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2 소드 엑스퍼트 이미리 - [1]
34명의 한국인이 죽은 그 사건, 그 끔찍한 사건을 카르세 정부에서는 사고였다고 주장했다.
물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사고 직후 방송된 카르세의 뉴스만 봐도 의도된 일임이 분명했지 않은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났고, 한국인들의 일상은 바뀌었다.
그 사실은 집구석에 처박혀 잘 나오지 않는 이복동마저 실감하고 있었다.
이제 라면과 참치 통조림을 사기가 어려웠다. 사재기가 시작된 까닭이다.
특이한 일이었다. 적대국의 도발에 익숙하다 못해 무덤덤한 한국인들 아닌가. 심지어 그로 인해 인명피해가 발생했더라도 금세 남 일처럼 여기곤 잊는 법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일어난 일은 남 일처럼 여길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국인 모두가 그 일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증거물이 남았으므로.
거대한 푸른 문. 끔찍하게 거대한 차원문이 이제 어지간한 산맥을 능가하는 크기와 존재감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 어떤 건물로도 그 거대한 모습을 가릴 수 없었다.
심지어 지평선 너머에서도 그 윤곽이나마 볼 수 있었다. 하늘의 별처럼, 저 멀리에 있어 작게 보이지만 선명하게 빛나는 푸른빛을.
이곳 게임에서처럼······.
이복동은 오늘도 백골부대에 용병으로 참전 중이었다.
스코프를 통해, 저기 지평선 너머 대차원문을 바라보았다. 그 존재감이 소름 끼칠 만치 선명했다.
당연히 게임 속 오브젝트였다.
저 주변을 점령하면 게임에서 우승하고 보상을 받는다.
저것이 보일 위치까지 백골부대가 진격해온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게임의 우승자가 나오는 데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셈 아닌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골부대원 모두가 그 사실에 환호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총을 어깨에 걸친 뒤, 이복동은 지휘관 막사에 들어섰다.
백골부대 길드장 류시범이 앉아있었다.
이복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뭣 좀 여쭤봐도······”
류시범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물어봐.”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사람이 부드러워졌다. 그 사실에 안도를 느끼며 이복동이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여쭙고 싶은데요. 그러니까, 계속 김정일과 싸울 건지. 얼마 전에 마주친 카르세 유저들이랑 동맹 맺은 거, 철회할 계획은 없는지······”
“전략을 말해달라고? 미안하지만 외부인에게 말해주긴 곤란한데······”
“그래서 저도 여쭙기 조심스러웠지만, 이건 백골부대 길드원들이 다 궁금해하는 겁니다.”
류시범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길드원들이 궁금해하는 거라고? 그런데 왜 그걸 자네가 묻나?”
“제가 외부인이니까, 이런 민감한 주제를 묻기 쉬울 거라면서 부탁하더라고요. 그러니까, 다들 계속 이대로 해도 되나 의문스러운데 그랬다간 길드장 결정에 대놓고 반대하는 것 같아 껄끄럽다고······”
“이대로 계속해도 되나 의문스러워 해?”
“예. 아시다시피 시국이 시국이라. 김정일이 게임 우승하도록 돕는 게 한국을 위한 것이란 주장도 있고······ 심지어 참마황이 우승하는 순간 전쟁 일어날 거란 소문도······”
류시범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길드원들에게 말할 수 없는 사실이 많았다.
너희 길드장이 아스 전쟁 신의 신도가 되었다느니, 한국을 전쟁에 휩쓸리게 할 작정이라느니······.
가슴 한구석에 통증이 느껴지는 가운데, 류시범은 거짓말을 했다.
“이대로 싸우다가······ 카르세 놈들이 정말 우승할 거 같으면, 그때 김정일과 동맹 맺을 계획이라고 전해.”
그 말에 이복동은 반색했다. 요즘엔 이복동도 자기가 한국에 해로운 일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 걱정했던 것이다.
“정말입니까?”
“그래. 그런데 그때까진 이 전선에 계속 있어야 해. 그래야 카르세 놈들이 닥쳤을 때 맞서 싸우든 동맹을 맺든 할 거 아니야. ”
“그럼 그렇게 전할까요?”
“그래. 딴 놈들한테 누설하진 말고.”
이복동은 그 순간 경례를 했다. 맘에서 우러나온 듯한, 존경심이 표출되는 경례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류시범의 가슴 통증은 더욱 커졌다.
이복동이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드 여기저기서 함성이 울려 퍼지는 것 아닌가.
“길드장님 만세!”
길드원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류시범은 마음이 편치 않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러지 같은 길드원들을 속이든 말든 상관이 없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느 엘프가 추측했듯, 그 사건 이후로 자기 길드원들에게 나름의 애착이 생긴 탓이다.
‘하여간 강주석 그 개새끼만 아니었으면······’
기만의 시간, 이 괴로운 시간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다행히 그리 오래 지속 되진 않을 것 같다는 게 위안이다.
전쟁 신이 알려주었기로, 이 게임에서 참마황의 군세가 총공격에 나설 때까지는 앞으로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쯤 되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백골부대를 물릴 계획이다. 그들이 우승하는 데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젠장.’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나?
류시범은 문득 자신을 살려준 어느 엘프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그 엘프가 참마황의 부탁을 받고 자신을 카르세로 옮긴 줄 알았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요즘 그 엘프의 행보를 보니 그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한국인도 아닌데 왠지 한국을 돕는 그 엘프의 최근 행보를 떠올리며 류시범은 신음했다.
‘가온 그 양반······ 행보가 너무 뒤죽박죽이야. 도무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
“여신이시여. 당신의 대전사는 정의를 원합니다!”
가온이 외치자 여신께서 한탄하시었다.
‘또 누군가의 집 주소를 알려달란 청이냐? 네 여신은 그러지 않겠노라 이미 대답했지 않느냐! 애초에 그것들은 음해가 아니라 사실이거늘.’
원하던 결투를 할 수 없게 되자 가온은 씩씩거렸다.
이번 일로 가온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폭증한 마당이었다. 덕분에 가온은 며칠 내내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며 즐길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차마 넘길 수 없는 글 또한 많았다.
- 가온 보면 막 정체 숨기고 있다가 딱 나타나고 그러는데, 이거 딱 힘숨찐 아님?
만화만 봐도 이런 힘숨찐들은 원래 성격이랑 변신 성격이랑 확 다른 법임.
게다가 뭔 일 터질 때마다 왠지 딱 나타나는데, 이거 보면 칩거한 채 수련에 매진 중이란 것도 가짜일 수 있음. 그렇지 않고서야 뭔 일 터질 때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을 수가...
강력한 그레이엘프 반신이 분노를 노래하던 중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아, 지금······”
가온은 약속한 시간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며칠 전, 한국의 국회의원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던 것이다.
“얜 왜 나 자꾸 부른대. 이렇게 엉덩이 가볍게 나돌아다니면 설정 깨지는데.”
가온의 불평에 여신께서 여쭈시었다.
‘그래서 안 가겠느냐?’
“물론······ 갈 겁니다.”
가온이 컴퓨터를 끄자 여신께서는 눈에 띄게 기뻐하시었다.
‘정말 장하다, 가온! 이젠 정말 외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구나. 그 사실이 어찌나 네 여신을 기쁘게 하는지 아느냐?’
‘제가 기쁘게 해드렸다면, 그 상으로······’
‘그자의 주소를 알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 시각, 국회의원 엄근오는 전화벨을 내려놓으며 한숨 쉬고 있었다.
한국 정치인 모두가 요새 심적으로 고생하는 중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가 다가오는 와중에, 국민들은 높으신 분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며 분노했다.
이 와중에 국가적으로 아무런 대응 조치가 없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난이다.
지금 한국 높으신 분들의 일처리가 어찌나 한심해 보이는지, 최근 일본 인터넷엔 한국이 ‘징징거리기 외교’만 구사할 줄 안다며 조롱 중이었다. 싸울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웬 엘프에게든 미국에든 그저 부탁하며 매달리기만 한다고 비웃었다.
엄근오가 보기에, 지금 이 상황은 어쩔 수가 없다.
총동원령을 내리거나 예비군들을 소집하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참마황이 이쪽의 사소한 조치에도 발작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싸울 준비를 하는 당연한 준비조차 그 초인 독재자를 지나치게 자극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외교적 해결을 하고자 발버둥 치고 있었는데, 나흘 전에도 그랬듯 가장 유명한 엘프와의 친분이 이상할 정도로 도움 되었다.
사실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초인 하나와의 친분에 의지하는 외교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그 방법이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좋은 데다 그 엘프가 의외로 부탁까지 잘 들어줘서 자주 활용했을 뿐이다.
‘하여간 정말 비정상적이야. 뭔 놈의 국가적 결정이 한 엘프가 찾아가 대화 좀 나눴다고 몇 시간 만에 바뀌어? 하여간 이해할 수······ 생각해보면 가온 그 양반, 친구가 한국인이었다고 이렇게 챙겨주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 사실 처음에 관계 맺으려 노력할 때만 해도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엄근오가 곧 오게 될 엘프를 생각하던 와중이었다.
문득 앞을 바라보니, 그 엘프가 이미 있었다.
“가온 경?”
“왜 놀라지. 불렀지 않나.”
온다는 소식도 못 들었는데. 그놈의 텔레포트로 또 한 순간에 물리적 거리를 좁혀버린 모양이다.
물론 정식 입국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비난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엄근오는 그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닙니다. 왕림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엄근오가 안내하는 가운데, 가온은 거대한 체육관을 걸었다.
얼마 전에 마련된, 한국의 소드 엑스퍼트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장소다.
“수련생들에게 짧게 조언을 해주면 된다고 했나 그리고 소드마스터가 될 만한 인재가 있나 살펴봐주면 된다고도.”
가온의 물음에 엄근오가 대답했다.
“예, 아주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다름 아닌 마스터의 도움 아닙니까?”
“그렇지는 않을 텐데.”
사실 소드마스터의 지도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한국과 이 유명한 엘프와의 관계를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유치한 짓이지만, 놀랍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한국을 통해 이 엘프에게 말을 전하고 싶어 하는 덕분이다.
소드 엑스퍼트들, 소드마스터가 되길 희망하는 지망생들이 그들의 우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가온 경께 검례!”
카메라가 번쩍이더니, 미리 준비하고 있던 소드 엑스퍼트들이 검을 들어 예를 표했다.
이 간단한 동작만 해도 며칠을 연습했는지 모른다.
힘든 일이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또 다시 TV에 방송되어 연속으로 국민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소드 엑스퍼트들은 요새 연습까지 치열하게 했다. 휴대폰 따윈 내팽개치고, 검에만 매달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미리가 그랬던 것처럼.
‘씨발.’
이 상황이 이미리는 너무 불편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이들이 열심히 굴지 않는다며 욕해왔지만, 다들 열심히 하게 된 이 상황은 더욱 싫다.
자신의 우위가 사라진 탓이다. 노력한다는 우위가······.
‘저 적폐 새끼 때문에.’
속으로 욕하려다 말고, 이미리는 문득 여길 찾아온 소드마스터 가온과 시선이 마주쳤다.
재가 일렁이는 눈. 그 눈과 마주친 순간 이미리는 질겁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영혼이 빨려들어가, 맘이 읽힐 것 같다는 걱정이 든 탓이다.
이후로도 고개를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는 존재감에 질린 탓이다.
반신이라서? 초인 소드마스터라서? 그도 아니면······.
이미리는 이 순간, 실제 소드마스터와 자신의 거리감을 느낀다. 이를 악문다.
‘아, 저 미친년?’
한편 이미리를 발견한 가온은 속으로 기겁했다.
그러나 무표정하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