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90화 (90/135)

우드엘프 오림 - [2]

“가온, 우리 영웅!”

가온을 환영하러 모여있는 우드엘프들은 수만 명이었다.

거의 모든 우드엘프들이 여기 모여있는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요, 그들 종족에 비해 우드엘프의 수가 적다는 사실을 고려해도 놀라운 환대였다. 이 숲만 해도 한반도보다 훨씬 넓건만, 다들 이 넓은 숲을 가로질러 한 장소에 모였다.

여기 모인 우드엘프들은 모두 이 종족의 영웅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남녀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가온을 끌어안았고, 악수를 청했으며, 심지어 숲 바깥에서 구해온 듯 너덜너덜한 ‘가온 영웅전’에 싸인을 부탁하기도 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렇듯 수만 명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가온은 멋지게도 무표정을 유지해야 하나, 아니면 친구들 가족 앞임을 고려하여 웃어야 하나 생각했다.

그리 심각하면서도 행복한 고민을 하던 와중이었다.

“가온, 정말 왔구나!”

심지어 일을 하고자 숲 밖에 나가 있던 우드엘프까지 가온을 맞으러 와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가온은 놀랐다.

“나루 양? 류시범 그 친구랑 같이 계신 줄 알았는데.”

“그랬지.”

“제가 알기로 그 저택과 여기 거리가 꽤 먼 줄로 아는데 말입니다.”

“통화 마치자마자 육십 킬로미터 뛰어오느라 고생 좀 했단다. 내가 불러놓고 딴 데 있긴 뭐하더라고.”

“고생이 많으셨군요.”

“내가 원래 고생을 엄청나게 하지. 애초에 연금 좀 올려받겠다고 그놈의 게임에 뛰어드는 역할도 맡기 싫었는데. 내가 가장 나이 많다고 억지로 시켜버리니 원.”

이 와중에 한 우드엘프 소녀가 끼어들었다.

“왜 맨날 언니는 불만이 많아! 오천 살이나 먹었으면 모범을 보이란 말이야! 스물도 안 된 나도 도와줬는데!”

나루는 언니가 잘못했다며 사과하더니, 가온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여간 오천 살이나 먹으니깐 대접을 못 받으니 서러워. 너무 억울해서 유교를 도입하려 했는데 다들 반대하지 뭐니? 민주적으로 검술로 결정하자 했더니 다른 마스터 두 녀석이 검기 뿜고 덤비더라.”

“다른 마스터 분들이 더 어린가 봅니다,”

“그렇지. 원래는 나보다 나이 많은 마스터들이 넷이나 더 있었는데 전쟁에서 다 죽었거든. 위험한 국면에 나서야 할 때마다 나이 많은 순대로 먼저 뛰어든지라. 뭐 이대로 전쟁이 일어나면 나도 그래야겠지. 어린 것들부터 죽게 할 수야 없으니······”

한편 근처에 가온에게 애정을 보이고 싶어하는 우드엘프들이 많이도 모여있었다. 그들은 소드마스터이자 오천 살 먹은 이 우드엘프 장로에게 비난하길 어려워하지 않았다.

“소드마스터라고 권력 발휘하는 거예요? 가온 경 그만 독점하고 음식 나르는 거나 도와요, 장로님!”

나루는 또 다시 툴툴거리면서도 제 할 일을 하러 나섰다. 그러면서 가온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아, 여기서 본 모든 것들은 시범이에겐······”

“비밀을 엄수해야겠지요.”

“그래, 모든 엘프를 위해서.”

잠시 후 연회가 시작되었다.

준비된 음식을 보기만 해도 우드엘프들이 자길 얼마나 극진히 맞이하려 했는지 알기는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는 소화가 안 돼 잘 먹지도 않는 돼지고기는 물론 숲에서는 구할 수 없어서 따로 돈을 주고 구해야 하는 궁중음식들까지 이 한 명의 그레이엘프만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가온은 결국 무표정하길 포기한 채 웃었고, 그 주변에 있던 우드엘프들도 웃었으며, 가온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더욱 기분 좋게 웃었다.

포도주를 들이키며 가온의 옛 전우, 오림이 물었다.

“그래서 가온, 요즘은 뭐하고 지내나?”

“나야 뭐 똑같지. 수련하며 지내네.”

“역시. 자네는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도 열심이로군. 그런데 저번에 자네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치 고강한 화로의 사제를 봤는데. 그거 혹시 자네 아니었나?”

“절대 아니네.”

“아, 그런가. 난 또······”

여신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거짓말하는 대전사를 맹렬히 비난하시는 가운데, 가온은 못 들은 척하며 물었다.

“자네들은? 대강은 아네. 따로 알아봤더니 자네들이야말로 열심히 살아왔더군. 제국주의자들을 물리치기 위한 온갖 전쟁에 참여했다고? 그 외에도 여러 위대한 일들을······”

“뭐, 봉사활동 비슷한 거라네. 하면서 기분이 좋아져.”

“그래서 지금 안 보이는 친구들은 관련 활동을 하러 자리를 비운 건가?”

가온의 물음에 오림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아, 몇 명이 없는지 알아보겠나?”

“당연히 알아보지. 세 명 없군. 모기, 나기, 하우.”

“이런. 우리 리더 눈썰미는 도저히 숨길 수가 없네.”

숨기려 했다고? 그 말만으로도 가온은 세 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챘다.

“셋 다 전사했나?”

“그렇네. 바로 들켰군그래.”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온이 우울하게 말했다.

“전우들이 죽는 중에 난 집안에나 처박혀있었군.”

“그게 왜 자네 잘못인가?”

“그럼 잘한 건가. 도울 능력 있는데도 그럴 생각조차 않았으니, 대체······”

“괜히 자길 탓하지 말게! 우리가 확인해본 바에 따르면 셋 다 천국에서 한 자리씩 하고 있으니 애석해 말게. 신성을 머금은 준신이잖은가? 애초에 수십 년 동안 세 명밖에 안 죽은 걸 용하다 해야지. 게다가 그리 덜 죽은 건 다 자네 덕분이고 말이야.”

“내 덕분이라니?”

“우린 위기 순간마다 이렇게 말해. ‘두고 봐라, 나는 여기서 죽지만 내 친구 가온이 복수하러 올 것이다!’ 이렇게 뻔한 대사를 말하면 저쪽도 뻔한 대사를 말하는 거지. ‘오, 오오오 오늘은 이만 물러가 주지······’ 아, 뻔한 대사라는 건 만화에서 나오는 얘긴데 자네는 모르겠군?”

“뭐······ 모르지. 아무튼 그 말이 농인지 사실인지 몰라도, 그것만으론 의무를 다했다 평하기 어렵겠군.”

“그럼?”

“다음부턴 위험한 상황이면 무조건 날 부르게.”

그 말에 오림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도 되겠나? 자네는 세상과 인연을 끊기로 했을 텐데.”

“그것도 다 옛말이니 걱정 말고. 연락수단은 있나?”

“있지 물론. 아무튼······ 감동이군.”

“돕기로 해서? 고작 그거 가지고······”

“그거 말고. 비로소 자네에게 활기가 돌아온 듯해서 말이야.”

“활기라니. 날 무슨 환자였던 것처럼 말하는군.”

“환자보다 더 걱정됐지. 자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듣고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나? 위로라도 하려니 연락은 안 되지, 어디 사는지 겨우 알아내서 찾아가 보니 두드릴 문도 없지······ 몇 명은 자네 만나겠다고 텔레포트 익히려 노력했는데, 막상 마법을 익혀보니 자네가 한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만 깨달았지 뭔가.

언젠가는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몇 년 동안 교대해가며 그 앞을 지켰는데, 절대 안 나오더군. 얼마나 애가 탔는지······ 이제라도 얼굴을 보니 정말 좋네.”

“그래. 나도.”

“그래서 말인데, 아예 우리랑 같이 지내는 건 어떤가?”

갑작스러운 제안에 가온은 당황했다. 같이 지내자니, 숲에서?

오림은 해명하듯 말을 이었다.

“말해두겠는데 아예 우드엘프라 되란 건 아니야. 그냥 같이 지내자는 거지. 그러다 우리 여자랑 눈 맞으면 결혼해도 좋고.”

“결혼? 자네들한텐 그런 문화가 없는 데다, 그건 금지된 일 아닌가?”

“그렇긴 하지만, 자네랑 누가 결혼한다고 우리 여신께서 화내지는 않으실걸? 그분의 대전사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입 다물고 계실 거야. 어디 보자, 우리 중에 머리칼 희거나 검은 여자랑 결혼해서 애 낳으면 그 머리칼은 회색이겠군. 딱 그레이엘프라 부를 만하겠어. 그렇다면 일족을 재건할 수도 있겠는데?”

그 말에 잠시 가온은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의 엘프들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가운데, 가온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거 참 매력적인 제안이군. 하지만 미안하네.”

“아, 거절······”

“바로 거절하는 건 아닐세. 물론 승낙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

“결정하려거든 나중에 그러고 싶네. 아직 바깥에서 못다 한 일이 많아.”

그때 여신께서 물으시었다.

‘전자오락?’

‘아닙니다.’

한편 오림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 말이군.”

“그렇지. 특히 하고는······”

어느새 나루가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엘프답게 저 멀리서도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바로 사과했다.

“하고 그자를 해치우는 걸 도와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미안해. 알다시피 하고 그 작자가 우리 여신의 대전사라서 말이야. 볼 때마다 쓰지도 않을 그걸 떼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어.”

“괜찮습니다. 지금껏 주신 도움만으로도 차고 넘칩니다.”

이후로도 연회가 계속되었다. 이 순간을, 이 환대와 여기 차려진 음식들을 가온은 진심으로 즐길 수 있었다.

이렇듯 연회를 즐기는 것은 가온에게 수십 년 만의 일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참여해온 연회라고는 죄 우울하거나 정치적인 자리였으므로.

웃고 웃다가, 즐거운 시간이 끝났다.

“연락처도 주고받았으니, 이제는 자주 만날 수 있겠지?”

“어쩌면······”

서로를 끌어안은 뒤, 가온은 숲을 떠났다.

어두운 집으로 돌아왔다.

*******

오랜만에 친구들과 만나 말을 섞으니 느낀 바가 있었다. 계속 놀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대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바로 복수든 뭐든 해야한다고.

얼마 전 꺼림칙했던 감각을 이겨내고, 가온은 다시 게임 속에 들어갔다.

검술 교습소에서 훈련을 했다. 몇 시간이고 계속.

그러자니 이번에도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가온 경? 저번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 도움을 받아놓고 또 찾아오다니 뻔뻔스럽지만, 감히 드릴 말씀이······”

한국인 게이머의 말에 가온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 뭘 부려먹으려는 거냐? 이 패턴 슬슬 지겨운데.”

“아뇨, 당장 뭔가 부탁드리려는 건 아니고 나중에 일어날 일에 협조를 구하고자 미리······”

“미리 거절할게.”

가온에게 나중의 도움을 구하려던 게이머는 당황한 눈치였다.

가온은 딱 잘라 말했다.

“형 수련하는 거 안 보이니? 형도 바쁘단다.”

“그럼······”

“더 도와주지 못하는 건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도와준 것도 꽤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검술 수련하려고 이 게임하는 건데, 너희한테 불려갈 때마다 개인 시간 뺏기는 거 솔직히 좀 그래.”

“저희도 죄송하긴 한데······”

“죄송하면 그러질 말아야지. 한 번 도와주니까 계속 부르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이참에 선을 그어두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리 알고 그만 좀 불렀으면 좋겠어.”

한국인 게이머는 더 설득하려 했지만 가온의 뜻은 변하지 않았다.

실망한 채 물러가는 게이머를 가온은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거절하자니 기분이 좋지는 않다.

하지만 끝까지 도울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기어이 참마황이 게임에서 우승하려 할 때, 한국인들은 그를 저지하고 싶어하겠지만 그때 자신은 도울 생각이 없다.

그렇듯 저들이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마지막 순간에 돕지 못할 바에야, 지금부터 돕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 전에 다들 게임 내 재산 처분이나 했으면 좋겠는데. 설령 우승자 나와 서비스 종료 돼도 문제없게.’

수련을 마친 뒤, 가온은 몽마관에 향했다.

그 사이버 매춘업소 안에서 지존무쌍과 마주쳤지만 가온은 모른 척했다. 남들이 알아보고 귀찮게 하는 사람이 없도록 폴리모프한 마당이었기에 지존무쌍도 이쪽에 아는 척하지는 못했다.

가온은 접수원에게 작은 목소리로 주문했다.

“하이엘프 남자.”

몇 분 뒤, 창이 깨지고 하이엘프 검사가 들이닥쳤다.

가온은 달빛을 피워내는 하이엘프를 노려보았다.

소드마스터 하고. 달과 순결의 여신의 대전사.

저 하이엘프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되새겼다.

수십 년 전, 가온의 누이들이 저 하이엘프의 검에 죽었다.

후긴의 혁명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 구 인사들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개종과 죽음의 선택에서 그녀들은 살아남길 원했다. 그랬기에 그녀들은 후긴의 인간들이 자신들을 자기네 자식들과 피를 섞으려 하는 것마저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강제적으로 결혼하게 된 그녀들의 운명을 하고는 죽음보다 끔찍한 것이라 여겼다. 결혼식장에 들이닥쳐 모두 죽였다.

결국 가온의 누이들은 배교자인 상태로 죽었다. 강제적인 배교였음이 참작되어 그녀들은 지옥에 가지 않았지만 천국에 가지도 못했다. 모든 기억을 잃은 채 다시 태어나야 했다. 결국, 세간의 기준에는 ‘그냥 죽은’ 셈이었다.

그 사실에 가온은 울분을 느꼈다.

그따위로 멋대로 죽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직접 그녀들을 구했을 텐데. 여신께서는 그녀들의 배교를 용서해주셨을 것이고, 가온은 그녀들을 위해 복수했을 것이다. 몇 개의 국가가 상대건 상관없이 모조리 불살라버렸을 것이다. 그녀들은 굴욕적으로나마 살아남은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저 작자가 모든 걸 망쳤다.

“씨발 놈의 유니콘.”

가온이 칼을 뽑았다. 사나운 재를 피워냈다.

소드마스터 둘이 대결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오십육 분 만에 가온은 패배했으며, 게임오버당했다. 이 사실에 가온은 굴욕감과 충족감을 동시에 느꼈다. 졌지만, 어쨌건 예전보다는 확연히 나아졌으므로.

이대로 가다보면······.

그대로 일주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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