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회장 아타락시아 - [1]
“가온 씨 아직도 설득 못 했어요?”
이미리의 질문에 한 게이머가 대답했다.
“예. 교습소에서 검만 죽어라 휘두르다가 하고랑 맞짱 뜨고 겜 끄는데요. 하도 쉬질 않아서 요샌 말 걸 타이밍 찾기도 힘들어요.”
“좆됐네. 일주일 내내 그래요?”
“예. 매일 칼 휘두르는 시간만 열두 시간이던데요. 진짜 미친 거 같아.”
칼잡이로서 수련 내용을 듣고 기가 질린 이미리는 침묵했다.
전 백두 길드장 강주석이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 정도로 열심히 굴면 딴 거 도와달라 부탁하기도 뭐한데. 그래도 부탁해야 하는데······ 소드마스터랑 맞짱 뜰 수 있는 양반을 또 어디서 구해와? 맨날 주변에 있어서 귀한 줄 몰랐던 거지, 실은 항공모함보다 구하기 어려운 인재 아냐 그거.”
그러나 지금은 항공모함이라도 필요하다면 구해와야 할 판이었다. 자신들의 손에 한국의 운명이 걸린 상황 아닌가.
참마황이 이 게임을 통해 영생을 얻으려 하고 있다는 설, 그러니까 게이머들이 연합해 참마황의 군세를 막아야 한다는 설은 본디 절반은 믿고 절반은 비웃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비웃는 사람들은 상당수 줄어든 가운데, 전보다 훨씬 많은 게이머들이 그 황당한 주장을 믿었다.
얼마 전 그들이 참여한 전투에서 소드마스터가 나타났다. 기본 여자외형 커스터마이징을 유지한, 그러니까 게임 속 NPC일 리가 없는 유저 소드마스터가.
그것은 참마황이 게임 우승을 노린단 설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었다.
모름지기 소드마스터들은 게임이나 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은 법이다. 그러니까 소드마스터가 게임 따위에 들어왔다면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요, 그것은 분명 참마황에 관련된 일이다.
그 가정에 의거하여 이미리는 말했다.
“우리가 우승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최소한 김일성이 우승할 수 있게 도와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한데, 우선 소드마스터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무튼 강한 그 가온······ 안 돕겠다고 했는데, 어떻게든 돕게 해야 합니다. 다들 이유는 알죠?”
“이 게임에서 우승하려면 소드마스터 가온을 지나쳐야 하는데, 설령 쓰러뜨리진 못해도 붙잡아두긴 해야 하니까요. 그게 가능한 건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엔 그 양반뿐이고.”
“그래요. 이쪽 가온한테 텔레포트 불가 유물을 장착시켜 다른 가온이 사방팔방에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만 있어도 우승 가능성이 엄청나게 커지는 셈이거든요. 먼치킨 가온이 묶여있는 동안 아린 벌판을 점령하면 되니.
아무튼 이 작전을 쓰려면 당연히 우리가 카르세 놈들보다 전력상으로 강해야 합니다. 그러니 백두 길드 협조가 절실해요. 최소 이천 명에서 최대 만 명의 병력을 추가할 수 있단 점에서 필수입니다. 누구 때문에 어렵게 되었지만······”
이미리가 흘겨보는 가운데, 강주석은 어물어물 변명했다.
“오상덕 그 새낀 그냥 작정하고 반대하는 거야. 이 상황에 아직도 보수부터 내놓으라는 거 보면 몰라? 애초에 이미리 양이 정부에서 보수 약속받겠다는 건 어찌 됐어?”
“약속받아오긴 했는데, 그것만으론 부족하대요.”
“뭐? 왜?”
“이번 우리 원정 개같이 실패했잖아요. 비싼 장비도 왕창 잃었고. 그거 보면 보수 받아봤자 잃을 돈이 훨씬 많을 상황인데, 차라리 보수 포기하고 전력보존하는게 훨씬 이득이라나?”
“미치겠네······”
강주석이 한숨 쉬는 가운데, 이미리가 말했다.
“그러니까 마지막 조건으로, 게임사가 이딴 개 같은 운영으로 우릴 괴롭히지 못하게 막아야 하죠.”
“게임사를 막아야한다고요?”
“예. 만약 우리가 병력 잔뜩 모아봤자 게임사에서 깜짝 이벤트랍시고 또 그 가온 보내거나 해골 군단 보내거나 하면 다 끝장이잖아요. 최소한 그런 일은 없어야 우리가 우승을 노리든 말든 할 수 있어요.”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건 또 어떻게 하나? 중소기업 모바일 게임 운영도 유저 말 더럽게 안 듣는데, 하물며 유일한 가상현실 게임이라 배짱 장사하는 곳을 어떻게······”
“가서 항의해야죠.”
“우리 같은 마족의 항의를 참 귀 기울여 들을 것 같긴 하네요. 그렇죠? 따지러 가는 김에 월정액도 좀 깎아달라 그러지?”
비꼰다기보다는 자학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 게임사에서, 그 게임사가 위치한 카르세인들이 요새 한국인들을 어찌 대하는지는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미리는 힘없이 말했다.
“물론 한국인이 가서 따지면 들은 척도 안 하겠죠. 그러니 아스인이 가서 따지는 게 좋겠어요.”
“아는 아스인 있어요?”
“있죠. 그것도 상당한 지위가 있는 것 같은.”
*******
“또 왜 찾아왔는데?”
가온은 성난 얼굴로 따졌다.
한국인 게이머는 움츠러든 채 대답했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
“거! 절! 한다고! 했잖아!”
“예. 그건 아는데······”
“알면 좀 꺼져줄래, 응? 거절해도 자꾸 찾아와서 달라붙으면 감동을 하겠니, 짜증을 느끼겠니? 내 경우엔 짜증을 느끼다 못해 배때기에 칼빵 놓고 싶은데, 정말 그럴까?”
그리 말하는 가온은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이 칼잡이가 게임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그 사실로 볼 때 현실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짐작해보면 절로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게이머는 겁을 먹은 가운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도 염치가 없는 건 아는데······ 만족하실 만한 보수도 못 드리면서 부탁드리는 게 어이가 없는 것도 알고······ 그래도 부탁드릴 만한 사람이 가온 경밖에 없어서······”
“불쌍한 척해도 안 돼. 나 수련 시간 뺏기는 거 진짜 싫거든, 응?”
그 말에 게이머는 조심스레 말했다.
“이번엔 수련 시간 뺏기진 않을 겁니다.”
“그럼 또 뭔데?”
“게임사 좀 찾아가서 항의해달라 부탁드리려고······.”
“게임사에 항의?”
“예, 함께 해오셨으니 알겠지만 게임사에서 우리를 대하기가 무슨······ 도저히 정상적인 게임을 할 수가 없는 상황 아닙니까? 지구인이라 차별을 해도 너무 하는 것 같은데, 억울해 미칠 지경입니다. 우리가 따진들 들을 것 같지도 않고요.”
이 말에 가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게이머는 계속 말했다.
“나름 보수도 준비해왔습니다. 육백만 원인데, 큰돈은 아니지만 모인 길드장들이 각출해서 드리는······”
“나 돈 필요 없는 거 알면서 그러네.”
짜증을 내면서도 가온의 목소리는 누그러져 있었다.
그 사실에 희망을 품고 게이머는 말했다.
“어차피 게임 오버 되시면 24시간 접속 못 하시죠······ 그리 남는 시간에 한번 찾아가 주시면 한국 게이머 모두가 감사드릴 텐데요.”
가온은 조금 뜸 들인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 게임사 놈들이 선을 넘긴 했지.”
“예? 예! 그렇죠? 우리가 뭐만 하려 들면 게임사 차원에서 깽판을 치는 게······”
“여캐 생성을 막아놓다니, 말도 안 돼. 옛날 메이플도 아니고 성별 고정이라니, 대체 뭐야?”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한국인 게이머는 지금 자신이 놀림받나 싶어 우물쭈물 물었다.
“어······ 그러니까······”
“한번 따지러 가고 싶긴 했어.”
그제야 게이머의 낯에 핏기가 돌아왔다.
“도와주시겠단 거죠? 정말 감사드립니다!”
넙죽 절하며 감사를 표하는 가운데, 가온은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그래. 사실 그런 도움이야 줄 수 있지. 게임에서 참마황을 막자느니 하는 헛소리만 아니라면야,”
“그건 헛소리가 아닌······”
게이머의 말에 가온은 딱 잘라 단언했다.
“헛소리야. 게임에서 현실 독재자를 물리칠 수 있단 것부터가 말이 되나?”
“하지만······”
“다시 말하는데 그런 부탁은 미리 거절해둔다. 애초에 나 카르세에 사는 우드엘픈데, 카르세 대통령을 늙어 죽게 만들 이유가 없는 거 알지? 설마 국가를 배반하라 부탁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몇 번이고 말하지만 그런 거 절대 못 도와. 알겠어?”
“예······.”
게이머가 움츠러든 가운데, 가온은 다시 수련에 매진했다. 열 시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다가 조금 쉬어 체력을 회복하고는 하고와의 대결에 나섰다.
눈앞에서 흉흉한 초승달이 빛나는 가운데, 이번에 가온은 재를 피워올리지 않았다.
왼손에 든 칼을 겨누었을 뿐이다.
지난 일주일, 그리고 오늘. 가온은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써가며 하고와 겨뤘다.
어제, 오른손으로 검기를 써서 싸웠을 때는 약 두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일주일 전보다도 십 분이나 나아진 결과였다.
그렇듯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나루가 조언했던 왼손의 경우엔 별 차이가 없다.
검기를 쓰지 못하는 왼손만으로 싸울 때, 가온은 수십 분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부분은 아무리 싸워도 변하지 않았는데, 검기를 쓰지 않을 때면 체력의 한계가 빨리도 찾아오는 탓이었다.
이것저것 시도해보고 있지만 이 부분에서는 큰 발전이 없었다.
고작 일주일 만에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기는 어렵겠지만, 이대로 계속 겨룬다 하여 정말 크게 변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반복적인 대결보다 결정적인 계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처음 소드마스터가 되었을 때처럼······.
약간의 성취감과 아쉬움 속에서, 가온은 또다시 패배했다.
그 게임 오버를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천상의 존재도 아닌, 게임사 직원 두 명.
“여기 찾아온다 하셨지?”
“예, 빨리!”
두 직원은 황급히 회장에게 연락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응준비가 끝났다.
*******
가온은 확실히 한국인 게이머들을 대하는 게임사의 처우에 불만을 느꼈다.
정상적인 게임사라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불합리한 개입의 연속, 그것들을 보면서 기분이 좋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부분을 고치도록 하기는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터였다. 거대 게임사가 뭐가 아쉬워서 유저 하나의 항의로 뜻을 바꾼단 말인가. 아스인이 찾아가든, 한국인이 찾아가든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재의 왕자가 직접 찾아가면 게임사가 무덤덤하게 반응하진 못할 테지만, 정말 그럴 수는 없었다. 왕족 체면에 고작 게임사에 항의하러 찾아갈 수야 없는 일이다.
결국 폴리모프를 유지한 채, 가온은 게임사에 찾아갔다.
게임사 건물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웅장하네.’
이런 건물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은 얼마나 콧대가 높을 것이며, 일개 게이머의 말은 얼마나 하찮게 들을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바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한 채 가온은 게임사 건물에 발을 디뎠다.
가장 먼저 보인 직원에게 방문 목적을 말했을 때였다.
“게임 운영에 지적하실 부분이 있어 오셨다고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접수대에 있던 직원은 활짝 웃으며 가온을 안내했는데, 이 친절한 대응에 가온은 놀랐다.
돈 내고 게임하는 유저들한테 해골 군단을 보내 재산피해를 입히는 정신 나간 게임사 아닌가. 이렇게 불쑥 찾아온 유저를 잘 대접해 줄 줄은 미처 몰랐다.
가온이 어리둥절한 가운데, 직원을 따라간 곳은 VIP룸이었다.
“정말 여기서?”
“예, 물론!”
방에 들어간 가온은 또 다시 놀랐다.
젊은 남녀로 구성된 직원이 깍듯이 서서 가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할 만치 예를 차린 셈이었지만, 다음 순간 가온은 더욱 놀랐다.
두 직원이 자신을 향해 깊이 허리 숙여 절하는 게 아닌가.
“안녕하십니까!”
“어······ 안녕하십니까.”
“누추한 자리에 왕림해 주시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당황하던 가온은 문득 두 남녀 직원의 가슴을 보고는 물었다.
“명함을 보니 고객센터 분들이 아닌 것 같은데? 생각보다 직위도 높으시고요. 일개 유저 방문에 시간을 할애하셔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지요! 바쁜 시간 내주셔서 게임 발전을 위해주시다니, 참으로 감격스럽고도 감사할 일입니다!”
가온으로서는 자신이 게임사 건물을 잘못 찾아왔나 고민스러울 지경이었다.
조심스레 가온이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두 직원은 그 앞에 앉았다. 너무나도 공손한 자세로. 조심스럽게.
그 와중에 여직원은 가온을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티 없는 웃음, 아무리 봐도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 정말 맘에서 우러나온 미소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저러지? 내가 폴리모프 커마를 너무 잘해서 반했나?’
가온이 계속해서 당황하는 가운데, 여직원은 여전히 웃음기 넘치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래서 친히 방문해주신 목적을 감히 여쭤봐도 될까요?”
“그게. 요새 한국인들이 게임 운영에 불만이 있다던데, 혹시 개선할 수 있는지······.”
가온이 말하기 무섭게, 남자 직원이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정말 잘못된 일이었네요! 유저님의 소중한 의견 감사히 들었으며, 앞으로의 게임 운영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