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97화 (97/135)

영국인 조지 - [2]

조지는 멀거니 서 있다가 물었다.

“끝인가?”

“예? 예······”

조지가 사제의 손에서 종이를 뺏었다. 그것을 주먹에 움켜쥐며 생각했다.

‘순교를 노린 거다. 죽어서 성인으로 시성 되려고.’

상대가 덜 선하게 느껴지면 자신은 덜 악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조지는 필사적으로 생각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천국에 갈 거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았던 거지. 죽음이 안 무서운 자가 죽음을 선택한 게 뭐 그리 대단한가? 그러니까 싸구려 희생······’

그러는 중에 방해가 들어왔다.

사제가 벌벌 떨며 물어왔다.

“이제 뭘하면······”

조지는 사제를 노려보고는 뭐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잔뜩 겁에 질린 사제의 얼굴, 테러리스트가 자길 죽일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에게도 죽음은 두려운 법이니.

자신도 그래서 언데드 리치가 되려고······.

“꺼져라.”

“예?”

성당 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관광객들, 그리고 눈앞의 사제를 향해 조지가 외쳤다.

“다 꺼지라고! 여기서 나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모두 성당을 뛰쳐나갔다.

조지가 새삼 자비를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조지는 중얼중얼 주문을 외워 성당을 봉인하기 시작했다.

문에 냉기를 스며들게 했다. 그리하여 자물쇠를 봉인하고는 추가로 강화 주문을 걸어 문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제 산탄총을 가져와도 돌입해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창가에도 강화된 고드름들을 솟아나게 만들어 창살을 만들었다.

이로써 안전하게 텔레포트할 준비가 끝났다. 더 빨리 도로에서 텔레포트를 시도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이제는 안전하게 주문을 외워, 최대한 멀리 떠나면 되었다.

그러나 조지는 당장 그러지 않았다. 시야를 온통 벽화들이 채우고 있었다.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성당 끝 벽을 가득 채운 최후의 심판이다.

이 종교적인 그림들 앞에서 조지는 멍하니 서 있었다.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교황이 왜 그런 내용의 유언을 몰래 작성했는지는 알 만하다.

아스에서 전쟁을 원하는 누군가가 암살자를 파견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교황 암살이 제2의 사라예보 사건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온 암살자가 평화를 바라는 메시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몰래 쓰려다가 실패했다. 그 암살자의 눈에 띄어서.

바깥이 시끄러운 중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조지는 최후의 심판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바깥에서는 열심히 문을 돌파하려 애썼지만 쉽게 되지 않는 눈치였다.

조지밖에 없던 이 성당에 한 명이 더 늘어난 것은 그때였다.

“왜 아직도 떠나지 않았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조지는 무릎 꿇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웬 동양인 남자가 거기 있었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진작 수백 미터 바깥으로 텔레포트 했으리라 생각해서 그 주변부터 수색했더니, 당최 보이질 않더군. 혹시나 싶어 돌아왔더니 정말 남아있을 줄이야.”

“누구······”

“가온이다.”

“가온 경? 왜······”

“도우러. 안면이 있는 자가 곤경에 처했는데 모른 척하긴 어렵더군.”

전에 만났다고 해봤자 딱 한 번 짧게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 사실은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조지는 도우러 왔다는 말에 반응했다.

“치료를······”

“어디 다쳤나?”

“저 말고······”

“그럼?”

“제가 죽인 사람들······ 치료를······”

가온은 난처함을 표했다.

“새삼 후회가 드나 본데, 미안하지만 안 될 일이다.”

“왜요!”

조지가 벌컥 소리질렀지만 가온은 무례하다며 질책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설명했다.

“관련 책 몇 권 읽었다 하지 않았나? 이 교단과 얽힌 내 원한은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정 그네들에게 신성 주문이 필요하다면 여기 있는 사제들에게 기도를 외라지. 여기도 사제가 많은데 왜 다른 종교 사제인 내가 나서야 한단 말인가?”

신랄한 비꼼, 조지는 그들을 다치거나 죽게 만든 장본인이면서도 분노를 느꼈다. 그 감정이 실로 적반하장이라는 것은 지금 신경 쓸 수 없었다.

그저 울분에 차 가온을 바라보았다.

재의 왕자. 비극의 소드마스터. 영국의 공포.

그리고······

나의 근원. 내 인생의 목적이었던 남자. 내 망가진 인생의 시작.

1957년, 앙골모아 대왕은 42년 일찍 회색 엘프의 모습을 취한 채 강림한 듯했다.

마왕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해, 영국 정부는 기존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프로젝트를 목적만 바꾼 채 새로운 후보생들을 불러모았다.

소년과 청년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재의 왕자와 승산 없는 싸움에 나설 애국자들을 모집했다.

조지가 그 모집에 응했다. 끔찍하게 힘든 데다 실제 사망자들이 나왔던 훈련을 이겨냈다.

그로부터 수십 년 지나, 시련을 이겨낸 보답은 없었다. 목적은 흐지부지된 채 우울증 걸린 노인만 남았다.

그 목적이 다시 상기되고 있었다.

조지는 다시 한번 가온을 바라보았다.

가온. 숙적이 저기 서있었다.

“잔말 말고 어서······”

조지는 옛 목적과 함께, 지금껏 해온 훈련을 떠올렸다. 수십 년 간 해온 훈련을. 훈련의 대상이 눈앞에 있었다.

훈련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회색 엘프와 마주쳤을시, 즉시 특정 주문을 외우라. 공격 주문을······’

아스인과 달리, 결투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주문을 입안에 웅얼거렸다.

그것을 엘프답게도 가온은 바로 알아들었다. 눈앞의 마법사가 자신과 싸우려는 것을 알아채고는 조용히 말했다.

“죄책감에 미쳤나 보군. 머리를 식혀주길 바라나?”

가온은 차분하게 방어 준비에 나섰다. 화로 여신의 성화가 피어올라 그 주변을 감쌌다.

조지의 주문이 완성되었다.

“아브리캇타-아으드-사로니쿠-세뎀소카쿨라!”

빠르게 주문을 욈에 따라 빠르게 주변 습기가 응결되었다.

가뜩이나 이미 경당 전체에 냉기를 스며들게 해둔 마당이었다. 이 차가운 장소에 강력하고 넘쳐나는 마나가 퍼져나갔다.

마법사 개인의 마력과 주변 환경에 의해,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수류탄 미만이라는 이 공격 주문은 폭격 못지않은 공격으로 화했다.

40미터 길이에 20미터의 높이인 성당 전체에서 얼음 파편이 생겨났다. 세열수류탄의 구슬과 같은 그 파편들은 일제히 발사되었다.

가온으로서는 피할 장소가 없었다. 검으로 쳐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가온은 마법적 수단으로 방어에 나섰다.

이 강력한 엘프 마법사는 따로 주문을 외지도 않았다.

가온이 손짓하자 성화가 가온의 주변을 감쌌다. 방어에 쓰이는 화염벽. 거기 날아온 얼음 파편들은 불을 뚫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열기의 폭풍이 위로 치솟았다.

피어난 증기들이 성당에 구름을 이루었다. 성당 천장의 천지 창조에 어울려 구름은 알록달록하게 흔들렸다.

“대단한데. 영국 마법사가 이 정도면 미국은 슈퍼맨이라도 거느리고 있나?”

가온이 여유롭게 평하는 가운데, 조지는 계속해서 훈련대로 했다.

수십 년 훈련 동안 단련해온, 방금 공격에 이어지는 주문을 외웠다.

“나 셸라 카!”

이것은 영국에서 만든 주문이었는데, 그래서 가온은 무슨 주문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현상을 보고 대응했을 뿐이다.

이번에도 그를 향해 날아오는 것은 냉기였다.

허공에서 발사되는 냉기 숨결. 특정 드래곤의 숨결과 같았다.

닿은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액체가 성당을 가득 채울 기세로 방사되었다.

광범위에 향하는 이런 공격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다. 소드마스터에게도 그렇다. 괜히 대전 당시에 화염방사기를 전 사단에 보급했던 것이 아니다. 그 무기 근처로 소드마스터들이 다가오지 않았기에 실제 죽인 적이 없었을 뿐, 일개 보병들이 초인들의 접근을 꺼리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미 그런 공격의 위험성은 증명되었다.

과연 이번에도 가온은 피하거나 검으로 막으려 하지 않았다. 역시 불로 막으려 했다.

가온의 주변으로 화염벽이 솟구쳤다.

걸렸다!

이런 대응을 노리고 만들어진 주문이었다. 화염 벽에 냉기의 숨결이 가 닿았다.

성화의 열기는 끔찍하게도 높았다. 불에 닿은 액체들을 모조리 즉시 기화시킬 만큼.

그래서 다음 과정은 빠르게.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기체들이 폭발했다.

엄청난 압력이 생겨난다. 충격파가 퍼진다.

‘억······’

소리 없는 비명이 울린다.

조지는 아까부터 보호 주문을 걸고 있었지만 이 충격을 견딜 수는 없었다. 바로 뒤로 나자빠져 쓰러졌다.

주문을 쓴 장본인임에도 내장이 파열되었다. 조지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고개를 들어보았다.

“이게 무슨······”

불이 걷히고 엘프의 모습이 드러났다. 수십 년 훈련한 보람이 있었다.

숙적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핵에도 견뎠다는 저 재의 왕자는 만신창이였다. 온 의복이 찢어지고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위업이란 말인가.

조지는 웃으려다 말았다.

“음······”

잠시 가만히 서 있던 가온의 입이 달싹였다. 그러자 찢어졌던 옷이 복구되더니, 불 회오리가 한차례 소용돌이 치며 가온의 피 흐르는 몸을 감쌌다.

그 불이 가온의 입에서 흐르던 피를 모조리 증발시켰다.

그리하여 드러난 가온의 모습은 싸우기 전과 같았다. 아무런 상처 없는 모습.

그리 재생을 마친 가온은 무덤덤하게 조지를 바라보았는데, 태평한 태도와는 달리 실제 태평하지는 못했다.

‘아파죽겠네.’

가온은 입 밖으로 나오려던 피를 삼켰다. 물끄러미 조지를 바라보았다.

고통이 가시지 않은 마당이었지만 새삼 화를 내지는 않았다.

가온은 전직 사제로서 공황상태에 빠진 사람에게는 놀라울 정도의 관용을 보일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한 차례 공격을 당했음에도, 가온이 자신에게 적의를 보이지 않음에 조지는 당황했다.

“난······”

조지가 뭔가 말하려는 가운데, 가온은 조용히 말했다.

“그래, 잘 싸웠네. 어디 가서 날 피 흘리게 했노라고 말하면 믿지 못할걸. 만족했으면 이제 가지. 그 전에 상처부터 치료하고.”

그 모습에서 조지는 반신의 여유를 느꼈다. 조지는 당황하다 못해 체념했다.

가온이 다가온 가운데, 그 손이 신성으로 빛났다. 공격 주문이 아니라는 것은 척 보고 알아볼 수 있었다.

조지는 그 치료를 거부했다. 온몸의 마력을 끌어올려, 몸에 스며들려는 신성을 차단했다.

“치유하려는 거니 가만히. 그래야 텔레포트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가온의 말에 조지는 고개를 저었다.

“난 여기서 안 떠납니다. 안 떠나요······”

“일단 치료는 받고 얘기하지.”

“그건 됐습니다. 그건 됐어요. 그런 것보다 이걸······”

조지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가온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종이?”

“이걸, 원래 위치에······”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야말로 나중에 하지.”

“안 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늦습니다. 제발, 제발······”

조지가 칭얼거리는 가운데, 가온은 기절시키고 강제로 치료하려다 말았다.

“원래 위치에 가져다 놓아야 한다고?”

“예, 예······”

“거기가 어딘가.”

설명을 들은 뒤, 가온은 성당을 나섰다. 폴리모프 한 그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보지는 못했다.

“누구냐······”

가온을 보고 공격하려던 근위대원들은 성당 내부를 보고 놀랐다.

그들은 안에 쓰러져있는 테러리스트를 발견했다. 근위대는 물론 기자들까지 모두 눈을 크게 뜬 가운데 가온은 경고했다.

“이 안에 들어가지 마라. 온갖 마법에 오염되어 위험하니.”

따로 마법을 걸어 문을 봉인한 뒤, 가온은 조지가 말한 방향으로 걸었다.

근위대원들이 막아서려 했지만 가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폴리모프 주문에 투명화 주문을 덧씌우자, 가온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텔레포트!”

눈앞에서 사라진 것을 정말 사라진 것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을 내버려 두고 가온은 그들 사이를 걸가로질렀다.

조지가 말한 그곳으로 걸었다.

건물에 들어갔다. 그 복도를 걷자니 마법을 해제하는 유물들이 잔뜩 깔려 있지만 가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유물들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가온의 주문은 특별하다. 신성과 마나를 동시에 사용하여 주문을 유지한다. 따라서 해제하기 위해서는 신성 주문과 일반 주문을 동시에 해제하는 수단을 써야 하지만 그런 장비는 거의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바티칸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것들은 대개 아스 신들의 유물이니.

목표한 곳에 이르렀다.

“성하, 성하!”

쓰러진 교황이 보였다.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슬퍼하거나 울부짖고 있었다.

가온은 투명화 주문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때아닌 불청객의 등장을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가온도 여유롭게 교황의 상태를 볼 수 있었다.

늙은 교황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누워있었다. 온몸에서 핏기가 사라져 있었다. 죽은 지 꽤 지난 것이다.

치료하기는 이미 너무 늦었거니와 아까 조지에게 말했듯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가온은 그저 조지의 소원이나 들어주기로 했다.

교황의 주먹 쥔 손에 종이를 넣었다. 그러기 위해 두 명의 손이 접촉했다.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가온, 경?”

가온은 기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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