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87화 (87/135)

외전 재의 왕자 - [1]

차원문을 나오자마자 가온이 한 것은 인원수 세기였다. 모두 나왔나?

모두 나왔다!

이제는 정말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모두 그렇게 했다.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며, 천상에 기도하고 지상에 입을 맞추었다. 먼지가 입안에 들어갔지만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이백 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들의 눈을 찌르는 햇살의 눈부심마저 지금은 축복으로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래서 여긴 어디였더라? 우리가 처음 들어간 곳이······”

“카르세 제국 연구소.”

척척 걸으니 금세 사람을 마주칠 수 있었다. 제복을 입었는데, 이상할 만치 서양 마족 놈들의 복장을 닮은 옷이었지만 그마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백 년 만에 만난 사람이었다!

웬 우드엘프가 외쳤다.

“사랑해요!”

당황한 직원이 물어왔다.

“여러분은? 여긴 국가시설인데, 지금 이건 불법침입······ 설마 엘프 분들이 스파이 노릇을 하진 않으실 테고, 대체 왜 여기 계십······”

추궁하다 말고, 직원의 눈길이 가온에게 꽂혔다.

“잠깐만, 한 분 머리칼······ 혹시 염색입니까?”

가온은 인자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자네는 그레이엘프를 모르나? 나름 유명한 종족인데, 애석하군.”

눈을 크게 뜬다. 당황한 눈치다.

대체 왜?

가온은 소드마스터답게, 영문을 모르는 와중에도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낀다.

불안감을 증폭시키기 위해서는 아니겠지만, 그때 여신께서 말씀하시었다.

‘뭔가 이상하구나. 가온. 내 대전사의 가족들이 보이지 않는다.’

‘예?’

‘정확히는 후긴 자체가 잘 보이지 않는구나. 신도들의 눈이 곧 네 여신의 눈이거늘, 어째서인지 알 수가 없다.’

‘신도들의 눈을 공유하시는 것은 오랜만이라 익숙하지 않으신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다른 곳은 잘 보이노라. 이게 대체······’

속에 싹트는 불안을 가온은 애써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함께 기뻐야 할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망칠 수는 없다······.

잠시 후, 이들이 이백 년 만에 돌아온 귀환자들이며 이십 년 전에 다른 세계로 떠났던 소년들임이 밝혀지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귀환자들을 맨 먼저 맞으러 온 것은 놀랍게도 한국인이었다.

“아니, 강제징용 되셨다가 아스인들에게 잡혀서는 다른 세계에 끌려가셨다고요? 그게 뭔 고생······”

카르세 한국 영사관에서 파견된 영사는 반지성의 존재에 기겁했다. 평소에는 탱자탱자 놀기만 하던 그 공무원은 이번만큼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는데, 덕분에 가장 먼저 떠난 것은 반지성이 되었다.

“이렇게 헤어지는군. 더 있고 싶은데, 터미널인가 하는 곳까지 향하는 비행기가 몇 시간 뒤에 출발한다고 해서······ 진심으로 미안하네.”

반지성의 말에 가온이 대답했다.

“뭘 그리 다시 만나지 못할 것처럼 구나? 어서 가게. 이백 년 묵은 유학자가 설마 부자유친을 어기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반지성은 일행을 떠났다. 우드엘프들이 울면서 그 조선인을 배웅하는 가운데, 가온은 웃으려 애썼다.

그로부터 하루 지나, 숲에서 우드엘프들이 달려왔다.

“엄마!” “오림!”

정말이지 감동적인 재회였다. 명목상 출산이 금지된 우드엘프들 사이에서 ‘소년’이란 참으로 귀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들을 숲에 돌려보냈다는 사실이 가온은 너무나도 자랑스러웠지만, 지금 맘 편히 즐거워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가온은 웃으며 재회를 축복하며, 저들을 송별하려 했다. 그리고 우드엘프들은 자기들 먼저 떠나는 것을 거부하려 했다.

“후긴에서 사람들 올 때까지 같이 지내지, 응?”

그 제안, 너무나도 고마운 제안을 가온은 바로 거부했다.

“아니. 그럴 필요없네. 나도 후긴에서 사람 오면 바로 떠날 생각이니.”

“그렇다고 자네만 혼자 남기고 떠나기는 정없는데? 자네는 우리 사제요 지도자였잖은가, 어찌 그런 가장 중요한 동지만을 마치 남인 양 덩그라니······”

“됐다니까? 우린 이백 년 동안 봤네. 더 지겹지도 않나? 이 순간을 즐겨야지. 어서 가게. 가족과 만나야할 것 아닌가. 자, 어서.”

반쯤 강제로 가온은 우드엘프들을 떠나보냈는데, 우드엘프들은 진심으로 내키지 않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그들 전 지도자의 말을 따랐다. 매우 툴툴거리면서.

“대체 후긴 사람들은 언제 오는 거야?”

이 와중에 후긴 사람들은 전 왕족을 맞으러 출발하지도 않았다. 사실, 연락도 몇 시간 전에 겨우 이루어진 마당이었다.

현재 카르세와 후긴은 상호 연락이 어려웠다.

카르세에 후긴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사관이니 영사관이니, 그런 문명적인 개념과 거리가 먼 우드엘프들이기에 그들은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것을 가온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온이 생각하기에, 이백 년이나 고생하다 겨우 돌아온 저들은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자기네 사제와 불행을 공유하며 함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 전, 한 카르세의 공무원이 가온을 불러내어 말을 전했다.

“모쪼록 차분한 마음으로 들어주십시오. 말씀드리기 심히 죄송스럽지만······”

이어진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후긴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그 혁명을 프랑스가 전폭적으로 지원했지요. 그들의 무기를 든, 역도들의 수가 끔찍할 만치 많았습니다······”

이어진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그레이엘프들, 그러니까 후긴 왕가는 오랜 동맹인 카르세 제국을 도우려 했다. 이곳에 적극적으로 지원군을 보내려 했다. 카르세가 무너지면 그다음 차례는 후긴이라 판단했으므로.

그 결정을 후긴의 평범한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왜 자신들의 전쟁도 아닌, 저 멀리 떨어진 전장에 끌려가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이때 마족들을 무찔러야 한다는 후긴 왕가의 주장은 잘 먹히지 않았다.

영국을 위시한 서방세계는 당시 후긴을 아스 진출의 교두보로 만들려 하고 있었다. 자본을 투자해 후긴에 ‘문명적인’ 시설을 세우고, 그것을 자신들의 선물이라며 홍보했다.

홍보 전략은 충분히 먹혔다. 놀랍게도, 당시 후긴인들의 지구인들에 대한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자신들을 전선에 보내려는 왕가의 명령을 따라서는 안 된단 영국 선교사들의 선전이 먹힐 정도로.

기어이 반란이 일어났으며, 역성혁명도 아닌 공화 혁명이었다고 했다. 전 왕족이었던 그레이엘프들이 모두 끌려 내려온 뒤, 공화정이 들어섰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우리 가문의 왕권은 여신께서 내려주신 것인데 어찌······.”

“전하, 그들은 반역자일 뿐만 아니라 배교자입니다. 후긴 사람들은 이제 화로의 여신님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깁니다······ 방금 후긴 정부와 연락했습니다. 이런 전보가 전해지더군요.”

“말해보시오.”

“‘경고하건대, 돌아오지 말라. 후긴은 당신을 거부한다. 후긴의 시민들은 옛 왕가를 거부한다’······”

잠시 가온은 굳어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카르세 공무원이 제안했다.

“전하, 그러니 제안드립니다. 카르세에 망명을 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카르세도 이제 공화국이라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지만 우린 후긴과 다릅니다. 카르세 혁명 당시 카르세의 반군은 소수였습니다. 고작 수천 명의 자유주의자들이 무장하여 황궁을 점령했지요. 그 반군이 카르세 백성들의 마음을 바꾸진 못했습니다. 자랑스럽게 말씀드리자면 현 대통령 각하께서는 옛 선제후 가문 출신으로, 제국의 기준에도 정통성이 있는 분입니다. 나라의 뿌리를 바꾸진 못한 것이지요.”

“하지만 후긴은 아니라고······ 후긴에선 고작 수천 명이 아니라 다 같이 반역에 나섰나보지. 백성들 모두? 그러니까, 정말 백성 모두가 우리 왕가를 끌어내리는 데 동참했단 말인가?”

침묵이 긍정을 표하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공무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전하, 방금 드린 망명 제안은······”

“거부하오. 다른 도움은 줄 수 없나? 예를 들어 후긴의 옛 왕가의 인물과 연결해준다든가.”

그 요청은 승낙되었다.

그리하여 지금, 가온은 다른 동지들을 떠나보낸 뒤 기다리고 있었다. 억지로 자아냈던 웃음을 거두고, 하염없이.

*******

반지성과 함께 비행기에 탄 한국 영사관 직원은 조선도, 대한제국도 아닌 대한민국 사람이었다.

어쨌건 이백 년 만에 만난 동포였다.

그 동포의 얼굴을 보고서 반지성은 당황했다. 오랜만에 본 동포는 아름답기는커녕 잘생기지도 않았다. 가끔은 여자로 착각될 만치 아름다운 엘프들만 봐오던 반지성이 보기에는 정말이지 수준 미달의 외모였다.

여기까지는 놀라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래, 못생길 수도 있지.

하지만 다음 발언에는 기어이 놀라고 말았다.

“조선이 독립했다고······”

“아니, 그것부터 알려드려야 합니까?”

서로가 놀란 가운데,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반지성 씨, 가족은 있다고 하셨지요?”

그 물음에 반지성은 자랑스럽게 제 아버지를 소개했다.

독립운동가라고, 그분의 성함을 알고 있느냐 넌지시 물었더니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망스럽게도.

“지금쯤이면 그 이름이 알려져있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라니, 대단하군요. 부디 공훈을 인정받고 계시다면 좋겠습니다.”

“공훈을 인정받으면 좋은 점이 있소?”

“물론 있지요. 나라에서 보상을 준다든가······”

“보상이라, 그거 좋군. 그럼 아버지께서 보상을 받고 잘 살고 계시겠소?”

그 질문에 영사관 직원은 면목이 없다는 듯 대답했다.

“모르지요. 사실 독립운동가라 해서 다 보상을 받은 건 아니거든요.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증거가 없다든가, 좌익쪽이었다든가······ 독립운동을 했는데도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한 분들이 훨씬 많을 겁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에 헌신하느라 살림을 챙기지 못해 가난하게 사시는 분들도······”

‘내 아버지도 그러실지 모르겠군.’

반지성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애석해하지 않았다. 지금 얼마나 어렵게 살고 계시든 자신이 보상해드릴 것이다.

이백 년 만에, 그분께는 이십 년 만에 돌아온 자신에겐 그럴 능력이 있다.

*******

시간이 꽤 지나서야 가온은 요청한 인물과 만날 수 있었다.

옛 왕가의 인물이라 해서 왕족, 그러니까 혈족인 그레이엘프가 온 것은 아니었다.

가온은 그 사실에 실망하지 않으려 애썼다.

“전하! 이게 대체······”

자신 앞에 납작 엎드린 노인을 가온은 가까스로 알아보았다.

“청지기 영감.”

“절 알아보시는군요. 도련님?”

감격스러운 재회의 순간은 길지 못했다.

가온은 바로 용건을 꺼냈다.

“왕가가 완전히 뒤집어졌다고 들었소. 후긴 내에 왕가를 지지하는 저항세력은? 없소?”

“그건 왜······”

“후긴에 돌아가야 할 것 아닌가. 내 왕국을 찾으러.”

“있긴 하겠지만 도움이 안 될 겁니다. 없는 거나 다름없어서요.”

만류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 연락하시오. 당신들의 왕자가 돌아갈 것이라고 전해.”

“그러지 마십시오, 전하! 개죽음을 당할 뿐입니다!”

“아니, 당신의 왕자는 놀다 오지 않았어.”

가온은 검을 뽑아 검기를 보였다. 유례가 없는 회색의 검기를.

거기에 홀린 듯, 노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예, 전하.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너무 큰 기대는 마시고······”

“기대하겠소.”

노인이 넙죽 절하며 물러난 뒤, 가온은 또 다시혼자 남겨졌지만 진정으로 혼자는 아니었다. 여신께서 당신의 대전사와 함께 하고 계시었다.

그분께 기도를 올렸다.

‘제 가족들이 살아있겠지요?’

여신께서 기도에 응답하시었다.

‘그렇기를 바란다. 아니, 아마 그러리라. 전 왕가를 몰살하지야 않았을 테니.’

‘그런데 살아남은 그들이, 개종한 모양인데······ 그것도 마족의 종교로, 이 죄를 대체······’

그리고 대전사를 안심시키려는 듯, 여신께서는 일부러 온화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었다.

‘용납할 수 있다. 네 여신은 너희와 함께할 동안 이 땅에 부재했노라. 그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었지. 그동안 신앙이 날아가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강요가 있었을 테니, 네 여신은 결코 탓하지 않으리라.’

‘여신이시여······’

‘아무런 걱정을 말라, 가온. 네 여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대전사의 편이니. 내 대전사는 수백 년을 고생했다. 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네 혈족이 뭘 했건 용서할 것이며, 결코 그들이 내 대전사의 불행이 되지 않게 하리라.’

가온이 감격해서 우는 가운데, 여신께서는 천상에서 후긴의 그레이엘프들이 대체 어찌 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하셨다. 당장 후긴에 신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상황이니, 죽은 영혼들을 통해 알아봐야 할 것이므로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도.

전 청지기 노인이 후긴 국내와 연락을 취하는 데 성공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서였다.

“배편이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노인의 안내를 따라, 가온은 길을 나섰다.

후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백 년 만에 다시 밟은 조선 땅은 반지성을 들뜨게 하지 못했다.

‘여기가 정말 조선 땅이 맞나?’

너무나도 달라진 정경, 고작 이십 년 정도 지났다고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지. 반지성은 떨떠름할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반지성에게 익숙한 것은 이 땅에 아직 남아있었다.

반지성에게 가장 익숙한 남자, 누군가의 아들에게는 가장 위대한 남자가.

“아버지!”

그 아버지는 아직 살아있었다.

“지성이, 내 새끼······”

서로를 본 둘은 울면서 안겼다. 하염없이 울면서 서로를 다독이고, 계속 울다가 겨우 대화 비슷한 것을 나눌 수 있었다.

“아버지도 많이 나이가 드셨군요.”

울음기 섞인 반지성의 말에 아버지도 반쯤 울면서 대답했다.

“너도 꽤 변했구나. 아주 많이 변했어.”

‘이백 년이나 지나서 돌아온 것치고는 많이 변하지 않았는데.’

그리 생각하며 반지성은 아버지의 집을 둘러보았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초가집, 묵은내 나는 쌀통에는 웬 벌레만 가득했다.

지금 아버지가 무슨 대우를 받고 계신지는 그것만 봐도 명백했다. 그 사실에 반지성은 분노를 느꼈다.

노력에는 마땅히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그러니 보상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 공적을 인정받게 해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백 년 만에 첫 효도를 해야겠다.

비행기에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쭉 해온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비행기에 함께 탔던 직원에게 도움을 받았다.

마침 온갖 풍파를 거쳐 아스에서 돌아왔다는 이 조선인 귀환자는 참으로 주목받을 만한 존재였다.

국가는 물론 방송국까지 반지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연락해왔으며, 그들은 이 귀환자와 아버지의 만남을 더욱 극적으로 연출하고 싶어했다.

마침 조선 출신 귀환자가 남한을 선택한 가운데, 그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음이 밝혀짐으로써 국민들이 애국심에 고취되는 상황을 원했다.

그러니까 때마침 관련기관에서 공무원들이 찾아온 것은 조금도 우연이 아니었다. 연출된 결과였다.

그들이 한 인사 또한 연출된 대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여기 국가유공자가 계시다고요?”

갑작스럽게 방에 들어온 두 남자를 보며 아버지는 당황했다.

“이 사람들은 다 뭐냐?”

반지성은 당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부른 사람들입니다. 아버지의 명예를 되찾아줄 사람들이지요.”

“뭔 명예?”

“독립운동의 공적 말입니다.”

그 말에 아버지의 낯빛이 변했다.

“아니, 그건 안······”

“아버지, 이런 건 밝혀야 합니다. ”

아버지는 황급히 뭔가 말하고 싶어했지만, 그럴 시간을 주지 않았다.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은 빨리 용무를 끝내고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니까 빠른 진행을 원했다.

“자, 그래서······ 독립운동을 어떻게 하셨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 요청에 아버지는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이 아무리 독촉해도 입을 다물었는데, 십 분 넘게 그러고 있었다.

이 상황에 사람들은 거기에 짜증을 느낀 모양이었다.

“벙어리신가?”

모욕적인 말, 반지성은 화가 치밀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무례하게!”

“아니, 말씀을 안 하시는데······”

“내가 설명하지. 그럼 됐나?”

애써 분노를 가라앉힌 뒤, 반지성은 열심히 아버지의 공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설명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 듣고난 공무원들의 반응은 반지성의 예상 밖이었다.

“그게 뭔······”

뭐가 그리들 우스운지, 공무원들은 자기들끼리 낄낄거렸다. 심지어 카메라맨조차도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있었다.

반지성은 당황스러웠다.

“왜 웃는 거요?”

웃음기가 걷히지 않은 얼굴로, 사람들이 대답했다.

“아니, 산에서 칼 휘두른 게 왜 독립운동인데요?”

그 말에 반지성은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 그러나 이백 년 동안 애써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사실이 그제야 떠오른다.

그렇다. 지구에 소드마스터 따윈 없었다. 당연히 조선에도 없었다.

천둔검법이든 해동검법이든 아무리 익혀도 검기를 좍좍 뿜을 순 없었다. 검술을 익히는 일 따윈 총 든 왜놈들을 물리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산속에 숨어 칼이나 휘두르는 것은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다.

왜 지금까지 이 사실을 몰랐나?

반지성에게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란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을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정도로. 아들의 뇌에 박히도록, 아버지는 자신이 독립운동가란 사실을 툭하면 자랑스럽게 말씀하곤 하셨던 것이다.

허세요, 거짓말이었다.

반지성은 충격을 받다 못해 공포심을 느낀다. 자기 우상이 별볼일 없었음을 깨달은 아들답게도.

황급히 방금 추측이 틀렸음을 증거를 머릿속에서 찾아내려 애쓴다.

아버지가 말해준 독립운동은 첫 부분부터 자세했다.

웬 청년결사에 합류하여, 경찰서를 습격하고······ 동지들과 함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는 부분에선 스릴은 물론 긴장감까지 느껴졌으며······.

도망치다 떨어진 절벽에서 김시습 선사의 천둔검법을 습득한 이후의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독립운동, 하긴 하셨군. 동지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겁에 질려 산에 숨었을 뿐.’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음에 위안을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결국 도망쳤음에 수치스러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의 경우에는? 수치를 느낀 모양이다.

“아니, 산에서 칼 휘두르신 건 나중에 한국독립을 위한 수행이었고, 칼 휘두르시기 전에도······”

반지성이 어찌어찌 변명하려는 가운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아버지가 말했다.

“다들 나가시오. 어서!”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은 비웃음을 남긴 채 집을 나섰다.

그리하여 둘만 남겨진 부자는 말이 없었다.

말없이 반지성은 생각했다. 아버지가 사죄하면 웃으며 그럴 수도 있노라 말해야겠다고. 예전에 뭘 하셨든 아버지는 위대한 분이라고.

그러나 아버지는 사죄하지 않았다. 한숨을 쉬다 말고, 갑자기 벌컥 성냈다.

“자신의 공이든, 아비의 공이든 자랑하지 말 것을 당부했거늘! 뭐하다 왔길래 안 좋은 버릇이 들은 게냐? 낯짝만 늙어가지고 철이 들지 않았어!”

거짓말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시는군. 오히려 훈계를 하신다.

반지성은 굳어지려는 표정을 애써 관리했다.

이제 반지성은 소년이 아니다. 어른으로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는 한때 했던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죽다 살아난 마당에 또 할 용기는 없었을 것이다. 혹시 수배됐을까 두려워 산속에 숨어서는 아들한테 허세 부리면서 잘난 척이나 했을 것이다.

“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독립운동은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함이 아닌데 내세우며 호가호위하려 하다니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반지성이 잘못을 빌자 아버지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제야 좀 알겠느냐? 너는 정말이지 깨달음이 늦어.”

“그래도 천둔검법에는 꽤 성취가 있지요.”

당신께서 가르쳐준 검술을 잘 익히고 있었노라고, 헤어진 동안 당신의 존재를 잊은 적이 없었다는 말이 거기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함축된 그 의미를 읽어내지 못했다.

“천단검법? 아직도 하고 있었느냐? 그런 걸······”

천단이 아니라 천둔인데. 반지성은 감히 그걸 지적하지 못하고 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수련하지 아니하고 계십니까?”

“모르겠느냐? 평화로운 시대가 왔으니 칼잡이는 칼을 내려놓아야 하는 법 아니냐. 넌 정말 깨달음이 늦는구나. 매번······.”

“죄송합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겨우 맘이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난 세월, 뭘 하고 지냈느냐?”

반지성은 그제야 자신이 뭐하다 왔는지 설명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아들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아버지는 다시금 소리질렀다

“왜놈 수발이나 들다가 노비 노릇이나 실컷 했다고? 결국 넌 아비의 가르침을 하나도 따르지 못했구나!”

“그럴 기회가 없어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 불초 자식아!”

반지성은 지금 화내는 아버지가 속으로는 안심했음을 안다. 자신이 하다 만 독립운동을 자식이 하다 왔더라면 자기가 아들보다 못해지는 셈 아닌가.

그것은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초인적인 동체 시력으로 아버지의 안도의 표정을 포착할 수 있었다.

그 모든 허세를 반지성은 이해해줄 수 있었다. 이제 반지성은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으므로.

당시의 아버지는 당연히도 지금 반지성보다 훨씬 어리다. 몇 배의 세월을 살아온 연장자로서 반지성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반지성은 아버지께 깊이 절하여 사죄를 표한 뒤, 집을 나섰다.

문밖에서 방송국 사람들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원하던 애국 연출을 하지 못하게 되어 다들 화가 난 눈치였다.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재회는 마치셨지요?”

“덕분에.”

“그럼 이제 아버지 말고, 본인 인터뷰를 하십시다. 반지성 씨? 남한을 선택하신 이유가? 역시 자유국가가 좋아서겠지요?”

그 말에 반지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버지가 남쪽에 살아서요. 다른 이유는 없소. 솔직히 남북한 차이도 잘 모르겠고.”

“그렇다면 아버지께 감사하셔야겠네! 북한은 그야말로 끔찍한 독재국가인데, 거기 안 가신 걸 행운이라 생각하셔야겠습니다.”

“독재가 뭐요?”

“국민의 뜻과 상관없이 선출된 국가원수 홀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거지요. 아주 나쁜······”

“미안하지만 그게 왜 나쁜 건지 잘 모르겠는데.”

기자로서는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자 더욱 화가 난 모양이다.

이제 말투가 완전히 비꼬는 투로 바뀌는 게 아닌가.

“아는 게 그토록 없으시다면 앞으로는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시겠군요? 참 힘드시겠어요.”

반지성은 화내지 않으려 애썼다. 훨씬 어린 동포다. 훨씬 어린 동포······.

“확실히 난감하긴 하군. 독립운동을 하려 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니까.”

인내심을 발휘한 보람도 없이, 기자는 계속 비꼬았다.

“조국이 독립해서 퍽 아쉬우겠습니다그려. 그래서 이제 아무 계획도 없습니까?”

“구체적인 계획은 있지만, 각오는 있소.”

“각오라?”

“나는 애국자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선 뭐든 할 각오요.”

“뭘 하실 수 있는데요?”

“검기 좍좍.”

주변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웠다. 거기에 백색 광채를 발한 뒤, 바위에 쿡 하고 찔렀다. 빛나는 나뭇가지는 단단한 화강암 바위를 마치 두부처럼 파고들어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

“이거면 총 든 군대도 상대하기 애먹는다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

기자들의 눈이 떨린다. 부랴부랴 굽신거리면서, 한국에서 탄생한 초인의 존재를 카메라에 담는다.

원래 쓰려던 기사와는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다. 이게 그딴 것보다 훨씬 특종이 될 것이 분명하니.

다음 날 아침, 추레한 귀환자는 민족 영웅이 된다.

한국인 소드마스터의 존재가 신문과 TV에 도배되었고, 그가 남한을 선택한 것은 곧 체재의 우월성 증명이요 남한의 국격이 상승한 일이 되었다.

「아, 반지성, 그 이름! 한민족의 자랑!」

아버지 또한 신문을 보고 자기 아들이 노비 노릇만 하다 온 게 아님을 알았다.

고생 끝에, 그 아들은 유일한 존재가 되어 돌아왔다. 한국뿐만 아니라 지구에서도 유일한 초인 소드마스터.

아버지의 눈이 흔들린다.

반지성은 기대감 속에서 아버지의 반응을 기다렸다. 이백 넘어 주책이지만, 칭찬 좀 들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아버지는 위엄을 위한 허세를 택했다.

애써 퉁명스레 말을 던졌다.

“놀다 온 건 아니구나.”

“예. 고생 좀 했지요.”

“이젠 쉴 거고?”

반지성은 실망을 감추고는 선언했다.

“아뇨. 앞으로도 고생할 계획입니다.”

“고생? 뭔?”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겁니다. 아버지 몫까지.”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애국을 해 보이리라. 그리하여 아들의 활약을 통해 대리만족을 시켜드리리라.

이후로도 계속, 이 새로운 한국인 소드마스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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