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99화 (99/135)

LV.22 한국인 이복동 - [1]

4판타지 온라인의 아린 벌판, 현실을 고스란히 옮겨온 이 역사적 장소에 모여든 육만 명의 카르세인들은 단순히 게이머들이라 부를 수 없는 무리였다.

그들은 한 달 내내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그 고생의 대가로 세금감면과 같은 몇 가지 혜택을 받았다.

절반 가량은 그 자그마한 혜택이 탐나 이 군세에 참가했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은 아무런 혜택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도 기꺼이 이 성전에 참여했을 무리였다.

“참마황 폐하께 영생을!”

자기네 대통령에게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는 무리들. 그들은 영웅이자 초인인 그들의 지도자를 사랑했다.

참마황이 독재자라느니, 군비에 지나친 돈을 퍼붓는 데다 지구와의 외교를 완전히 망쳐버려 카르세를 더욱 빈곤하게 만들었다느니 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초인 지도자를 위해 싸우기를 원했다.

“카르세-아린에 영광을!”

군가 대신 구호를 외치며, 카르세 사람 육만 명은 진군했다.

아린 벌판의 중심에 있는 대차원문으로.

이들은 지금까지 등장한 그 어느 세력보다 우승 후보에 가까운 무리였다.

다름 아닌 소드마스터가 포함된 무리인 것이다. 오직 소드마스터만이 NPC 가온을 쓰러뜨릴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이 곧 승리로 이어질 수 있으리란 점에서 볼 때, 이들이 대차원문 근처까지 전진할 경우 게임의 우승자가 될 가능성은 대단히 컸다.

다른 게이머들이 볼 때, 그러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기세등등한 이 카르세 의용군을 막아선 것은 조선인민군이었다. 김일성의 지시를 받는 독재국가의 군대. 기존에 가장 강력했던 세력.

4판타지 온라인 내 조선인민군의 수는 수십만으로, 최소 십만 명은 가장 많을 때는 삼십 만 명에 근접했다. 길드니 연합이니 하는 어설픈 집단과 비교할 수 없는 한 국가의 군대다.

작 수만 명에 불과한 카르세인들이 그들을 돌파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도 카르세 의용군의 진군은 막혔고, 병력은 물론 훈련 상태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첫 전투에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어 진군을 멈춰야 했다.

원래라면 이것만으로도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전쟁이 아니었다.

게임 속 사망자들은 24시간 뒤에 부활했다. 죽음을 통해 그들의 실력은 나아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스인들의 계정은 사망 시에도 기본 지급된 무기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사망할 경우 값비싼 무기를 상실하는 지구인들의 계정과 달리.

이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카르세 인들의 좀비 어택이 시작되었다.

카르세인들은 죽고 죽어가며 전진했다. 그러다 기회가 되면 북한군의 무기를 약탈하여 용돈벌이를 했다.

이 와중에 북한은 썩 부자 나라가 아니었다. 그런 지속된 피해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가뜩이나 게임사에 치여 큰 손실을 입은 데다, 게임 내 NPC 하나를 쓰러뜨리지 못해 일 년 넘게 질질 끌어온 마당이었다.

이대로가면 북한인들의 의지는 언젠가 꺾일 것으로 보였다. 심지어 참마황과 손을 잡은 카샤드 서기장이 휘하 뱀파이어들에게 명령하여 김일성에게 게임에서 군을 물리도록 명령할 수도 있으리란 전망은 언젠가 이 독재자의 군대가 물러나리라고 예상할 수 있게 했다.

이것은 한국인 게이머들이 보기에도 위기였다. 적의 적은 아군인 법. 수십 년 전이었다면 끌려갔을 말을 모두가 외쳤다.

“북한군을 도와야 해!”

한국인 게이머들은 전에 없이 단결했다. 조선인민군을 돕기 위해, 다시 원정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소모되어가는 북한군에 전해줄 전쟁 물자들을 모았다.

소드마스터로 의심되는 자칭 가온을 포섭하는 것 또한 한국인들이 한 시도 중 하나였다.

마지막 시도는 잘되지 않았다.

가온은 여전히 돕기 싫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가온은 게임 속에서 말 걸기도 어려워졌는데, 얼마 전부터 가온은 검술 교습소에서 훈련하지 않고 접속하자마자 바로 하고와 싸우다 게임오버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리는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양반이랑 친분 있는 사람 없어?”

*******

‘그나마 에어컨 살 돈이 생겨서 다행이네. 작년까진 꿈도 못 꿨는데.’

이복동은 찡그린 얼굴로 에어컨의 제습 기능을 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워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장마였다. 습하고 축축하다.

지금도 괴롭지만, 앞으로는 견디기 힘들만치 괴로워질 것이다.

이 장마가 가시면 얼마나 무더워질 것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이복동은 얼마 전 게임에서의 일을 회상했다. 원정을 떠나 정예 요원들과 함께 벌였던 작전. 소드마스터를 쓰러뜨릴 수 있었을지도 몰랐던 그 순간, 정말로 짜릿했는데.

그때 이복동은 아주 오랜만에 자기가 살아있다는 걸 느꼈다.

정말이지 이 게임은 이복동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성취감과 자신감. 그리고 상당한 금전까지.

그러나 이것도 이젠 끝이다.

일을 하기 위해, 이복동은 가상현실 기기에 들어섰다.

“골드 팔아요!”

게임에 접속해보니 종말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 찼던 훈련소는 텅 비었고, 거래소 앞에만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골드 싸게 사실 분?”

게임 내 재화를 팔아치우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골드와 아이템들. 골드보다 게임 내 아이템을 팔려는 사람들이 더욱 많지만, 그들은 잘 팔리지 않자 울상을 지었다.

하기야 잘 팔릴 리가 없었다. 서비스 종료가 다가온 게임의 아이템들 아닌가. 아직도 팔리기는 팔리지만, 이전 만한 가격을 받지는 못한다.

‘입버릇처럼 망겜 망겜 하더니, 이제는 정말 망겜이 다 되었네.’

이복동이 무기력하게 서 있던 와중이었다. 이복동을 알아본 게이머가 다가왔다.

“골드 처분 잘하고 있니?”

랭커 이현우의 말에 이복동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예.”

“지금이 가장 비쌀 때니까 가능하면 다 팔아둬. 그래서······ 지금껏 돈은 많이 모았고?”

“예. 육천만 원 정도 모았네요.”

“너 몇 달 활동하지 않았나?”

“그랬죠.”

“그럼 엄청 많이 번 거네! 그런데 왜 그리 울상이야?”

“오천만 원이 큰돈은 분명하지만 평생 살 돈은 아니잖아요.”

“양심도 없네. 몇 달 벌어 평생 먹고 살려고 했어?”

“그래도······”

이복동은 지금만 한 수익을 계속 거두지는 못하더라도 몇 년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단순히 금전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잘하는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길 바랐다.

그러나 이 세계에 사형선고가 내려진 지금, 그 소망은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

벌어둔 돈을 까먹으며, 다시 편의점 알바나 평생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어서 할 수밖에 없는 그 일로 연명해야 할 것이다.

그 심정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현우는 놀리다 말고 위로했다.

“그래도 우리 정도면 운 좋은 거야. 갑작스럽게 서비스 종료됐다고 생각해봐라.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냐? 미리 알게 돼서 다행이지. 미리 아이템들 처분도 할 수 있게 됐고.”

“골드 가격 이전의 절반이 됐는데······ 아이템들은 절반의 절반으로 떨어졌고······”

“그나마 완전히 똥값 되지 않은 게 다행 아니냐? 그 사이버 매춘업소 덕에 골드 수요는 똑같은 데다, 지금 아린에서 벌어지는 두 독재자의 싸움 덕분에 아이템들도 수요가 있으니까 그나마 팔리는 거지. 아무튼 가온 씨한테 고맙다고 전해줘.”

여기 사람들은 가온과의 친분 덕에 혜택을 보았다. 게임 서비스 확정 소식을 미리 알고는 미리 재화들을 처분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이복동에게 위로를 주지는 못했다.

“그럴게요.”

이복동이 일을 하러 움직이던 때였다. 누군가가 붙잡고는 말을 걸었다.

“이복동 씨죠?”

이복동에게 다가온 것은 웬 여자였는데, 이복동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아, 그때 그······”

이미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보나마나 좋은 모습을 기억하고 계시진 않겠지만 제발 잊어주세요. 부탁 드릴 게 있어서 왔는데······ 가온 씨랑 어울려 다녔다지요?”

“예? 예. 얼마 전까진 그랬죠. 요새는 따로 일하게 됐지만······”

“아무튼 친분이 있긴 하죠? 그럼 좀 꼬셔봐요.”

“꼬셔요? 뭘요?”

그 말에 이미리는 곧 참마황에 맞서 또다시 원정을 떠날 것이라느니, 그 원정대에 반드시 그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가온을 참여시켜야 한다느니 설명했다.

다 듣고 난 이복동은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려울 것 같은데요.”

“한국의 미래를 위한······”

“그래도 그 형은 아스인이고. 애초에 싫어하면 강제로 끌어들이긴 어려울 거 같은데.”

“설득 성공하면 사례할게요.”

수입이 곧 끊길 마당이니, 가능한 돈을 더 벌어둬야 하긴 했다. 그러나······.

이복동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사양할게요.”

이복동은 그 아스인에게 별것 아닌 친분으로 싫은 부탁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좋게 말하자면 염치를 알았다. 나쁘게 말하자면 자신감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게임을 나왔을 때였다.

전화가 걸려왔는데, 이복동은 냉큼 받아야 했다. 스폰서의 전화였다.

「복동 씨죠? 시킬 일이 있는데요······ 아직 가온 씨랑 연락하고 지내죠?」

“예? 예······”

또 그 가온에 관련된 일인가. 이복동이 주눅 든 가운데, 스폰서 여자는 말했다.

「저번에 만난 그 여자가 만나길 원한다고 전해줘요. 전에 봤던 거기서 만나자고」

차마 돈을 주는 스폰서의 요구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잔뜩 울상이 된 이복동은 가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외로, 전화를 받은 가온의 목소리는 쾌활했다.

「오, 복동이!」

전화를 받은 가온의 목소리는 쾌활했고, 이복동은 안심하면서도 놀랐다.

뭘 저리 반가워하는지 모르겠다. 이젠 거의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저 가온이 자신 따윌 친근하게 여길 이유도 없는 것 같다.

이복동은 요새 저 가온이 그 가온임을 반쯤 믿고 있다. 그리고 그 가온은 어떤 인물인가 하면, 이복동이 감히 말도 걸 수 없을 만한 거물이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웠다는 그 가온, 그 엘프는 요새 TV에 자주 나왔다. 한국의 뉴스가 마치 북쪽 방송처럼 한 목소리로 칭송을 보냈다.

평화의 아이콘이니 뭐니 하면서. 그런 인물이 자신 따위와 친분을 유지해주는 이 상황은 이복동이 보기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건 일은 일이었으므로, 용건을 전했다.

「그 아가씨면 네 스폰서, 맞지?」

가온의 물음에 이복동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응? 응.”

「내가 가주면 스폰서한테 보수 추가로 받나?」

“아마······”

그리고 잠시 후, 가온이 말했다.

「그럼 가지 뭐」

그 대답에 이복동은 다시금 놀랐다. 지존무쌍이 말하길, 얼마 전에 자기한테 쌀쌀맞게 굴었다며 하소연하더라니. 자신한텐 조금 다르게 대하는 모양이다. 어째서?

가온이 말했다.

「생각해보니 전에 만났을 때, 중요한 용건을 못 전했거든? 이번에야말로 전해야겠네」

“중요한 용건?”

「성별 제한 풀어달라는 요구를 못 했어. 이번에야말로 전해야지」

“힘······ 내요.”

*******

가온이 게임사에 또 다시 찾아갔을 때, 입구에서 이미 직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 본 그 남녀 직원은 더없이 공손한 태도로 가온에게 허리를 굽혔다.

“다시 뵈어 정말 영광입니다, 가온 씨! 모쪼록 저흴 따라와 주시길.”

그리 말하더니 둘은 가온을 차량에 태웠다. 귀빈을 태우기 위해 준비해둔 리무진.

리무진에서 내린 가온은 그 여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번쩍거리는 마천루.

“회사 건물이 아닌 것 같은데?”

“회장님이 머무시는 사저입니다.”

“회장님이면, 아타락시아? 그 드래곤?”

“예. 가온 씨를 저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장이 왜 자신을? 하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순순히 건물에 들어갔더니,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방에 안내되었다.

방의 중심에 있는 물건을 보고 가온은 신음했다.

‘이건 정말 신성 차단 유물이군. 신의 눈을 가리기 위해 설치했나본데.’

이런 부류의 유물이 귀한 이유 중 하나였다. 신들을 꺼려 하는 드래곤들이 죄다 독차지 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마법이 풀릴까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또 일어나지 않았다. 평범한 마나로도 가온의 마법은 유지되었다.

덕분에 가온은 완벽하게 정체를 숨긴 채, 그 여자와 만날 수 있었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온 씨!”

세 번째로 만나게 된 여자, 가온은 기꺼이 예를 표했다.

“저야말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래서 잘 지냈어요?”

“덕분에.”

“그랬다면 다행이네요. 요새 다사다난했잖아요? 후긴의 천국입성 허가 사건이니 교황 암살 사건이니 뭐니. 모두 한 엘프께서 관련되었는데······ 가온 경을 흠모해서 그분의 이름을 쓰고 계시다는 여기 가온 씨에겐 참 기쁜 일이겠어요.”

“예, 뭐.”

가온이 떨떠름한 가운데 여자가 빙긋 웃었다.

“설마 눈앞에 계신 분이 진짜 가온 경은 아니겠지요? 저번에 여신께 맹세하셨는데, 아무리 봐도 그 가온 경 같으셔서 원.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시면 안 놀릴게요.”

그 말에 가온은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신성모독이군요. 설마 여신께 맹세한 것이 거짓일 수 있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 죄송해요. 그래도 이해하세요. 신을 존경할 줄 모르는 드래곤이라서.”

“드래곤이라고요?”

“예. 아타락시아요. 이 게임사 회장이죠.”

“회장님? 모쪼록 여캐를······”

아타락시아는 가온이 긴급히 제 용건을 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아타락시아는 이 자리가 최대한 진중한 자리이기를 원했다. 말투조차 바꾼 채 말을 시작했다.

“그동안 가온 경의 행보를 지켜보았소. 너무나도 인상 깊더군. 후긴을 용서했을 때는 진심으로 경탄했고······ 이번 행보는 특히 인상 깊었소. 그리하여 비로소 확신이 들었지. 손을 내밀어도 되리라는 확신 말이오.”

“여······”

“그래서 지금 내가 제안할 것은 하나요. 손을 잡읍시다. 이 무익한 전쟁을 중단시키고 싶으시겠지? 내가 돕겠소. 은밀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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