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엘프 오림 - [1]
부활한 봐라니에게 가온은 이런저런 일을 설명했다.
가장 먼저 부모에 관한 일을 해명했다. 대놓고 네 부모가 널 버렸다며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까 봐라니? 당분간 요으 그 친구랑 같이 지내렴. 지금은 못 가지만, 나중에 만나러 갈 테니까······ 알겠니?」
자기 어머니의 말에 봐라니는 겨우 울음을 참았다.
“응. 그럴게······”
봐라니가 부모와 재회할 수 없어 아쉬워하는 한편 납치된 것이 아니었음에 안심하는 가운데, 가온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실제로 그 부모가 뱀파이어가 되어버린 제 딸을 만나러 찾아갈 일은 없을 것이었다.
가온은 앞서 봐라니의 부모를 만났다. 양육권 포기에 서명시키고는 딸을 안심시켜 떠날 수 있도록 말을 전하게 명령해두었다.
당연히도 그 부모는 아무런 잔말 없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누구의 말인데 거부하겠는가? 이 후긴에서 회색 머리칼의 엘프가 내리는 명령이란 절대적인데.
별로 놀랍지는 않게도, 그 명령에 저항할 만한 모성애나 부성애는 발휘되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흘러, 봐라니는 자신의 유아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은 후에.
그리고 단순히 나이를 먹을 뿐만 아니라 성장과정에서 몇 권의 역사책을 읽는다면, 봐라니는 자신이 어릴 적 요으의 친구라던 잘생긴 오빠가 왜 자신에게 이상할 만치 호의를 보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 그 전 왕족의 죄책감을 건드렸음을, 그 결과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통화가 끝난 뒤, 회색 머리칼을 휘날리는 엘프를 봐라니는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므로 가온은 숨기고 있던 정체를 특별히 드러냈는데, 아주 큰 인상을 준 눈치였다.
“저······ 왕자님? 저 떠난 뒤에도 만날 수 있을까요? 마법도 가르쳐주시고······”
봐라니의 부탁을 가온은 거절했다. 이 아이를 살리는 데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은 애정이 아니라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부채를 충분히 갚았노라 판단되는 지금 뭔가 더 할 의무는 없었다.
“미안, 자주 만나러 가기엔 예히나탈은 너무 멀단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아무튼 고마웠어요, 왕자님!”
“뭔가?”
“이것저것요! 구해주신 거랑, 그동안 마법 가르쳐주신 거랑, 잘은 몰라도 이번에 뭔가 노력해주셨단 거랑······”
슬슬 떠날 시간이 되었다. 요으가 봐라니의 손을 붙잡았다.
“그럼······ 봐라니?”
“응! 아, 오해해서 미안해, 요으!”
한편 둘을 맞으러 예히나탈에서 사람들을 보내두었다.
“자, 가실까요?”
귀족 시종처럼 차려입은 아름다운 뱀파이어들이 둘을 안내했다.
이 장면을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지구의 공산계열 독재자들이 보았다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언제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고위 뱀파이어들이 고작 오크 하나와 애완흡혈귀 하나를 맞으러 나온 것이다.
카샤드 서기장이 직접 내린 지시였는데, 예히나탈의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 예히나탈의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일로 얼마 전 화로의 대전사가 그들 앞에서 한 발언, 그러니까 예히나탈의 사람들도 천국에 갈 수 있으리란 발언에 훨씬 힘이 실렸다. 간악한 후긴 놈들도 천국에 갈 수 있게 허락해준 마당에 고작 빨갱이와 언데드들을 거부할 리가 없으니.
정확히는 몰라도, 그 결정에 여기 있는 조그만 뱀파이어가 관련되었음을 예히나탈의 고위 언데드 공산당원들은 알고들 있었다.
“정말, 정말 드릴 말씀이······ 매번 드린 말씀이지만, 감사를 드려요으. 전하······”
요으가 가온에게 고개를 숙였다. 가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작별해주었다.
그렇게 하나의 일이 마무리되었다.
가온은 집으로 돌아왔다. 후긴에 있는 자신의 집에.
어두운 요새에서 가온은 자신의 고향에 대해 생각했다. 거기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번 변화는 그들에게 진정한 구원이 되었나?
아닐 터였다.
천국의 문이 열렸다고 해서 후긴 인간들에게 천국행 티켓이 발급된 것은 아니었다.
아스의 모든 신들이 후긴을 싫어했다. 화로의 대전사가 귀환하기 전부터 말이다. 신들은 이전부터 후긴의 인간들을 천국에 들여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화로의 대전사가 그들이 천국에 갈 수 없노라 선언한 것은 그저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준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신들의 후긴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가온이 선언을 번복하기 무섭게, 전쟁 신은 공식적으로 후긴인들에게 자신의 가호를 내리지 않으리라 선언했다. 설령 놈들이 성전에 참여해 공을 세우고 죽더라도 천국에 들여보내지 않겠다고.
다른 신들은 조용하지만, 그들이라고 배교자들의 후손에게 자비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 와중에 후긴 자체가 천국에 가기 적합한 환경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이 지배하는 도둑과 살인마들의 도시, 이 회색빛 도시에 살아가며 신들의 마음에 들 만한 삶을 살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천국의 문이 열렸건 닫혔건, 지옥문이 그들을 삼킬 것이다.
대부분의 후긴 사람들은 천국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게 가능해지려거든, 나라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할 것이다.
그 변화를 이끌어 낼 생각이 가온에게는 없다.
천국의 문만 열어준 것마저 후회가 막심한 마당이다. 뭘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당장 가상현실 기기에 들어갈 맘은 들지 않았다. 허탈한 가운데 생각했다.
‘이젠 진짜 할 게 없네.’
가온은 가온은 멍하니 침대에 앉았다. 탈력감 속에서 한참 동안 그러고 있자니,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렸다.
「저······ 가온 경?」
늙은 전 군인의 목소리. 가온은 의문스럽게 물었다.
“시범이? 웬일이냐, 전화를 다하고?”
「가온 경께 연락하고 싶단 분이 계셔서요」
“내가 내 연락처 남한테 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나?”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던 마당이라 가온의 반응은 차가웠다.
류시범은 쩔쩔 매며 변명에 나섰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던 게―」
갑작스럽게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바뀌었다.
「―미안해, 가온. 내가 강요했어」
“나루 양?”
「소식을 들어가지고.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거야?」
“아뇨, 딱히.”
이 우드엘프 여자가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가온이 당황한 가운데, 나루는 계속 말했다.
「이번 결정으로 마음의 짐이 덜어졌으면 좋겠네. 그리하여 맘이 좀 편해졌음 좋겠고」
“맘이 편해지면 좋겠다니요?”
「용서를 하면 맘이 가벼워진다잖아?」
“글쎄요, 전 사실 이번에 정말 용서한 것도 아닌 데다······ 용서 비슷한 결정을 내린 뒤에도 생각보다 기분이 좋아지진 않는군요.”
「뭐, 세상 일이 그렇지. 아무튼 널 기억하는 우리 애들은 이번 일에 기뻐하고 있어. 후긴이 용서받아서가 아니라, 네가 옛날 일을 조금은 이겨낸 것 같다고 생각해서 말이야. 그러니 이제야말로 그 요새를 나올지도 모른다 기대하는 중이고······ 저번에도 말했듯, 우리 애들이 널 보고 싶어하는데」
‘우리 애들’이 누군지는 가온도 알고 있었다. 이백 년 동안 함께였던 우드엘프들. 세간에는 그림자 엘프라 특별시되는 엘프들.
“그들이 절 보고 싶어한다고요?”
「그래, 가능할까?」
가온은 조금 생각에 잠겨있다가 대답했다.
“예, 그러죠.”
「잘 생각했어!」
“그런데 말입니다. 게임 속에서 절 만났다느니, 게임 속 저는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 달랐다느니 다른 엘프들에게 말씀하신 건······”
「당연히 비밀을 지켰지. 그러기로 약속했잖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그제야 가온은 웃을 수 있었다.
“그 말씀이야말로 제 맘속 짐을 덜어내고 가슴을 편하게 해주는군요.”
「이게? 정말?」
나루가 당황하는 가운데, 가온은 외출할 준비를 했다.
옛 전우들을 만나러 텔레포트했다.
*******
본래 우드엘프들은 세상의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던 숲에서 각기 나뉘어 살았다.
이제는 아니었다. 수가 너무나도 줄어든 우드엘프들은 이제 카르세 연방에 있는 숲에 모여살았다. 그 숲마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과도할 만치 넓었지만, 예전 숲에 비하면 너무나도 좁은 것이었다.
그 숲 앞에는 엘프가 아닌 인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모름지기 자기네끼리 폐쇄적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종족이란 인간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엘프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인간 파파라치들과 그들을 내쫓으려는 경찰들이 뒤섞여서 숲 앞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진짜 엘프 사진 찍으면 엘프한테 죽는다고요, 아저씨!”
“죽어도 된다니까 그러네······”
그 와중에 정적이 흘렀다. 파파라치들이 바라던 엘프가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간 큰 파파라치도 그 엘프에게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했다. 그랬다간 목숨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위험하므로.
“가온 전하······”
잽싸게도 몇 명이 무릎 꿇은 가운데, 가온은 숲으로 나아갔다. 몇 걸음 걷다 말고 문득 생각난 듯 경찰에게 물었다.
“그러고보니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라던데. 나는 따로 허가를 받긴 했다. 확인이 필요한가?”
이 경찰로서는 어제도 TV에 나와 세상을 들썩이게 했던 이 엘프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다는 것마저 영광스럽게 여기는 눈치였다.
“아니, 아닙니다.”
“그러면 들어가도?”
“카메라나 사진촬영 기능이 달린 모든 전자기기 반입은 금지라서 원래는 몸수색을 하지만······ 전하께 그럴 필요는 없겠지요. 외부와 단절하고 홀로 수련만 해오신 전하에게서 마족의 물건을 찾아내려는 건 우스운 일이니.”
가온은 가슴 속 스마트폰에 투명화 주문을 걸며 대답했다.
“음.”
자신에게 예를 표하는 인간 무리를 등지고, 가온은 숲속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옛 전우들과 마주했다.
“가온!”
가온을 보며 너무나도 기분 좋게 웃는 우드엘프, 아는 얼굴이었다.
“오랜만이군, 오림.”
이백 년 동안 함께였던 우드엘프는 인사할 시간조차 아까운 눈치였다.
“그래, 오랜만이야, 너무! 너무 오랜만이야······ 모두 나와!”
넓은 숲에서 가온을 안내하기 위해, 많은 우드엘프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여 가온을 마주했다.
그들 중에는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 많았다.
“가온, 정말 왔구나!”
그리 외치면서 한 우드엘프가 껴안고자 달려들었는데, 가온은 기꺼이 마주 안아주었다. 나머지 우드엘프들 한 명 한 명도, 체면을 신경 쓰지 않고 기꺼이 끌어안았다.
수십 년만의 해후였다. 그 감격스러운 만남을 가온과 인연이 없는 다른 우드엘프들은 즐거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우드엘프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이름을 못 알려드린 것 같아서 지금 알려드려요. 나리예요. 가장 유명한 친척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가온은 그녀를 보고 기겁했다.
게임에서 본 우드엘프 여자였다. 나루의 여동생이라던가?
“저번이라뇨?”
가온의 부정에 나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세상에서 뵀었잖아요?”
“모르는 일이군요. 처음 만나뵈어 반갑습니다, 나리 양.”
“아니, 전에 만났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아니······”
오림이 끼어들어 만류에 나섰다.
“아니라잖아.”
그리고 나리는 성냈다.
“오빠들은 빠져. 내가 묻고 있잖아.”
결국 나리는 다른 우드엘프들을 무시하고 가온에게 일방적으로 추궁하다가, 끝까지 구면임이 부정당하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매우 억울해하면서.
“진실은 밝혀질 거예요······”
귀빈을 맞이한다기엔 너무나도 무례한 나리의 태도를 그 어느 우드엘프도 문제 삼지 않았다.
소드마스터 나루의 여동생이라서가 아니었다.
“나리 양, 많이 어린가 보지?”
가온의 물음에 오림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스물도 안 됐어. 우리 중에 제일 어리지.”
우드엘프의 사회와 문화를 가온도 알고 있었다.
“거의 공주겠군.”
“그리 대접받지. 아, 우리도 옛날엔 왕자님 취급 받았는데. 나이를 먹으니 취급이 달라져서 아쉬워.”
출산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엘프 사회에서 소년소녀들은 너무나도 귀중한 존재다. 그런 이유에서 나이가 어린 것은 그 자체로 벼슬이며, 연장자보다는 연소자가 더욱 큰 존중을 받는다.
한국인들에게는 반드시 숨겨야 할 종족의 비밀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일찍이 우드엘프들이 안전하다 여겨진 다른 세계에 소년들을 보냈다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들이 받은 충격이란 끔찍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무사히 살려보냈기에 가온은 우드엘프 모두에게 은인으로 대접받았다.
그 사실을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