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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84화 (84/135)

LV.? 후긴 왕 가온 - [5]

가온은 달리면서 생각했다.

‘나 여기 나타나지 않을 거라 하지 않았나? 왜 뜬금없이······’

황당함과 동시에 흥미를 느꼈다. 게임에 구현된 자신은 어떤 모습인가 하고.

그것을 보기 위해, 굳이 멀리 뛰어갈 필요가 없었다.

그 가온은 여기에도 나타났다. 아주 잠시. 환시인가 착각할 만큼.

‘와······’

허공에 전조없이 나타난 NPC 가온은 발 하나 움직이지 않고, 손목만 살짝 움직여 깔끔하게 남자 한 명의 목을 베고는 사라졌다. 사람이라기보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당연히 현상과 맞설 수는 없다. 총 한 발 쏠 수 없는 가운데, 저항하려는 사람은 없다. 다들 뒤돌아서서 도망치기 바쁘다.

‘여신이시여.’

가온의 기도에 여신께서 응답하시었다.

‘왜 부르느냐, 가온. 혹시 저 또 다른 모습이 좋지 않은 추억을 상기시킨 것이라면······’

‘저 왜 저렇게 멋있습니까? 말없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고요의 전사, 너무 멋있네요 진짜.’

여신께서 헛소리만 하는 대전사의 입을 꿰매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끼시는 가운데, 무전이 울렸다.

「튀어! 다들 튀어!」

다급하게. 무전 속 누군가는 모두에게 외쳤다.

「도시 밖으로! 최대한 짐 챙겨서 튀―」

그 말을 끝으로 무전이 끊겼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만했다. 그레이엘프 반신의 청각에 추적당해 죽었을 것이다.

뚜, 뚜 울리는 무전기를 바라보던 가온은 녹화기능을 켜다 말고 한숨쉬었다.

역시 맘 편히 즐길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들 이 멀리까지 비싼 장비를 들여서 원정을 왔지? 지금 다 전멸하면 가져온 장비값 다 날려서 거지 될 판이고.’

가온은 싸울 준비를 했다.

우선 오거 포션을 복용했다. 웬만한 소드마스터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물약.

초인적인 힘이 치솟지만 부족하다.

가온은 오거의 힘이 있다 해서 자신을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안다. 반신 아닌가. 그 초월적인 힘은 물리적 충격을 거의 온전히 흡수하는 검기 없이 대적할 수가 없다.

그리고 사실, 검기가 있다고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최근에 놀랍도록 이루어낸 실력 향상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가온은 여기 있는 가온보다 강하므로.

“비싼 것만 챙······”

뭔가 말하려다 말고, 한 유저가 또 죽었다. 그 등뒤에 나타난 또 다른 가온이 0.4초짜리 베기로 그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그 찰나의 순간, 가온은 NPC 가온이 입고 있는 검은 갑옷을 보았다.

갑옷의 붉은 테두리, 그 선명한 붉은 선은 불타오르는 화로의 문양을 하고 있다.

가온에게 눈에 익은 물건이다.

‘아다만티움 전신갑옷······’

머나먼 고대에 화로의 여신께서 대장장이 신에게 불을 빌려주시었다.

대장장이 신은 보답하기 위해 여신께 갑옷을 한 벌 선물했으니, 그 갑옷은 완전한 아다만티움으로 되어있었다.

그것은 제작자인 대장장이 신의 권능을 제외한 그 어떤 힘으로도 변형시킬 수 없는 금속이다. 뭐든 벨 수 있다 알려진 검기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천상의 대신격들조차 탐내는 귀물, 그 불멸의 갑옷은 또 다른 가온의 머리를 제외한 몸의 모든 곳을 가리고 있었다. 전신갑옷이지만 여신께서 투구만은 간직하신 탓이다.

그 사실에 아쉬움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제대로 된 약점이 아니니까.

다름아닌 소드마스터가 아다만티움 갑옷을 입고 있는 지금, 저 몸이 다치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소드마스터를 상대할 때도 그렇다.

두 칼잡이가 싸울 때, 둘 사이에 어지간한 실력 차이가 있더라도 한쪽에서 노릴 수 있는 부위가 단 하나라면 이기기 어렵다.

‘저 시절 내가 아무리 대인검술에 능숙하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소드마스터였지. 어디로 올지 확정된 공격을 막아내는 것쯤은 너무나도 쉽게 해낼 수 있었어. ’

저 갑옷만 손에 넣었다면, 가온은 자신을 세 번이나 연달아 쓰러뜨린 하고를 상대로도 승리를 점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냥 한쪽 팔로 방어하고 다른 팔로 공격만 해도 최소한 쉽게 지지는 않을 수준······’

그런 강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가온은 생각해보았다.

검기를 써야하나? 사람들 앞에서? 그런다고 이길 수도 없을 것 같은데?

차라리 뱀파이어들에게 돈을 뜯어내 위로금으로 주고 말지, 그럴 수는······.

이 와중에 한국인 게이머들은 일 초마다 두 세명씩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수가 죽어가고 있었다.

“가온 전하께서 오셨다! 모두 한국 새끼들 조져!”

밀리고 밀릴 뿐이었던 카르세 유저들이 반격에 나섰다. 다들 복수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망치는 한국인 게이머들을 쫓았다.

총화기가 봉인된 마당이라 다들 어줍잖은 날붙이를 들고 있었지만 도망치는 와중에는 그마저도 끔찍한 위협이었다.

“억······”

그리 수 명의 한국인 게이머가 초라한 날붙이에 찔려죽은 가운데, 열두 명이 더 고급스러운 칼날에 썰려 죽었다. 찬란한 재에 썰려죽었다.

이 와중에 가온은 뭘 해야할지 당최 결정내리기 어려웠다.

이 아비규환의 근원인 또 다른 자신을 쫓아야 하나? 아니면······.

고민하는 중에 등 뒤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우리 가온. 이렇게 보니 정말 무섭구나? 나와는 존재감이 다르네.”

그리 말하면서 소드마스터 나루는 양손에 든 칼에 힘을 주고 있었다. 싸우려는 걸까?

“이기실 것 같습니까?”

가온의 물음에 나루는 고개를 저었다.

“왜 레벨인가 더 올리라 했는지 알겠네. 원래 몸 가져와도 상대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지금 이 빈약한 몸뚱이론 어렵겠어.”

그리 말하면서도 나루는 전진했다. 세 발짝 걸었을 때, 그 양손에 들린 칼이 찬란하게 빛났다.

나루가 검기를 방출했다!

가온은 그래도 되겠느냐 물으려다 말았다. 뭐, 괜찮을 것이다. 혹시 이길 경우 바로 우승을 노릴 수 있는 지금이라면······.

양손에 들린 초승달이 어두운 지상에 달빛을 비추었다. 눈부실 만치 찬란한 달빛.

“어······”

한국인 게이머들을 쫓으려다 말고, 놀란 카르세 게이머들이 멈춰섰다. 그들은 감히 소드마스터 앞에서 움직여도 되는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도망치던 한국인 게이머도 또 다른 소드마스터의 출현에 놀라 발이 멈춘 가운데, 이 달빛에 주목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뿐이 아니었다.

그 신성한 달빛에 또 다른 가온이 반응했다.

NPC 가온이 저 멀리에 텔레포트해서 나타나더니, 여기 달빛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당장 나루는 인간으로 보인다. 그러니 인간 소드마스터의 출현에 위협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원수의 그것과 비슷한 달빛에 새삼 적의를 느껴서? 아니면 지성 없는 AI의 한계?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소드마스터가 검을 맞댔고, 어둠 속에 재와 달빛이 충돌했다.

그리하여 가온은 양손에 검기를 방출하는 위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말이지 검술 대결에서 놀라운 이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이기긴 어려울 것이다.

가온은 나루를 도와주려다 말았다.

당장 가온의 목적은 또 다른 자신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여기 온 자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도주를 돕는 것이었다.

“슬슬······”

새로이 나타난 소드마스터의 눈치를 살피다 말고, 카르세 유저들이 다시 추격을 시작했다.

가온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헛짓 말고 널린 템이나 주워! 그거나 주워도 한 재산 할 거다!”

“지랄······”

가온은 자신에게 다가온 카르세 게이머를 단칼에 목을 베어 죽였다.

그러면서 또 다른 자신과 나루의 대결을 보았다.

어쩌면 가장 강할지 모를 소드마스터에 맞서, 명백히 그보다 훨씬 검술이 부족한 또 다른 가온은 밀리지 않았다. 별로 놀랍지는 않게도.

마치 두 명인 듯한 나루의 연격을 상대로, NPC 가온은 단 한 자루의 재를 휘두르며 쉽게도 떨쳐냈다. 그러면서 반격.

‘나 왜 저렇게 세······’

NPC 가온은 오른손에 든 칼로는 나루의 공격을 막으면서, 왼손으로 손짓하여 마법을 쓰고 있다. 화염조종.

사방에서 모이고 모인 불꽃이 순식간에 거대한 파도를 이루었다. 불의 파도가 덮쳐오는 가운데, 여유롭게 칼질이나 할 상황이 아니라 판단한 나루는 도주에 나섰다.

그러나 기어이 불의 파도가 따라잡았다. 도망치던 나루를 집어삼켰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마 다음에 상대해야 한다면 불에 대한 저항 관련 마법장비들을 챙겨와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보스를 상대할 때는 그런 공략 준비가 필요한 법이니.

이제 또 다른 가온은 자유로워졌다. 내버려둘 수는 없다.

NPC 가온이 텔레포트하지 못하도록, 가온이 나섰다. 세 명을 더 쓰러뜨린 뒤 또 다른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거기 잘생긴 엘프, 거울이나 봐라!”

그리 덮칠 것처럼 달려들다가 멈췄다. 또 다른 가온의 앞에서, 가온은 슬그머니 뒷걸음질쳤다. 그러면서 주변에 마나를 퍼뜨렸다.

또 다른 자신이 텔레포트하지 못하도록. 그리 방해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 채, 가온은 뒤로 움직였다.

그것을 겁먹은 것으로 여긴 것일까?

“가온 전하! 저 한국놈도 죽여버립시오!”

카르세 게이머들이 독촉하는 가운데, NPC 가온은 서두르지 않았다.

뒷걸음질 치는 이쪽 가온을 향해, NPC 가온은 천천히 걸어서 다가왔다.

왜 저러는지 가온은 알 만했다. 사람들 앞에서 뛰는 것이 경망스럽다고 생각하니까. 그 버릇이 반영된 모양이다.

그러나 그 천천함이 게으름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정적인 요새와 같다. 쓰러뜨릴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

그리 시간을 끌던 와중이었다.

계속 걸어 추격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 판단한 것일까?

NPC 가온이 왼손을 휘저었다. 그 손짓에 따라 불이 움직였다.

나루를 덮쳤듯, 불의 파도가 가온을 덮쳐왔다. 모두의 시야를 뒤덮을 만치 거대한 불.

그리고 가온은 도망치지 않고, 불속으로 달려들었다.

땅을 박차면서 생각했다.

기회는 적이 자신을 자기보다 약하다고 판단한 한 번뿐.

‘여신이시여.’

성스러운 가호가 가온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불속을 뚫고 달리며, 가온은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무표정. 불길이 태우지 못한다는 것을 별로 당황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오른손에 쥔 재의 칼날로 공격해온다.

그에 맞서 가온은, 불속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리라 믿고, 검을 오른손으로 바꿔잡았다.

그리고 마주 찔렀다

불 속에서 재들이 흩날린다.

이 순간적인 기습에 또 다른 가온은 가까스로 방어해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온은 연속공격에 나섰다. 감아올리고, 반격하고······.

그러면서 느끼건대, 이쪽 실력이 훨씬 낫다는 것을 새삼 확인한다. 그러나 그뿐이다. 당장의 우위가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가온이 반격을 해온다. NPC 가온의 손에 들린 자동권총 한 자루.

“야, 똑똑하게 그런 짓을······”

허리춤에 홀스터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역시 가온은 알 수 있다. 투명화 주문으로 숨기고 있던 모양이다, 소드마스터 하고를 기습할 때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으니 분명하다.

이 기습이 워낙 효과가 좋아, 그때도 하고의 귀 한짝을 날리기는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효과가 좋다.

서로의 칼이 부딪치는 틈을 놓치지 않은 영거리 사격, 피할 틈은 없다.

따르르르륵, 하고. 탄창 하나가 순식간에 비었으며 온몸에 총상을 입은 가온은 쓰러졌다.

다음 순간, 불이 걷혔다. 당연스럽게도 승리한 재의 왕자를 향해, 여기 모여있던 카르세인들은 경의를 표했다. 단순히 NPC를 상대하는 것임에도, 무릎 꿇은 채 경건하게.

하기야 종교적인 광경이기는 했다.

거대하고 뜨거운 불이 상승기류를 일으켰다. 붉은 광채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열기를 머금은 어두운 밤하늘, 그 구름은 노을보다 선명한 붉은 빛으로 물들었다. 불꽃 같은 붉은 빛이 지상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불의 권세가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화로의 대전사시여, ······를······”

정확하게 들리지 않는 기도를 끝으로, 가온의 시야가 암전했다.

게임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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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기기를 나오며 가온은 한숨쉬었다.

도망친 한국인들은 재산을 꽤 건졌을까? 그렇기를 바란다.

게임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가볍게 웹서핑을 하고자 휴대전화를 켰다. 화면을 본 가온은 잠시 몸이 굳었다.

부재중 수신전화 세 통. 모두 요으에게 온 것이었다.

소드마스터 특유의 전투감각이 경고를 발했다.

불길함을 느낀 가온은 텔레포트했다. 요으의 집으로.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뭐야?”

권총을 든 요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봐라니가······”

봐라니가 뭘 어쨌느냐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가온은 바닥에 쓰러진 두 명을 보았다.

우선 쓰러져있는 한 명, 총을 맞았는지 헐떡거리고 있는 거대한 오크, 그 이름이 카록스인가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 쓰러져있는 조그만 소녀.

온몸의 피와 살이 무기질로 대체 된 언데드 뱀파이어답게, 배에 난 구멍에서는 피가 아니라 재를 흘러내렸다.

가온은 죽어가는 봐라니를 보고서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 작고 가벼운 몸을 안아든 채, 텔레포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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