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72화 (72/135)

LV.24 대전사 가온 - [3]

카르세 공무원들은 사전에 아스인들을 터미널 바깥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기어이 죽은 다섯 명은 한국에 밀입국을 시도하고자 화물에 숨어있던 자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죽은 것은 어느 나라의 잘못이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다섯 명의 죽음에도 참마황은 분노를 표하더군요. 너희 한국인들이 죽인 거나 다름없다 합니다. 반드시 핏값을 받아낼 거라고도······”

엄근오 의원이 말했는데, 그 목소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완전히 탈진한 목소리.

최대한 동정심을 유발하고 싶어 일부러 그러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의도는 성공했다.

가온도 조금 머뭇거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이가 없군.”

동조해주자 엄근오는 한이 맺힌 듯 외쳤다.

“그렇지요? 정말 모든 게 말이 안 됩니다! 대체 왜 저러는 겁니까? 누가 보면 한국이 카르세를 식민지배하고 아린 벌판을 점령 중인 줄 알겠어요! 한국도 그저 제국주의의 피해국일 뿐인데! 같은 피해자한테 대체 왜 저러는 겁니까?”

“때로는 자기 분노에 동참하지 않는 동류가 더욱 미운 법이지.”

“그렇다고 원수들보다 험하게 대하는 게 말이 됩니까?”

“진정하게.”

“죄송합니다. 무례를······”

“사과는 됐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윽박지른 뒤에, 다른 말은 없던가?”

엄근오는 한숨 쉬더니 대답했다.

“저번 요구에 대답을 내놓으라 하더군요. 만약 제국주의자들을 응징하기로 결정했다면 카르세 군대의 한국 영토 내 주둔을 받아들이라 합니다.”

“그러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마찬가지로 자기네 군대를 받아들이라 합니다. 쳐들어오는 군대를요. 정말······ 어느 쪽을 고르든 한국에 미래는 없습니다.”

“군 주둔조차 용납할 수 없는 건 국가적 위신 때문인가?”

“아니요, 생존의 문제입니다. 당장 지구의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길이니까요······”

“맞서 싸우는 건?”

“그건 더 말도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방법이 없을 때 일이에요.”

가온도 조금 생각해보고는 그 이유를 이해했다.

차원문은 한국 영토 내부에 열렸는데, 이번 일로 군단이 뛰쳐 나올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커졌다.

끔찍한 일이다. 영토 중심으로 달려 나오는 군대라니? 그 어떤 메뚜기 떼도 그보다 해롭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들이 휩쓴 뒤에 한국에 남아있는 건물이라곤 움막이 전부일 것이다. 한국은 북쪽 형제국과 누가 더 가난한지 경쟁하게 될 것이다.

엄근오가 문득 물었다.

“참마황이 조센징에게 매를 들겠노라 발언했음을 알려드렸을 때, 그자라면 그럴 만하다고 하신 적이 있지요?”

“있지.”

“대체 왜 그럴 만한 겁니까? 혹시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가온은 조금 고민하고는 대답했다.

“알려줘도 크게 도움 될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다만 다른 방식으로나마 도움이 되도록 해보겠네. 만류해보겠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엄근오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감사드립니다! 믿을 건 정말 가온 경뿐······”

울기 시작한 엄근오를 위로한 뒤, 가온은 텔레포트했다. 이제는 만주에 있는 그것과 같은 크기가 되어버린 차원문 앞으로.

터미널이 무너진 참사 현장은 아직도 정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가온······ 경.”

거기 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가온을 보고 흠칫했다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다들 거기 이 유명한 엘프가 마침 있었기에, 사고가 일어난 뒤에도 따로 도움을 주었기에 죽은 사람이 대폭 줄었음을 알고 있었다.

직접 차원문 팽창에 휘말려 죽은 사람 이외에 과다출혈 따위로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그게 반신 사제가 도움을 주었기 때문임도 알고 있었다.

“정말 감사······”

가온은 컨셉에 맞게 무시할까 하다가 큰마음을 먹었다.

자신에게 감사를 표한 여자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고, 여자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가온은 말없이 뒤돌아서서 차원문에 몸을 넣었다.

마찬가지로 무너진 터미널 잔해를 치우느라 고생 중이던 카르세 공무원들이 있었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엘프를 보고 기겁한 가운데, 가온이 말했다.

“자네들 대통령에게 연락을 넣어주겠나.”

“예?”

“지금 만나고 싶다고 전하도록.”

이 요청이 최고 통수권자에게 전해지기까지는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잠시 후, 가온은 참마황을 만났다.

이번 일을 저지른 장본인답지 않게, 참마황은 더없이 기쁜 얼굴로 가온을 맞이했다.

“아, 이게 누군가. 가온 경! 얼마 전에 마족들과의 전쟁에 참전키로 했지! 내 그 사실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바로 축하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알다시피 연락하기 어려운 처지라 그럴 수는 없었소.”

참마황의 말에 가온이 물었다.

“연락하지 않은 것, 다른 이유는 아니고?”

“다른 이유? 뭔 말하는지는 모르겠군. 연락하기 어렵단 건 잘 알 텐데, 혹시 그걸 고려해도 서운하다면 미안하고······ 아무튼 와줘서 정말 기쁘군. 진심이오! 그래서 내 감사를 들으러 왔나?”

“아니. 이번 일을 비난하러.”

“비난? 왜?”

“여신님의 신도들이 다치거나 죽을 뻔했지 않나.”

가온의 말에 참마황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사실에 대해 난 떳떳하오. 전쟁 신께 부탁드려 예언자를 도왔거든. 그분께서 꿈속에 들어가 위험을 경고하셨지. 여신님의 신자들이 다치지 않도록 미리 힘을 썼어. 우리가 이번 일에서 의도하지 않은 점이라면 아스인이 다섯이나 죽은 점이지. 안타까운 일이야, 정말. 하여간 이 아스에 조센징들은 도움이 일절 안 되는······”

듣다못한 가온은 말을 끊었다.

“신도들이 죽지만 않게 하면 다가 아닐 텐데.”

“그럼?”

“어쩌면 이 일을 저지른 무리와 한패로 보일 수도 있었지 않나. 일이 일어날 걸 미리 알고서 자리를 피했다는 의혹에 박해받을 수 있었지.”

“그건 생각 못 했군. 게다가 괜한 수고를 끼치기까지 했으니······ 정말 미안하오. 화로의 여신님께도. 다음부터는 폐를 끼치지 않겠노라 약속하지.”

“그것만으론 만족스럽지 않은데.”

“음?”

“애초에 이번 일을 저지른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필요해서 한 일이 맞나? 아무리 봐도 감정의 분출로만 여겨지는데.”

“감정의 분출이 맞지.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

“있지.”

“뭐요?”

가온은 잠시 말을 골랐다. 한국인들을 쓸데없이 괴롭히지 말라고 하면 들어먹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유를 애써 찾아내자면······.

가온은 따로 생각해낸 이유를 입 밖으로 꺼냈다.

“이롭지 않은 일 아닌가.”

“이롭지 않은 일?”

“그런 식으로 한국인들을 도발하는 건 아무리 봐도 곧 일어날 전쟁에 해롭기만 할 것 같군. 한국이 워낙 굽히고 있어서 그렇지, 나름대로 지역 강국 아닌가. 진지하게 항전하게 만드는 건 대체 뭐가 이롭나? 적 하나를 더 만드는 행위에 불과한 짓 같은데.”

그리 말한 순간, 참마황의 옆에 서 있던 측근들은 몸을 떨었다.

지금 이 엘프는 오늘 벌인 일이 멍청한 일이었노라 대놓고 말하고 있었다. 이 대통령 궁에서, 그 누구도 저 초인 군주에게 저럴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와 대등하게 맞서 싸울 같은 초인이 아니고서야······.

카르세의 관리들은 지금 참마황이 격분하리라고, 두 마스터끼리 결투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잠시 후에 돌아온 참마황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좋군.”

참마황의 말에 가온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뭐?”

“좋아. 아주 좋아! 전쟁에 해로울까 봐 걱정하는 걸 보니, 다가올 전쟁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군? 열심히 싸울 모양이야! 그건 정말이지 꿈에서도 바라던 일이고!”

참마황이 웃었다. 너무나도 기분 좋게 껄껄거렸다.

이 반응에 가온은 머리를 긁적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기가 참전하리란 일에 이렇게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다.

한참을 웃어대는 참마황을 보고 그 측근들이 아까보다 더한 공포를 느끼는 가운데, 참마황은 한참 뒤에야 겨우 웃음을 그쳤다.

너무 웃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말했다.

“그래, 내 너무 감정을 앞세우긴 했지. 대놓고 도발해서 좋을 게 없단 것도 옳고.”

“그럼 이번 사태를 수습하도록 노력할 텐가?”

참마황은 어색하게 웃더니 말했다.

“내 그러지.”

*******

한국인들은 적대국의 도발에 익숙하다. 북한이 일으킨 온갖 참사 덕분이다.

그리고 지금 일어난 일은 그 참사들을 능가하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모두가 그 일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증거물이 남았으므로.

이제 한국인들은 이번 사태가 일어난 주변 지역을 지나가다 보면 그 푸른 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주 거대한 차원문을. 다들 거기서 뛰쳐나올 적들을 생각하고는 몸서리쳤다.

이 와중에, 4판타지 온라인의 팬사이트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글쓴이의 이름은 강주석으로, 얼마 전까지 4판타지 온라인의 거대 길드 수장이었던 남자였다.

참마황의 도발이 도를 넘었습니다.

보다시피 전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막을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한국 게이머들이 뭉쳐야 합니다! 참마황을 늙어죽게 만들어야 합니다!

새삼 신선한 글은 아니었다. 이미 비슷한 내용을 몇 번이고 올린 마당이었다. 그때마다 비난만이 쏟아지곤 했다.

- 그런데 정말 전쟁 막을 수 있으면...

그래도 이번 상황에 위기감이 들긴 한 모양이다. 댓글로 달린 욕설이 줄어든 데다 나름의 동조하는 반응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역시나 전체적인 반응은 싸늘하다.

→ 지랄 마셈. 게임에서 적국 수장 죽일 수 있음 정부는 뭐하나? 정부 직속 프로게이머단 육성 안 하고.

애초에 이 병신이 이러는 거, 전쟁 분위기로 길드장 복귀 노리는 거임. 괜히 먹이 주지 마라

*******

“그래서 참마황의 말이 변했다고?”

“예. 차원문 보수 중 일어난 사고에 유감을 표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사과의 의미로 사과의 의미로 좋은 제안을 하겠다고도 했고요.”

“좋은 제안, 어떤?”

“만약 자기 제안에 응한다면, 아스에 강제 징용 된 한국인들의 영혼이 좋은 데 갈 수 있도록 돕겠다더군요. 원래 지옥에 가야 하지만 끌려온 점이 정삼참작되어 보류 중이었는데, 참마황이 전쟁 신께 부탁드려 좋은 데 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요. 물론 거절할 경우는 바로 지옥 깊이 보내버리겠다고······”

한낱 인간 주제에 사람의 영혼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다니, 오만해보이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참마황은 전쟁 신의 대전사 아닌가. 전쟁 포로들의 영혼을 어찌 처우할지에 대해 큰 권한이 있는 존재다.

“결국 협박으로 끝났군. 결국 별 도움이 못 된 것 같아 유감일세.”

“아니, 아닙니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다 말고 회유로 돌아선 것만 해도 태도가 훨씬 나아진 거죠. 시간을 번 게 어딥니까?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너무 큰 은혜를요. 게다가 감사가 늦었는데, 이번에는 몸소 현장에서 한국인들을 구해주셨다지요? 정말이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지······”

“괜찮네. 아무튼 할 말은 이게 단가?”

“아, 하나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뭔가?”

“여신님의 신도들이 말했는데, 거기 계신 사제님이 가온 경 같았다더라군요. 아주 친절한 분이었다는데 사실인지······”

가온은 정색했다.

“그건 사실이 아닐세. 신도들이 착각했나 보군.”

대화를 마친 뒤, 가온은 다시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한국 인터넷에 자기 이름을 검색했다.

올라온 기사며 글이 많았다. 아주 많았다.

- 한국의 수호자, 가온 경을 찬양하라!

- 가온, 가온, 가온!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온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지만, 이번 일로 다시 호의적으로 돌아선 마당이었다.

다른 나라에는 싸늘할지 몰라도 한국에는 친절하니 고마운 것 아니냐는 것이다.

가온은 그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며,

죄책감과 관심 충족의 쾌감 속에서 글을 읽고 읽었다. 그러는 중에 웬 글이 발견되었다.

- 근데 사건 현장 목격담 들어보면 그때 있던 사제가 아무리 봐도 가온 같았다던데. 말 엄청 부드럽고 친절하게 했다고 함

사실 엘프일 때 말 짧게 하고 그러는 거 사실 컨셉질 아님?

가온의 몸이 굳었다. 참혹한 분노 속에서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이자와 결투할 수 있게 이자의 주소를 알아봐 주시길 간청합니다,”

‘네 여신은 그런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듣지 않으리라.’

“이자가 당신의 대전사를 음해하게 내버려 두시렵니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