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후긴 왕 가온 - [7]
딱딱한 대답, 여신께서는 걱정스레 물으시었다.
‘괜찮겠느냐? 알다시피 후긴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천국에 가지 못할 뿐, 조건 없이 지옥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을 얻어 다시 태어나는 것은 가능할 텐데.’
“또 후긴에 태어나면요? 그러니까, 또 고통받으면요? 제 탓에······”
여신께서는 잠시 말씀이 없으셨다.
가온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독촉하려던 그때, 그제야 여신께서 물으시었다.
‘그래, 이제 후긴을 용서할 생각이냐, 가온?’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닙니다. 제 어찌 그러겠습니까? 전 여전히 이 나라가 싫습니다. 이 나라가 저지른 죄는 용서될 수 없습니다. 그 죄를 저지른 장본인들이 다 죽고 없더라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가온은 우울하게 말했다.
“이 아이의 처지를 봤을 때 통쾌한 기분이 들지 않더군요. 그저 우울해질 뿐이었습니다.”
‘이해한다. 개인에 대한 분노와 집단에 대한 분노는 다른 법이니.’
“그 말씀이 맞습니다. 어느 나라가 끔찍하게 싫다 하더라도, 거기 사는 조그만 아이에게도 분노하긴 어려웠습니다. 그 아이가 당한 일에 동정하지 않거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도 어려웠고요.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여신께서만 용납하실 수 있다면 그 선언을 부디······”
‘물론, 네 여신은 용납할 수 있다.’
“여신께서도 이 나라에 분노하셨을 텐데요? 아마 지금도.”
‘그 추측이 옳으나 내 대전사가 원하다면, 얼마든지 옛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지. 그러길 원하느냐?’
“예. 그래주십시오.”
대전사의 요구에 여신께서 응하시었다.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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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로의 불이 춤춘다.
복잡한 춤이다. 흥겨워서 추는 것인지, 성나서 추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불꽃의 춤.
그 춤을 읽고 성녀는 여신께서 전하시는 뜻을 읽어낸다.
그리하여 놀라면서, 성녀는 여기 모인 사제들에게 고했다.
“여신의 말씀을 전한다.”
사제들이 무릎 꿇은 가운데, 성녀는 말을 이었다.
“교단이 대전사의 요청에 따라, 옛 저주가 정식으로 거두어졌다. 이제 후긴 공화국의 인간 또한 천국에 거부되지 않으며······”
화로의 여신께서는 언론의 자유를 신경 쓰실 만치 진보적인 신이시다.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라, 화로의 신전에는 늘 각지에서 모인 기자가 상주하고 있다.
그 기자들 모두, 방금 성녀의 발표가 특종임을 이해했다. 다른 누구보다 늦을세라 허겁지겁 기사를 써서 전했다.
모든 뉴스와 신문에, 심지어 SNS에도 방금 그 선언이 발표되었다.
그리하여 아스는 물론 지구의 사람들마저 그 소식을 알게 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요, 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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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각, 가온은 비로소 한 소녀의 운명을 알게 되었다.
“살았소? 정말?”
카샤드가 보낸 뱀파이어는 겸손하게도 고개 숙이며 말했다.
“제가 감히 누구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불사왕이 머나먼 옛날에 만들어낸 이 태초의 뱀파이어는 그 힘을 충분히 발휘한 모양이었다.
그 피를 받은 봐라니는 살아났으며, 그 죽음은 한없이 유예되었다.
“정말 수고했소. 감사를 보내오. 진심으로.”
대전사가 감사를 표하자 카샤드가 보낸 뱀파이어는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담담하게 대응했다.
“별말씀을.”
그리 짧게 대답하더니 그 뱀파이어는 사라졌다. 나머지 떨거지 뱀파이어들을 향해, 가온은 굳이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 애초에 웬 후긴 소녀가 뱀파이어가 된 사태는 저들의 탓이니.
그러나 굳이 화내거나 질책하지도 않았다.
감사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 가온은 저 뱀파이어들에게 화낼 자격이 없었다.
말없이 가온은 집에 돌아왔다.
전자난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방금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소녀가 죽다 살아난 마당이지만 순수하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기뻐해야 하는지 후회해야 하는지. 두 감정이 섞인 나머지 알기 어려웠다.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가온은 여신께서 들으시도록 한탄했다.
“살아날 줄 알았다면 괜히 선언을 거뒀군요. 이미 내린 결정은 번복하기도 어려울 텐데요.”
‘그래서 후회되느냐?’
“솔직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신께서는 웃으며 말씀하시었다.
‘후회하지 말라. 네 여신이 보기에, 내 대전사의 그 결정은 잘한 것이다 못해 숭고했으니. 마땅히 만민의 칭송을 받을 만하노라.’
여신께서 치하하시매 가온은 미심쩍다는 듯 중얼거렸다.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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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긴 백성의 거룩한 수호자시며, 이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혈통이시며, 여신의 대전사이신 가온 전하의 뜻에 따라, 우리 후긴 사람들이 천국에 가지 못하리란 엄벌은 거두어졌다! 오늘부터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다!」
언제나 저런 후긴의 뉴스, 어느 엘프에게 오직 찬사만을 바치는 그 뉴스에는 오늘 절절한 감정이 실려있다.
리포터는 발표를 마치자마자 울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꾸며낸 감정이 아니란 사실은 후긴의 시청자 모두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마찬가지 심정이었으니.
“그 계집애는 대체 뭐요? 누구 아는 사람 없나?”
한편 후긴의 뱀파이어들은 겨우 살아났다며 안도하면서도 불안하다. 그들이 후원을 바치는 자, 그 엘프의 속내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그 뱀파이어 소녀는 누구이며 재의 왕자는 왜 그리 반응했는가? 그리고 그 소녀의 존재로 말미암아, 재의 왕자는 이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후긴의 뱀파이어들은 모든 지혜를 짜내 의문의 답을 유추해보려 애쓴다. 알아내기 어렵겠지만, 반드시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 엘프의 결정에 여기 모인 모든 뱀파이어들의 운명이 걸렸으니.
그 엘프의 허락 없이, 뱀파이어들은 이 땅에 한시도 머물 수 없다.
「가온 전하께서 옛 결정을 거두셨으니, 이는 곧 숭고한 자비의 뜻······」
소드마스터에 관련된 내용이면 늘 그렇듯, 카르세의 뉴스 또한 찬양조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찬양 속에서도 떨떠름한 기색을 읽어낼 수 있다.
방송사 높으신 분들로서는 저 소드마스터의 결정에 찬사를 보내도 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햇을 것이다.
아마 정부에서 좋아하지 않을 텐데. 정확히는 대통령 폐하께서 싫어하실 것이다.
“대체 이게 뭔······”
그들의 추측이 옳다. 지금 참마황은 혼란스럽다.
대체 왜?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나?
참마황은 그 엘프와 그 나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안다. 그리고 참마황이 생각하기에, 둘 사이에 화해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참마황이 입술을 깨문 그때, 주변의 누군가가 숨을 삼켰다.
마스터의 불편한 심기를 느끼고는 움츠러든 모양이었다. 다들 겁 먹은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는 가운데, 그제야 참마황은 제 실수를 깨닫고는 어색하게 말했다.
“다들 난 신경 쓰지 말게. 내 미안하니.”
그렇듯 떨떠름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기뻐하는 이들도 있다.
드래곤 아타락시아는 뉴스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래야지.”
계속 뉴스를 보려니 방해꾼이 나타났다.
“엄마, 뉴스 재미없어······ 빨리 딴 거······”
기꺼이 아타락시아는 딸의 명령에 복종한다. 즉시 채널이 돌려지고, 웬 어린이용 프로그램이 조그만 여자아이의 시선을 잡아끈다.
펭귄과 북극곰, 공룡 따위가 어울려 즐겁게 노는 애니메이션. 어떻게 약해빠진 펭귄과 포식자 북극곰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느냐며 현실성을 따질 생각이 아타락시아에게는 없다.
모름지기 아이들의 세계란 저래야하는 법.
일찍이 도시와 마을들을 불태웠던 레드드래곤이 생각하기에도 그렇다.
그리고 드래곤 못지 않게 강력한, 어쩌면 어지간한 드래곤보다 강력한 고대 리치도 지금 이 상황에 만족을 느낀다.
「네가 구한 그 소녀가 예히나탈로 올 예정이던 아이였단 말이지?」
카샤드 서기장의 말에 그가 만들어낸 뱀파이어가 대답했다.
“예, 아버지. 그 소녀를 어지간히도 소중히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런 결정을 내릴 정도로······”
그리고 카샤드는 껄껄 웃는다.
정신파를 발하여, 머리가 아플 만치 강한 기쁨의 감정을 사방에 퍼뜨린다.
카샤드는 일찍이 왕족이었다. 고대왕국 데이몬의 태자.
부왕이 당최 늙어죽질 않았다. 이대로는 왕좌를 물려받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늙어죽을 것 같자, 카샤드는 천재적인 마법적 재능으로 수명연장 방법을 강구했으며 최초의 리치가 되었다.
아버지를 해치지 않고서 왕좌를 물려받기로 한 이 결정은 천상의 분노를 샀다. 결국 파문당해 왕좌를 물려받기는커녕 왕국에서 쫓겨났으며, 이후로 신의 대전사들의 추격을 피해 숨어다니는 와중에도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이 고대 리치의 숙원이 되었다.
그 숙원의 결과물, 이 나라에 대한 카샤드의 애착은 그저 소유욕이란 단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강렬한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카샤드는 자기 개인에 대한 칭송보다 자신의 나라를 칭찬하는 것을 더욱 즐겁게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 여신의 대전사가 보여준 결정은 그 어느 칭송보다 와닿으며 진실한 칭송이었다.
「내 나라에, 저주를 거둘 만치 귀히 여긴 아이를 보내려 했다고? 그거 너무······ 너무 멋지군」
이렇듯 대전사의 결정에 기뻐하기는 지구의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후긴과 마찬가지로 그 엘프의 옛 원수인 영국도, 프랑스도 이번 결정을 대단히 기껍게 받아들였다.
이 결정에 찬사를 보내기는 한국 또한 마찬가지다.
「진정한 대전사다운 결정이었습니다! 이 용서는 그야말로 역사에 기록될 만한······」
전화기 너머 엄근오의 말에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용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군. 자네 한국인들도 위안부고 강제징용이고 용서하라면 모욕으로 느낄 것 아닌가.”
「예? 예, 그렇겠지요. 실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거룩한 자비의 결정이군요? 깊이 사죄드리며, 진심으로 경의를 보냅니다!」
왜 저리 좋아하나? 가온은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었다.
‘옛 원한 중 하나를 용서한 줄로 아나보군. 대전사답게, 평화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정한 걸로 해석하는 모양이야.’
착각이다. 굳이 오해를 정정하지는 않는다.
한국 국회의원과의 통화를 그친 뒤, 가온은 이제 뭘 해야하나 생각했다.
평소 버릇대로 게임에 접속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어린애가 찔리는 동안 게임이나 하다가 부디 지옥에 가지 않았기를 기도해야 했던 지금은.
그래도 소식이 궁금하기는 했다. 그래서 스마트폰에 발신자 이름으로 이미리가 떠올랐을 때, 가온은 기꺼이 통화를 받았다.
「그 가온 아닌 가온 씨 전화 맞죠?」
어쩐지 전에 만났을 때보다 말투가 공손하다. 가온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물었다.
“어. 그래서 다들 잘 도망쳤니?”
「예, 병력 대부분이 모여있던 기지는 도시에서 몇 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니까요. 거기서는 가온 경 권능도 안 미쳐서 차가 움직였거든요. 가까스로 거기 장비를 실어 모두 퇴각했죠. 뭐, 그러고도 분위기가 침통하긴 한데······」
“아무튼 재산들 건졌다니 다행이네. 그러도록 나도 노력 좀 했지.”
「그래서 다들 칭송하기 바빠요. 지금 여기 가온뿐만 아니라 다른 가온 경한테도 똥구멍을 핥을 것들처럼 떠드네요. 가온들이 너무나 위대하냐고, 인터넷뿐만 아니라 뉴스에서도 칭찬 일색······」
“넌 그 분위기 맘에 안 들겠다? 저번에 가온 경이 적폐니 뭐니 했잖아.”
가온은 이미리가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쩐지 대답하기 어려운 듯, 이미리는 말을 흐렸다.
「뭐, 그랬죠······」
“오, 지금은 떨떠름한 눈치네. 왜, 요새 가온 경의 위대한 행적을 여럿 보니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
그리고 조금 뜸 들이더니, 이미리가 대답했다.
「아뇨」
“아, 가온은 여전히 적폐다 이거지. 왜?”
「후긴에 뱀파이어들을 들끓게 한 것부터가 가온 경이잖아요. 아닌가요?」
이미리로서는 날카로운 지적을 한 것이었다. 가온을 흠모하느니 어쩌느니 한 엘프가 인정하기 어려운 지적을.
그러나 의외로, 가온은 담담하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맞아. 대전사의 신분으로 승낙해선 안 됐던 뱀파이어들의 후원 제안을 일부러 받아들였지. 그로써 후긴의 그 어떤 공권력도 뱀파이어들을 건드릴 수 없게 되었고.”
후긴의 경찰이든, 군대든 마찬가지였다.
“게임에서 실컷 봤으니 알지? 가온 경이 군대 상대로 얼마나 센지.”
「아주 답없는 먼치킨이죠. 마치 현대 군을 상대하라고 신들이 빚어낸 것 같은······」
“그래서 후긴 정부는 그 한 명한테 항복했지. 재의 왕자가 자신의 후원자들을 얼마나 소중히 여길지는 몰라도, 감히 그한테 줄을 댄 뱀파이어들을 손댈 수는 없었어.”
가온은 계속해서 말했다.
“공권력이 못 건드리니 자연스레 뱀파이어들이 지배자가 되었지. 그 와중에 뱀파이어들은 가온 경이 자기들을 받아들인 저의를 파악했는지, 그냥 얌전히 돈만 버는 게 아니라 쓸데없을 정도로 가학적인 사업들을 벌여 후긴을 생지옥으로 만들었고.
욕할 만한 거 또 알려줄까? 오크를 받아들인 것도 후긴인들을 괴롭히기 위해서였어. 야만적인 오크들이 후긴인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리라 여겼거든. 뭐, 모기들이 이미 그네들 삶의 질을 너무 낮춰놔서 오크들이 더 괴롭게 만들기는 어려웠겠지만.”
「그건 몰랐는데······ 그런데 가온 경이 오크들의 후긴 입국을 허가했다고요? 아무런 공식 지위가 없을 텐데, 무슨 수로······」
“충분히 그럴 수 있었어. 후긴의 배후 지배자였으니까. 사실상 왕이었지. 왕좌를 걷어차고 지배하는 왕.”
이 자세한 설명과 인정에 이미리는 당황한 눈치였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걸 알면서 가온 경을 흠모하느니 어쩌느니 해요?」
“어.”
「왜요?」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다뇨? 일본이 온갖 짓을 저질렀지만, 그렇다고 한국인들이 일본에 찾아가서 일본인들 배를 칼로 푹푹 찌르면 안 되죠. 아무리 원한이 있어도 불특정 다수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아니, 해야했어.”
가온은 우울한 목소리로, 그러나 변명한다고 말하기엔 무덤덤하게 말했다.
“해야 했던 일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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