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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67화 (67/135)

LV.? 드래곤 아타락시아 - [1]

레드드래곤 아타락시아는 심란하다.

며칠 전 뉴스 탓이다.

며칠 내내 아스의 TV를 잠식한 엘프에 대해 생각했다.

‘가온······ 도저히 뭘 원하는지 알 수가······’

게임에서 관찰했기로, 그 엘프의 전쟁 의사는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화로의 대전사가 기어이 그런 선언을 할 줄은 몰랐다.

두통마저 느껴지는 가운데, 아타락시아는 게임에 접속했다. 참마황의 요구를 들어줄 겸, 그리고 쌓이는 스트레스를 풀 겸.

*******

요으는 어릴 때부터 남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큼지막한 오크들 사이에서 덜 두들겨 맞으려면 그래야 하는 법이다.

그와 동시에 속마음을 숨기고 웃는 일에도 익숙해졌는데, 그 탓에 멍청하고 우둔하단 평을 많이 듣지만 사실 보이는 것보다 똑똑한 편이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속으로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저 남자가 정말 가온이란 말이지. 그 가온······’

요으는 책도 꽤 읽었다. 그 덕에 이 엘프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역사서의 몇 페이지를 차지하는 엘프 아닌가.

재의 왕자.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후긴 공화국의······.

‘배후지배자.’

반세기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후긴의 현대사 그 자체가 되어버린 엘프가 자신의 집에 찾아와 있었다.

요으가 보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신 집중하면, 마법이 딱 펼쳐지는 거야. 참 쉽지?”

“하나도 안 쉬워!”

어제 한 약속대로 가온은 이 조그만 흡혈귀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었는데, 약 한 시간에 걸친 강의는 요으가 보기에도 성의가 넘치는 것이었다.

결국 봐라니가 먼저 지치고서야 가온의 마법 강의는 끝났다.

저 거물에게서 뭔가 가르침을 받는 게 얼마나 귀중한 은혜인지 요으는 감히 설명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한편 가온은 강의를 마치고 바로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가온은 이 보잘것없는 오크와 대화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그 사실에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황송해야 하는지 요으는 알 수 없었다.

“왜 이민을 안 가겠단 거야? 그 오크들이랑 계속 부대끼고 싶어서 그래?”

가온의 물음에 요으가 대답했다.

“오크를 받아주는 곳은 많지 않아요으. 후긴과 카르세뿐인데, 카르세에서 오크를 받아주는 건 병력으로 쓰려는 거죠으. 전쟁 나면 소총 들고 뛰쳐나가는 조건으로 입국을 받아주는······ .”

“내 인맥으로 병역면제 따줄 수 있는데?”

“그랬다간 주변 이목이 두려워지지 않을까요으? 비겁하게 시민권증만 받고 의무를 모른 체한다고 욕할 거 같은데. 가뜩이나 전쟁 분위기잖아요으. 병역기피 했다간 이웃들이 해코지할지도 몰라요으.”

“그럼 카르세 말고 다른 나라에 가는 건······ 너무 눈에 띄겠네. 다른 나라엔 오크가 거의 없으니까.”

“예, 말씀드렸다시피 오크의 입국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거절되니······”

고작 사십 년 사는데 절반 가까이 공부로 보내는 건 미친 짓이라며 절대 중학교에 입학하지 않는, 부족한 교양과 월등한 근력으로 문제만 일으키는 이 종족을 그 어떤 국가도 좋아하지 않는 탓이다.

가온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민은 가야 해. 알지? 후긴의 인간은 천국에 못 가는 거. 뱀파이어화 되었어도 일단 인간 종족으로 취급하니까, 혹시 저 애 죽으면 천국 못 간다.”

“그러면 어디로······”

요으가 고민하는 가운데, 가온이 제안했다.

“예히나탈에 가는 건 어때?”

“언데드 빨갱이 나라에 가라고요으?”

“거기 살기 좋대. 리치 공산당원들이 인민을 엄청 아낀다나? 게다가 단순노동은 스켈레톤들이 대신 해줘서 인민들은 교육지원 충분히 받고 고급노동에 종사하면 된다던데.”

“그래도 거기 국민들도 천국 못 가지 않나요으?”

공산주의자들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단 사실은 아직 비밀이었다. 지상에 펼쳐진 그 사악한 지상락원에 이민 신청이 지나치게 늘어나는 것은 천상이 보기에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너희 둘은 될 거야. 천국 가려면 일단 후긴만 벗어나면 돼.”

“정말요으?”

“응. 여신께 따로 합의 없이 맹세코. 그런데 예히나탈은 내 인맥이 좀 부족한 곳이라서, 이민 신청 허가 나오려면 시간 꽤 걸릴 거 같은데 괜찮나?”

사후세계는 워낙 중요한 일이라, 요으는 더 따져 물으려다 말았다.

여신의 대전사가 하는 말 아닌가. 그보다 믿을 만한 말은 더 없다.

“그리 해주신다면 저는 그저 감사히······ 정말 이렇게까지 챙겨주실 줄은 꿈에도······ 그저 감사를······”

요으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가온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튼 결정한 거지? 그럼 이따가 이민신청 넣고······ 요새 하는 일은 있나?”

“아뇨, 딱히.”

“그 게임은? 그걸로 돈 버는 게 마약팔이보다 낫다고 했잖아.”

“기반 없이는 돈 벌기 힘들다 해서 한 달 전에 그만뒀어요으.”

“기반, 내가 만들어줄까? 네 캐릭 아직 그 도시에 있나?”

게임에서까지 챙겨줄 계획인가? 요으는 새삼 놀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둘이 게임에 접속했다.

로그인 장소에서 가온은 요으의 레벨을 보고 놀랐다.

“LV.11? 이 정도면 엄청 고레벨인데. 게임하는 거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벌써?”

“오크는 경험치 성장이 두 배라서요으. 대신 능력치는 힘만 올릴 수 있고, 기본 몸집부터 너무 커서 피격 면적이 넓어 인기 종족은 아니지만요으. 그래도으 현실에서도 이러면 좋을 건데······.”

둘은 대화를 나누며 시내에 발을 디뎠다.

가온은 생각했다.

‘요새 내가 진짜 소드마스터 가온 아니냔 소문이 퍼져있던데. 얼마 전 뉴스 탓에 사람들이 날 경외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시선들 느껴지면 은근히 짜릿할 듯······’

주목받지 못할까봐 걱정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유명인이요 옆에 오크까지 있는 마당이라, 시선이 집중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가온은 사람들 앞에 섰다.

예상했듯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가온을 향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들의 반응은 가온의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가온을 본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더니, 열렬한 목소리로 외쳤다.

“드래곤 슬레이어께서 오셨다!”

*******

1939년, 철로 된 기계들이 아스의 하늘을 점령했다.

제로센, 스핏파이어, 랜서······.

복엽기와 단엽기,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아스의 하늘에 시커먼 매연을 수놓았다.

떼 지어 날아다니던 와이번들이 멸종하기는 순식간이었다.

하늘과 번개의 신이 굴욕을 이기지 못해 우울증을 앓고 칩거한 가운데, 드래곤조차 더는 하늘의 주인이 아니었다.

대공포와 전투기들을 두려워한 드래곤들은 지상에서 싸워야 했다. 육탄전을 벌여 전차를 뒤집고, 숨결을 뿜어 참호들을 타격했다.

아스의 그 어떤 종족보다 맨 앞에서. 두꺼운 비늘로 총탄을 맞아가며 싸웠다.

그 분투는 지구의 잘난 군인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드래곤의 가공할 마법적 능력, 즉 폴리모프를 비롯한 온갖 전략 전술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능력들은 지구에도 이미 잘 알려진 바였다.

그런 능력을 두고서 기껏 하는 게 육탄전이라니?

똑똑하다 자부하는 지구인들은 자신이라면 그 능력으로 뭘 할 수 있을지 떠들어댔다.

전략적 기동성을 활용할 것이라느니. 폴리모프를 이용해 적들 사이에 섞여 암살과 후방 기습을 반복할 것이라느니. 어쩌느니.

아무튼 저 짐승들처럼 무식하게 정면으로 들이받진 않을 것이라고. 그보다 조금만 더 똑똑하게 굴어도 훨씬 위협적일 것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 비웃음은 드래곤들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다.

드래곤들은 모름지기 오만한 영주다. 영주로서 드래곤들이 원한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자기 영지를 지키는 것이었다.

영토와 자식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방어하려면 일정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방어 행동도 적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을 방식으로, 정정당당하게 치러야만 했다.

그러니까 드래곤들은 지구인들이 말하는 ‘똑똑한 짓’들을 하지 않은 것뿐이다. 못한 게 아니라.

그 사실과 더불어 지구인들이 모르는 것이 더 있었는데, 다름 아닌 아스에 전해지는 격언이었다.

천상의 과수원에 첫 감이 열린 이래, 드래곤의 새끼를 해쳐서는 안 된다. 절대.

영국 왕립공군의 폭격사령부 또한 그 격언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 무리의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켰다.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날아간 폭격기들은 활화산 위에 항공폭탄을 떨어뜨렸다.

드래곤의 둥지가 거기 있었다.

성대한 붕괴. 아린 전선에서의 격렬한 전투를 마치고 돌아와 휴식하던 수컷 드래곤과 그 품에서 졸고 있던 해츨링이 죽었다.

그로써 영국군은 이 골치 아픈 도마뱀 가족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며 좋아했지만, 이 와중에 모르는 사실이 또 하나 있었다.

황금을 벌고자 둥지를 나가 있던 어미 드래곤이 있었다.

대영제국은 위의 세 가지 사실을 모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다음날, 대차원문에 자식 잃은 레드드래곤 하나가 날아왔다.

그 레드드래곤의 이름은 아타락시아로, 소위 에인션트 드래곤이라 부르는 강력한 존재였다.

이때, 대차원문 주변에 배치된 대공화망은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 어떤 지옥일지 모를 지구에 쳐들어가겠다고 결심한 드래곤이 없었던 탓이다.

최초 사례가 생겼고, 기어이 에인션트 드래곤이 지구에 당도했다.

이후로 벌어진 일은 지구인들의 걱정보다 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상대해본 에인션트 드래곤들은 지구의 막강한 군대에도 가공할 적이었지만, 어쨌건 상대할 수 있는 적이긴 했다. 대공포와 넉넉한 철갑탄, 막강한 화력을 쏟아부으면 고생 끝에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짐승은 전장에서 싸워주지 않았다.

아타락시아는 인간들이 잘난 듯 말하던 ‘똑똑한 짓’을 시작했다.

거대한 주둥이를 크게 벌려, 적국의 후방에 숨결을 뿜었다. 그러니까, 도시에. 마을에.

맨 먼저 런던이 불탔다.

*******

“웬 레드드래곤이 출몰해서 도시를 불태우고 다닌다고?”

가온의 물음에 한 플레이어가 대답했다.

“예, 아타락시아요! 아시죠?”

“알지. 우리 게임 회장님 아냐. 그래서 지금 회장이 슈퍼계정이라도 끌고 와서 유저들 학살한다 이거야? 그럼 정식으로 항의해야 하는 거 아냐?”

“아뇨, 게임에 존재하는 레이드 보스인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위치에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지구 진영 도시에 막 나타나서 폭격을 한다고······ 여기도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리고 도시의 모든 것이 재산인 이 게임에서, 레이드 보스의 습격이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심각한 재산의 위협으로 간주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썩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기 지키고 있어 달라고? 어제도 하고랑 못 싸웠는데······.”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대공포들 배치될 때까지만이라도······.”

“대공포는 언제 배치되는데?”

“그게, 아타락시아 활동으로 대공포 수요가 확 늘어서요. 요샌 매물이 없어서 언제 구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는데, 그렇다고 당장 화내지는 않았다.

그 사실에, 또한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고민한다는 사실에 요으는 놀랐다.

고민 끝에 가온이 말했다.

“바로 쳐들어오진 않겠지?”

“예? 예, 아마.”

“그럼 기다려. 어디 가서 일 좀 마치고 올 테니까.”

그 말에 도시의 플레이어들이 반색했다. 어지간히도 아부하고 싶은지 주저 없이 말했다.

“어디 가시는지 몰라도 저희가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정말로 그들은 가온과 요으를 위해 차 한 대를 끌고 왔다.

‘여기서도 엄청 잘 나가시는 모양이지······’

이 상황에 요으는 새삼 부러움을 느낀다. 하여간 초인들이란 어디서든 인정받기 마련이다. 아스에서도, 지구에서도, 심지어 게임에서도.

“어디로 모셔드리면 되겠습니까?”

그 물음에 가온이 대답했다.

“백골부대 있지? 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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