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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74화 (74/135)

LV.12 소드 엑스퍼트 이미리 - [2]

이미리는 한동안 고개를 다시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온, 이 유명한 엘프를 게임에서는 여러 번 봤는데. 그래서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도저히 그 앞에서 편히 있을 수가 없다.

유독 이미리만 과민반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활발한 체육계들이 모인 이곳에서 지금 말소리는 조금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숨소리와 더불어 소드마스터의 발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소드마스터가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주변의 수련생들은 흠칫거렸다. 모두가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지만 감히 그럴 용기가 나지 않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들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여기 와있는 것이니.

동경의 눈길이 쏠린다. 높으신 국회의원마저 소드마스터의 옆에 찰싹 붙어서는 일개 가이드처럼 군다.

실제 소드마스터의 위상을 알겠다.

그 목표가 너무 높게 느껴지는 지금, 이미리는 절망감을 느낀다.

지금은 지나가 버린, 공무원 학원에서 보낸 사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

원래 이미리의 집은 부자였지만 이미리가 17살이 된 시기에 망했다. 부모님의 사업실패.

그전까진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놀기만 하던 이미리는 집안을 일으키겠노라 결심했다.

없는 살림에 대학 따윈 가지 말자고, 공무원이 되어 살림에 보탬이 되자고 계획했다.

그러나 18세에 고교를 졸업한 후, 공무원 학원에 등록한 지 사 년이 되었음에도 이미리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

고시 생활이 그 지경에 이르면 사람은 미쳐버리는 법이다.

오래 묵은 고시 낭인들은 으레 그렇다. 겉으로는 태평해 보여도 그 마음속은 자책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썩어가고 있다.

그 탓에 피해망상과 강박증에 시달리는 등 정신병을 얻거나, 좋지 않은 쪽으로 성격 변화를 일으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미리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는 와중에 사 년이나 날리게 되었다는 열등감은 지나치게 자존심을 해치는 것이었다.

열등감에서 자존심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작용은 공격적으로 발현되었다.

이미리는 자기 이외 모든 사람을 병적으로 무시하는 성격이 되었다. 다른 사람을 깎아내려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이제 이미리는 고졸인데, 중졸과 대졸 모두를 무시한다. 중졸은 학력이 부족하니 자기 아래요, 대졸은 취업은 안 하고 비싼 등록금이나 날린 머저리들이니 현명하게도 취업 활동에 전념한 자기 아래란 놀라운 논리다(결국 취업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변해버린 성격을 견디지 못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다.

고교 시절만 해도 넘쳤던 친구들은 물론 가족과도 결별한 뒤, 결국 이미리는 공무원 학원을 때려치우고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해왔던 검술에 다시 뛰어들었다.

마침 국가적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수련에 매진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유일하게 열심인 수련생이니, 여기 있는 모두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요새 깨지고 있었다.

한때 머리를 잠식했지만, 애써 떨쳐내었던 우울감이 다시금 머리를 뒤덮는다.

결국 다 허송세월이었나 하는 생각.

나도 엘프면 좋을 텐데. 그랬음 4년이고 6년이고 날린 것쯤은 아무 타격이 없을 테니까······.

물론 지금 이미리가 우울해하든 말든,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모두의 시선이 여기 온 소드마스터, 요새 가장 주목받는 소드마스터에게 못 박힌 채였다.

소드마스터 가온의 첫 말은 이러했다.

“지도를 시작하지. 모두 각자 동작을 펼쳐보도록.”

수련생들은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소드마스터 가온은 그 옆을 지나가며 교정해주었다.

“이상한 군더더기가 붙었군. 이런 식으로, 간결하게 휘두르는 게 좋겠다.”

가온은 뭔가 문제가 있다 싶으면 몸소 시범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힘을 잔뜩 뺀 채, 수련생과 칼을 섞어주기도 했다.

“공격과 방어는 구분되면 안 된다. 공격하듯 방어해야지.”

소드마스터가 친히 지도해주는 상황, 이 상황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임을 모두 알았다. 모두 전율 속에서 칼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가온이 이미리 앞에 다가왔다. 이미리의 동작을 본 소드마스터 가온은 짧게 평했다.

“너무 강하게 휘두르는데. 힘을 빼는 게 좋겠군. 그래야 반격이 용이할 테니.”

이미리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감사합니다.”

이후로도 가온은 한 명 한 명을 지도해주었는데, 수련생들의 인원이 꽤 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단한 성의였다. 그 사실이 얼마나 감동스러운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상대해야 할 적 소드마스터 중에 가온 또한 포함돼있음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정도였다.

시간이 꽤 지난 가운데, 가온의 지도가 끝났다. 돌아갈 시간이 된 지금, 가온은 마지막으로 조언 비슷한 것을 해주기로 했다.

운을 떼기 위해 엄근오가 물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 수련생들에게도 모두 꿈에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겁니다······ 베풀어주신 가르침에 힘입어, 계속 노력한다면 언젠가 이 중에서 소드마스터가 나올 수 있을까요?”

엄근오가 바란 대답은 ‘나올 수 있으니 노력하라’겠지만, 소드마스터 가온은 그리 대답해주지 않았다.

“모르지. 노력한다면 뭐든 이룰 수 있노라 말할 순 없다. 그것은 노력했음에도 실패한 자들을 모욕하는 발언일 테니. 수백 년 동안 피 흘리며 싸운 내 동지들도 모두 마스터가 되진 못했지. 그들의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었는데도.”

가온과 반지성, 그림자 엘프들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 일화라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

“그래도 해야겠지.”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엄근오의 물음에 가온은 조금 뜸 들이고는 대답했다.

“노력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테니까. 그 모든 노력이 결국에 모두 허송세월이 될 수 있어도······.”

그다지 참신한 조언은 아니었다. 노력만으로 다 이룰 순 없지만 그래도 노력해야 한다느니 어쩌느니. 만화책이나 인터넷에서 꽤 자주 볼 수 있는 말 아닌가.

그런데도 그게 무슨 세기의 명언인 듯, 수련생 모두가 방금 들은 소드마스터의 말을 맘에 새기는 중이었다.

‘그 모든 노력이 결국에······’

그러나 이미리가 듣기에, 그 조언 자체는 맘에 와닿지 않았다.

이미리에게 와닿는 것은 가온이 마지막에 한 말이었다.

‘······모두 허송세월이 될 수 있어도······.’

그 말이 이미리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우울감 속에서 이미리는 표정이 굳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 관찰력이 뛰어난 소드마스터는 아니었다.

가온은 이미리의 표정을 보고 의아했다. 왜 저러나? 기분이 안 좋나?

나름 아는 사이인데, 아예 모른 척하기는 껄끄러웠다.

떠나기 전, 가온은 이미리의 옆을 지나가며 슬쩍 한 마디를 흘렸다.

“실력이 괜찮더군. 아가씨.”

칭찬의 말, 그 말에 이미리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타도하기로 마음먹었던 적폐 소드마스터가 자길 칭찬했다. 그렇다면 의기 넘치게도 적대감을 표출해야 하나?

그러지 못했다. 그저 몸이 굳어서 멍하니 있었다.

울음을 참기도 벅찬 까닭이었다.

뭐라 표현해야 할지도 모를, 가슴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 감동 혹은 감격이라 부를 그 감정 속에서 이미리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적폐. 이 귀쟁이는 적폐······’

이미리는 기도문을 읊듯 속으로 마구 중얼거렸다. 덕분에 울지는 않을 수 있었지만, 끝내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결국 소드마스터 가온이 떠난 뒤, 이미리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엇다. 가온이 그리 말한 것을 모두 들었다. 다름 아닌 소드마스터의 칭찬이었다!

그 사실이 어지간히도 놀라웠던 모양이다.

국회의원 엄근오마저 이미리를 따로 불러서는 대화를 나눴다.

“아까 가온 경께 칭찬받았던데?”

평소 연습량이나 현재 실력보다는 소드마스터의 눈길을 받았다는 게 더 주목거리인 모양이다.

이미리는 좋아해야 하는지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지 혼란을 느끼며 대답했다.

“예. 과분하게도.”

“평소에 어떻게 연습하나?”

그 질문에 이미리는 마구 입을 움직였다. 필사적으로 어필하듯, 구구절절할 정도로 자세하게 자신이 노력해왔는지 설명했다.

한참을 주의 깊게 듣던 엄근오는 문득 물엇다.

“가상현실 게임에서도 수련했다고?”

‘이 시국에?’ 하는 지적이 나올까봐 이미리는 움츠러들었다.

“예······”

그러나 엄근오는 비난해오지 않았다. 환히 웃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마침 잘됐군! 그렇다면 맡길 만한 일이 있는데······”

*******

사실 가온은 자기 교습 실력에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기가 방문해서 지도 좀 해주었다 하여 실제 소드마스터가 탄생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가온은 가온 나름의 목적으로 한국에 방문했다.

아스에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집에 돌아온 가온은 TV를 켜보았다. 후긴의 뉴스가 이번 가온의 방문을 특종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위대한 후긴 민족의 수호자, 가온 전하께서 한국에 친히 방문하시어 가르침을 내려주시었다!

한국인들은 이 은혜를 뼈에 새겨야 할 것이며······」

가온은 자기 방문이 상당히 효과가 있음을 알았다.

‘한국인들을 부르는 데 마족이란 표현이 사라졌네.’

예상한 일이었다. 소드마스터 가온이 한국과의 친분을 과시한 지금, 쓸데없이 한국을 공격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은 소드마스터 가온의 체면을 깎는 짓으로 간주 될 테니. 소드마스터들의 눈치를 살피는 아스의 뉴스는 당분간 한국을 존중하는 척할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참마황은 당분간 한국을 도발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주전파 아스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분간은.

“이 정도면 제가 할 일은 다 한 거겠지요?”

가온의 물음에 여신께서 치하하시었다.

‘그래, 가온. 잘했노라. 그래서 네 친우의 나라를 위해 뭔가 더 해줄 계획이더냐?’

“아니오. 더 뭔가 하진 않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 같아요. 한국을 지켜주겠답시고 참마황과 싸워줄 수야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여신께서는 조금 뜸 들인 끝에 말씀하시었다.

‘그래, 그렇지.’

여신께서도 그런 것을 명령하진 않으실 것이었다. 내심 바라실지는 몰라도 하여튼.

가온이 몸을 일으켰다.

잘난 척 설교했듯, 이쪽도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원수를 떠올리고는 복수할 준비를 했다.

‘하고나 때려 잡아야지.’

가온은 가상현실 기기에 들어가 로그인했다.

시야가 암전되더니, 다른 세상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이벤트 알림] : 레이드 보스, 불사왕 카샤드가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강력했던 그의 군세는 전보다 더욱 강력해졌지요.

얼마 전, 이 강력한 고대의 리치는 죽은 소드마스터의 유해를 손에 넣었으며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카샤드는 새로 얻은 이 강력한 전력을 기꺼이 선봉장으로 세웠습니다.

수백만 스켈레톤 돌격대와 수십만 좀비 포병대, 거기에 소드마스터 언데드까지 합류한 불사자들의 군세를 막아보세요!」

“이거 뭐야.”

가온이 어이가 없어 멀거니 서있는 가운데, 가온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이벤트 알림 보셨죠?”

가온이 거리에 나서기 무섭게, 시장 정진영이 말을 걸어왔다.

가온은 조금 당황하며 대답했다.

“어. 또 뭔가 이상한 게 시작된 거 같은데······”

“이상한 걸 넘어 한국 게이머들 모두 좆된 상황입니다! 아시다시피 언데드 군단, 상대하기 어렵잖습니까? 백두 길드만 해도 반쯤 초토화되었다는데, 맞습니까?”

“응. 그때 나도 있었지.”

“그래서 말인데, 한국 플레이어들이 다 함께 전선을 형성하기로 했습니다. 기념할 만한 첫 한국인 공동전선이죠! 곧 한국 게이머들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이기로 했습니다. 저도 시장으로서 거기 참가하기로 했는데요.”

“잘됐네. 그래서?”

“그 모임에 가온 경도 초청했는데 말입니다.”

가온은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나 아스인인데?”

“한국에서 활동하시고 한국인들 위해 좋은 일 많이 해주셨으니까, 대충 명예 한국인으로 치고 초청하는 거죠. 안 됩니까?”

가온은 떨떠름하게 말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참여하지.”

가온이 생각하기에, 시간 낭비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자그마치 언데드 소드마스터까지 출전한다는 마당이니.

*******

작가의 말

저번 화에 댓글로 푼 설정을 말씀드리자면...

1. 게임에 우승해도 드래곤은 될 수 없습니다! 드래곤은 신들이 창조한 종족이 아닌 까닭입니다. 드래곤들은 우주에서 왔지요! 신들도 어떻게 드래곤을 만들 수 있는지 모릅니다.

2. 아스의 천국엔 인터넷이 깔려있습니다! 그 인터넷을 통해 지상에 말을 전하거나 글을 쓰지는 못하는데요.

반대로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지상의 소식을 보는 것은 가능합니다. 아래에서 위로 전해지는 건 가능한 덕분입니다.

심지어 지상에서 나온 게임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3. 우드엘프들이 연금을 바라는데, 물가상승률이 연금에 반영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우드엘프들의 수가 적지만 그들에게 돈을 주는 것마저 부담스러울 만큼 카르세의 재정 상태는 좋지 않습니다.

4. 스포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이미리가 소드마스터가 되어 가온을 때려눕힐까봐 걱정하는 분들이 계셔서 굳이 말씀드리자면...

한국인 소드마스터는 반지성 이외에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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