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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4판타지-64화 (64/135)

프랑스인 로랑 - [3]

킬로미터 단위로 열병기를 무효화하는 정신 나간 소드마스터의 존재가 발견되었을 때, 심지어 후긴 공화국이 최후의 발악으로 터뜨린 핵탄두조차 그 소드마스터를 죽이지 못했을 때, 미국은 신의 지팡이의 개발에 예산을 쏟아붓기 시작했으며 기어이 실전 배치에 성공했다.

그 가공할 무기를 타국에서 쓸 작정인 모양이었다. 유사시 폭격에 동의하도록 각국에 동의를 강요했다.

주요시설에 모두 텔레포트 불가능하게 조치해두지 않았느냐며, 거기 침입해온 순간을 노리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미국은 타국 주요시설과 거기 있던 사람들을 소드마스터 하나의 목숨과 교환하겠노라 선언한 셈이었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 사실에 불쾌감을 표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아니었다.

프랑스는 미국이 들이민 동의서에 제일 먼저 서명한 나라였다. 그게 오히려 싸게 먹히리라 생각했으므로.

엘리제 궁전 내부에서 텔레포트는 막혀있었다. 지하 대피소인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마법적 유물들이 공간의 왜곡을 막고 있었다. 여기로 누군가가 텔레포트하는 것도, 여기서 밖으로 텔레포트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니까 재의 왕자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위험에 취약해진 셈이었지만, 당장 그 사실에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로랑은 마라톤하듯 힙겹게 달리면서 생각했다.

이쯤 되면 모두 상황을 파악했을 것이요 자신의 의도 또한 알 것이다.

다들 저 멀리 도망쳤을까? 근방 주민들은 소개시켰고?

제발 그랬기를 바란다. 그 지팡이가 무슨 블록버스터 영화에 나온 것마냥 위력이 크지는 않다고 들었다. 딱 이 주변만 박살내기를. 곧 죽을 상황에 길동무는 이 엘프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엘프는 죽어도 여신의 대전사로서 천국에 가겠지만 나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억누르고자 애썼다. 당장 다가오는 엘프에 대한 공포를 원동력 삼아 필사적으로 달렸다.

너무 많이 먹어 배가 아팠지만 참고 달리면서 속으로 부르짖었다.

‘지팡이! 지팡이 떨어뜨리라고! 빨리!’

5m짜리 텡스텐 막대가 얼른 이 궁전을 갈아버리길. 그리하여 이 괴로운 시간을 얼른 끝내주길 빌었다.

최대한 쉽게 파괴되도록, 지하 대피소는 일부러 튼튼하게 만들지 않았다. 5m짜리 막대가 떨어질 경우 송두리째 붕괴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고작 엘프 하나를 죽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이 얼마나 정신 나간 일인가, 그 당시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계속 달려 다다른 곳은 막다른 방이었다.

로랑은 겨우 멈췄다.

이십 분은 지났을까? 지났을 것이다. 이렇게 괴로웠으니 그 정도 시간은 지나갔을 만하다.

텡스텐 막대 몇 개쯤 내려오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로랑은 초조함을 느꼈다. 왜 이미 지팡이가 떨어지지 않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발소리 없이, 회색빛 엘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전히 걸어서 왔는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온은 짧게 물었다.

“펜싱검은?”

아직도 숨이 찬 나머지 로랑은 헐떡거렸다.

“대학 다닐 때······ 연극부였어. 펜싱할 줄 몰라······.”

”그럼 항복이군. 내가 원하는 걸 답할 준비가 되었나?”

“아니······”

가온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고, 그것만으로도 로랑은 겁을 먹었다. 죽기 전인데도 두려울 게 더 남았다니?

생각해보니 두려울 게 더 있긴 하다.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이쪽을 고문할까? 고문하는 법을 알지도 모른다. 영원히 사는 엘프들은 별별 기술을 다 익힌다고 하니까.

웬만해선 고문을 견딜 수 없는 법이라지만, 지금 자신이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결연한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온이 한 발짝 다가왔고, 공포가 더욱 커졌다.

로랑은 발작적으로 권총을 들어 겨누었다.

“꺼져!”

가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걸었다.

로랑은 비명질렀다.

“꺼지라고!”

그러면서 무의식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

왜 발사되나? 그 악명 높은 연소반응 제거는? 지금은 그거 안 하고 있나?

의문을 느끼는 사이, 기어이 발사된 총알은 가온의 배에 닿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로랑은 빗맞았나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명중했지만 없던 일이 돼버렸을 뿐이다. 초인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가장 초월적인 신체를 지녔기로 유명한 이 반신은 배에 생겨난 관통상을 눈 깜짝할 사이에 재생해버렸다. 수복 마법이 걸려있었는지, 옷마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가온이 한 발짝 더 걸었고, 이제 로랑의 바로 앞이었다.

이제는 어떤 식으로든 죽을 것이다.

로랑은 공포 속에서 여유를 가지기 위해, 마지막 유언으로 눈앞의 엘프를 조롱하려 애썼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곧 죽을 거라는 식으로 암시를 주면 안 될 텐데. 뭔가 시적이면서도 비장하게······.

가온의 입이 열렸다.

“발악은 그만.”

“이······”

“지팡이는 떨어지지 않아.”

그 순간, 로랑의 머릿속에 가득 차있던 온갖 도발 문구는 증발했다.

그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왜······”

“미국은 나보다 참마황을 위협적으로 여기지. 내 원한의 대상은 협소하지만 그의 원한은 과거 아스의 원수들 모두를 향하니. 그가 일으킬 대전쟁이 자국을 승패와 상관없이 폐허로 만들리라 걱정한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평화를 노래하는 여신을 원수로 만들 생각이 미국엔 없어.”

“그건 또······ 어찌 알았소?”

“미국이 누굴 더 위협적으로 여기는지? 아니면 지팡이가 떨어질지 안 떨어질지?”

“둘 다······”

“내 여신께선 신도가 많으시지.”

미국에도 여신의 신도가 많으리라는 것, 심지어 그놈의 지팡이를 떨어뜨릴 권한이 있는 사람들 중에도 신도가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소문에 따르면 저 엘프와 여신은 이십사 시간 연결돼 있다던데. 어쩌면 여신이 직접 전해줬을지도 모른다.

이쪽 신도 그래주시면 좋을 텐데.

“하나님······”

로랑이 중얼거렸고, 가온이 물었다.

“이제 좀 대화할 준비가 됐군. 아닌가?”

“난······ 말할 수 없소.”

“칼이 허벅지에 드나들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난 아무것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관없다. 네가 모른다면 네 아랫사람에게 물을 것이다. 그마저 모른다면 그 아랫사람에게.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로. 네 나라의 모든 이가 내 질문을 받게 될 거야.”

모든 프랑스인을 찾아가 고문하여 답을 얻어내겠다고? 로랑은 그럴 순 없다고 외치려다 그만두었다.

저 엘프라면 그럴 수 있다. 늙어죽지 않고 모든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저 망령이라면 기어이 그럴 수 있다.

“왜 그렇게까지······ 고작 갑옷 한 벌일 뿐인데······”

가온은 아다만티움 갑옷이란 일개 갑옷이 아니란 것, 신들조차 없어서 못 입는 귀물이라는 것, 그 귀중한 물건을 내려주신 여신의 은혜가 어찌나 큰지 알아야 한다는 것, 검기마저 막아내는 그 물건을 입는다면 자기보다 실력이 월등한 하고와의 대결에서도 승산이 커진다는 것을 길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백 마디 말 대신 칼을 겨누었다.

로랑은 오줌을 지렸다.

그 순간, 가온은 심문의 대상이 최대한 무력감을 느끼도록 정말 지팡이가 떨어질 위험마저 감수한 보람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로랑은 결국 누군가가 자백할 거라면 차라리 자신이 짊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합리화이건 실제 희생의 정신이건, 그 입이 열렸다.

“처음 훔친 것은······ 영국입니다. 미리 그 물건을 노리고 있었는지, 요원들이 궁전에 잠입하고 있었죠.”

로랑의 고백이 계속되었다.

“그걸 우리가 1954년에 훔쳤습니다. 물론 3년 뒤에 이 모든 것을 후회했지만 말입니다.”

“왜 반환하지 않았나.”

“반환할 계획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진품을 대영박물관 창고에 몰래 넣어두자는 계획도 있었죠. 실제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말입니다.”

“왜.”

“저희도 도둑을 맞아서······.”

잠시간의 침묵.

“여기가 후긴인가. 도둑질한 물건을 도둑질해서는 도둑맞았단 말을 믿으라고?”

“한심한 일이지만, 사실입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훔쳤나. 영국?”

“모르겠습니다. 영국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국이 경을 두려워하는 만큼 영국도 경을 두려워하니까요. 괜히 핵폭탄이 되어버린 그 갑옷을 다시 가져오고 싶어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로랑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흉턴이······ 흉턴이 훔친 것 같습니다.”

“흉턴?”

“흉턴은 늘 아다만티움 갑옷을 갖고 싶어했지요. 경과는 달리 적 병사 하나를 죽이려면 야간에 포복해서 죽을 고비를 넘겨야 하는 상황에 염증을 느꼈으니까요. 정말 훔쳤다면 말이 됩니다. 흉턴은 원자력 발전소를 초토화시켰으면서 살아남았는데 이상한 일 아닙니까? 전문가들이 추측하기론 그 갑옷 덕분인 줄로······”

가온은 말을 끊었다.

“헛된 추측은 됐다. 그래서 갑옷은. 잃어버렸고, 어디 있는지 모르며, 돌려줄 수도 없다는 게 네가 할 말의 전부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불편한 침묵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먼저 침묵을 깬 것은 가온이었다.

“나는 프랑스에 복수할 맘이 거의 없었다. 그보다 증오스러운 것들이 있었거든. 심지어 후긴조차 너희보다 더욱 증오스러웠지. 유혹한 자보다는 유혹에 걸려든 자가 더욱 증오스러운 법이니. 너희 나라에 대한 증오는 비교적 덜했다. 참아줄 수 있었어.”

“제발 지금도······”

“그런데 기어이 옛 원한을 상기하게 만드는군.”

그 말뜻을 이해한 로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일을 꾸민 자들이 노리는 바입니다! 우린 레플리카 따윈 만들지 않았습니다! 분명 그 차량의 짐칸에 레플리카는 없어야 했습니다! 누군가 몰래 넣은 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그들은 의도를 이룰 테고.”

“분명 아스 주전파들이 꾸민 일입니다! 그 전쟁광들의 꼭두각시가 되셔서는 안 됩니다!”

“이게 누구의 의도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의무가 왕족을 움직여. 기만을 몰랐으면 모르되, 알았다면 대가를 받아낼 의무가 있다.”

“하지만······”

로랑이 애원하려는 가운데, 가온이 조금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바로 뭔가 하겠노라 선언하진 않겠다. 네 이번 행동을 좋게 봐서.”

“절? 왜······”

“발버둥치는 인간은 아름답지. 남을 위해서라면 더욱. 감명 깊더군. 가라앉았다가 되살아난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을 만큼.”

다른 세계에서 죽을 위기를 넘겨가며 보낸 이백 년,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도망치며 살아온 그 세월 동안 확립된 가치관임을 로랑이 알지는 못했다.

약간의 희망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럼······”

“결자해지할 기회를 주겠다. 너희가 훔쳐가놓고 발뺌했던 그 갑옷을 되찾아와.”

“언제까지 말입니까?”

“참마황이 전쟁을 일으킬 때까지. 그때까지 갑옷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참마황의 전쟁에는 후긴 왕족 또한 참가할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를 적으로 삼아서. 이해했나?”

“예, 참마황의 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재의 왕자가 선언했다.

“그때까지 돌려놓지 못한다면, 양국과 후긴 왕가는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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