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서기장 카샤드 - [1]
당신이 예히나탈 국민이라면 편의점에서 알바하다 진상들한테 시달리거나 공장에 나가 몸이 상할 이유가 없다. 당신은 한국 돈으로 월 팔십만 원의 기초연금을 받는다.
당신이 해야했을 괴로운 일들은 수십 년 경력의 무보수 노동자들인 스켈레톤들의 몫이다. 이 뼈다귀 노동자들은 얼마나 저렴하면서도 효율적인지, 국제무역에서 아무리 관세를 먹여도 중국제보다 싸고 질 좋은 공산품들을 지구의 모든 마트에 꽉꽉 채워넣을 정도다.
당신이 예히나탈 국민이라면 내 집 마련의 꿈은 시민증 발급과 동시에 달성된다. 당이 넉넉한 토지를 줄 것이며, 당신은 그 땅에 소규모 농업을 꾸리면서 집을 한 채 올릴 수 있다.
이때 당신은 무보수로 벽돌을 나르는 스켈레톤들을 구경하면 된다.
당신이 예히나탈 국민이고, 소규모 농업보다 세련돼보이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면 대학에 등록하면 된다.
돈이 없다거나 학교에 가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며 자책할 필요는 없다. 예히나탈의 모든 대학엔 무료로 재학 중인 나이든 학생들이 이미 넘친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예히나탈은 어지간한 지구의 선진국을 능가하는 지상락원 취급이다.
그러나 예히나탈에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으니, 바로 영적인 위안이다.
언데드와 빨갱이. 천상이 싫어하는 두 조건을 만족하는 예히나탈 국민이라면 천국행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단점 탓에 수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예히나탈에는 이민 신청이 많지 않으며, 출산률도 놀라울 만치 적다. 자식에게 지옥 갈 운명을 선사하고픈 부모는 없으니.
지구산 종교들도 구원은 되지 못했다. 아스 신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카샤드 서기장은 기독교의 예히나탈 진출을 극구 거부했으므로.
여전히 예히나탈 국민들은 영적인 구원에 목말랐다.
예히나탈에 시골 사제 하나가 입국하면 가히 교황 대접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와중에 고위 성직자 하나가 예히나탈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것도 단순한 주교 수준이 아니었다.
신의 직속 전사, 모든 교단에서 교황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간주되는 대전사가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도 가장 거대하고 유명한 화로 교단의 대전사가.
그러니까 대전사 가온이 차원문 터미널 밖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거기 모여있던 수십만 명의 환성은 조금도 연출된 결과가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구원을!” “당신을 환영합니다!” “화로 여신님 만세! 그 대전사 가온 전하 만세!”
온갖 사람들의 열렬한 외침 속에서, 머릿속에 직접 전해지는 정신파는 똑똑히 울렸다.
「어서 오십시오, 귀하신 전하! 이 미천한 해골이 감히 위대한 여신의 대전사를 뵙나이다!」
서기장 카샤드가 직접 이 귀빈을 맞이하러 나와있었다. 단순히 말뿐만 아니라 뼈로 이루어진 허리를 숙여 극진한 예를 표했다.
대전사 가온이 입을 열었다.
“말씀을 낮추시오, 서기장. 마찬가지로 전 왕족이 아니신가?”
「예, 그렇지요. 하여간 이 고마우신 말씀인지······ 하여간 정말로 인자하신 분······」
카샤드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을 낮추지 않았는데, 이 서기장의 사회적 위치와 강력함이 결코 이 소드마스터보다 낮지 않음을 고려하면 어색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지금 이 만남을 보는 예히나탈의 모든 리치와 국민들은 이 서기장을 부러워하고 있었기에.
언데드 리치가, 여신의 대전사와 직접 말을 섞을 뿐만 아니라 직접 얼굴을 마주하다니? 이 얼마나 얻기 어려운 은총이란 말인가.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웬 노인은 자기도 그러고 싶다는 충동을 참지 못했다.
“어, 어!”
무리의 대열에서 노인이 뛰쳐나왔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군중을 막고 있던 군인들도 지금 이 대전사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노인의 돌발행동을 바로 막지 못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막겠······」
한 리치가 말했지만,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으니 내버려두지.”
리치가 놀란 가운데, 결국 노인은 가온의 앞에 당도했다.
노인은 바짝 엎드린 채 애원했다.
“위대한 대전사시여. 제가 감히 당신의 손을 만져봐도······”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여기 모인 모두가 이 대전사의 옷깃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와중이었다. 종교적 구원을 얻기 위해서.
모두의 원한과 질투 어린 눈총에도 불구하고, 결국 노인은 가온의 손을 만지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목적을 달성한 뒤, 노인은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희열에 가득 차 물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전 정화된 거지요? 그러니까 천국에······”
노인의 기대와 달리, 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대전사를 만진다고 천국에 가진 못하지.”
“그러면······”
“기도하게. 화로의 여신께.”
“그러면······ 그러면 천국에 갈 수······”
그 질문에 대전사 가온은 무심한 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있지 않겠나.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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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락시아는 한국어를 할 줄 안다.
의외로 많은 아스인들이 그렇다. 지구의 발전된 학문을 공부하고자 유학을 떠난다면 한국이 가장 좋은 선택인 까닭이다.
대부분의 지구 선진국은 천상의 분노를 산 까닭에 감히 발 디뎠다간 신들의 분노를 살까봐 껄끄럽지만, 한국은 선진국인데도 그렇지 않으므로.
지금 아타락시아가 보는 것 또한 한국의 뉴스였다.
「또 다시 가온 경의 행보가 주목받고 있습니다. 가온 경과 카샤드 서기장이 접촉하고 있습니다 (······) 아시다시피 카샤드 서기장은 대표적인 주전파 인사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
······그러니 여쭙자면, 이 동에 번쩍 선에 번쩍하는 칼 든 수소폭탄은 기어이 전쟁을 대비하려는 걸까요? 일인군단 초인으로서, 반송장 군단을 거느린 이 서기장과 사이를 돈독히 하려는 걸까요?」
「글쎄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알 수 없는 일이요?」
「예. 대체 화로 여신님의 대전사로서 평화를 원하는지, 전 왕족으로서 전쟁을 원하는지 알 수 없는 이 엘프입니다. 이번 행보 또한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어쩌면 이 역시 대전사로서의 행보일 수 있지요」
「어째섭니까?」
「생각해보세요. 카샤드 서기장이 전쟁하려는 건 딱히 지구에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신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부분만 충족된다면 카샤드는 당장 공장에 보내기도 모자란 스켈레톤 노동자들에게 소총을 들려줄 이유가 없게 되거든요.
어쩌면 카샤드가 내심 바라는 일은 그걸지도 모릅니다. 전쟁이 이루어지려다 마는 일. 아시다시피 카샤드가 주전파를 넘어 직접 병력을 제공하는 잠재적 적국 수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경제제재를 하지 않는 것도 혹시 모를 그 가능성을 기대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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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말을 잘 받아주는구나, 가온? 흡혈귀들을 혐오하기에 언데드들이라면 모조리 질색하는 줄 알았건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굴어줄 줄은 네 여신도 몰랐느니라.’
여신께서 기뻐하시는 가운데, 가운이 대답했다.
‘좋아하진 않는데, 뭐······ 후긴 놈들보단 낫지요. 그리고 직접 보니 생각보다 괜찮은 친구들인 것도 같고요.’
‘괜찮은 친구들임을 한번 보고서 어찌 아느냐?’
‘그거야 뭐······ 소드마스터의 직감인 걸로······’
그리 호의적으로 반응할 만큼, 가온은 지금 기분이 좋다.
놀라운 청력 덕에 군중의 외침 하나하나를 전부 구분해낼 수 있었다. 그 모두를 귀에 새기고는 다시 되새김질할 수 있었다.
덕분에 가온은 언데드 나라에 와야한다는 말에 떨떠름했던 것도 잊고, 제법 즐거워진 기분으로 여신께 말씀을 올렸다.
‘아무튼 색다른 체험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종교계의 거물이 된 거 같더군요? 제법 괜찮은 기분이었지요.’
‘아니, 그럼 여신의 대전사가 종교계의 거물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지금껏 대전사가 무슨 자리인 줄 알았느냐?’
‘집에서 전자난로 지키는 역할인 줄······’
‘아니다. 절대 아니다, 대전사!’
여신께서는 기겁하시면서도 기꺼운 듯하시었다.
대전사를 여기 보낸 목적이 달성된 까닭이다. 이 강력한 언데드 나라에 은근한 포섭의 제스처를 보낸다는 목적이.
‘아무튼 제가 앞으로 할 일은 그거지요? 저 빨갱이들한테 직접 천국에 들여보내줄 수 있다 공언하지는 않으면서, 들여보내줄 것처럼 말하기. 전 세상 일에 관심이 없는 설정이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해보았는데, 괜찮았는지······’
‘아주 괜찮았노라, 대전사! 차마 성녀에게 시키진 못할 일이었느니라.’
‘교단 지도자의 오점이 될까봐요?’
‘아니. 아시다시피 네 여신은 중도좌파가 아니더냐? 여기 언데드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기 어렵노라. 이 여신이 드디어 극단적인 좌성향을 드러냈다며 비난받을 수 있었으니.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방문할 만한 이유가 있는 내 대전사라면 교단을 비난하기 어렵겠지.’
물론 평화를 원하는 화로 교단이 저 언데드들과 친해지는 것은 장차 참여하게 될지 모를 전쟁 수행에 해로운 일이었다. 몇몇 국가에 대한 복수와 멀어지는 일.
그러나 이번 여신님의 요청에, 가온은 차마 거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순한 신앙심의 발로만은 아니었다.
아직 가온은 자신이 정확히 뭘 해야할지 정확하게 결정하지 못했다. 그 탓에 그 행보는 계속해서 뒤죽박죽이었다.
한편 기분이 좋기는 언데드 리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스 교단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언제나 지성 있는 언데드들의 숙원이었으므로.
가온을 시중하기 위해 온 리치는 감격에 벅차 정신파를 전했다.
「훌륭합니다. 아주 훌륭합니다!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여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가온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여신님의 지엄한 명을 따를 뿐이다. 그래서, 이제 더 할 일이 남았나?”
「아니요! 더 뭔가 해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방금 그리 발언해주신 것만으로도 저희 국민들은 엄청난 희망을 얻을 겁니다! 이제, 명목상으로 전하를 초청드린 목적을 바로······」
가온이 교단의 대전사로서 방문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개인으로서 방문한 것처럼 꾸미기 위해, 양쪽에서 따로 설정해둔 방문 목적이 있었다.
“이동을 해야하나? 텔레포트하면 될 텐데.”
「죄송스럽게도, 텔레포트가 불가능한 위치에 있어서」
잠시 후, 가온은 리치가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엄중한 지하벙커, 그 중심에 갇힌 웬 남자를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흉악한 연쇄살인마라도 되나?”
남자는 늙은 백인이었는데, 어지간한 죄수에게도 하지 않을 조치가 되어있었다.
텔레포트가 불가능하도록 주변에 온갖 마법적 유물이 설치된 가운데, 주문을 쓰지 못하도록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는 것이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보다 질이 나쁠지도 모르지요」
“질이 나쁘다?”
남자를 가리키며 리치가 설명했다.
「얼마 전에 한 마법사가 찾아와 우리의 일원이 되길 청했습니다. 그러니까, 불사자 리치가 되길 소망한 것이지요. 웬만해서는 자격 시험을 거친 후에 받아주겠으나, 이번에는 우리끼리만 결정할 수 없겠더군요. 가온 전하의 허락이 있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자가 그 리치가 되러 찾아왔다는 마법사인가?”
「예. 영국인 마법사입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한」
가온은 남자를 보고는 그 내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는 감상을 표했다.
“확실히 강력하군. 한낱 지구인이 이 정도로 강력한 마나를 가질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로.”
「확실히 놀라운 일입니다마는 단순히 이자가 잘나서만은 아닙니다. 국가 프로젝트의 성과물이라더군요」
“영국에서 이 마력을 제공했단 말인가?”
「예. 국가예산의 상당부분을 털어, 멘드레이크 엑기스를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고, 있는 대로 마법적인 재능이 있는 애국적 소년들에게 복용시킨 것이지요. 마구스(Magus) 프로젝트, 영국이 1950년대에 시작한 초인 육성 프로젝트라더군요. 텔레포트와 온갖 공격 주문을 활용한 초인적 전투가 가능한, 전술적 응용이 가능할 만치 강력한 마법사 육성을 꾀했다 합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얼마 전에도 국정원 요원으로 의심되는 지구 마법사를 본 적이 있었다.
리치가 계속 말했다.
「원래는 중국과 소련을 겨냥한 프로젝트였지만, 1957년부터는 겨냥한 대상이 달라졌다더군요」
“여기 있는 어느 마스터를 상대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되었나?”
「예. 영국의 가장 끔찍한 악몽으로 부상한 전하를 상대하는 프로젝트로서 더욱 많은 예산을 부여받았다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국인은 전하가 적이 될 경우를 가정한 훈련을 평생 해왔단 말이지요. 가증스럽게도······ 이런 자를 우리 일원으로 받아들여줘도 될지, 감히 여쭙고 싶은 겁니다.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면 바로······」
그리고 가온이 대답했다.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