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68화 (68/135)

LV.? 드래곤 아타락시아 - [2]

다시 방문한 백골부대는 예전과 달라진 분위기였다.

여전히 군기가 잡혀있었지만, 전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자신을 맞으러 온 백골부대 길드원을 보자마자 가온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자네 이름이 김종일이었나? 또 만나네?”

최고 유명인이 자길 알아보는 상황을 김종일은 영광으로 여겨 반색했다.

“와,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히 기억하지, 내 기억력이 얼마나 좋은데. 아무튼 표정이 밝아 보이네? 뭐 좋은 일 있나?”

“아뇨? 딱히. 전과 똑같은데요.”

“전에 만났을 땐 일부러 웃을 때 제외하면 표정 계속 딱딱하게 굳어 있었잖아. 다른 사람들도 그랬는데, 지금은 다들 표정이 풀렸네. 길드 전체에 좋은 일이 있는 거 같은데?”

“아, 길드 분위기가 전보다 나아지긴 했죠.”

“왜?”

“길드장님이 훨씬 부드러워지셨어요. 옛날엔 진짜 별일 아닌 거 가지고 사람 죽일 듯 갈궜는데, 요즘엔 웬만해선 허허 웃으십니다. 두 엘프 분들이 가르침을 주신 덕분인 거 같은데,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를······”

저번에 만났을 땐 자기 길드장을 은근히 욕하더니, 지금 하는 말에는 은근한 존경심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우리 엘프들이 유교를 이백 년 익혀 역사상 최고의 유학자들이긴 하지만, 유교의 가르침만으로 사람이 확 달라지진 않을 건데? 다른 이유로 변한 거야.”

“다른 이유라면 어떤?”

“왜 있잖아. 류시범이가 습격당했을 때 인터넷에 길드원들이 응원 댓글 달린 거. 내가 그때 옆에 있었는데 엄청 감동하더라고. 그때부터 사람 달라진 거 같은데, 아닌가?”

“아, 확실히 길드장님이 변한 시기가 그때인 듯도······”

“그렇지?”

“하지만 그때 인터넷에 길드장님 응원 댓글 단 거, 솔직히 위에서 시켜서 그런 건데 말입니다. 귀찮은데 어쩔 수 없이 막 달아서 댓글에 성의도 없었는데 그거 가지고······”

“그래도 충분히 힘이 되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 자기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나면 가슴에 와닿거든.”

“그럴까요?”

“응. 나도 옛날에 그랬어······. 그러니까 잘 대해 주라고. 그럼 저쪽도 잘해줄 테니.”

그 말에 김종일이 웃었다. 기분 좋게 가온을 자기 길드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큼지막한 지휘부 건물에서 백골부대 길드장 류시범이 가온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류시범조차 처음 만났을 때보다 여유가 있어 보였는데, 그것을 본 가온은 새삼 안심했다.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네”

“예, 덕분에. 아무튼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이 친구 좀 맡길 수 있나 해서. 용병 자리 좀 남나?”

가온은 요으를 소개했고, 류시범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물론 남지요. 그럼 바로 계약 할까요?”

“바로 대답해주니 고맙긴 한데, 요새 길드 사정 괜찮나? 혹시 부담스러우면 딴 데 가서 부탁할 수도 있고.”

가온의 말에 류시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길드 사정 충분히 괜찮아요.”

“참마황 협박 탓에 한국인 스폰서들 많이 떨어져 나갔을 텐데? 이 게임에 큰돈 퍼부으면 불이익 받게 됐잖아.”

그 말에 류시범은 작게 속삭였다.

“그렇긴 한데, 상관없습니다. 이건 남한텐 말하지 못하는 건데······ 새 스폰서가 생겼거든요. 덕분에 물자가 부족할 일은 없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그리 대화 나누던 와중이었다.

절로 안심이 될 만치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성 우드엘프다운 목소리.

“이게 누구야. 그 가온은 아닌 가온이네?”

뒤돌아본 가온은 나루를 보고 표정이 굳었다. 가온은 이 소드마스터가 부담스럽다.

“예, 그 가온 아닌 가온입니다. 다시 만나뵈어 반갑습니다. 나루 양.”

“반갑네, 정말. 아, 나 레벨 꽤 올렸다? 이제 신체 꽤 움직일 만해졌는데 말이야······ 만난 김에 대련 몇 번 할까?”

이미 굳어 있던 가온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대련을 말입니까?”

“응. 하고 물리치려고 폐관 수련을 했다던데? 내가 보기엔 썩 좋은 방법이 아니야. 혼자 연습해봤자 실력은 잘 안 늘거든. 대련이 최고야. 내 대련에서의 승률이 높은 거 알지?”

“예. 소드마스터 중에서 최고라고······”

“내 보기엔 그게 다 대련을 자주 해서 그래. 우드엘프 소드마스터가 가장 많으니까 연습상대가 널려있었거든. 그래서 나도 연습 상대가 돼줄까 하는데, 어때?”

가온은 가뜩이나 실력이 좋기로 유명한 이 소드마스터와 붙었다가 쉽게 패배하는 상황, 그로써 부족한 실력이 들통나는 사태를 원하지 않았다.

바로 거절의 말을 꺼냈다.

“고마운 제안이지만 할 일이 있어서요.”

“할 일? 어떤?”

“드래곤을 잡아야 합니다. 지금 제가 여기 오래 있으면 도시가 위험한 상황이라 가급적 빨리 돌아가야 해요.”

그 말에 나루는 조금 생각해보더니, 가온이 싫어할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서 같이 잡지. 드래곤.”

“그러셔도 되겠습니까? 당장 공무를 위해 이 게임 시작하신 줄로 아는데, 빨리 레벨 올리셔야 하는 게 아닌지······”

“레벨보다 드래곤 피 뒤집어쓰는 게 더 도움 될 거 같아. 마력이 확 오른다던데, 맞나? 자네가 아닌 그 가온이랑 같이 돌아온 애들, 그 가온이랑 드래곤 여럿 잡았잖나? 그 덕분인지 나보다 훨씬 마력이 강하더라고. 얼마나 부러웠는지······”

가온은 달리 거절할 이유를 생각해보다 그만두었다. 문득 다른 데 생각이 미쳤다.

‘당분간 하고랑 붙지 못할 상황인데, 확실히 다른 소드마스터랑 붙을 수 있으면 좋긴 하겠지.’

결국 가온이 승낙했다.

“그럼 좋습니다. 하지만 대련을 한다면 사람들 없는 데서 해도 괜찮겠습니까? 결과도 비밀로 하고요. 누구한테 알려지면 곤란해서요······.”

그리고 나루는 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괜찮지.”

*******

모든 일이 결정된 바, 요으는 오늘부터 이 전선에서 용병으로 일하기로 했다.

그로써 넉넉한 보수를 받을 수 있게 되었음에, 심지어 하루 만에 그 계약이 처리되었음에 놀랐다.

이 모든 것이 거저 받은 도움이었다.

요으가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가온이 먼저 말했다.

“예히나탈에 이민신청 넣으면 제법 빨리 답변이 올 거야. 산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해 안달인 곳이니까. 웬만해선 한 달 내로 이민갈 수 있겠지. 하지만 한 달 지나도 예히나탈에 이민 갈 수 없으면? 그땐 이사를 가든가 게임을 그만두든가 해.”

섬세한 조언. 요으가 당황하여 물었다.

“예? 왜······”

“알다시피 깡패들한테 원한을 산 마당이잖아? 집에 있다가도 습격당할지 모르는데, 그때 게임기 속에 있다간 놈들이 쳐들어 와도 못 도망칠 거 아냐.”

“아······ 그런데 한 달 지나서야 게임 그만두라는 건 왜죠으?”

“당분간은 걱정 없잖아? 그놈들, 한두 달은 병원 신세일 테니까. 후긴사는 놈들이 신전에서 치유 주문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 내가 기억하기로 너랑 같이 다니는 오크들이 일곱 명이고 일곱 명 다 때려 눕혔으니 당분간 괜찮을 거라 생각한 건데, 혹시 패거리 더 있나? 그럼 지금도 안심할 수 없는데······”

처음 만났을 때 인원까지 기억하고 있었나? 요으는 놀라서 물었다.

“아뇨. 일곱 명이 전부긴 한데······ 설마 그것까지 고려하고 제안하신 거예요으?”

“당연하지.”

가온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요으는 어제 묵돈을 받았을 때보다 지금 더 감정이 요동치는 걸 느꼈다. 맘에서 우러나온 감격.

마음 한편으로는 이 잘난 소드마스터가 넘쳐나는 돈과 시간을 기분  좋기 위해 적선했을 뿐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진지하게 생각해줬다는 걸 알겠다.

‘고작 게임 인연까지 신경 쓰는 걸 보면 책임감도 엄청 강한 것 같고······’

요으는 문득 이 엘프가 왕이 되었다면 그 누구보다 좋은 왕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말했다간 조롱으로 들릴 터였으므로 그 생각을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어야 했다.

요으는 잠시 생각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아서 미처 이 부분에 대해 감사를 못 드렸는데, 후긴에 오크 받아주기로 한 거······ 가온 경이시죠? 거듭 감사드려요”

그 감사에 가온은 난색을 보였다.

“솔직히 썩 좋은 이유로 받은 건 아닌데? 알다시피 내가 후긴을 별로 안 좋아해서······”

“알아요으. 그래도 감사드려요으.”

“감사는. 이딴 나라에 받아준 게 뭐 고마운 일이라고.”

“후긴이 치안이야 엄청 나빠도 문명국이잖아요으? 다른 오크들 사는 곳보단 훨씬 나아요으. 평소엔 고철이나 줍다가 툭하면 부족 전쟁에 껴서 막 죽어가는 대부분 오크들의 삶은 정말······ 거기였음 전 덩치 작다고 태어나자마자 죽었을 거예요으. 그러니까······ 큰 은혜 베풀어주신 게 맞아요으.”

그리 말하며 허리를 굽히더니, 요으는 사라졌다.

한편 가온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멍하니 굳어 있다가, 겨우 몸을 움직였다.

부자연스럽게 다리를 움직여, 기다리고 있던 차량에 탑승했다. 새로 합류한 일행과 함께.

“얘야, 너무 빠르지 않니? 좀 천천히 가자.”

가온으로서는 빨리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재촉할 정신도 지금 없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목적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래곤 슬레이어께서 돌아오셨다!”

오매불망 자길 기다리던 사람들의 호응에 가온은 지금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짧게 말을 전했다.

“당분간 검술 교습소에 있을 테니까, 회장님 납시면 말해.”

*******

“가온 경 진짜 사람 좋아. 누가 뭐 부탁하면 싫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다 들어줘.”

선임 직원이 투덜거리자 후임 직원이 키득거렸다.

“게임 속 이분이 뉴스에 나온 그분이랑 동일인물이란 게 안 믿겨지는데요? 진짜······”

“웃을 상황 아니다.”

“예? 왜요? 아무 문제 없는 거 같은데.”

“하루 접속 안 하시더니 갑자기 다시 하고와의 대련을 미루시는 상황이잖아. 회장님 잡겠다고.”

“아······ 기껏 하고 출현 조건 쉽도록 업데이트 한 보람이 이대로는 없겠군요? 하지만 당분간의 일이니 상관없지 않을까요? 계속 회장님 잡겠다고 대기만 하진 않으실 텐데. 기껏해야 한두 달?”

“그 한두 달이 커. 알다시피 전쟁이 코앞인데, 회장님 의도대로라면 그 전에 하고를 쓰러뜨려야······”

“그럼 회장님께 문의드려야 할까요?”

“그래야겠지.”

*******

당연한 일이지만 가온이 돌아오자마자 레드드래곤 하나가 냉큼 도시에 날아오는 일은 없었다.

당분간은 게임에서 원하던 대련을 하지 못하고 발이 묶일 판이었다.

이 와중에 다른 대련 상대가 생겨서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아닐지, 가온은 알 수 없었다.

“자, 그래서······ 폐관수련이 얼마나 효과 있었는지 좀 볼까?”

나루가 검기를 방출했다. 밀폐된 대련실 안에 빛이 퍼졌다.

강렬한 달빛.

가온으로서는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다행히 감정의 변화는 크지 않다. 지난 한 달 내내 마주친 보람이 있는 것 같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이때 가온이 맨 먼저 한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망신만 안 당했음 좋겠는데’

한심한 생각과는 달리 단련해온 검이 발하는 빛은 아름답다.

가온도 검기를 방출했다. 그 은은한 일렁임에는 신성마저 느껴진다.

달빛 속에 재가 스며든다.

소드마스터들 사이의 대결에 신호는 필요하지 않다. 누가 기습을 하든, 예리한 전투감각이 바로 알려주는 까닭이다.

그래서 마치 실전처럼, 두 소드마스터가 대결에 나섰다.

먼저 공격해온 것은 가온이었다. 재가 허공을 갈랐고, 달빛은 여유롭게 끼어들었다.

이미 알았던 것처럼 이루어지는 반격.

이 짧은 반격으로 가온은 몇 가지 사실을 파악했다.

이 우드엘프는 하고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하고처럼 맹렬하지는 않지만 반격은 보다 날카롭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반격것을 자신이 막아낼 수 있게 되었단 사실에 놀란다.

거기에 반격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단 사실에도.

“좋은데······”

공방이 거듭된다. 계속해서 재와 달빛이 섞인다.

모름지기 검술에도 나름의 전략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전략과 전술하에 설계된 무언가엔 일정한 흐름이 있다.

반격과 반격이 얽히는 흐름. 그 와중에 간혹 터지는 예상치 못한 공격, 그 혼돈마저 결국에는 흐름 속에 섞여 일부가 된다.

흐름이 이어진다. 달빛 속에 재가 춤춘다.

이 얽힘이 즐거운 듯, 나루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가온도 웃는다. 즐거워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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