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소드마스터 언데드 - [3]
먹구름 낀 밤하늘, 조명마저 시원찮은 어두운 참호 속에서, 검은 갑옷은 그저 그림자로만 보였다.
가뜩이나 후방 참호선이었다. 참호 안의 병사들은 적습을 걱정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렇듯 대비가 철저하지 못한 와중에 이 갑옷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갑옷은 1910년대부터 구덩이 속 지구인들을 죽여온 남자였다. 소드마스터를 참호전의 악몽으로 인식시킨 베테랑 중의 베테랑.
몇 년씩이나 참호 속에서 썩어야 했던 1차 대전의 군인들도, 이 남자보다는 참호 안에서 덜 시간을 보낸 편이었다.
“아 씨······ 억.”
갑옷이 적 하나를 죽였다. 축축한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병사 하나를 죽였다.
특유의 긴 칼, 꼬챙이처럼 긴 칼을 소리 없이 뻗어 멀리서 목을 찔러 죽였다.
참마검.
원래 검기를 씌워 쓰도록 만들어진 칼이었다. 그러지 않고 쓰다가는 검신이 너무 길고 가느다란 나머지 꺾이거나 부러질 수 있었다.
그러나 갑옷은 야간에 적진에 은밀히 접근해,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싸워야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번쩍거리는 검기를 쓰지 않고 싸워야 했다.
그 경험은 검기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하게 된 지금도 큰 도움이 되었다.
갑옷이 살짝 손을 휘저으면, 10미터 너머에 있던 병사의 목에 빨간 점이 생겼다. 그때마다 정확히 성대를 관통했기에 단말마를 지르는 일 따윈 없었다.
어둠 속에서 병사들은 조용히 쓰러져갔다.
한편 참호 속에 고인 물구덩이, 진창마저도 이 갑옷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것들을 밟지 않기 위해, 갑옷은 시체들을 밟고 움직였다. 아무런 소리 없이, 그런데도 빠르게.
말 그대로 시체들을 길 삼는 그 걸음이 멈춘 것은 그로부터 십여 분 후였다.
갑작스레 터진 조명탄, 비로소 밝아진 가운데 적들이 소리쳤다.
“소마 식별!”
저 앞에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 무리의 게이머들이 총을 한 데 겨누어 화망을 형성했다.
지금까지 갑옷이 상대해본 그 어느 군대보다도 대응이 빨랐다. 기껏 죽이고서 좀비로 부활시키기까지 한 그 무전병은 결국 로그아웃하여 아군에게 위험을 경고했음을, 그래서 늦긴 했지만 어쨌건 모두가 대응에 나섰음을 갑옷이 알지는 못했다.
처음부터 소드마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마련된 화망은 갑옷에게도 위협적이었다.
피할 데 없이 날아오는 총알들.
제대로 된 소드마스터라면 한두 발 총알쯤은 막아낼 수 있지만, 갑옷은 그러지 못한다. 지금 이 반송장 몸은 원래 몸처럼 유연하지도, 위험을 경고하는 날카로운 신경이 살아있지도 않은 탓이다.
그래서 갑옷이 제때 회피를 시도했음에도 기어이 총알 하나가 그 등에 박혔다.
“맞았다!”
좋아하던 병사의 발 아래에 수류탄이 굴러오더니, 쾅 하고 터졌다.
안전핀을 내던진 뒤, 갑옷은 살아남은 나머지 적들을 해치웠다.
“왜 안 뒤져, 왜!”
그 와중에 적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결국 총알 한 발이 또 어깨에 박혔지만 갑옷은 상관하지 않았다.
구멍 뚫린 갑옷 안에는 그을린 뼈뿐이었다.
살과 근육이 없는 언데드. 갑옷을 껍데기 삼은 데스나이트(Death Knight)는 출현이 발각된 뒤에도 막힘없이 전진했으며 1개 중대 병력이 궤멸하기는 이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게임의 길드들은 실제 군만큼의 규모를 유지할 수 없다. 현실에 비하면 상당히 축소된 이 게임의 군대에게, 그 정도 병력의 전멸이란 끔찍하게 치명적인 일이었다.
결국 가온이 그 위치에 도달했을 때, 그 참호의 방비를 맡았던 길드는 반쯤 미쳐있었으며 이미 전의를 상실한 마당이었다.
“왔다!”
그 와중에 나타난 가온을 보고서 몇몇 병사들은 환호할 뿐만 아니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것은 그들의 기쁨은 물론 무기력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왜 지원사격은 안 하고 구경만······ 안 좋은데.’
데스나이트, 아마 흉턴으로 추측되는 언데드는 물론 게이머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는 상황에 가온은 부담감을 느꼈다.
이대로 맞붙으면 질 것이다. 실제 소드마스터보다 약한 언데드고 뭐고, 이렇게 지친 몸으로는 어림도 없다.
“가온! 가온!”
“한국의 구세주!”
그래도 저리 기뻐하는 사람들을 실망 시킬 수야 없었다.
가온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덤벼!”
가온이 접근하자마자 저 멀리서 뻗어오는 길쭉한 칼날.
흉턴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고, 검사를 상대하는 와중에도 완벽했다. 순식간에 덮쳐온 그 길쭉한 검신은 놀라울 만치 절묘한 각도에서 날아왔다.
가온의 위치에서 보기에, 그 찌르기는 그저 점으로만 보였다. 마주 칼을 부딪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가온은 소드마스터고, 평소에도 점에 가까운 총알을 벨 수 있는 존재다.
덕분에 가온은 자기 가슴을 찌르려던 그 검신을 비스듬히 쳐낼 수 있었다. 상대의 긴 칼날에 자기 칼을 댄 채, 미끄러질 수 있었다.
그대로 달려나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것만으로도 모두가 보기에 위업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가온이 그 바로 앞에 도달했다.
“와!”
지나치게 접근해온 적에 맞서, 데스나이트는 다른 손으로 롱소드를 뽑아 휘둘렀다.
접전이 시작되었다. 가온은 오거 포션을 복용한 마당이요 데스나이트는 카샤드가 특별히 괴력을 부여한 마당이었다.
둘이 칼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릴 때마다 화산이 터지고 천둥이 울렸다.
굉음 속에서 불이 튀었다.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두드러지는 그 대결을 모두가 총질마저 포기한 채 바라 보았다.
그리 흘러간 2분, 그 짧은 순간에 두 검사의 사이에서 이루어진 심리적 공방은 검술서 한 권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치 복잡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 대결은 비등해 보였다. 헤이스트 주문을 쓰고 있는 가온이 훨씬 빨랐기에 마치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흉턴 저 씹새끼 튄다!”
그래서 애써 가온을 떨쳐낸 데스나이트가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기꺼이 천지가 떨리는 환호를 보냈다.
“가온 경이 이겼다!”
한편 가온은 숨을 헐떡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기가 방금 얼마나 힘겨웠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은 채, 상황을 설명했다.
“격퇴한 게 아니라 전략적 후퇴야. 나랑 싸우느라 시간 잡아먹다가 포위되면 골치 아프니까. 이제 딴 데 가서 깽판 칠 거라고. 그러니까 칭송은 나중에······”
그 말에 장교 게이머가 말했다.
“그래도 감사한데요 뭘.”
“왜?”
“우린 덕분에 무사하니까······”
“우린 무사하다고?”
“정확히는 우리 길드요.”
그 말에 가온은 저들이 그냥 자기 길드만 피해가 덜하면 된다고 생각했음을, 저 언데드가 아군에 피해를 주든 말든 다른 길드의 일로 여기기로 맘먹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추격 안 할 거야?”
“지금은 우리 상황 수습하기도 바빠서······”
장교 게이머가 어물어물 변명했다. 가온은 이럴 거면 아까 데스나이트가 도망칠 때, 자신이 잔뜩 지친 와중에도 무리해서라도 쫓아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다 같이 추격하자고 설득할 시간은 없었다. 가온은 혼자서라도 쫓아가고자 땅을 박차려다, 그만두었다.
저놈들도 움직이지 않는데 왜 외부인인 자신이 고생해야 하나? 그 역시 다 집어치우고 휴식이나 취하려던 그때였다.
그 옆에 군용차량 하나가 멈춰섰다.
차량을 몰고 온 운전수가 말했다.
“가온 경? 팬입니다. 타시죠!”
“내 팬?”
“예. TV에서나 보던 가온 경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나 그 가온 진짜 아닌데. 여신께 맹세코······.”
이제 여신께서는 화낼 의욕조차 없으셨다. 그것을 가온은 완전히 허락하신 것으로 판단하고는 슬쩍 웃으며 차량에 올라탔다.
차량이 아까 데스나이트가 달려나간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뒤에서 웬 고함이 울려 퍼졌다.
“야! 왜 멋대로 위치 이탈해! 당장 안 돌아오면 탈영 취급한다!”
가온이 운전수에게 물었다.
“허락 안 받았어?”
“예.”
“아니, 그래도 돼? 길드 차원에서 불이익 있지 않나?”
“지금 불이익이 중요합니까? 여기서 밀리면 다 끝장인데요.”
가온은 조금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여기서 지면 그냥 한국 게이머들 전멸하는 건데 말이지. 쟤들은 왜 그걸 모르고 저런대냐?”
“이해해주세요. 아까 후방 참호 맡은 길드들은 다 영토 잃어 덜 싸울 수 있도록 배려받은 길드들이라 그래요. 이미 열심히 돕겠다고 나섰다가 뒤통수 맞고 전 재산 다 날린 셈이거든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들 움직일 상황이 아닌 거죠. 이 와중에 가온 경이라도 계셔서 도와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대체 우리가 달리 어디서 소드마스터를 모셔오겠습니까······”
운전수가 열심히 수다를 떠는 가운데, 가온은 빠르게 움직이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있고 뭐고, 졌네······’
나뒹구는 뼈 한 무더기 주변에는 늘 몇 개의 피 웅덩이가 있었다. 스켈레톤 하나의 파괴에 인간 병사 수 명의 죽음. 저쪽이 수가 더욱 많음에도 끔찍한 교환비였다.
이 와중에 하늘마저 지구인들의 편이 아니었다.
세계대전 당시, 아스 군과 지구 군이 대결했을 때, 제공권은 늘 지구 군대의 차지였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하늘에 본드래곤들이 날아다녔다. 그 주변에 강철로 된 전투기들이 날아다녔는데, 크기 차이가 심했다. 마치 매 주변의 날파리들처럼 무력해보였다.
진짜 드래곤조차 전투기들 앞에선 금세 벌집이 되고 말지만, 뼈만 남은 저 드래곤 언데드들은 아니었다.
용의 뼈는 놀라울 만치 튼튼하다. 기총으로 파괴하기 어렵다.
본드래곤들의 비행속도가 느리고 수마저 적어 전투기들의 수를 줄이지는 못했고, 전투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를 견제할 뿐, 의미 있는 행동들을 취하지 못하고들 있었다.
‘하여간 이 게임에선 아스가 너무 세게 나온단 말이야. 실제론 본드래곤 수가 너무 적은 데다 살아있는 드래곤들 눈치가 보여서 전장엔 몇 번 나오지도 못했는데. 진짜 프로파간다 목적인가? 아스의 잠재력이 이렇게 세다고 게임 즐기는 아스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온이 생각하는 중에 운전수가 툴툴거렸다.
“그래도 역시 짜증 나긴 하네요. 여기서 뭉쳐야 참마황한테도 대항할 텐데······”
그 말에 가온이 혀를 찼다.
“참마황에 대항? 게임에서?”
“예.”
“너도 강주석이 말 믿니? 순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왜 말이 안 돼요? 애초에 흉턴은 늙고 지쳤을 텐데, 새 육체 얻을 기회 없애버리면 정말 다 집어치우고 싶어질걸요.”
“설마. 정말 늙어 죽을 것 같으면 언데드라도 될걸? 그 정도로 집념 있는 양반인데.”
“이 게임처럼요?”
“그래. 정황상 흉턴이 저 언데드잖아? 원래는 언데드 될 리가 없는데도 그리 된 거야.”
“왜요?”
“확실하게 천국 갈 기회를 걷어찬 것이거든.”
“처음부터 천국 못 갈 거라 생각한 거 아니고?”
“아니, 소드마스터들은 무조건 천국 갈 수 있어. 예를 들어 고결하신 재의 왕자 가온 경, 화로 여신님의 신자인데 결혼도 안 하잖니? 그래도 죽으면 천국 프리패스야.”
“죽으시면 천국 가세요?”
가온은 그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소드마스터는 워낙에 귀하니까. 천상의 입장에도 죽는 즉시 신격으로 승천시켜 줘야할 인재인 데다, 소드마스터가 사후가 두렵다고 지상에 계속 남으려들면 골치 아프니 무조건 천국 확정인 거지. 그런데도 흉턴 저 양반은 기어이 언데드가 된 거고. 지구인들 하나라도 더 죽이려고 말이야. 그 정도로 집념 있는 양반이야. 절대 포기 안 해.”
운전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하지만 이건 게임이잖아요.”
“생각해봐라. 게임에서라도 누군갈 언데드로 내보내는 건 고인 모독인 셈이야. 흉턴이 전쟁 신의 대전사임을 고려하면 신성모독이기도 하고. 그런데 신들이 스폰서인 이 게임에 흉턴을 언데드로 내보내? 다들 그 양반이라면 그럴 만하다 납득한 거지. 신들도. 그러니까 아마 현실에서도 그러고도 남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