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88화 (88/135)

외전 재의 왕자 - [2]

불과 몇 주 만에, 반지성은 대통령을 만났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반지성 씨! 이백 년 넘게 다른 세계에 계셨다고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기사에 따르면 애국자라고 하셨는데 맞습니까?”

반지성은 공손하게도 긍정했다.

“그렇습니다. 대통령 각하.”

대통령은 소드마스터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우해준다는 사실에 기쁜 눈치였다. 하기야 미국 대통령도 소드마스터를 거느리지 못했다.

“좋습니다, 정말 좋습니다!”

이후로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통령은 한참 후에야 용건을 꺼냈다.

“혹시 공산당이라고 아십니까?”

“모릅니다.”

“지금이라도 알려드려야겠군요. 지구의 종양 같은 것들입니다. 마귀 같은 것들이지요.”

“왜놈만큼 나쁜 놈들입니까?”

“예, 물론. 놈들과의 성전에 참여해주실 의향이 있습니까?”

대통령은 공산주의에 심취한 청년이 옆집 지주 딸을 꼬챙이로 꿰어 죽인 얘기, 공산당의 병사들이 공을 세우겠답시고 병원을 습격한 얘기 따위 공산당이 벌인 온갖 악행들을 들려주었다. 다름 아닌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놈들이 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자기가 없는 사이 동포가 그런 일을 당했단 사실에 반지성은 울분을 느꼈다.

“그게 북조선이란 말이지요. 가서 거기 수장 수급을 취해오면 되겠습니까?”

반지성의 말에 대통령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럴 수 있습니까?”

“어쩌면.”

대통령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래주신다면야 아주 놀랍고도 경사로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말고······”

“그렇다면?”

“지금 무찔러주셔야 할 공산당 빨갱이들은 베트남에 있습니다.”

“베트남이요?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군요.”

“우리처럼 분단의 비극을 겪기 전에 도와야 하는 곳입니다. 게다가 이건 우리나라에도 엄청난 이득이 되는 일이에요. 파병 시 미국이 상당한 원조를 해주기로 했는데, 잘만 하면 독립배상금까지 갚아줄지도······”

“독립배상금은 또 뭡니까?”

“아, 그거 말입니다······”

일본에서 독립하기 위해 한국이 져야 했던 거액의 빚, 그 존재를 듣고 반지성은 경악했다.

“베트남이 아니라 일본에 군대를 보내는 게 옳지 않습니까?”

반지성의 물음에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대통령은 현실주의자였다. 이번 파병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대폭 상승할 것을, 경제적으로도 큰 보상을 얻어 지긋지긋한 낙후국가 신세에서 벗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웬 조선인 초인이 나타난 지금, 그 기대는 현실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 어느 나라도 내보내지 못할 비대칭 전력이 생긴 것이다.

전 세계가 유일한 지구인 소드마스터의 고향을, 한국을 주목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약간의 설득 끝에, 결국 반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참전하지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

어두운 건물 안에서, 노인은 커튼을 쳐 창문을 가리려 했다.

그것을 가온이 만류했다.

“창을 가리지 말게.”

노인은 여전히 커튼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지금 머리칼이야 가리셨지만 사람들이 다 알아볼 겁니다. 엘프는 워낙에 아름답지 않습니까? 누가 보고서 신고할 수 있습니다, 전하.”

“후긴에 반역자만 즐비한 것은 이미 알지. 하지만 상관없네. 커튼을 치지 마.”

“하지만······”

“창을 가리지 말라고 했네.”

노인은 이 왕자가 왜 이리 쌀쌀맞은지 몰라 당황스러운 눈치였다.

노인이 안절부절못하는 가운데, 가온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십 년 동안 너무나도 바뀌어버린 후긴이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마천루가 도시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가운데, 산업화 성공을 증명하는 공장들은 쉼 없이 가동되고 있었다.

너무나도 이질적인 고향의 모습에 가온이 감상을 말했다.

“뱀파이어들이 살면 딱 좋겠어.”

“예?”

“후긴 말일세. 저 검은 매연이 하늘을 가리고 있지 않나? 딱 뱀파이어들이 돌아다니기 적합할 것 같군.”

노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예, 하고 말을 받았다.

가온은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보며, 노인에게 말했다.

“자꾸만 창밖을 흘긋거리는군. 어지간히도 신경 쓰이나 본데, 정 원한다면 커튼 치게.”

“예? 예.”

노인은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허겁지겁 커튼을 쳤다.

어둠이 깔렸고, 사실 가온도 이쪽이 더 맘에 들었다. 저 거지 같은 풍경보다야, 이백 년 동안 곁에 있었던 어둠이 훨씬 맘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제야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가온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를 여기 데려오기 전에 시간이 꽤 많이 남더군. 그 시간에 민주주의란 게 뭔지 알아봤네. 국민이 선출하는,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지도자란 개념을 알게 되었고······. 거기서 내가 깨달은 것이 뭔지 아나?”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 나라에 숨 쉬는 모두에게 복수해도 정당하단 것이었네.”

“예?”

“왜냐하면 이 나라 정부가 벌인 모든 일은 여기 사는 이들의 의지를 대변한 것이잖나. 그러니 후긴의 정부가 내 피붙이들을 죽였다면, 그것은 사실상 국민들이 죽인 것과 같지.”

“전하의 혈족들······ 왕족들께서는 살아계실 겁니다.”

가온이 듣기에는 헛소리였다.

“아니, 맘에도 없는 위로를 할 필요는 없네. 이미 많은 것을 눈에 담았거든. 역겹고도 신성모독적인 것들을. 내가 뭘 봤는지 궁금한가, 영감?”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가온은 말을 이었다.

“맨 먼저 철거된 여신의 사원을 보았네. 여신님의 신상, 목이 잘려있더군. 그분의 목에 억지로 꽂아둔 십자가란······. 그런 짓에 반대하는 선량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인데, 잘나신 혁명가들께서 싹 다 죽여버린 모양이더라고. 덕분에 이 나라엔 배교자만 남았지.”

“저는······”

“다들 정말이지 마족처럼 되고 싶어 안달 났던 모양이던데? 프랑스의 바스티유 광장을 본뜬 불쾌한 광장을 봤네. 거기 설치된 혁명 박물관에 다녀왔어. 거기 전시된 단두대를 보았고. 그 옆에 안내 문구가 이렇게 적혀 있더군. ‘억압적인 왕족들을 참수한 단두대’.”

노인은 식은땀을 연신 흘리는 가운데, 겨우 입을 열어 말했다.

“끔찍한 것들을 보셨군요. 삼가 위로를 표합니다. 그래도 너무 분노하지 마십시오. 오해하시는 바와 달리, 대부분의 백성은 무고합니다. 모두 가온 전하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단두대 옆에는 웬 큼지막한 사진이 걸려있던데? 우리 가족이 찍혔는데, 가족사진 삼기엔 별로인 사진이었네.”

“예? 어떤······”

“박박 머리가 깎여 길가를 행진하는 그레이엘프들 사진. 주변에 늘어선 사람들이 오물 던지는 게 찍혀있더군. 그 야만적인 행위의 이유를 뭐라 설명하고 있던가. 아, 귀한 혈족이라 해봤자 의복과 특이한 머리를 없애놓으면 일개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모두에게 보이기 위함이라던가?”

노인은 이제 숨도 잘 쉬지 못했다.

분명 자기가 이 왕자를 얼마 전에야 후긴에 데려왔는데. 어떻게 그것들을 봤는지 묻지 않았다. 그런 걸 묻기에 노인은 너무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가온도 자기가 텔레포트의 명수라느니, 노인이 후긴 내 비밀세력과 접선하겠답시고 시간을 질질 끄는 동안 후긴을 여러 차례 오갈 수 있었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여기가 함정인 걸 알고 왔다는 사실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물끄러미 어둠 속 콘크리트 벽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왕실 충성세력과 만나기로 한 비밀 장소랍시고 안내한 곳은 이 조그마한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왕가에 아직도 충성을 바치는 신실한 자들이 올 것이라던가?

가온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노인은 거짓말을 했고, 이곳에 데려온 것은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

이 판단에 위험을 감지하는 소드마스터의 전투감각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이 노인의 눈을 여신께서는 당신의 눈으로 삼을 수 없으셨다.

그러니까 이 노인은 배교자였다. 후긴의 거의 모두가 그렇듯이.

“그레이엘프들을 다 쫓아내더니 엘프들이 귀가 좋다는 걸 잊은 모양이야. 아주 대놓고 걸어오는군.”

가온의 빈정거림, 노인은 울먹이듯 대답했다.

“전하께······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러 온 자들일 겁니다.”

“그런가. 만 명은 넘는 무리가 한꺼번에 내게 충성하러 오는 건가? 그거 놀랍군. 다들 군화까지 신었는데. 만 명의 군인들이 다 함께 내게 충성을 맹세하려나 보지? 저 정도면 진작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복고를 이루어냈을 만한데. 왜들 그러지 못했는지 모르겠군.”

이쯤 되면 노인도 가온이 이미 다 알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흐느꼈다.

“돌아오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그래, 아무도 내 귀환을 바라지 않더군. 자네도 그렇지?”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온은 권총을 던져주며 물었다.

“자결할 텐가, 아니면 기독교도라 그러진 못하겠나?”

노인은 눈을 감았다. 일렁이는 재가 그 목을 지난 뒤, 가온은 그 시체를 난도질할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다가 말고,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았다. 배신자를 응징했음에 기뻐할 수 없었다.

이십 년 전 자신을 유일하게 알았던 사람을 죽였다. 그것만으로도 모든 인연이 끊긴 기분이다.

허탈한 기분으로 가온은 건물을 나섰다.

군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도, 전 왕족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온 군인들은 아니었다.

「항복하라!」

장교가 확성기로 외치는 가운데, 소총을 든 병사들이 이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가온은 당당했는데, 그것은 아마 현대무기의 무서움을 잘 이해하지 못한 중세 인물의 오만쯤으로 보일 것이었다.

“여기 와서 내 가족들을 찾아다녔어. 가족이 아니면 친척이라도. 도저히 못 찾겠더군. 묘지만 잔뜩 봤을 뿐이야.”

가온은 반신이라, 목에 힘주지 않아도 저 멀리까지 그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항복하라!」

“신들께서도 내 가족들의 영혼을 찾아주셨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애도를 표해야 할지, 천국에 꽤 있더군. 하지만 몇 명은 끝내 신들께서도 못 찾아주셨는데, 그들의 영혼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신들께서도 모르시겠다더군. 이미 환생한 것인지 아직 살아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

「항복하라고 했다!」

“나로선 살아있길 바라는 마음을 포기할 수가 없어.”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 마당이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항복하라!」

“그래서 묻겠는데, 몇 명이라도 살아있나?”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항복하라!」

“나야말로, 살아있다고 말한다면 항복할 기회를 주겠네. 그 처분은 나중에 하더라도 말이야.”

그리 말하며 가온은 검을 뽑았다. 찬란하게 일렁이는 재, 초인의 증명인 검기에 수많은 병사의 시선이 꽂혔다.

그리고 이것을 저항 의지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지휘관이 외쳤다.

「발사!」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모두 훈련을 잘 받은 듯, 실전 상황에 움츠러들거나 놀란 기색이 없었다.

소드마스터가 상대임에도 크게 겁먹지 않은 눈치다.

하기야 다들 이쪽이 소드마스터임을 알고 온 모양이었다. 고작 한 명을 잡으러 온 것치고는 과도한 인원이 주변을 에워쌌다.

저 병사들이 만들어낼 화망은 촘촘하고 빈틈없을 것이며, 확실히 소드마스터도 피할 방법이 없을 것이었다. 활이나 쇠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인데. 정말이지 지구의 무기는 실로 놀랍다.

그 힘에 의지해 초인을 죽일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저 만 명을 부리는 지휘관으로서는 이 왕족 출신 초인이 테러를 벌이고 다녔다면 골치 아팠을 텐데 바로 죽일 수 있게 돼서 다행이라고, 자기 경력에 소드마스터 제거기록을 추가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첫 병사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 가온은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지금 이 순간에도 여신께서 함께하고 계셨다.

자비로운 가정의 수호자, 화로의 여신께서는 지금 여기 계시지 않았다.

분노의 여신, 불의 여신만이 계실 뿐이다.

‘불태워라! 저것들을 불태워라, 가온!’

여신께서 포효하시는 가운데, 그분의 힘이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반신의 몸을 타고 흐른다. 열과 불을 조종하는 힘.

병사들의 총이 폭발한다. 온갖 부품들이 튀어나가 그들의 눈을 찌른다. 실명한 병사들이 비명지르는 가운데, 그들은 자기네가 운이 좋았음을 알지 못한다.

몇몇 병사들은 가슴에 수류탄을 달고 왔다. 그것들이 모조리 폭발한다. 파편은 물론 뼈와 살이 비산한다.

총열이 휘어지고, 주변 건물의 아궁이가 터진다. 가스레인지가 폭발하여 가정을 삼킨다.

여기저기서 생겨난 불꽃이 한 데 모이기 시작한다. 기초적인 화염조종. 그러나 그 결과는 결코 기초적이지 않다.

거대한 화염 회오리가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춤춘다. 벌써부터 몸이 성하지 않은 병사들이 도망치는 가운데, 가온은 텔레포트한다.

후긴이 불탄다. 불타는 고향을 배경으로 재가 일렁인다.

모든 아스 국가의 원성을 사며 근대화에 나선 보람이 없게도, 후긴에 중세 시대가 돌아왔다. 봉건적 군주의 귀환과 함께.

*******

한국과 그다지 멀지 않은 이 베트남에서, 반지성은 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을 느낀다.

설명에 따르면 자신은 현지 주민들의 구원자여야 했는데. 그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마치 일본 순사를 보는 조선의 백성들처럼.

어쨌건 반지성은 해야 할 일을 한다.

한 자루 거대한 칼을 들고 전장에 뛰어든다. 미합중국의 초월적인 화력에도 불구하고 지지부진했던 전장은 단번에 정리되기 시작한다.

폭격을 피해 땅굴을 파고 숨어있던 병사들, 그들의 흙 묻은 저항은 초인 소드마스터 앞에 무력하다.

반지성이 거대한 칼을 한 번 휘두른다. 베트콩이 열심히 판 땅굴이 단번에 드러난 가운데, 초인은 그 안에 홀로 진입한다.

몇 발의 총알쯤은 쉽게도 베어넘기는 이 초인을 빈약한 무기론 도저히 상대하지 못한다.

적과 민간인이 분간되지 않는 혼돈마저도 초인을 위협하지 못한다.

초인의 반사신경은 그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민간인 사이에 숨은 베트콩이 수류탄을 들어올리면, 그 어느 저격수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소드마스터는 그자에게 달려가 베어버린다.

그리고 받게 되는 눈길.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내는 증오의 눈길. 죽어가는 사람들의 탄식의 눈길.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 눈길들을 반지성은 견디기 어렵다.

내가 생각한 적들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오만하게 콧수염을 기른 일본 순사 같은, 비교적 알기 쉬운 적과 싸울 줄 알았다.

혼란 속에서 칼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베트남의 주민이 아닌 누군가와 마주쳤는데, 아스 출신이었다.

“소드마스터?”

반지성의 칼이 뿜어내는 백색 광채를 몰라보기는 불가능했다. 활을 든 우드엘프 게릴라가 놀란 가운데, 상대를 보고서 놀라기는 반지성도 마찬가지였다.

“우드엘프? 여긴 왜······”

“이 나라의 독립을 돕고 있소.”

독립, 어쩐지 익숙한 단언데.

반지성이 굳은 가운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드엘프가 물었다.

“소드마스터씩이나 되는 걸 보니 아스의 고명한 검사에게 가르침을 받으신 모양인데······ 이 전쟁에 왜 저들의 편으로 선 거요? 이건 아스의 모두가 경멸하는 전쟁이오. 그릇된 싸움이고.”

반지성은 변명하듯 대답했다.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겁니다.”

“조국을 위한 일이 다 좋은 일은 아니오.”

또다시 정적.

반지성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엘프? 돌아가십시오. 당신은 날 이기지 못합니다.”

우드엘프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순순히 물러나고자 뒤돌아선 가운데, 웬 한국인 소령이 그 등을 향해 총구를 가져갔다.

반지성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소령은 기겁해서 따졌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시지, 귀쟁이를 왜 돌려보내 주시려는······”

“귀쟁이?”

“엘프 말입니다. 저······”

맙소사, 조센징을 욕이라 느끼고 분노하던 한민족은 이제 다른 민족을 깔아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반지성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다 못해 분노를 표출했다.

“고귀한 엘프를, 감히 그따위로 불러?”

초인의 으르렁거림, 그것은 마치 야수의 울부짖음과 같다.

그 앞에 선 소령의 떨린다. 초저주파가 그 몸을 굳게 했다.

겨우 몸의 진동이 그치고서야 소령은 겨우 반박에 나설 수 있었다.

“저 엘프 하나를 살려 보내면 한국인 수십 명이 죽을 겁니다!”

그게 뭐 어떻다고? 반지성은 그리 쏘아붙이려다 말았다.

자신이 엘프 하나의 목숨을 동포 수십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에, 또 그게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사실에 놀랐다.

왜?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반지성이 조선인 혹은 한국인과 보낸 시간은 엘프들과 보낸 시간에 비하면 너무 짧다.

이제 반지성은 엘프들의 문화, 습성, 좋아하는 것 등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모른다. 하나도.

동포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했기에 자신을 이 지옥에 보냈는지 반지성은 잘 알지 못한다.

“돌려보내라고 했다.”

물론 우드엘프 게릴라 하나가 돌아갔다고 해서 전황이 뒤집히지는 않는다. 게릴라들의 필사적인 저항은 초인 소드마스터 앞에 비참하게 짓밟히길 반복할 뿐이다.

그로부터 불과 이 년 만에, 한국이 포함된 연합군은 베트남전에서 승리했다.

*******

후긴 공화국의 군대는 지구의 기준에도 현대적이고 강력했다.

잘 무장하고 잘 훈련된 현대식 병사들은 아스의 모든 국가가 후긴을 적대하는데도 불구하고 후긴을 지역강국으로 우뚝 서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 후긴의 군대를 상대로, 가온은 전투와 전투를 반복했다.

좋은 추억이 되지는 않았다.

가온은 후긴의 모든 곳에 존재했고, 모든 곳에 재와 불을 흩날렸다.

현대무기를 무자비하게 폭발시키며, 소드마스터이기까지 한 반신에게 저항할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후긴의 후원자, 영국을 위시한 서방세계는 겁에 질렸다. 심지어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마저도.

“충성을! 왕가에 충성을!”

웬 반역자의 목을 베던 그때, 저 시커먼 하늘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그게 핵미사일이란 것을, 심지어 영국에도 없건만 후긴이 아스 국가들 사이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 미국이 특별히 배치해준 무기라는 것까진 가온이 알지 못했다.

그저 폭발하는 무언가라는 것만 짐작하고 공중에서 폭발하게 만들었다.

굉음마저 빛 속에 삼켜지더니······.

공중에 태양이 떠올랐다. 지상까지 확산 되는 열기.

여신께서 내려주신 가호가 가온의 몸을 열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뿐만이 아니다. 진공과 충격파, 기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 세상을 강타한다.

그 충격에 못 이겨, 가온은 몇 초간 정신을 잃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거의 죽기 일보직전임을 알 수 있었다. 갈기갈기 찢겨나간 반신의 몸뚱이.

폭발은 저 멀리서 일어났는데도 이 지경이라니, 마치 신의 힘과 같다.

후긴 사람들은 저런 힘에 반했을 것이다. 너무나도 반한 나머지, 아스의 신들을 버렸을 것이다.

‘가온, 괜찮으냐?’

여신께서 물으시자 가온은 대답했다.

‘예, 물론.’

여신께서 가호를 내리시는 동시에, 신성이 몸에 들어온 이물질들을 차단한다. 방사능도, 뜨거운 열도 그 몸을 해치지 못한다.

그리고 재생이 시작된다. 심지어 옷마저.

이백 년 동안 워낙 생필품이 부족했기에, 가온이 익힌 마법 중에는 섬유를 복구하는 마법도 있었다.

그래서 잠시 후, 벌떡 일어난 가온은 핵폭발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폐허가 된 현장을 보니 새삼 충격적이다.

‘이제부터는 폭발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연소 자체를 없애야겠군. 그게 안전하겠어.’

가온은 그리 생각하다가 문득 자신에게 묻는다.

이제부터? 뭘? 어째야 하나?

가온은 잠시 멀뚱히 서 있는다.

낙진이 시작된다. 이제는 검이 아닌, 하늘에서 재가 흩날린다.

재 속에서 왕자가 걷는다.

그 모습이 후긴의 잔존 지휘부는 물론 세계 각국에도 포착된다. 그들은 절망한다.

1957년 8월 23일, 후긴 공화국군은 13개 사단에 준하는 병력의 피해를 입었으며. 더 이상의 항전이 무의미하다고 판단되어 전의를 상실한바, 사실상 궤멸했다.

후긴의 모든 수뇌부가 항복한 그날, 가온은 겁에 질린 그들에게 그레이엘프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그 요구에 응하지 못했다.

그 대가로, 화로의 대전사로서 재의 왕자가 저주를 내렸다.

“여신의 권위를 빌어 선언한다. 후긴에 사는 그 어떤 인간도, 이제 천국에 가지 못한다.”

이 선언은 즉각 효력을 발휘했다.

이제 정식으로 후긴 인간들이 아스의 천국에 입성할 수 없게 된 가운데, 이 선언은 아스의 신이 아니라 지구의 신을 모시던 후긴 사람들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지구 문명의 상징, 교회의 목사와 신부들이 일제히 후긴에서 철수한 것이다. 강제적인 조치였다.

그들 성직자로서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고, 후긴인들의 영혼을 책임져야 한다며 부르짖었지만 긴급히 파견된 군인들이 강제로 그들을 차원문에 밀어 넣었다.

새로이 생겨난 초인, 마치 분노한 아스의 신들이 빚어낸 것 같은 초인의 나라에 자기네 교회를 계속 두는 것은 지구의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모든 지구의 성직자가 떠난 지금, 후긴 사람들은 양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버림 받았다.

그 사실에 후긴 사람들이 느낀 절망이란 지구인들이 이해하지 못할 성질의 것이었다.

모름지기 아스인들에게 신의 존재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므로. 마찬가지로 아스에 사는 후긴인들은 신의 가호를 바랐다. 아스 신의 가호든, 지구 신의 가호든 간에 간절히.

*******

항복한 후긴의 지휘부가 증언하건대, 살아남은 그레이엘프들은 없다고 했다.

그리 말하면서 변명하듯 외쳤다.

“저희가 다 죽인 건 아닙니다! 저희는 전 왕족분들을 꽤 많이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그레이엘프들을 굳이 살려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설명을 들은 가온은 어이가 없어 물었다.

“합동결혼식을 치렀다? 그러니까, 그레이엘프 여자들과 후긴 인간 남자들을 강제로 결혼시켰다고?”

“예, 전 왕족과 전 백성들 사이에 화해와 공존을 표하려는······”

그리 지껄이던 놈의 목을 주저 없이 날렸다.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해보았더니,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인간은 엘프를 질투한다. 싫어하는 동시에 동경한다. 그 영생하고 아름다운 피를 자기네 범속한 피에 섞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왕족의 피를 탐내서.’

그런데 결혼을 원해 살려두었다면 왜 다 죽고 없나?

이 질문에 떨면서 대답하기를, 습격이 있었다고 했다.

합동결혼식이 벌어지던 날, 현장에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거기 있던 모두를 죽였다고.

미사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했다.

“현장에 있던 인간 남자와 그레이엘프 여자들은 모두 목을 베여 죽었다고?”

놀리는 줄 알았으므로, 가온은 또 한 명의 목을 베었다. 방금보다 더욱 떨며, 한 남자가 외쳣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유해가 남아있는데 ······”

이마저 가온의 분노를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죽은 자들의 뼈가 남았다고? 왜?”

“태우지 않고 매장했기에······.”

또 한 명의 목을 베며 가온이 물었다.

“전 왕족 놈들에게 쓰기엔, 땔감마저 아까웠나?”

모름지기 시체란 바로 태워야하는 것이다. 시체 수집에 환장한 고대 리치가 텔레포트로 나타나 가져가 버리지 않도록. 좀비 혹은 스켈레톤 노예로서 죽은 뒤에도 그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바로 태워야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스의 장례문화였지만, 지구의 경우엔 아닌 모양이었다. 지구에 물든 후긴의 경우에도.

“다른 방식의 장례입니다. 저희로선 최선을 다해 장례를 치른 겁니다. 정말입니다······.”

이 와중에 여신께서도 분노를 표하시었다.

‘매장이라? 기독교 왕국의 관습이구나. 철저히 배교를 했어.’

어쨌건 그 말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리고 죽은 친척들을 다시 제대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가온은 그들이 묻힌 묘지로 향했다.

확실히 그레이엘프 여자들의 이름이 적힌 묘비가 줄줄 널려있었다. 가온은 그 무덤을 파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자기 친척 묘를 도굴하는 기분이라고.

여기서부터 이미 죄책감이 치솟았다. 그때 자신은 없었다는, 함께 죽지 못했다는 죄책감마저도 가온의 머리를 잠식했다.

‘내 잘못이 아니야. 내 잘못이······’

애써 죄책감을 억누르고, 땅에 묻힌 유해들을 파냈다. 다행히도 시체는 부패를 마쳤다. 뼈만 온전히 남아있었다.

베인 흔적 또한 남아있었다.

이 순간, 소드마스터의 전투감각이 총동원된다.

하늘에서 날아왔느니 어쩌느니 소리를 지껄이긴 했지만, 분명 이들을 죽인 자는 칼잡이다.

그런데 누구?

유해의 흔적을 통해, 적의 정체를 파악하려 애썼다.

단서를 역추적한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재생시킨다. 상상과 추측. 그러나 소드마스터가 하는 것이라, 그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실제나 다름없다.

머릿속에서 그레이엘프 여자들의 죽음이 반복된다. 무력한 여성들의 죽음. 그녀들의 목이 베이고 베인다.

가온의 정신이 아찔해진다. 현실과 머릿속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이 상상 속에서, 가온은 누이들을 수백 번 찌르고 베었다.

‘미안해요.’

가온이 사죄하는 가운데, 여신께서 지금 대전사에게 일어난 문제를 알아차리시고 외치셨다.

‘네가 안 죽였다!’

‘죽여서 미안해요.’

‘기다려라. 가온. 기다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여신께서 필사적으로 달래신 끝에야 가온은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여전히 머릿속에 그녀들의 죽음이 남은 가운데, 여신께 흉수의 정체를 고했다.

“완벽한 칼질······ 흉수는 저와 같은 경지입니다. 소드마스터 중 누군가가 제 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 정도면 알아내기 쉬우니, 네 여신이 알아보고 오리라. 그러니 가만히 쉬고 있어라, 가온. 가만히 쉬고 있어.’

가온이 오래 쉬지는 못했다. 여신께서는 바로 범인의 정체를 알아오셨으며, 대전사에게 알려주시었다.

‘하고란 놈이 죽였다고 한다. ’

“하고요?”

‘달 여신의 대전사다. 그 여자에게 따졌더니, 원한다면 결투를 주선하겠다고 한다. 원하느냐?’

“원합니다.”

‘싸울 수 있겠느냐?’

“싸워야지요.”

*******

공항에서, 서울에서, 시골에서. 모두가 반지성의 이름을 부르짖는다.

“아, 반지성! 한국의 축복!”

온 나라가 반지성을 민족 영웅으로 받든다. 반지성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제작되고, 관련된 소설과 다큐멘터리는 이미 수두룩하게 반영되고 있다.

심지어 중국계 성씨인 반씨를 한민족의 고유성씨인 양 조작하는 방송까지 송출되는 가운데, 반지성은 동포들의 환영에 감흥이 없다.

저들이 아무리 자신을 칭송한들, 기쁘지 않다. 전혀.

*******

하고는 하이엘프였고 소드마스터이자 달 여신의 대전사였으며, 만 살이 넘었다.

원래라면 존중해야 할 인물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 죽였나?”

가온의 물음에 하고는 담담히도 대답했다.

“그녀들은 긍지만큼 용기가 충분하지 못했지. 자기네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없었어. 내가 도움을 주었소.”

“죽이는 게 도움을 주는 건가?”

“그런 상황에서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더럽혀질 상황에는 그것이 구원이었소.”

“나도 네게 구원을 주고 싶은데.”

“아니, 구원을 주실 필요 없소.”

“닥치고, 칼을 뽑아라.”

결투하러 나왔음에도 하고는 영 전의가 없는 모양새였다. 가온은 더욱 화가 치밀어 외쳤다.

“칼을 뽑아! 아니면 그냥 죽여주랴?”

그제야 만 년 된 하이엘프의 칼이 뽑혔다. 초승달을 닮은 그 칼은 달빛을 머금고 빛났다. 만 년 동안 갈고 닦은 칼, 그 칼 앞으로 가온은 달려들었다.

내 손에 수많은 적들이 쓰러졌다. 고대의 신도 내 칼에 피를 흘렸다. 네깟 것이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냐?

가온의 칼신에서 재가 일렁인다. 초승달이 이쪽에 겨누어진 그때, 가온은 하고의 등 뒤로 텔레포트했다······

실패했다. 이동이 되지 않는다. 어째서?

그 와중에 하고는 이 앞까지 다가와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가온은 긴급히 다시 텔레포트하여 거리를 벌리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소드마스터의 공간왜곡 방지, 잘 알려지지 않은 기술이다. 가온은 익히기는커녕 그게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 기회도 없었다.

결국 검술 대결이 시작된다. 나름대로 팽팽하지만, 그것은 한쪽이 봐준 결과다.

가온은 온 힘을 다해 싸우며 하고는 그렇지 않다. 대강 칼을 휘드려먼서도 여유롭기 그지없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패배한 것은 가온이었다.

쓰러진 가온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하고는 말했다.

“유감이오. 나이를 더 먹어보면 이해했을 텐데.”

“뭘······”

그 말에 하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세상엔 목숨보다 가치 있는 것들이 있는 법이며, 그건 영혼과 순결 등이라고. 그것들을 보존케 해준 자신의 조치는 아주 타당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 모든 말이 가온의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가온은 지금 그저 충격을 받았다.

굳어버린 가온을 내버려두고, 자비로우시게도 하고는 떠나갔다.

한참 뒤에야 가온은 겨우 여신께 물었다.

“내가 졌어요? 내가?”

‘가온.’

“왜?”

이백 년 고통의 세월, 다른 세상에 갇혀 사투를 거듭해야 했던 그 세월. 툭하면 흘리고 싶었지만 딱 한 번 흘리고 말 뿐이었던 눈물이 기어이 다시 흘러나온다.

소년들이 잔뜩 죽은 날, 무력함에 침수됐던 그때처럼.

그때와 달리 지금은 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하염없이 울었다.

무력함. 이것을 또다시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소드마스터까지 되었는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

한국행 비행기에서 반지성은 우울함을 느꼈다.

워낙 힘겹게 살아온 탓에 잊고 지냈던 과거가 떠오른다.

아스인에게 총질하던 소년 시절의 자신. 그때 자신은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도 그래야 하나? 민족과 나라를 위해 일했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당시의 자신은 살아남기 급급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타적으로 굴고자 애썼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정말이다.

잘했다고 말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한국 국민들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길가에 똥을 싸도 박수 쳐 줄 테니까.

아첨하지 않을 사람, 그래서 위로가 객관적으로 느껴질 사람이 필요하다.

마침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아버지. 엄하신 아버지.

이번만큼은 당신의 아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십시오. 장하다고 해주십시오.

간절한 소망을 품고,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나아갔다.

아버지께 새로 구해드린 집은 멋지고 웅장했다. 그 안에 들어가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 얼굴은 문과 반대방향이었다. 그래서 반지성은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뒤돌지 않은 채 물었다.

“그래, 뭘 하다 왔지?”

“뉴스 못 보셨습니까?”

“보긴 봤는데, 네 입으로 말해 보거라.”

“전쟁을 하다 왔습니다. ”

“왜?”

“나라를 위해서요.”

그제야 아버지가 뒤돌아 앉았다. 그리하여 드러난 성난 얼굴, 아버지의 분노한 얼굴을 반지성이 보게 되었다.

반지성이 놀란 가운데, 아버지가 외쳤다.

“뚫린 입이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해!”

그 순간, 반지성의 온몸 신경이 곤두선다.

소드마스터의 전투감각이 작동한다. 가속된 사고가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다.

지금 들어오는 공격의 이유는 무엇인가?

심리적 이유다. 부끄러운 행동을 한 사람은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싶어 하는 법.

아들을 영웅 대우하지 않기 위해, 당신의 체면을 보존하기 위해 아버지는 계속해서 맹공에 나섰다.

“넌 독립을 원하던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 미국놈들 신문을 보니 민간인들도 죽였다던데, 제정신이냐? 넌 학살자다! 더러운 칼을 어딜 감히 들고 와! 그걸로 네 아비도 찔러 죽일 테냐!”

반지성은 지금마저 참지는 못한다.

반격수단을 찾아낸다. 쉽다. 처음부터 갖고 있었으니. 그것을 단번에 휘두른다.

“도망자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뭐?”

“동지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잖소. 숨어지냈지, 산속에서. 아닌가?”

반지성이 품어온 추측은 사실로 드러난다.

아버지는 반박하지 못한다. 수치심으로 벌겋게 물든다.

“나는······”

“잘난 아들한테 훈수 둘 자격이 있나?”

“그래, 없지.”

아버지가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나가라.”

반지성은 이 기와집 누구 덕분에 받았는지 잊었나? 하고 면박을 주려다 말았다.

반지성이 멀뚱히 서있자, 그보다 나이 어린 아버지가 애원했다.

“나가, 제발.”

뜻대로 따랐다. 반지성은 집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길가에 나온 반지성은 바로 움츠러들었다. 사람들이 아는 척할까 봐, 고개를 푹 숙인 채, 죄인처럼 걸었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그래, 자신은 죄인이다.

아버지에게 그러면 안 됐어.

잘못했다고 빌어야지.

당신이 가르쳐준 천둔검법은 큰 도움이 됐다고. 그 덕에 소드마스터도, 민족 영웅도 되었다고 감사해야겠다. 그런 주제에 고마운 줄 모르고 소리질렀노라 잘못을 빌어야겠다.

화해하기 위해 선물을 샀다. 아버지께서 옛날에 내주신 목검 한 자루. 비싼 선물은 아니지만 이걸 왜 내미는지 알아보실 것이다.

그걸로 못된 아들놈을 때려달라 하면 허, 하고 웃으시면서 종아리를 한 대 치실지도 모르지.

좀 아프게 치시더라도 기꺼이 감내하리라. 자신은 그럴 수 있다······.

아버지의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았을 만한 시간이 흐른 뒤, 반지성은 집에 돌아왔다.

애써 살가운 목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아버지? 저······”

손에 들고 있던 목검이 떨어져 내렸다.

추억 속 그 물건은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묻히며,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기괴할 만치 혀를 쭉 내민 아버지가 보였다.

그 목에 달린 예쁜 매듭 하나. 매듭에 이어진 밧줄.

아버지의 몸은 우울한 아낙이 올라탄 그네처럼 흔들린다.

아, 저 양반.

도망쳐서 숨어 산 주제에 도덕 기준만은 높았던 양반.

평생 수치 속에 살아오다 멍청한 아들놈이라도 자길 존경하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세상 사람 모두가 자신을 깔보고 있었음을 알게 된 양반.

더없이 분한 가운데, 초인이 되어버린 아들을 때려눕힐 수는 없으니 다른 방식으로 복수한 모양이다.

자기 파멸적인 그 복수는 성공했다.

눈물이 주룩 새어 나왔다. 반신으로서 지닌 강건함 덕에 이 와중에도 다리에 힘이 풀리거나 하는 일은 없이 자세만은 꼿꼿하다.

멍하니 서서 생각해보았다.

뭘 어째야 하나. 사망신고라도 해야 하나? 그건 또 어떻게 하나? 할 줄 모른다.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연락처에 있는 건 기자와 공무원들의 것뿐이다.

그 가증스러운 것들.

놈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린다.

생각해보면 거기서부터 모든 일이 잘못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동포에게 좀 더 친절할 수는 없었나? 수치를 덜 느끼게 배려해줄 수는 없었고?

그랬으면 아버지는 안 죽었을 텐데.

결국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죽은 지금, 이백 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반지성은 완전히 혼자였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시체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묻으려다 말았다.

매장풍습은 이제 반지성에게 익숙한 풍습이 아니다. 모름지기 시체는 태워야 하는데, 어떻게?

사제인 친구에게 장례를 부탁할 수 없을까 생각했다.

아스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취해달라고, 알고 지내던 방송사 인물에게 기어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분노를 무릅쓴 보람도 없이, 방송사의 남자는 난색을 표했다.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어진 설명, 그 친구에게 일어난 일을 전해듣고 반지성은 또 다시 충격에 빠졌다.

아무도 내게 그런 걸 말해주지 않았는데.

전장에 종군기자랍시고 당신네 방송국 기자들도 여럿 있었는데, 그놈들이 알려 줘야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싶다.

그러나 가슴에서 소용돌이치는 분노와 충격은 말이 되어 흘러나오지 못한다.

반쯤 홀린 기분으로 반지성은 허공을 응시한다.

그러다 한곳에 쌓인 신문이 눈에 들어온다.

TV 편성표가 보인다. 거기 큼지막하게 굵은 글씨로 적혀 있는 방송 프로그램 제목.

‘영웅 반지성’이란 글귀가 보인다.

반지성이 무슨 활약을 했는지 특집 방송을 할 예정인 모양이다.

「더 하실 말씀은······」

“방송 취소하시오.”

「예?」

“영웅 어쩌고 방송 취소하란 말이오. 누구 허락받고 내 얼굴을 내보내는 거요?”

그러기 싫은 모양이다. 어물거리며 대답한다.

「아······ 나중에 얘기하지요」

“취소하라고!”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반지성은 손에 쥔 수화기를 부숴버렸다. 저쪽에는 행운이게도, 통화가 끊겼다.

반지성은 분노 속에서 아버지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썩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아스의 방식대로, 화장을 하기로 했다.

불을 던졌다. 타오르는 집을 등지고 반지성은 길을 나섰다.

터덜터덜 걷는 중 아버지의 말이 메아리쳤다. 무슨 짓을 했느냐, 넌 학살자다, 어쩌고 하던 질책들.

그렇다. 자신은 죄를 지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세상이 뒤집히고 다시 뒤집히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천지가 뒤집히는 가운데, 반지성은 방송국 앞에 서있었다 .

그 입구 앞에서 웬 남자가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주변 길에는 어린애의 손을 붙잡은 어머니가 걸어가는 와중인데도.

심사가 뒤틀린 마당이라 보아 넘기기가 어려웠다.

“너.”

반지성이 남자를 노려보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소드마스터의 분노지만 무시한다.

반지성의 얼굴이 TV며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는데. 평소에 보지 않는지 알아보지 못한 눈치다. 하여간 방송에 나오는 보람이 없다.

그리 생각하며 방송사에 들이닥쳤다. 이미 반지성에 관련된 프로그램은 방송 중이었다.

그 와중에 나타난 방송 주인공, 반지성을 보며 방송사 사람들은 난처해했다.

“여긴 왜······”

반지성이 말했다.

“방송 취소하라 했지.”

“죄송하지만 어렵습니다.”

반지성의 사회적 위치가 놀라울 만치 드높아진 마당이다. 그래서 반지성을 대하는 방송사 인물의 태도는 정중하기 그지없지만, 그 얼굴에 떠오른 짜증을 반지성은 놓치지 않는다.

아버지와 함께할 때, 그때도 보았던 그들의 표정.

화가 솟구쳤고, 지금 반지성은 참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칼이 움직였다. 그따위 표정을 지었던 얼굴을 몸에서 떼어냈다.

“진작 이랬어야 하는데.”

반지성이 중얼거리는 가운데,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려 한다. 그러지 못하게 목구멍에 칼을 쑤셔 박았다.

“아, 아······”

덜덜 떨면서 전화에 손을 가져가는 놈. 그러지 못하게 휘두른 칼이 놈의 손목을 날린다. 그러면서 반지성은 생각한다.

어디서 본 얼굴인데. 카메라맨이었던가?

맞다. 생각해보니 이놈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다. 공무원들이 아버지를 모욕하던 그 자리에.

하지만 별 도움을 안 준 거 같은데.

직접 한 건 없으면서 얄밉긴 마찬가지인 이런 족속을 뭐라 부르던가?

‘그래. 방관자.’

방관자는 공범과 같고, 공범은 실행범과 같다.

그러니까 이놈이 내 아버지를 죽였다.

칼 한 번을 더 휘둘러 아버지 원수의 목을 날렸다.

몇 번 더 휘둘러, 그 옆에 있던 놈들도.

소드마스터의 검은 참으로 신속하고도 간결하게 휘둘러진다. 열세 명의 인원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목과 몸이 분리되었다.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오지만 반지성의 몸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들어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반지성은 방송국을 나섰다.

또 다른 놈이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걸 보니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모양이다. 길가의 누구도 그자가 한국의 공기를 망치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다.

이제 반지성은 노려보기만 할 생각이 없다.

반지성이 또 다시 칼을 휘두른다.

담배 연기를 마시던 그 목을 베어버렸다.

“어······”

그 옆에서 걸어가다가 놀란 놈, 그놈도 흡연자를 말리지 않고 방관했으니 똑같은 놈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놈도 죽였다.

조선 땅이 한결 나아진 느낌이다.

그렇다면 애국적이군.

반지성은 속으로 읊조린다.

나는 애국자다.

애국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

이후로도 가온은 바로 포기하지 않았다.

결투를 한 번 더, 이번에도 패배했다.

마지막으로 부랴부랴 총 쏘는 법까지 배우고서 비겁한 기습까지 감행했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두 졌고, 하고는 가온을 살려보냈다. 아주 자비로우시게도.

‘쉬자, 가온아. 집에 들어가자.’

보다 못한 여신께서 말씀하셨고, 가온은 흐리멍덩한 기분으로 여쭈었다.

‘집이요? 어떤······’

‘네 여신이 다 알아봐두었다. 화로의 온기 앞에 몸을 누이자.’

그럴 순 없다고, 복수해야 한다고 부르짖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복수라니, 누구한테?

대상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다. 너무 많아서가 문제다.

복수해야 할 놈들이 너무 많다.

누구에게부터 복수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만치 원수가 너무 많은 와중에, 당장 죽이려 했던 원수 하나는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가 없다.

프랑스나 영국, 후긴의 잡것들부터 마저 죽이자니, 그럴 의욕이 나지 않는다.

무기력, 끔찍한 무기력이 그 온몸을 감싼다.

패배를 곱씹으며, 가온은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영웅 서사가 아니었다고.

시련은 있었지만 영광은 없었다. 시련만이 계속되다가, 시련으로 끝났다.

독립운동 하다가 무관심 속에서 골병들어 죽은 독립운동가들처럼. 어릴 때부터 고생하다 나이 들어 고독사한 하류 인생들처럼.

이 세상에 넘쳐나는 비극들처럼.

소년이 꿈꾸던 영웅담은 추억 너머로 사라졌다.

가온은 이제 정말 소년기가 끝났음을, 자신이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이 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좋은 어른이 되었나?

아니었다.

시련이 보상을 담보하지 못하듯 세월은 성장을 담보하지 못한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좋은 소년이 꼭 좋은 어른이 되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세상이 도와주지 않으면 그 어떤 소년도 그럴 수 없기에.

가온은 자신이 형편없는 어른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

하고에게 연달아 패한 마당이지만 그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가온을 깔보게 하지 못했다. 홀로 현대식 군대를 정면에서 박살 낸, 심지어 핵폭발 속에서 걸어 나온 위업은 그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공포였다. 그것이야말로 그 어떤 초인도 해낼 수 없는 위업이라고

사람들은 자신을 두려워한다

덕분에 집에 처박힌 와중에도, 후원제안이 참 많이도 왔다. 주제넘게도, 뱀파이어들까지 후원제안을 해왔다. 그 언데드 모기들이 후긴에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잘은 몰라도 후긴 사람들에게 즐거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재의 왕자가 가호하는 가운데, 뱀파이어들이 후긴에 들어온다. 그들은 특유의 자본으로, 경매에 올라온 공장이며 토지를 싹쓸이한다. 후긴의 모든 재산이 그들 차지가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후긴의 재앙이 시작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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