?”
“왜, 폴리모프를 해제해 보일까? 그러기엔 방이 좁은데. 정 원한다면 다른 장소로······”
가온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그냥 눈앞에 계신 분은 아타락시아가 아닌 것으로 여기지요. 제가 아는 아타락시아라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으니.”
아타락시아는 정색했다.
“아니, 아타락시아가 한 말이 맞소. 아타락시아는 가온 경에게 제안하고 있어.”
“그 제안을 왜 제게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전 그 가온이 아니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런 말을 아타락시아가 했다고는 믿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아타락시아가 그런 제안을 하더라도······ 가온은 분명 거절할 겁니다.”
“어째서요? 유명하긴 하지만 어차피 퇴물에 불과한 레드드래곤 따위가 재의 왕자를 도울 순 없으리라 생각해서? 물론 내가 직접 대단한 도움을 줄 순 없을 거요. 하지만 도움이 될 만한 자들과 연결해줄 수는 있소.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 많소. 심지어 소위 주전파들 사이에도······. 나처럼 말이지.”
아타락시아는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가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그럼?”
“가온은 평화에 관심이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무엇 때문에 그런 오해를 하셨는지는 짐작할 만하지만······”
가온은 카샤드에게 했던 해명을 똑같이 했다. 모든 것은 착각이며, 신들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음을 설명했다.
다 듣고 난 아타락시아는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겨우 물었다.
“그러니까, 난 방금 동지가 될 리 없는 인물에게 비밀을 말한 거요? 절대 발설해선 안 될 비밀을?”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전 평화의 사도는 아니지만 전쟁을 간절히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일이 어찌 흘러간들 상관할 이유가 없으니, 비밀을 지킬 겁니다. 여신께 맹세하지요.”
“그 맹세는 믿을 수가 없는데······.”
“아무리 신앙과 거리가 먼 드래곤이라지만 다른 종족이 신들을 얼마나 경외하는지는 아실 텐데요? 아, 우드엘프들의 신앙심이 부족한 걸 알고 그러시는 겁니까? 전 동족 사이에서 가장 신실한 남자니 괜찮습니다. 걱정 말고 믿으십시오. 절대 발설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라······ 아니, 됐소.”
아타락시아는 어째서인지 몰라도 여전히 불안한 눈치였지만, 어쨌건 비밀을 확실히 지키겠답시고 공격해오지는 않았다.
아타락시아는 그저 탈진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럼 대체 가온은 뭘 원하는 거요? 평화를 원하지 않고, 전쟁도 썩 원하지 않는다면······”
“이도 저도 아니죠. 무언가를 직접 주도하길 원하진 않습니다.”
“그럼 가온은 그냥 상황이 흘러가는 걸 보기만 할 거다 이거요? 예를 들어, 집에서 게임이나 하면서?”
“뭐, 그렇겠지요. 물론 재의 왕자가 정말 게임 따위를 할 리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걸 할 만한 분이 아니라서······”
가온의 말을 흘려들으며, 아타락시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숨 쉬었다.
“그거 아주 별로군. 재의 왕자는 절대 방관자로 머물러선 안 될 인물인데. 어느 일이든 몸소 주도해야 해. 그 엘프에겐 그럴 능력이 있잖소? 차라리 그 엘프가 전쟁이라도 바랐다면 좋았을 텐데.”
“평화를 바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약 가온, 그 군대 도살자께서 참전하리란 뜻을 명백히 밝혔다면······. 난 이놈의 박쥐 노릇을 하지 않았을 거요. 우리가 이길 게 분명했을 테니까.”
“지금은 이기지 못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사실, 그래. 난 소위 주전파란 작자들을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소.”
“어째서입니까?”
“놈들이 전략이랍시고 세운 계획을 보라지. 핵으로 목표지대를 초토화한 다음 전차들을 보내 점령하겠다? 그것부터 어려울 것 같소. 드워프 놈들이 망치 두들겨 찍어낸 그 전차란 것들은 깡통만도 못한 고물들이오. 미국이 1개 전차대대만 내보내 방어해도 과연 돌파할 수 있을지 의문이야.”
“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세운 계획 아니겠습니까? 나름대로 고등한 전략 전술을 교육받은 사람들이 세운 계획일 텐데요.”
“글쎄? 대차원문을 닫는 것이 목표라던 흉턴은 한국에 대차원문을 하나 더 만들어냈는데, 그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주변에 있던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더군······. 하기야 누가 그럴 수 있었을까? 싫은 소리를 했다간 겁쟁이 반역자로 몰릴 판인데.”
아타락시아의 하소연에 가온이 물었다.
“겁쟁이로 몰릴 게 두려워서 주전파들의 진영에 남아계신 겁니까?”
“비슷하지. 모름지기 적보다 전향자를 더욱 혐오하는 법이잖소? 내가 감히 평화를 입에 담았다간 바로 배신자로 낙인찍힐 거요. 적보다 먼저 죽이려 하겠지. 그리고 사실······ 칠 년 전까지만 해도 난 전쟁을 원했어.”
“복수를 위해서?”
“그렇소. 딸아이의 복수. 이미 잔뜩 했지만,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이제는 아니오.”
그때였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 상황에 대체 누가?
이마에서 땀을 흘리며, 아타락시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다음 순간 긴장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엄마! TV 틀어줘!”
앳된 목소리.
가온이 고개를 보니 웬 조그만 아이가 아타락시아를 엄마라 부르고 있었다.
“애기, 착하지? 지금은 엄마 바빠. 리모컨은 운전기사 아저씨 불러서 눌러 달라고 해.”
“크롸라라라라라―!”
열 손가락을 발톱처럼 구부리며 포효하는 딸을 아타락시아는 어찌어찌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그녀가 어찌나 쩔쩔매던지, 가온은 심각한 분위기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귀여운 아이군요?”
“고맙소······”
“그런데 다른 아이가 있었다니, 재혼하셨습니까?”
“아니, 입양했소. 종족부터가 달라. 인간 아이라오.”
“드래곤이 인간을 왜?”
“유기견을 입양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였소. 똑똑한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었지. 그러다 정말 딸로 인정할 만큼 정을 주게 될지는 몰랐어.”
하기야 드래곤의 모성애란 너무나도 유명한 것이었다.
“혹시 복수를 포기하신 것도 그 애 때문입니까? 새로운 딸의 존재가 슬픔을 잊게 해주어서······.”
그 물음에 아타락시아는 얼굴을 붉혔다.
“아니, 전 딸의 죽음을 잊은 건 아니오. 여전히 내겐 마족들의 불탄 해골을 딸의 무덤에 바치고픈 욕망이 있소. 다만 그 강력한 욕망을 무시해야 할······ 다른 의무가 생겨난 거지.”
“다른 의무?”
“지금에 충실할 의무. 승패가 확실하지도 않은 전쟁을 위해 목숨과 재화를 허비하고 싶지 않소. 드래곤에게는 넘쳐 나지만 인간에게는 부족할 시간도, 그 애를 위해서만 쓰고 싶어.”
전쟁하는 중에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도 딸에게 써야 할 시간과 재산이 마구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스의 복수자들은 아타락시아가 벌어들인 돈을 군비로 쓰겠노라 가져가면서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육 년 전까지 그랬듯,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것들쯤은 기꺼이 바치리라 기대했다.
정말 전쟁이 일어나면 뭘 더 바치라 할 것인가?
어쩌면 목숨까지 바치라 요구할지도 모른다.
육 년 전이라면 기꺼이 바쳤을 텐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딸의 어미로 살아야 할 지금은 절대.
“내가 말하자니 웃기는 일인 건 알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평화를 만들어내실 맘은 없소? 모름지기 무고한 아이들은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오.”
아타락시아의 설득에 가온이 대답했다.
당연히, 이번에도 거절이었다.
“그 가온은 전쟁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복수는 여전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주제에 평화의 사도 노릇을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군요. 심지어 몇몇 원수들은 아직도 살아있는데 말입니다.”
“그래, 그건 알지. 하고······. 나도 그자에 대한 복수를 도우려 했어. 그 유니콘이 계속 날뛰는 것은 아무리 봐도 평화의 진전에 도움 될 일이 아니었으니. 게임에 관련 시설을 넣은 것도 그 때문이지.”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합니다. 저 말고 다른 가온도 그럴 겁니다.”
“감사는 됐고. 그래서, 정말로 그 뜻은 변하지 않는 거요?”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복수에 열정적이었다 해서, 앞으로도 계속 그럴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지겨우시겠지요?”
“그렇소.”
“마찬가지입니다. 의무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은 지겹습니다. 재의 왕자로서 당장 모든 원수를 태워버려야 한다는 전쟁광들의 주장도, 화로의 대전사로서 전쟁광들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지겹습니다.
사람들은 그럴 의무가 있다고 말하지만, 다 헛소리입니다. 복수할 의무 따윈 없습니다. 여신께서 말씀하시길, 복수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화로의 대전사로서 평화를 이끌 의무······ 그건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신께서도 대전사에게 그런 의무를 다하라 명하지 않으셨지요. 그렇다면 다른 이들도 그 의무를 다하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길게 설명한 보람이 있었다.
아타락시아는 더 설득하길 포기했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가온은 뒤돌아서며 말했다.
“걱정하실까 봐 다시 여신께 맹세하지만, 이번 일은······”
“됐소. 그쪽이 가온이 아니듯 나도 사실 아타락시아가 아니지. 맞소?”
“예, 물론.”
그 대화를 끝으로 가온은 집을 나섰다.
그러면서 맛본 감정은 지극한 슬픔과 우울감이었다.
결국, 가온은 캐릭터 성별 제한 해제를 요구하지 못했다. 부탁을 거절한 다음 부탁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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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이복동은 또다시 찾아온 이미리를 보고 기겁했다.
“또 가온 형 설득해달라는 거면······”
이미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것도 부탁하고 싶긴 한데 이번엔 다른 용무로 왔어요.”
“다른 용무요? 어떤?”
“댁 실력이 좋대서요. 소드마스터에게도 위협적이었을 만큼. 그래서 초빙하려는데······ 카르세 놈들 막을 원정대 꾸리려는 건 알죠? 거기 낄 맘이 있나요?”
“봉급은 줍니까?”
“주긴 줘요.”
이미리가 약속한 보수를 듣고서 이복동은 눈살을 찌푸렸다.
“계정 비랑 탄약값 빼고 나면 푼돈이네요? 죽어서 무기 잃을 때 발생할 손실 생각하면 오히려 적자 날 확률이 더욱 높고요, 지금만 해도 안전하게 월 사백 이상 버는데······”
“어차피 앞으로는 더 못 벌 것 아닌가요? 참마황이 목적을 달성하면 게임 끝난다잖아요.”
이복동은 앞으로 계속 벌지 못할 테니 지금이라도 벌어둬야 하는 것 아니겠냐 말하려다 말았다.
“그렇긴 하죠.”
“그럼 원정대에 참여할 건가요?”
“예······.”
이복동은 이 일을 사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참마황이 우승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이 일의 수명연장에 도움이 될 터였다.
“잘 생각했어요! 애국해야지, 애국!”
이미리가 웃으며 떠난 뒤, 이복동은 저번에 지존무쌍이 화냈던 게 생각났다. 같이 가자고 권유하지 않아서 속상했다던가?
그래서 지존무쌍에게도 권했더니, 거절의 대답이 돌아왔다.
“난 됐어. 남아서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이복동이 생각하기에도 한두 명이 낀다고 이미 망조가 든 게임의 수명이 크게 연장될 리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저 아저씨는 게임에 망조가 든 이 상황을 조금 반길지도 모르지. 덕분에 그 업소에서 소비해야 할 골드의 현금 가격이 절반으로 내려갔으니까.’
이복동이 생각하기에, 지존무쌍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저 중년 남자는 오늘만 생각하고 사는 것 같았으니까.
그로부터 이틀 뒤, 한국인 게이머들은 원정에 나섰다. 게임의 수명연장을 위한, 더 나아가 조국의 미래를 위한 원정이었다.
그리고 출발한 당일에 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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