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서기장 카샤드 - [2]
리치는 정신적으로 놀라움을 표했다.
「고민하지도 않으시는군요?」
“고민할 일이 아니니까. 그러니 저리 묶어두지 말고 풀어주면 좋겠군.”
리치는 정말 영국인을 용서할 것이냐 물으려다 말았다.
순순히 영국인의 포박을 풀어주며 정신적으로 윽박질렀다.
「감사를 표해라, 영국인」
비로소 자유로워진 영국인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그 비쩍 마른 몸, 주름살 가득한 얼굴이 드러났다.
늙고 마른 영국인은 맨 먼저 가온을 바라보더니,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가온 전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름이 뭔가.”
“조지 워커입니다.”
“리치가 되려는 이유는?”
가온의 질문에 영국인 마법사는 조지는 더듬더듬 설명에 나섰다.
“열일곱 살에 프로젝트 훈련생으로 뽑힌 이후······ 평생 훈련해왔습니다. 맨드레이크 엑기스만을 마셨습니다. 그것과 비스켓 말곤 뭔갈 입속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언제든 텔레포트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저체중을 유지해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괴로웠나?”
“물론 괴로웠지만, 불만을 가진 적은 없었습니다. 당시 모든 영국인이 생각하기에 가온 전하께서 런던을 후긴처럼 만들러 오실 터였으니까요. 영국을 지킬 수 있으면 고통쯤은 감내할 수 있었죠.”
「너, 감히!」
리치가 정신적으로 분노하는 가운데, 가온이 제지했다.
조지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프로젝트에 뽑힌 모두가 감내하진 못했습니다. 훈련 도중에 우울증을 앓다가 자살한 자들이 속출했습니다. 교관들은 자살자들을 애국심과 정신력이 부족하다며 비난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식증이 우울증을 동반한다더군요. 자살률도 끔찍하게 높아지고 말입니다. 신앙심이 깊었던 저만은 자살할 수가 없어 수십 년이나 버텼지만······”
“버텼지만?”
“전하께서는 복수하러 오지 않으셨지요. 반 세기가 지날 동안요.”
원망까지 느껴지는 말, 가온은 사과해야 하나 생각하다 입을 다물었다.
조지가 계속 말했다.
“그대로 나이를 먹으니 일흔이 넘었습니다. 이쯤 되니 마구스 프로젝트는 예산 낭비로 취급되더군요. 국가예산을 쏟아 자살자만 잔뜩 만들었다고요. 유일하게 살아있던 저마저 우울증 환자가 됐습니다. 시체 하나를 더 치우기 싫은지, 사 년 전에 은퇴를 시켰습니다······
그나마 연금은 넉넉히 지급됐습니다. 늦게나마 식도락이라도 즐겨 볼 겸, 청소년 시절 기억을 떠올려 뭔갈 먹어보려 했죠. 카레나 햄버거 같은 살찌고 맛있는 것을.”
“맛있었나?”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섭식장애가 위에 달라 붙었거든요. 독서라도 즐겨보려 했습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책을 봤어요. 훈련소 기숙사 책장에 잔뜩 꽂혀있던 애국적인 역사책 말고, 그냥 역사책을요······ 우리가 악역이더군요. 반면 전하께서는 비극의······”
“낯 뜨거운 말은 됐다. 그래서?”
“얼마 전에 가온 전하께서 위용을 보이시자, 그제야 국가에서 절 다시 불렀습니다. 드디어 훈련해온 보람이 생길 마당이었지만······ 반길 수가 없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모아온 애국심이 삼 년 동안 다 고갈됐거든요. 붙어있던 감시원을 뿌리치고, 리치가 되러 여기 찾아왔습니다.”
“이제 와서 싸우다 죽으라니, 듣고 싶지 않았나보군. 헛되이 인생을 낭비하다 늙어죽고 싶지도 않았겠고.”
“정확합니다······”
“안 됐군. 정말.”
“위로하실 필요는······”
“아니, 위로하고 싶네.”
가온이 말을 이었다.
“내 인간 친구들도 그런 식으로 천천히 죽었지. 다른 세계에 갇혀서, 긴 시간을 날려서는 죽었어. 그들을 그리 헛되이 죽게 만든 대마법사, 그자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내가 돌아왔을 땐 이미 늙어 죽은 뒤였으니.”
“저도 이제는 그 이야기를 압니다. 저야말로 위로를······”
“리치가 돼서라도 행복하면 좋겠군. 식도락은 즐길 수 없겠지만, 뭐 나름의 즐거움이 있겠지. 아닌가, 리치?”
리치는 정신적으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예, 물론. 인민에게 봉사하는 삶은 참으로 즐겁지요」
조지가 허리 숙여 절하는 가운데, 둘은 지하벙커를 나섰다.
문득 가온이 말했다.
“잠시 바람 좀 쐬고 싶군. 혼자 바깥 좀 관광하다 오고 싶은데, 괜찮겠나?”
리치는 귀빈용 리무진을 가져와 관광을 돕겠노라 말하려다 말았다. 이 엘프는 서기장에 비견되는 텔레포트의 명수 아닌가.
「원하시는 대로. 예히나탈을 눈에 담아주시기를······」
그리고 가온은 텔레포트했다. 그와 동시에 폴리모프하여 모습을 바꾸었다.
인간 남자의 모습으로 예히나탈의 시내를 걸었다.
그러면서 말한 대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단순한 관광 목적은 아니었다.
일종의 사전 조사였다. 정말 살 만한 곳인지 봐두기 위한.
그로부터 이십 분 뒤, 조사는 끝났다.
가온은 휴대전화를 들어 한 오크에게 연락했다.
「가온 경?」
“그래, 요으. 이민 신청 접수됐나?”
전화기 너머 요으가 말했다.
「반만요으. 제 신청은 접수 됐는데 바롸니가 아직 안 됐어요으. 이민 신청을 동시에 넣었는데, 다른 한쪽만 질질 끄는 걸 보면 반려될지도 모르겠는데요으······」
“그래? 뱀파이어라서 그런가, 아니면 후긴의 인간 출신이라 그런가······ 아무튼 형이 처리할 테니 슬슬 이사할 준비 해라.”
「예? 아, 거기 계시지요으······」
“응. 직접 봤더니, 살 만하더라.”
*******
명목상 목적마저 달성되었으므로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가온이 떠나겠노라 알리자, 서기장이 직접 배웅하러 나왔다.
카샤드는 정신적으로 웃으며 가온에게 말했다.
「관광을 조금 하셨다고요? 바라신 다면 제가 시중을 들었을 텐데요. 아무튼 보기 좋으셨다면 좋겠네요」
가온은 다시 들어도 저 겸손한 말투가 적응이 안 된다 생각하며 대답했다.
“보기 좋았소, 서기장. 아주 감명 깊었어. 백화점에는 상품이 즐비하고, 주유소엔 싼값에 기름을 주더군. 대낮인데도 오락시설에 사람이 많았고.”
「국민 대부분이 약간의 농사만 지으면 할 일은 끝이라. 나머지 시간은 즐기는 데 쓰지요」
“이런 나라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텐데. 솔직히 말해 리치들이 이런 나라를 유지하리라곤 믿지 않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물을 수 있겠소?”
그 질문에도 카샤드는 더없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저희 불사자들······ 리치와 뱀파이어들은 오랜 세월 동굴에 숨어 살았지요. 기나긴 삶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어낸 셈이에요. 그것도 힘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지지로 얻은 것이에요. 다들 그 사실에 고무되었지요」
“그래서 다들 사리사욕 없이 봉사하는 거요?”
「예. 그로써 존경을 얻어내기만 해도 정신적 충족이 되니까요. 가장 염려되는 것은 사후였는데, 얼마 전에 그 염려는 해결되었지만 그 사실을 공표할 수는 없었는데······ 직접 인민들 앞에서 모두 천국에 갈 수 있으리라 말씀해주시니다니요?」
가온은 차마 나중에 그 발언이 문제가 되면 모르고 발언했노라 말할 셈이었음을 밝힐 수 없었다. 그래서 무표정하게 입 다문 가운데, 카샤드가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인민들 모두가 위안을 얻을 겁니다.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전하」
“아까도 말했지만 그리 말을 낮추실 필요가 없는데.”
「아니요, 제가 어찌 감히······」
“솔직히 존경스럽소.”
그 말에 카샤드는 살짝 당황한 눈치였다.
「존경이요?」
“나도 예전엔 이런 나라를 만드는 게 숙원이었지. 이제는 아니지만. 대리만족이라도 할 수 있게 되어 기쁘오.”
「정말 고마우시게도, 그런 말씀을 해주시다니······」
카샤드는 정신적으로 황송해하면서 생각했다.
여신이 따로 명을 내린 건가? 이 강력한 국가지도자와 각별히 친밀해져서, 평화를 선택하게 포섭할 수 있도록?
그렇듯 환심을 사는 것이 의도였다면 성공했다.
저 말이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닌지 몰라 의심스러운 와중에도, 카샤드는 그 말이 기껍다.
다름아닌 여신의 대전사가 하는 치하 아닌가. 리치가 그런 치하를 얻기는 백 년 전만 해도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후긴 인간의 이민 신청은 거부하는 거요?”
「예, 물론. 그들은 고통받아야 하니까요. 저승에서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예외 하나를 둘 수 있겠소? 그러니까 후긴 출신의 뱀파이어 한 명의 이민을 원하는데······”
약간의 대화를 나눈 후, 카샤드는 기꺼이 승낙했다.
그리고는 그저 감격에 겨워 정신파를 토해냈다.
「그러면 또 영접하는 영광을 얻을 수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거룩한 분······」
부담스럽기까지 한 송별인사를 끝으로, 가온은 텔레포트했다.
후긴, 자신의 나라에.
시내 중심에 서서, 가온은 신들에게 버림받은 나라를 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들에게 버림받은 나라는 후긴만이 아니었다. 국민들이 천국에 갈 수 없도록 거부된 나라로는 방금 갔다온 언데드 나라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 결과, 가온의 고국은 이제 유일하게 신들에게 버림받은 나라가 되었다.
그 사실에 가온은 무슨 감정을 느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옥좌에 앉아 카샤드 서기장은 방금 나눈 대화를 곱씹었다. 대전사 가온은 한 소녀의 이민 허가를 부탁했다.
사실 서기장씩이나 되는 인물에게 고작 소녀 한 명의 이민을 부탁하는 것은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샤드는 그 사실에 화를 느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시 희열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것은 이 대전사가 정말로 이 언데드 나라를 좋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기쁨을 곱씹고 곱씹는 와중에 업무를 치러야 했다. 그 사실에 극심한 분노를 느낀 나머지, 카샤드의 정신파는 날카로웠다.
「리치가 되고 싶다고?」
그 말에 늙고 말라비틀어진 영국인이 대답했다.
“예. 제 이름은······”
「버러지 이름을 기억해서 뭐하나?」
조지가 머리를 조아렸다. 몸을 떠는 가운데, 카샤드는 그 영혼에서 불쾌감을 느끼고는 정신적으로 물었다.
「왜, 버러지라 불려 기분이 나쁜가? 틀린 말이 아니잖나. 스켈레톤이 더 쓸모 있을 것 같은데. 인민들에게 뭘 할 수 있나? 공산당선언은 완독했나?」
“이제부터라도······”
카샤드는 바로 말을 끊었다.
「나는 내 리치들이 좋네. 어려운 시기부터 같이 해왔으니. 지금까지 남아있는 리치들은 기독교 신들이 꼬실 때조차 내 곁에 남아있던 자들이지. 믿을 수 있어. 함께 영광을 누린다는 사실이 기꺼운데······ 자네는 나중에 찾아와서는 결실만을 따먹겠다고?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른 영국놈이? 안 되지. 절대 안 돼」
“그렇다면 어떻게······”
「기독교도겠지, 응? 개신교도인가?」
“카톨릭 교도입니다.”
「그거 잘됐군. 개신교도였다면 개종하고 세례를 받게 해야 했을 텐데,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 말에 조지는 몸을 떨었다. 아스인들이 누군가가 기독교도임을 확인하고서 기뻐한다면 그 이유는 그를 괴롭게 할 수 있어서일 뿐이다.
괴로워질 각오를 한 가운데, 카샤드가 말했다.
「마침 쓸모를 보일 일이 있어. 신뢰도 보일 수 있는 일이 말일세」
“어떤······”
「얼마 전에 화로의 교단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
“웬 리치가 마법적 테러를 벌이려다 실패한 일 말입니까?
「내 얼마나 죄송스럽던지. 여기 오신 대전사께서 그 사건을 언급하지는 않으시어 서로 불편하지는 안았지만······ 속으로 의심하시는 게 아닌가 걱정되더라고. 이 서기장이 시킨 일이 아니었는가 하고 말이야. 내 보기엔 분명 예수쟁이 해골 놈들이 그런 것 같은데」
저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분간하기는 어려웠다. 조지가 계속 듣는 가운데, 카샤드만 계속 말했다.
「아니라는 걸 증명하긴 어려울 거야. 신뢰란 게 그렇네. 면식도 없는 누군가를 믿긴 어려워.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그러니 내 결백을 믿게 할 순 없겠지만, 기분 좋게 해드릴 순 있겠지. 원한을 대신 갚아줄 수는 있겠단 말이야」
“기독교 사원에 테러를 벌이실 거란 말씀이시군요. 그것도 단순한 시골 교회가 아니라······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화로의 여신께서는 평화를 바라십니다. 평화를 깨는 행위를 하시는 건 그분을 즐겁게 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러실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어. 다른 신들은 즐거워하실 테니 」
평화를 노래하는 교단과 유독 가까워질 듯 보이면 다른 주전파 신들에게 밉보일까 걱정된 모양이다.
천상에 눈치가 보이니 다른 신들에게도 잘 보이려 하고 있음을, 평화에 관심이 없음을 극적인 방식으로 보이기로 맘먹었음을 깨닫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화로 여신께서도 묵인하실 거다. 그 대전사께서 기뻐하실 테니. 네 고국과 함께,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지? 그분께서 내게 호의를 보였으니, 나도 호의를 보여야겠어」
조지는 죽고 싶은 기분을 느끼며 겨우 물었다.
“어딜 테러하면 되겠습니까?”
「얼마 전에 성녀의 옥체를 상할 뻔했으니, 같은 급으로 갚아줘야겠지」
“바티칸을?”
카샤드는 정신적으로 웃었다.
「악을 갚겠다 말하고 여호와에게 뒤돌아서게. 그가 자넬 버리게 해」
조지는 카샤드를 노려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고대 리치의 해골에서는 새파란 안광이 빛난다. 영혼을 빨아들이는 눈, 그 눈을 늙은 마법사는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렵다.
영혼의 강함, 그러니까 마력 총량만 따지면 비슷할 텐데 어째서? 기운이 모자란 탓인가, 아니면······.
“하지만······ 바티칸의 방비는 완벽합니다. 텔레포트와 몇 가지 공격 주문을 안다고 해서 뚫기는 어렵습니다. 저 혼자서는 지나치게 어려울 겁니다.”
「당연히 어려워야지. 위험한 일이어야 할 테고. 그래야 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런 일을 혼자서가 하지 않으면 누가? 내가 도와야겠나? 아니면 인민들을 위해 일하느라 바쁜 내 리치들이?」
강력한 정신은 체력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말라빠진 우울증 환자는 이 고대 리치를 이겨낼 정신력이 없었다.
결국 조지는 굴복했다.
“쓸모를 보이지 못한 버러지 혼자서 그래야겠지요.”
「그래, 그럼······ 쓸모를 보여라, 버러지야. 가서 네 신에게 작별을 고하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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