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83화 (83/135)

LV.? 후긴 왕 가온 - [4]

가온은 조금 뜸 들인 끝에 대답했다.

「내 그러지」

그러고서 가온은 달렸다. 달리면서 생각했다.

‘정말 이러긴 싫었는데······.’

가온은 누구와 붙게 되든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노라 증언할 생각이다.

참마황이 게임에 소드마스터를 동원하리라 주장한 강주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실제로 그 말이 옳아서 더욱 미안한 일이지만 그 주장이 틀렸다고 말할 생각이다.

그러는 편이 저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가는 길에 시체가 널려있었다.

전장에 흔한 총상 입은 시체가 아니라 깔끔하게 목이 찔린 시체들. 화살에 단번에 목이 뚫려 사슴처럼 편히들 누워있었다.

그와 같은 사냥감들만으로 사냥꾼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모름지기 베테랑 사냥꾼은 사냥터에서 자기 위치를 노출하지 않는 법이니.

그래서 소드마스터 특유의 직감, 전투감각의 도움을 빌렸다. 민감해진 감각이 아주 자그마한 단서를 붙잡아서는 거의 예언에 가까운 추론를 이끌어냈다.

눈 감은 채, 가온은 계속 달렸다. 그러길 이십 분 지나, 가뜩이나 어두운 와중에 담벼락의 그림자에 숨어있던 여자 앞에서 멈추었다.

가온은 나오라고 손짓하며 입을 열었다.

“나루 양? 잠시 대화 좀 나누지요.”

그리고 나루는 마치 이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앞으로 나섰다.

“가온. 열의도 넘치지. 이제 한 판 붙을까?”

나루의 말에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련은 저번에 실컷 했으니 이번은 넘어가지요.”

“왜?”

“벌써 마스터의 증거를 보이셔야 되겠습니까? 여기서 물러나 주시면 더 좋을 텐데요. 적당히 겨루다가 밀리는 척 도망쳐주시면 좋겠는데······”

“시범이랑 똑같은 말을 하네.”

입이 움직이는 가운데 손이 놀지 않았다. 공기를 가르며 뻗어오는 나루의 초승달 칼날.

당연히도 가온은 미리 공격을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쉽게, 허리를 젖혀 피했다.

그 기습이 나루에게는 거절의 표시쯤 되었던 모양이다.

기습이 실패했다고 해서 어색하게 멈추지는 않았다. 이어지는 연격.

나루가 양손에 든 시미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검기는 안 쓰네.’

가온은 낭패 반, 안도 반을 느끼며 왼손에 든 롱소드를 휘둘러 맞섰다.

소드마스터들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서 칼이 연달아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그 불똥은 허공에 천천히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겨난 즉시 저 멀리 밀려나 나가떨어졌다.

세 자루 검이 일으키는 바람 탓이다.

그 공기의 움직임만으로도 양쪽 검사는 서로의 검이 어디로 뻗어 올지, 어디를 노릴지 확신할 수 있다.

서로 무슨 기술을 쓸지 미리 알게 되는 싸움. 마치 친선대련 같다.

흔히 검기가 공기를 갈라버려 진공을 일으키는 소드마스터들의 대결에서 흔한 현상은 아니다.

그래서 지금 둘의 대결은 누가 더 빠른지가 아니라, 순수한 수 싸움이 된다.

그리고 가온은 그 대결에서 한 발의 차로 밀린다.

아주 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계속 밀린다. 그렇듯 약간 밀리는 상황이 중첩되면 결과적으로는 크게 밀리게 된다.

밀리고 밀리면서, 가온은 저번에는 정말 봐주었음을 실감했다.

이미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듯 양손 모두에 검기를 쓰면 훨씬 유리해지련만. 그러지 않고 그저 평범한 쌍검술을 펼치고 있음에도 상대하기 어렵다. 끔찍하게 어렵다.

괴로움 속에서 발전이 일어난다. 가온은 쌍검이 펼치는 폭풍에 천천히 적응하다가, 불현듯 의미 있는 반격에 나섰다.

“어.”

흥겹게 몰아붙이던 나루는 뻗어나갔던 자신의 시미터를 치워내며 역으로 뻗어오는 칼을 보았다.

이런 식의 반격은 검의 달인들이라면 으레 할 수 있는 법이지만, 기하학적인 측면에서 이렇게 노린 듯이 절묘하기는 어렵다. 소드마스터라도 기꺼이 감탄을 보낼 만한 반격.

나루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 놀라움을 표시함으로써 기꺼이 찬사를 드러냈다.

이 찰나의 순간 가온은 생각했다. 먹혔나?

아니었다.

나루의 목에 닿을 것 같았던 칼, 아슬아슬하게 벨 수 있을 것 같았던 그 칼은 나루가 다른 손에 들었던 칼에 막혔다. 그대로 반격하며 나루가 웃었다.

“전보다 더 괜찮아졌는데?”

지도할 여유가 충분한 모양이다. 이것도 막을 수 있느냐는 듯, 나루는 더욱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템포가 빨라진다. 손의 움직임을 보조하기 위해, 칼질마다 발이 움직인다.

그리고 양손이 폭풍처럼 움직이기에 그에 맞춰 발 또한 거의 빠르게 움직인다. 거의 달리듯이.

그래서 두 검사는 뒤로 달리고, 앞으로 달리며 도시를 가로질렀다.

계속 뒷걸음질 치며 가온은 쓰게 웃었다.

‘펜싱 경기에서는 지나치게 뒤로 빠지면 패배인데. 그럼 난 이미 진 상황······’

그렇듯 가온은 밀려나고 밀려났다. 뒷걸음질을 반복하며 후퇴를 거듭했다.

목표한 지점으로.

그러니까, 아군이 매복한 곳으로.

어디로 유인하는지 알 수 있도록, 미리 자기 몸에 위치추적기를 달아두었다.

GPS.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리기도 전인 이 시대 배경 게임에는 없어야 할 물건이다.

그러나 뻔뻔하게도 있었으므로, 가온은 기꺼이 썼다. 충분히 도움이 돌 것이다.

모름지기 저격수들은 사격만 잘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로 위성사진을 주고받거나 다른 GPS 기기를 쓰는 법 따윌 익혀야 한다.

훈련이 부족한 이복동은 그럴 줄 몰랐지만, 다른 저격수들은 알고 있다. 아까부터 이동 방향을 파악하고는 각자의 위치에서 총을 겨누고들 있었다.

이렇듯 작전은 소드마스터 반지성을 노릴 때와 같았다. 그리고 그때보다 쉬울 것이었다.

이번 소드마스터는 적어도 반신은 아닐 테니까. 배에 구멍만 뚫어줘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스코프의 야간투시경을 통해 다가오는 두 명을 보았다. 이 보조장비 역시 거의 현대 장비에 준하는 성능이다.

이렇듯 2차 대전 배경 게임임에도 4판타지 온라인의 고증은 선택적이다.

소총이나 박격포, 로켓포 따위 대부분의 제식 병기들은 그 시절 그대로의 성능이다.

그러나 저격총, 일부 군용차량, 몇몇 거리측정기며 위치추적기 따위 몇몇 장비들은 거의 현대 무기에 준하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이현우는 이걸 전쟁 시뮬레이션을 위해서라고 추측했다.

‘주로 특수전에 쓰일 만한 물건들이 현대 스펙인데······ 아마 소드마스터들 때문이겠지. 어떤 무기와 상황이 소드마스터를 죽일 수 있는가 테스트하려면 옛날 무기 가지곤 안 되니까.’

이 와중에 대화는 없다. 숨죽인 채, 각 건물에 위치한 저격수들은 거대한 사냥감을 기다렸다.

이복동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이복동이 GPS 하나 볼 줄 모름에도 여기 끼워준 것은 순수한 사격 솜씨 덕이었다. 잘 맞히는 능력 덕분에.

짧은 시기, 양옆으로 움직이는 이동표적지를 몇만 개나 맞혔는지 모른다.

스코프에 빠르게 움직이는 적이 들어온 순간, 이복동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소리를 놓고 간 총알.

그 총알은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다.

‘빗나갔······’

헤이스트인지 뭔지 마법도 걸리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그 상태로도 소리보다 빠르게 움직였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는 없다. 이쪽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불안감을 느끼고 회피를 시도한 것이다. 저격당하리란 전조를 느끼고서.

하기야 진짜 소드마스터라면 저격 당할 뻔한 상황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닐 것이다. 총격당하기 좋은 대로에 나온 시점에서 이미 경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복동은 너무 실망하지 않으려 애쓴다.

검기는 보이지 않지만, 새삼 소드마스터가 맞다고 확신한다. 한두 발 납탄만으로 잡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여기 준비된 것은 납탄 한두 발뿐이 아니다.

“물러나시게요?”

가온의 물음에 나루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와중에 계속 싸우면서 사냥감이 되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야지 뭐. 뜻대로 됐네?”

“아쉽게도······”

나루는 씩 웃더니 건물 안에 들어갔다. 가온은 굳이 쫓지 않았다. 나루가 거기 숨도록 내버려두었다.

한편, 저 소드마스터가 저 콘크리트 뒤로 몸을 숨기기로 결정한 가운데, 소드마스터의 전투감각은 거기에 위험이 없다고 알렸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안에 지뢰나 매복은 없었다.

그런데도 덫이었다.

보였을 때부터 항공지원을 불러두었다. 정확히 4분 전에. 건물 하나를 통째로 부술 만한 폭탄을 탑재한 폭격기를 호출해두었다.

휙 하고, 저공으로 날아온 폭격기가 끔찍한 무언가를 토해냈다.

명중했다!

놀랍게도 이마저 죽이기는 부족했던 모양이다. 무너지는 건물에 깔리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여자를 몇몇 저격수들이 보았다.

저격수들은 이 순간을 대비하고 있었다.

성공하기만 하면 영광을 차지할 수 있으리란 기대와 긴장감 속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젬? 다 함께?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뭐야?”

불길한 추측을 증명하듯 현상이 이어진다.

엔진의 힘을 잃고, 폭격기가 추락한다.

쾅 하는 소리. 바닥에 내리꽂힌 폭격기가 두 동강 났다.

그러나 이후로 폭발은 없다. 기름이 가득 찬 기계가 크나큰 충격을 받은 것임에도 불꽃조차 치솟지 않는다.

일단 떨어져서 박살 난 뒤에는 그저 고요뿐이다.

저 멀리 있을 지휘부도 이 현상을 감지한 것 같다.

「수류탄 가진 사람 있음 다 멀리 던―」

그 무전을 끝으로는 침묵이 깔린다. 도시는 순식간에 고요해진다.

달이 뜬 밤에 걸맞게도, 총성 하나 울리지 않게 되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 알았다.

이현우가 중얼거렸다.

“그 가온이다······”

*******

“NPC 가온 경을 너무 갑작스럽게 움직이면 부자연스럽지 않을까요? 평소엔 거의 고정된 위치에 계셨는데요.”

“그 분을 너무 바삐 움직이게 만들면 감당이 안 되니까 그랬지. 오히려 이쪽이 말이 되지 않나?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법인데, 여기까지 적이 왔는데 가온 경께서 거기 남아계시는 게 더 이상하잖아.”

“예, 뭐. 말이 되는 상황이긴 한데······ 그래도 너무하지 않나 싶은······”

“됐어. 아무튼 반칙은 아니야.”

*******

도시의 2.4km 반경에 일어난 현상은 다음과 같았다.

교전 중, 열심히 납탄을 토해내던 총은 모조리 고물이 되었다. 노리쇠만 힘없이 움직여, 그저 딸깍거릴 뿐인 물건으로 전락했다.

과열된 기관총들의 총열은 순식간에 식었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식은 나머지, 그 총열이 약간 이상해질 정도였다.

계속해서 천둥을 울리던 박격포들은 침묵하다 못해 이미 피어오르고 있었던 연기마저 순식간에 꺼졌다.

그리고 무언가를 태워서 작동하는 기계들, 대표적으로 차량이 모조리 멈추고 말았다.

현대문명이 정지한 셈이었다.

중세가 찾아왔고, 현대의 군인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저항하려거든 총에 달아둔 대검으로 총검술이라도 펼쳐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그게 가능하다고 믿을 만치 순진한 사람은 여기 없었다. 지휘해야 할 길드장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왜 여기에······ 아직 입구일 뿐인데 왜 최종보스가 나타나?’

저 멀리, 아린 벌판의 중심을 지키고 있어야 할 가온이 어떻게 여기 나타났는가?

그 개연성을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다들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뉴스를 봤다. 그 엘프가 원한다면 어디든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았다.

그러니 말이 된다고 수긍할 수 있느냐면, 결코 아니었다.

길드장은 피가 흘러내리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거면 아예 가온의 세계정복 게임으로 하지 왜?’

불만을 계속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

길드장은 무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수류탄 가진 사람 있음 다 멀리 던―”

그 무전을 감지한 것일까?

무언가가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났는데, 길드장은 그게 소드마스터 가온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가온의 형상을 딱 1초 볼 수 있었다. 머리가 허공을 날았기 때문이다.

그 머리는 허공을 날며, 폭발을 보았다. 도망치려던 한 병사가 폭발하는 것을 보았다.

가슴에 달아둔 수류탄이 터졌다. 안전핀이 꽂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게임이라 잔인하지는 않지만 상반신이 무너지는 광경은 보기 충분히 그로테스크하다.

거대한 불꽃이 치솟는다. 도시에 화재가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 듯, 불꽃은 생겼다가 말고 순식간에 사라진다.

“이미리 양 가온 나오는 전선에서 여러 번 싸워봤댔지. 북한 애들 이런 경우엔 보통 어떻게 해요?”

강주석의 질문에 이미리가 힘없이 대답했다.

“튀어요.”

“맞서는 방법은 없어요?”

“있으면 진작 김일성이 엘프 됐지.”

여기 온 한국인 게이머들은 텔레포트하는 이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겠답시고 지휘관들을 여기저기 숨겨두는 조선인민군 만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휘부가 전멸하기까지는 불과 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후로는 차례차례 무전이 끊겨갔으며, 그 모든 일이 벌어지는 와중에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었다.

무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수류탄을 소중히 챙겨둔 게이머들, 그들은 이 엘프의 시선에 닿는 것만으로도 폭발함으로써 굳이 칼질할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 폭발로 일어난 더러운 불꽃들은 생기는 중에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초현실적인 장면의 연속.

당연히도, 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장본인으로서 가온은 지금 사태를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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