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후긴 왕 가온 - [6]
야만인들이 문명인들을 약탈할 수 없게 된 21세기, 그러기에는 둘 사이의 격차가 너무나도 벌어진 21세기에, 저 먼 오지에서 오크들은 부족 단위로 어울려 산다.
각 오크 부족은 일정 영역에서 문명인들이 버린 고철을 주울 권리, 식수를 뜰 권리 따위 사소한 권리를 놓고 끝없는 전쟁을 벌인다. 전쟁이 곧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여기는 데다 그 말고는 달리 할 일도 없기에.
그렇듯 주변의 모두가 적인 부족 사회에서 부족이란 가족 못지않은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개념인지라, 문명사회인 후긴에 와서도 오크들은 부족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간직했다.
그러니까 오크 카록스가 쓸모없을 만치 조그만 오크 요으를 툭하면 구박하면서도 곁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나름대로 부족원의 의무를 다한 것이었다.
그러니 요으 역시 부족원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카록스가 생각하기에는 그렇다.
그러니까, 어떻게 얻었는지 모를 돈을 부족원 모두와 공평하게 나눠야 했다. 어디서 돈을 얻었는지 부족원 모두에게 알려 주고 방법을 공유해야 했다.
그런데 고작 가진 일부만을 적선하듯 내주고는 이런 굴욕을 안겨주다니.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전생 신께 맹세했다.
맹세를 지키려면 병원에만 있어서는 안 되었다. 요으 그놈은 큰돈을 얻은 뒤로 툭하면 이사했다. 내버려 뒀다가는 행적을 놓칠 것 같았다.
그래서 아픈 몸을 끌고 복수에 나서려 했다. 하지만 움직이기도 힘든 와중에 어떻게?
고통마저 잊게 해줄 마약의 존재를 많이도 알고 있었다. 병석에서도 마약을 구하기는 쉬웠다. 후긴의 병원 아닌가.
약 기운에 의지해 미리 봐둔 요으의 집에 향했다.
“나, 와!”
손잡이를 돌렸더니 문이 잠겨있었다.
씨발, 좆같은. 자신이 문을 딸 줄 모른다는 사실을 약기운에 취한 나머지 잊고 있었다.
화가 나서 문을 마구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
“아빠야?”
약 기운에 정신이 흐리멍덩한 중에 판단하기로도 저건 요으의 목소리가 아닌데.
잘못 찾아왔나 싶던 와중에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하여 카록스와 마주친 창백한 여자애가 놀라 비명 질렀다.
“아빠 아니잖······ 요으! 요으!”
요으를 부르는데, 정확히 무슨 관계인지 몰라도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아무튼 완전한 남은 아니라 이거지.
시끄러운 그 입을 닥치게 하고자, 카록스는 가져온 칼을 여자애의 배에 마구 찔러넣었다.
그 와중에 들려온 탕, 하는 총성. 카록스가 보니 요으가 권총을 들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 멍청한 얼굴이라니.
“너······”
약쟁이를 멈추기엔 한 발로 부족했다. 요으가 든 권총에서 두 발이 더 발사되고서야 카록스는 쓰러졌다.
그리하여 요으는 죽어가는 두 명 앞에 서 있게 되었다.
“봐라니, 봐라니······”
벌벌 떨며 필사적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떠올리려 애썼다.
구급차? 뱀파이어를 위한 의사가 있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없다면······.
너무나도 격이 높은 나머지 웬만해서는 의지하지 않으려 했던 엘프를 불렀다. 제발 빨리 받기 바라며 전화를 연거푸 걸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그로부터 오 분이 지나, 전화를 세 번이나 걸어서야 가온은 이 현장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바로 텔레포트.
그와 동시에 가온은 생각했다.
‘게임에서 자캐 놀이나 즐길 때가 아니었어.’
그 탓에 죽게 되면 평생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부터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텔레포트하여 이동한 장소는 뱀파이어의 저택 앞이었다.
내부에 텔레포트하지 못하도록 마법적 유물들이 깔려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가온은 검을 뽑아 담과 저택 벽을 잘라가며 내부에 진입했다.
“감히 어디에······ 전하! 제가 무례를······”
가온을 알아본 뱀파이어들은 바로 엎드리려 했다.
가온은 그러게 내버려둘 여유가 없었다.
“피를 주입해라. 이 아이를 살려!”
가온의 외침에 뱀파이어들은 그 품에 안긴 소녀를 보았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태가 너무 안 좋습니다. 될지 안 될지 알 수가······”
“저번에 내 앞에서 눈 뽑는 퍼포먼스 벌인 놈, 지금은 멀쩡히 모기눈깔 복구하고서 잘 다닐 텐데?”
“눈과 주요장기는 다른지라······ 게다가 이 아이는 척 보기에도 피가 옅어서······”
햇볕도 비치지 않는데 공기에 노출된 것만으로 내부가 재로 변할 정도면 너무나도 약한 뱀파이어라고, 다른 뱀파이어들만큼의 재생력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설명하려다 말았다.
여기 찾아온 재의 왕자가 변명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채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 분노에 가득 찬 얼굴만 봐도 명백했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뱀파이어의 맹세에 가온이 윽박질렀다.
“그래야 할 거다. 그렇지 않으면······.”
마주칠 때마다 무표정하던 이 엘프의 얼굴에 이렇게 생생한 감정이 떠오른 것은 처음 보았다.
공포에 가득 찬 뱀파이어들은 허둥지둥 움직였다.
제 손바닥을 잘라 귀중한 피를 봐라니의 입에 흘려 넣기 시작했다. 지금보다 강력한 뱀파이어로 만들어 재생력을 강력하게 만들려는 조치다. 이미 죽어가는 와중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건 시도는 해보았다.
한편 가온이 뭔가 해주기는 불가능했다. 강력한 신성 주문도 지금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성한 힘으로 언데드 뱀파이어를 살릴 수는 없는 일이니.
‘제발, 여신이시여.’
대전사의 기도에 여신께서 응답하시었다.
‘일단 이 자리를 떠나거라. 내 대전사가 지켜보고 있으면 긴장으로 잘 될 일도 안 될 것 같으니.’
가온은 군말 없이 여신의 분부를 따랐다. 죽을지 살지, 계속 지켜보기도 괴로운 일이었으니.
가온은 저택 밖으로 나가 텔레포트했다.
다시 요으의 집으로.
거기에는 왜소만 오크가 멀거니 서 있었다. 쓰러진 거대한 오크의 앞에서 울고 있었다.
가온이 함께 슬퍼해 주지는 않았다. 다만 추궁하듯 물었다.
“이 오크가 쳐들어 와선 찌른 거 같은데, 병원에서 전신 골절로 깁스하고 있다 하지 않았나? 문은 또 왜 안 잠가둔 거냐? 특별히 마법까지 걸어 침입자를 막게 조치했는데!”
“저도, 잘······”
요으의 힘없는 대답에 가온은 모르면 다냐고 소리치려 했다.
그러려다 말고, 쓰러진 오크를 보았다.
여기 있는 진정한 원흉. 가온은 그 얼굴에 대고 윽박 질렀다.
“너, 뭐냐? 대체 왜 그런 거지?”
약기운은 저번에 얻어터진 공포마저 잊게 했다.
카록스는 웃었다.
“뭐, 병신아······”
“대답해라.”
“닥치고 있으면 뭐 어쩔 건데······ 죽일 거면, 죽이든가.”
죽어가면서도 카록스는 비웃고 있었다. 가온은 이 오크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짓밟아 으깨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죽음을 앞당겨주면 기뻐할 것이다.
가온은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전쟁이시여, 정녕 이자를 가호하실 거요? 유아 살해자를 천국에 들여보낼 건가!”
카록스는 또다시 웃으며 웅얼거렸다. 의식이 흐려져가는 와중이라 발음은 분명치 않고 소리도 작았지만, 가온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병신. 천국에서 보자······”
이 순간, 천상에서는 두 신의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중 한 분의 여신께서 방금 나눈 대화 내용을 들려주시었다.
가온은 들은 그대로를 이 거대한 오크에게 전했다.
“아니, 넌 천국에 가지 못한다.”
“뭐래, 새끼가······”
“여신께서 말씀하시는군. 전쟁 신이 널 버렸다고.”
“병신이, 네가 뭔데 신이랑 개인 연락 주고받냐······”
가온은 폴리모프 주문을 해제했다. 그리하여 드러난 회색 머리칼을 보고서 오크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눈을 크게 떴다.
이 회색 머리칼의 엘프를 몰라보는 후긴 사람은 없다. 아무리 무식한 오크라도 마찬가지다.
가온이 선언했다.
“여기는 후긴이며, 내게 정복된 땅이다. 이 땅에서 그 어떤 신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네 영혼은 내 소유다.”
“너······”
“정복자의 권리, 그리고 대전사로서 여신의 권위를 빌어 선언한다. 천국은 널 거부한다.”
죽어가던 오크의 얼굴에 그제야 공포가 떠올랐다.
카록스는 뭔가 더 변명하고픈 기색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기어이 마약으로 간신히 붙어있던 의식마저 끊겼다.
그리하여 잔뜩 일그러진 오크의 얼굴, 죗값을 치른 시체의 얼굴이 탄생했다.
그것을 보고서도 가온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살아있는 오크를 향해 소리쳤다.
“네가 대신 죽었어야지! 넌 천국에 갈 수 있었을 텐데, 그 애와 달리!”
요으는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울먹였다.
“정말 죄송······”
“애초에 최대한 빨리 이 땅을 떠나라 했다! 애 하나 설득 못 해서 며칠을 질질 끌다가······”
가온은 소리지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감고는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다. 남 탓할 수가 없지. 애초에 이 모든 것이 누구 탓인지 명백한데.”
“그래서, 봐라니는 어떻게······”
“나름 강력한 뱀파이어들에게 데려가 치료하도록 조치했어.”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가온은 뭔가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해보았다.
떠오른 방법을 바로 실천에 옮겼다. 이번에도 텔레포트. 조금 시간이 걸릴 만큼 먼 곳에, 연달아서 텔레포트했다.
그리하여 예히나탈 사회주의 연방의 리치들은 졸지에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온 귀빈을 맞이해야 했다.
「대체 무슨?」
카샤드 서기장마저 반가움에 앞서 당황을 드러내는 가운데, 가온은 빠르게 용무를 전했다.
“여기에 가장 강력한 뱀파이어가 있다고 들었소. 잠시 데려갈 수 있겠소?”
「가능은 합니다마는, 왜······」
“이유는 묻지 말고, 부탁하오.”
그리 말하며 가온이 허리를 숙이자 카샤드는 또다시 당황했다. 신의 대전사가, 언데드 리치 앞에서? 옛날 같으면 이것만으로 파문할 만한 일이었다.
덕분에 얼마나 절박한지 눈치챌 수 있었다. 카샤드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마십시오, 귀하신 분······ 아무튼 바로 데려오지요. 누구 부탁이라고 감히 거절하겠습니까?」
그리 말하더니 정신파를 발해 저 멀리 있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한 모양이었다. 이 자리에 바로 한 남자가 나타났는데, 역사책에도 실린 오래된 뱀파이어였다.
「저분을 따라가라. 분부를 따라」
카샤드가 말하기 무섭게, 가온은 여기 나타난 뱀파이어를 붙잡고 텔레포트했다.
다시 후긴의 뱀파이어 저택까지 이동했다.
“가온 전하······”
이 공포스러운 엘프가 다시 나타났단 사실에, 그 엘프가 웬 상위 뱀파이어를 데려왔단 사실에 뱀파이어들은 더욱 주눅 든 눈치였다.
그리하여 더욱 긴장하게 된 바 모두의 몸이 굳었지만, 상관없었다.
“뭘 하면 되겠습니까?”
방금 데려온 뱀파이어의 질문에 가온이 요구했다.
“저 아이에게 피를 주시오. 죽음에서 이겨낼 수 있게.”
“그러지요. 일단······ 비켜라.”
상위 뱀파이어의 명령은 마법적이며 절대적이다. 의식을 잃은 봐라니를 제외한 모든 뱀파이어들이 그 명령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물러선 가운데, 카샤드가 보낸 뱀파이어는 봐라니의 앞에 섰다.
그 상태를 보고 있자니 가온이 물었다.
“살릴 수 있을 것 같나?”
“말씀드리기 송구하게도, 잘 모르겠군요. 일단 해봐야······”
그 대화를 끝으로 가온은 뱀파이어들의 저택을 떠났다.
뱀파이어들의 소굴 못지 않게 어두운, 자기만의 요새에 처박혀 멀거니 섰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지만 여전히 맘이 불안했다.
“살 수 있을까요?”
가온의 질문에 여신께서도 힘없이 대답하시었다.
‘모른다. 네 여신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신도 그 아이의 운명을 알 수 없다. 뱀파이어 역병은 네가 방금 만나고 온 고대 리치가 창조해낸 것이다. 신들이 만든 게 아니야.’
“만약 그 애가 죽는다면······”
생각하기 기꺼운 일이 아니었지만, 가온은 최악의 상황을 전제로 물었다.
“천국에는요? 그 애만 예외로 쳐서 천국에만 보낼 수 있습니까?”
‘어렵다. 천상의 법은 어느 영혼을 지옥에 보내는 것보다 천국에 보내는 것에 더욱 엄격하다. 그에 관련하여 정해진 법과 규칙이 존재하며, 신이라도 그것을 어기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내 대전사도 알다시피, 후긴의 인간들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 ’
“그 애의 국적은 곧 예히나탈로 바뀔 것이었습니다!”
‘아직은 아니지. 그리고 설령 지금 이 순간 국적이 바뀌더라도,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죽어가던 그 아이가 후긴의 인간이 아니라 해석되기는 어렵다.’
그 순간 가온은 웬 정신 나간 생각마저 들었다.
그 애를 정 천국에 보내고 싶거든 바로 예히나탈로 옮기면 되나? 그러니까, 다른 땅에서 죽게 만들면 후긴 사람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지 않을까?
바로 봐라니가 있는 곳으로 순간이동하려다 그만두었다.
그 순간 떠오른 또 다른 생각.
그 생각은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보다 확실해 보였다.
조금 머뭇거리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가온은 여신께 여쭈었다.
“정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있다. 그러나 내 대전사가 떠올린 그 방법은 네 여신이 생각하는 그 방법이 맞느냐?’
여신께서 물으시매 가온이 요청을 드렸다.
“예, 아마······ 제가 여신님의 이름으로 선언했던 그 선언을 거둬주십시오.”
‘후긴 인간들의 천국 입성을 거부하는 그 선언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