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후긴 왕 가온 - [1]
전 백두 길드장, 강주석은 길드장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도 게임 내 소식을 주기적으로 살폈다.
알게 된 바에 따르면, 요새 백두 길드와 다른 한국 길드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한국 길드끼리 분위기 개판이라고······’
얼마 전에 침공 이벤트가 끝났다.
결국 쳐들어왔던 언데드 군단은 물러났다고 했다. 덕분에 몇몇 길드는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고도.
결과적으로 보면 더없이 좋지만, 과정이 끔찍했다고 했다. 이벤트 내내 모든 길드들이 협조는커녕 다투기만 했으며, 현 백두 길드장 오상덕은 불화만을 일으켜 지도력을 의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역시 나 없이는 안 돼······’
강주석의 머릿속엔 기쁨이 생기려다 말았다.
곧바로 우울감이 그 머리를 가득 채웠다.
자책감. 답답함. 분노.
요새 강주석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이다.
자신은 국가의 부탁을 받았다. 부탁에 응해, 위기에 처한 한국을 구해야 했다.
그럴 기회를 놓쳤다. 그러니까 만약 한국이 초토화된다면, 그것은 자기 탓인 셈이다.
우울하게 컴퓨터를 끄던 그때였다.
따릉 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연 강주석은 찾아온 사람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구······”
문앞에 선 젊은 여자가 말했다.
“댁이 내로남불 찐따죠? 쫓겨난 길드장 강주석?”
“아니, 왜 초면부터······”
강주석이 어물거리는 가운데, 여자가 말했다.
“그래도 아직 인맥이 남아있긴 하죠? 게임 속 인맥이요. 모아봐요.”
“아, 혹시 인터넷 글 보고 날 도우려는······”
강주석은 반가움을 느꼈지만 잠시뿐이었다. 여자의 다음 말이 그 반가움을 송두리째 소멸시켰다.
“뭐 그딴 이유로 쫓겨난 등신이 제대로 사람 모을 수 있을 거 같진 않지만, 괜찮아요. 사람 모으는 거 내가 도울 수 있어요.”
강주석은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화가 치밀었다. 애써 반격에 나섰다.
“아가씨 말하는 싸가지를 보니 도움 하나도 안 될 거 같은데? 아가씨 밑에도 사람 모일 거 같진 않으니까.”
“댁보단 나을 듯? 아무튼 뭐, 내가 도우면 사람 모일걸요.”
“어떻게?”
“내가 좀 잘난 년이거든. 국가공인으로.”
국가공인이란 말에 강주석은 눈을 크게 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물었다.
“국가공인······ 혹시 공무를 맡은 분이십니까?”
여자는 속이 쓰리는 걸 느끼면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높으신 분이 댁 도우라고 보냈어요.”
“증거는?”
강주석의 물음에 이미리가 대답했다.
“TV 켜요. 재방송 기능 있죠?”
*******
“그래서 봐라니 이민신청도 접수 됐다고요으?”
요으의 물음에 가온이 대답했다.
“응. 입국하자마자 시민증이 발급될 거야.”
“그럼 이제······”
“이삿짐 꾸리자마자 예히나탈로 떠나면 돼.”
요으는 또 다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감사를 표하더니, 이 기쁜 소식을 봐라니에게 전하러 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봐라니는 이걸 기쁜 소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난 안 가!”
봐라니의 목소리, 밖에 있던 가온은 당황했다. 아직 이민가리란 말을 전하지 않았나?
“아니, 봐라니. 후긴보다 예히나탈이 훨씬 좋은 곳······”
요으의 말을 끊고, 봐라니가 외쳤다.
“안 간다니까! 딴 나라 가면 엄마랑 아빠가 우리 집 어떻게 찾아와?”
그 말에 어른 두 명이 동시에 굳었다.
부모를 보고 싶단 말을 하지 않아 그들에 대한 그리움은 딱히 없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모양이다.
봐라니는 이어서 외쳤다.
“요새 집 막 옮겨다니는 것도 이상해! 혹시 엄마아빠 못 오게 하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봐라니가 마구 씩씩거리는 통에 요으는 방에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쫓겨나듯 허둥지둥 나와서는 가온에게 면목이 없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부모 관련해 말을 안 했더니······”
“아니, 그건 어쩔 수 없다 치고. 이제 어쩌냐? 쟤 저러다 엄마랑 아빠 찾겠다고 가출하는 거 아니야?”
“그건······ 걱정 마세요으.”
“왜?”
“후긴에선 어떤 애도 경찰 호위 없인 학교 안 가요으. 이건 너무 당연한 상식이라서 따로 경고하거나 지켜볼 필요도 없는······.”
“아, 그래. 그래도 당분간은 게임에 접속하지 말고 애 지켜보고······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애 부모 찾아줘야겠네.”
그 말에 요으가 눈을 크게 떴다.
“예? 도망쳤는데 어떻게······”
“하루면 찾아내. 알아보니 후긴 인간을 받아주는 나라가 없더라. 그러니 국외로 튀지 못했을 테니 국내에 있을 거고, 그럼 전화 한 통이면 잡아 올 수 있다. 그 부모가 직접 딸내미 이민가도록 설득하게 시켜야겠어.”
가온의 말에 요으가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마세요으.”
“응?”
“그러실 필요 없어요으. 봐라니는 제가 설득해볼게요으. 교통사고로 죽었다 하든 어쩌든, 상황을 지어내서요으.”
“그것보단 그냥 부모한테 전화 시켜서 요으 널 따라가라 지시하게 만드는 게 애한테 덜 충격적일 거 같은데······”
“그랬다간 달라붙을지도 모르잖아요으? 제가 보기엔 그 인간말종들이은 아예 제 딸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게 가장 좋아요으. 아예 연을 끊는 게 장기적으로 보면 나을 거예요으.”
그 말에 가온은 생각했다.
‘애를 친부모한테 뺏길까봐 걱정하나? 봐라니가 다시 부모랑 살고 싶다고 조를까봐?’
추측이 사실인 것 같았다. 지금 요으의 눈에 느껴지는 것은 불안감이었다. 무언가를 뺏길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사람 특유의 감정.
가온은 그것을 애써 모른 체하며 말했다.
“그래도 빨리 떠나야해. 가뜩이나 네 오크 브라더들, 원한 갚으려고 이를 갈고들 있을 텐데.”
“괜찮아요으. 제가 몰래 병문안인 척 상황 보러 가봤는데 다 깁스하고 링거 맞으면서 누워있어요으. 나으려면 아직 꽤 걸릴 거예요으.”
“그래, 그럼. 최대한 빠르게 설득해.”
“최대한 빠르게면 얼마나······”
“사흘 줄게. 그 안에 설득하지 못하면 그냥 텔레포트로 부모 잡아올 거야. 알겠어? 네가 정말 봐라니를 원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후긴을 떠나게 해줘야 한단 말이야.”
요으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대화가 방 너머의 봐라니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어쨌건 누군가가 찾아온 것은 눈치챈 모양이었다.
방을 열고 나온 봐라니는 가온을 보고 환히 웃었다.
“잘생긴 오빠다! 마법 가르쳐주러 왔어?”
오랫동안 이웃집에 살았던 못생긴 오크는 수상하게 여기지만, 그 친구인 잘생긴 남자는 믿을 만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린애 특유의 순진함.
덕분에 가온은 봐라니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며, 은근슬쩍 설득을 시도할 수 있었다.
“오빠가 얼마 전에 가봤는데 말이야. 예히나탈이 진짜 좋았거든. 봐라니 같은 예쁜 뱀파이어들은 TV에 나오기도 하고······”
TV에 나올 수 있단 말에 봐라니는 잠시 흔들린 눈치였지만, 이내 마음을 굳게 먹고는 대답했다.
“그래도 여기 있어야 돼요.”
“왜? 엄마랑 아빠 만나야하니까?”
“응.”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떠난 걸지도 모르잖아.”
“아니야, 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라 약속했어?”
“응. 엄마가 나 거기 맡기면서 이렇게 말했단 말이에요. 좀 오래 기다리면 다시 찾으러 올 거라고. 그러니까 기다려야 돼요.”
이 와중에 네 엄마란 여자는 딸을 애완동물로 팔아치운 못된 년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결국 설득은 요으에게 맡긴 뒤, 가온은 그 집을 떠났다.
자기 집에 돌아와서는 생각했다.
‘우울해죽겠는데 관심 수급이나 해야지.’
조금 시간이 지나, 가온은 가상현실 기기에 들어섰다.
기대한 반응이 있었다.
다른 세상에서 한국인 게이머들이 가온을 반겼다.
“우리 구세주, 가온 경이 돌아왔다!”
*******
부활한 가온과 함께, 한국 길드장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이벤트의 뒷수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이벤트는 이쪽의 승리로 끝났다고 했다.
계속 밀리고 밀리기만 하던 중에 조금 갑작스러울 만치 이벤트 종료가 선언되더니, 그걸로 끝이었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피해가 그나마 적었던 것은 다 가온 경 덕분입니다! 다들, 가온 경 만세!”
“가온 경 만세!”
그 사이에 섞여, 가온은 기분 좋게 상석에 앉아 길드장들의 칭송을 무신경한 척 감상했다.
그렇듯 기분 좋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지루하고 불편한 시간이 이어졌다. 길드 연합 차원에서 이런저린 일처리를 해야했다.
보급 지원을 해준 길드에게 보상하는 일, 전사자가 다수 발생하여 길드원들이 비싼 장비를 잃은 길드에게 보상하는 일, 공훈에 따라 보상하는 일.
“야 이 씨발, 백병전 대비하겠답시고 비싼 총기 버려두고 싸구려 대검만 들고 온 새끼들이 뭔 보상을 받겠다고······”
“그래서 결국 24시간 접속 못해서 일을 못했는데 보상 안 주는 게 말이 되냐!”
이 과정에서 이런저런 욕설과 괴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일에 관련이 없는 가온은 괜히 왔나 싶어 후회하는 가운데, 어찌어찌 회의는 끝났다.
다들 얼굴을 붉힌 채 헤어지려던 와중이었다.
한 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잠깐만. 정말 다들 헤어질 겁니까?”
“안 헤어지면?”
“아직 우리가 모여 할 일이 남았습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이벤트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강제 참여해야 했습니다. 조선인민군도 후방에서 튀어나온 스켈레톤 대군의 급습을 당해야 했는데요······ 죄다 쓸려나갔다더군요. 그 결과 조선인민군은 아린 벌판에서 상당히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아린 벌판은 일종의 공백 지대가 되었는데요.”
“그래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우리는 아린 벌판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그 길드장의 말에 다른 길드장이 불만스레 말했다.
“당장 피해 복구도 못 했는데 또?”
“중요한 일입니다. 안 그러면 다 함께 망해요. 파악된 카르세 유저만 삼만 명입니다. 삼만 명. 게다가 말씀드렸다시피 조선인민군은 이번에 아린 벌판에서 죄다 죽어 쫓겨났고······ 죽은 병력이 부활해서 전선에 재합류하려면 며칠은 걸릴 텐데, 그동안 카르세 놈들이 아린 벌판을 장악해버리면 끝장입니다.”
“뭐가 끝장인데?”
“삼만 명의 카르세 군대면 정말 우승자를 탄생시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수십만 명인 조선인민군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한 전선에 투입되면 충분히 위협적인 수입니다. 어쩌면 정말 그들끼리 아린 벌판을 점령할 수도 있어요.”
그 말에 백두 길드장 오상덕이 반박에 나섰다.
“아린 벌판이면 거기 가온 있잖아요. 소마 가온.”
“예, 있겠죠.”
“요새 TV 안 봤어요? 그 양반이 최강이야. 그 양반만 나오면 프랑스고 리치 서기장이고 다 벌벌 떨어.”
“그래서요?”
“갈 필요 없다고요.”
“우리가 가면 다 썰릴 거고, 카르세 놈들이 가도 다 썰릴 거니까? 소드마스터 가온 경한테?”
왜 NPC한테까지 ‘경’을 붙이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온이 흐뭇해하는 가운데, 백두 길드장 오상덕은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 와중에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영토를 한 번 상실했던 길드의 장들도 여럿인 마당이라, 다들 모여서 뭔가 하는 데 관심들이 없었다.
길드장이 마저 설득에 나서려던 그때였다.
“아니, 가야해! 카르세 놈들 중엔 현실 소드마스터가 섞여있을 거니까!”
새로운 목소리.
여기 모인 길드장들은 회장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아, 또 강주석 저 새끼야!”
오상덕이 중얼거렸다.
“대사 적절하게 끼어드는 거 보니 끼어들 타이밍 재고 있었나봐?”
그렇듯 강주석이 모두의 분노 어린 주목을 한몸에 받던 와중이었다.
강주석의 뒤에서, 한 여자가 걸어나왔다. 그러고는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모두 조용히. 얘기 좀 들어주세요.”
가온이 이미리를 보고 당황한 그때, 오상덕이 물었다.
“아가씬 뉘쇼?”
“이미리요.”
“이름 물은 게 아니고, 뭐 하는 사람인데 길드장들 회의하는 곳에 불쑥 끼냐고.”
“공무원이요.”
“뭐?”
“소드 엑스퍼트요.”
“소드 엑스퍼트?”
이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가 공인 소드 엑스퍼트죠. 무려 7급이에요.”
그게 얼마나 높은 것인지는 몰라도, 오상덕은 조금 조심스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분이 여긴 왜?”
“다들 강주석 이 양반 말 듣도록 지원하러 왔어요.”
가온은 속으로 한숨쉬었다.
‘내로남불 길드장이랑 불특정 다수한테 부모욕 구사하는 미친년······ 비호감 동맹이네.’
그리 생각하며 한심하게 여기는 한편 안심했다. 둘의 조합은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저 둘이 무슨 설득을 하든 썩 먹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강주석 이 새끼가 지가 국가의 지령을 받았다느니 어쩌느니 한 거 같긴 한데······”
길드장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다들 이미리의 말을 듣는 눈치였다. 게임 내에서 아무런 지위가 없는 여자인데 어째서?
정말 소드 엑스퍼트란 공식 직위를 무시할 수 없어서?
가온이 보기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보다 못한 가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리를 향해 도발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아가씨, 소드 엑스퍼트는 맞나?”
이 자리에서 가온을 발견한 이미리는 당황한 눈치였다.
“댁······”
“실력 좀 보지.”
“나랑 붙겠다고? 저번엔 그리 거부하더니?”
그리 의문스러워 하면서도 이미리는 고수와 대결할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가온과 이미리가 서로를 향해 칼을 내민 가운데, 길드장들은 갑작스러운 결투에 당황하면서도 일단 상황을 지켜보았다.
“한 수를.”
이미리가 먼저 공격했다.
그리고 가온은 그 칼이 여기까지 오길 기다다가······ 반격에 나섰다. 특정한 동작으로.
접속하기 전, 가온은 데스나이트와 싸웠던 녹화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그 흉갑을 찔렀던 동작을 몇 번이고 따라해보았지만 그때 그 느낌을 재현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드마스터가 구사하는 동작답게 기술적으로는 완벽했으며, 소드 엑스퍼트 따위가 당해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결코 아니었다.
그 기술을 지금 발휘했다.
“어······”
이미리는 먼저 뻗어간 자기 칼을 슬며시 치우면서, 그 검신을 타고 미끄러져 오는 듯하다가 자기 목을 향해 찔러오는 칼을 보았다.
아무런 재반격의 여지 없이, 그걸로 끝이었다.
“와.”
똑바로 목을 뚫고 들어간 칼이 그 숨통을 순식간에 끊어놓았다. 꺼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미리는 뒤로 나자빠졌으며 잠시 후 그 시체가 사라졌다.
게임 오버. 가온은 입술을 깨물려다 말았다.
‘여신이시여. 오늘은 밤 새야겠습니다. 꿈자리 사나울 테니까······’
가온의 기도에 여신께서 응답해주시었다.
‘그래, 가온. 네 여신이 곁에 있어주마.’
고작 게임에서 죽인 것이다. 심지어 도시에서 죽인 것이니 한 시간 뒤에 부활할 것이다.
그리 속으로 맘을 가라앉히려 애써보아도 손이 살짝 떨렸다. 가온은 심란함을 애써 감춘 채, 사람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소드 엑스퍼트 아닌 거 같은데? 같은 소드 엑스퍼트한테 발리다니······”
“아니, 소드마스터한테 지는 거야 어쩔 수 없는 거 같은데.”
LV.? 후긴 왕 가온 - [2] (수정)
“나 소드마스터 아니라니까? 소드 엑스퍼트라고, 소드 엑스퍼트. 방금 죽은 아가씨가 자처한 그거.”
이 와중에 강주석은 가온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당신이 그럴 줄 몰랐다는 얼굴.
가온은 그 원망 섞인 시선을 외면하며 생각했다.
‘나중에 고마워할 거다. 헛짓거리 안 하게 도와줬다고.’
물론 강주석은 당장 고마워하지 않았다. 화가 치미는지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차마 지금까지 도와준 가온에게 화낼 엄두는 내지 못했다.
강주석이 가온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길드장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방금 죽은 아가씨, 국가에서 보낸 소드 엑스퍼트란 증거가 있어······ 동영상 봐!”
“뭔 동영상.”
“이번에 특집으로 나온 그거 있잖아! 소마 가온까지 나온 거!”
마침 여기 있는 길드장이 TV 공중파에 나온 그 방송을 본 모양이었다.
“소드 엑스퍼트 프로젝트?”
의외로 그 방송을 본 사람들이 꽤 있었다. 거기 출현한 엘프 때문이다.
강주석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래, 거기 이 아가씨가 나와! 쉽게 알아볼 수 있어. 커마 설정 하나도 안 건드렸는지 현실 모습이랑 지금 모습이랑 똑같으니까!”
“그러니까, 정부에서 소드 엑스퍼트를 보내 지원할 정도니······ 한국 유저들이 뭉쳐 참마황에 맞서는 게 한국을 구원하는 방법이 맞다?”
“그렇다니까!”
가온은 이 순간 차가운 반응이 돌아오길 바랐다. 그 여자가 소드 엑스퍼트든 무슨 상관이냐고,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데 정부 지시가 대수냐고 비웃음이 돌아오길 바랐다.
확실히 몇몇 길드장들은 그런 반응을 보였다. 당장 저번 싸움으로 길드가 큰 피해를 입어 다른 행동에 나설 여력이 없거나, 정부가 뭘 원하건 심드렁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듯 현실적인 사람들은 여기서 절반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그 반대였다.
“정말인지 방송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몇몇이 그리 말하더니, 로그아웃했다. 방송에 나왔던 그 여자의 얼굴이 방금 나타난 여자와 같은지 확인하겠다면서.
그리하여 가온은 침통해졌다.
잠시 후, 다시 로그인한 길드장들이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닌가.
“진짜던데. 완전 똑같더라.”
“커마만 그리 한 거 아냐?”
“아냐. 그리 세밀하게는 커마 못해.”
이 와중에 가온은 끼어들 수가 없었다.
한국의 운명이 걸렸다고 여겨지는 지금, 아스인이 끼어들어 반대주장을 펼쳤다가는 수상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입 다물고 있자니 길드장들은 계속 토론했고, 기어이 한 시간이 흘렀다.
결국, 기껏 죽였던 이미리가 다시 로그인해서는 돌아오고 말았다.
‘미친······’
가온이 욕을 듣겠구나 싶어 머리를 짚은 가운데, 이미리는 예상과 달리 행동했다.
회의장에 들어온 이미리는 가온을 노려보다 말고 시선을 회피했다.
이미리는 조심스럽게 가온을 스쳐 지나갔다.
가온이 저 여자가 왜 저러나 싶어 당황한 가운데, 이미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길드장들 앞에 섰다.
그녀는 정부 소속 소드 엑스퍼트로서, 여기 모인 게이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질문 있는 분?”
가온에게는 껄끄럽게도, 약 절반의 길드장들이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댔다.
핵심적인 질문과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정말 게임에서 참마황을 물리치는 게 한국을 위한 길입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적어도 정부는 그렇게 보고 있어요.”
몇몇 길드장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강주석은 자기가 옳았음이 증명된 이 상황에 자부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당당하게 서서 팔짱 낀 그 자세라니?.
그것이 현 백두 길드장, 오상덕에게는 영 고깝게 보인 모양이었다.
‘저 쓰레기가.’
전 길드장이 데려온 국가 요원인지 하는 여자도 영 곱게 보이지 않았다.
오상덕은 일부러 삐딱한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우리한테도 국가의 지령인가 뭔가 내리려고 온 거요?”
이미리는 나름대로 성실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예. 다만 공식적으로 내리는 지령은 아니에요. 아예 정부 차원에서 사람들을 움직였다는 게 확정되면 흉턴이 지랄할 게 뻔하니까, 비공식적으로 지시를 내리는 겁니다.”
이미리가 그리 대답하고서 공무원다운 대답이었다며 뿌듯해할 때였다.
공무원에게 당황스럽게도, 이번 민원인은 자세한 내용을 물고 늘어졌다.
“지시 따르면 뭐 해줄 건데요. 보수는 넉넉히 주나?”
오상덕의 물음에 이미리는 당황했다.
“아뇨, 그런 건 약속받지······”
“뭐야 그럼. 그냥 무보수로 원정 떠나라고? 우리 공익이나 군인 아니에요. 어디서 공짜로 부려먹으려 그래?”
“아니, 아저씨. 이건 한국의 미래가 달린 일이에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대가로 뭐 줄 거냐고.”
“국가가 내린 지시니까 아마 나중에······”
“국가 지시고 국가공인 소드 엑스퍼트고 뭐고 알 바야? 우리 민간인이거든? 공짜로 이래라저래라 할 생각하지 말고 보상부터 제시하라니까?”
정말이지 무례한 태도였다.
이 순간, 가온은 이미리가 최대한 끔찍한 욕설을 지껄이길 기대했다. 저번에 웬 프로게이머들을 엠생이니 뭐니 비하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러기를.
근사한 감투까지 쓴 지금, 저 여자는 한낱 게이머의 불손한 태도를 참지 못할 것이다.
‘가라, 이미리. 이 회의를 파탄내버리렴.’
그리고 이미리는 또다시 가온의 예상과 다르게 행동했다.
“죄송합니다. 당장은 무리고, 한번 문의해보겠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겸손한 그 태도에 가온은 충격을 받았다. 정말 전에 만난 그 여자와 같은 사람인가?
한편 그 겸손함이 오상덕에게는 썩 인상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무튼 당장은 아무것도 못 준다 이거지? 그럼 우린 빠질 겁니다. 보수 약속되면 그때 부르든가 말든가 해요. 당장 총알만 쏴도 돈이 드는데 그냥 움직이라니 말이야 똥이야?”
오상덕은 그리 쏘아붙이더니 회의장을 나섰다. 자길 따르는 몇몇 길드장들과 함께.
“저 개돼지 새끼들이······”
강주석이 욕설을 지껄이는 가운데, 놀랍게도 여기 모인 나머지 길드장들은 자리를 지켰다. 그들은 이미리의 지시에 협조하려는 모양새였다.
아무런 보상을 약속받지 않은 지금 어째서?
그 이유를 알 만했다. 최근에 한국에 일어난 몇 가지 충격적인 상황이 저 게이머들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젠장.’
이 애국적인 상황에 가온은 신음했다.
‘하여간 괜한 짓을 벌여서는······. 쓸데없이 윽박지르거나 대차원문 열어가며 도발하질 말았어야지. 그딴 식으로 위기감 키우지 않았으면 얘네도 얌전히 있었을 건데.’
이 지경에도 얌전히 있기는 힘들었다. 가온이 입을 열었다.
“한국 정부가 정말 그런 지령을 내렸다면, 그리 너희가 수고하면 한국이 구해질 수 있노라 여겼다면······ 잘못 판단한 거야.”
가온은 아스의 첩자로 취급받을 각오까지 했다. 그 판단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한 길드장이 말했다.
“그거야 뭐, 이번에 가보면 알 수 있겠죠.”
“기어이 아린 벌판에 가려고?”
“예. 만약 참마황을 물리치면 한국을 구할 수 있든 없든, 일단 거기에 가보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우승자가 나오면 안 되니까요. 그러지 못하게 저지해야죠.”
“왜?”
“우승자 나오는 순간, 게임 엔딩으로 치고 정말 서비스 종료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우리 다 실업자 되고요.”
“바로 서비스 종료될 거 같진 않은데······”
”설령 서비스 종료되지 않더라도 우승자가 나오는 건 안 좋습니다. 그 순간 영생을 바랐던 스폰서들은 다 관심 거두고 지원 끊을 텐데요. 그럼 우리 수입이 팍 줄어요.”
“그건······ 별로네.”
“그러니 막아야죠. 가온 경도 참여해주시면 좋겠는데······”
“나도?”
“예. 카르세 유저들 사이에 소드마스터가 있을지도 모른다니까요. 그에 맞설 초인이 이쪽에도 필요합니다. 게다가 한국인 유저들이 아린 벌판에 진출하려면 백골 부대의 영역을 지나쳐야 하는데요. 여기서 그쪽 길드장이랑 가장 친한 분은······”
“아, 그래. 교섭 역 겸 유일한 비대칭전력이다 이거지.”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가온은 고심 끝에 대답했다.
“도와는 주겠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어디까지나 당장 우승자 나오는 것만 저지할 수 있게 돕는 거야. 참마황을 막는다? 그런 건 못 도와줘. 도와줄 생각도 없고. 오케이?”
“오케이!”
잠시 후, 가온은 맨 먼저 ‘교섭 역’을 수행했다.
무전을 통해 저 멀리 있는 백골부대 길드장에게 연락했다.
영토를 통과시켜 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예 물론. 통과시키리라 약속드리죠」
“그래도 돼?”
「예, 됩니다」
류시범의 시원한 대답에 가온은 의문을 품었다. 왜 이러나?
‘류시범 이 자식, 이제 카르세 편 아니었나? 참마황 폐하 만세, 어쩌고 하면서 그쪽에 도움 되는 짓 할 거라 맹세했던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건 가온이 그 소식을 길드장들에게 전해주었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한국의 수호자, 가온 경 만세!”
“그 가온 아니니까 가온 씨라 부르라니까······.”
이 회의가 열린 지 하루 뒤, 각 길드에서 보낸 병력이 집결했다.
여기 모인 한국 게이머들을 보며 강주석이 한탄했다.
“부족해. 너무 부족해. 더 많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이미리가 쏘아붙였다.
“댁이 아랫도리만 안 놀렸음 만 명은 확실하게 더 있었을 거 같은데?”
이 와중에 부족하나마 모인 병력은 출정할 준비를 했다.
어쨌건 그 수가 만삼천 명은 넘었다. 삼만 명의 적들을 물리칠 수는 없어도 저지하며 시간을 벌 수는 있을 만한 병력이다.
병력을 태운 차량들이 출몰했다. 트럭과 장갑차의 행렬.
행렬은 백골부대의 영역에서 잠시 멈추었다.
“통과시켜 주겠다고 해놓고 혹시 기습해오는 거 아냐······”
누군가가 그리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백골부대는 약속을 지켰다.
길을 열어주며 류시범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이번에 피해가 커서 돕진 못하지만, 어쨌건 길은 당연히 열어줘야지. 돌아올 때도 열어줄 테니 안심하고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주석이 울부짖는 가운데, 가온은 오랜만에 몇몇 익숙한 얼굴과 마주했다.
“복동이! 오랜만! 너도 참여하게?”
“예, 저도 한국인이니까······”
이복동은 어색한 얼굴로 무리에 합류했다.
한편 익숙한 얼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온 씨? 오랜만입니다.”
반가이 웃으며 찾아온 게이머들을 가온은 알아보았다.
이현우, 그리고 솜씨 좋은 저격수를 포함한 랭커들. 스폰서의 후원을 받는 그들도 이번 일을 위해 고용된 모양이었다.
새로이 합류한 인원들과 함께, 행렬이 다시 움직였다.
아린 벌판으로.
이 전쟁이 시작된 장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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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백골부대도 한국인들이구만! 그래, 평소에 아무리 사이 나빠도 이럴 땐 서로 뭉쳐야지! 통과시켜줘서 정말 고마워요!”
협곡을 통과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나루가 물었다.
“쟤네 왜 보내주니?”
류시범은 조용히 대답했다.
“어차피 참마황 폐하를 위한 총공격은 한 달 뒤니까요. 나루님 레벨도 낮아서 당장엔 NPC 가온 경을 쓰러뜨릴 수 없다 하셨고. 그러니 어차피 지금 우승할 수 없다면······ 이참에 우리 길드원들한테 신뢰나 쌓는 게 좋겠죠.”
“신뢰? 아, 아직 한국을 위하는 척해야겠구나. 결정적인 순간에 네 한국인 부하들이 한국에 해로운 결정을 따르게 해야 하니까. 그때 길드장님이 뭔가 뜻이 있으셔서 그러는구나, 하고 따르게 만들려면·····.”
류시범은 애써 꿋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나루는 가타부타 뭐라 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용무를 챙겼다.
“뭐 아무튼 당분간 전투 없지? 북조선 애들도 크게 당해서 퇴거했으니까.”
“예, 아마.”
“그럼 난······ 따로 경험치 벌고 올 테니까 차 좀 태워줘.”
“어디서요?”
“아린 벌판. 쟤네 간다는 그곳.”
“한국인들 가는 곳에는 왜?”
“아까 보니 무리에 가온도 있더라고. 실력 좀 늘었을 텐데, 어디 붙어보게.”
류시범은 그 말에 만류하려 했다. 소드마스터 나루가 한국인들 앞에서 싸우겠다니?
그렇게 이쪽 소드마스터가 노출되는 것은 좋지 않다.
소드마스터씩이나 되는 인물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한국인 게이머들은 더 잘 뭉치게 될 것 아닌가. 참마황이 게임을 통해 영생을 얻으려 한다는 설이 현실성을 얻게 될 테니.
그러니 극구 말리려다 말고, 류시범은 이렇게 말했다.
“검기는 쓰시면 안 됩니다.”
“너 지금 어른한테 명령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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