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 로랑 - [1]
이복동과 지존무쌍은 이제 자주 만난다.
오늘도 그랬다. 지존무쌍과 마주 앉아 안주를 집어먹는 가운데, 이복동은 생각했다. 이 술자리가 꽤 익숙해졌다고. 자기도 꽤 사교성이 생긴 것 같다고 위안했다.
확실히 그 게임은 자신에게 많은 것을 준 모양이다. 월급쟁이들을 능가하는 돈과 인연들,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한 것들을······.
이렇듯 자신은 이 상황이 꽤 만족스럽다.
하지만 한국은?
이복동은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술집답게 술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떠들며 웃고 있었다. 무표정하게나마 시내를 걷는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전쟁이 다가오는 와중에도 한국은 별 달라진 게 없어보였다.
주가와 부동산가 하락으로 한강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집어삼켰만, 겉보기로는 다들 별 걱정없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듯했다.
다들 다가오는 위기에 실감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 건지 몰라도 어쨌건.
그 사실에 위안을 느끼며 이복동은 생각했다.
‘이대로 계속 변함이 없으면 좋을 텐데.’
한편 지존무쌍은 그저 기분이 좋아보였다. 일주일 전에 꽤 큰돈을 벌어들인 사실이 자신감을 심어준 모양이었다.
둘이서 이런 저런 대화를 웃으면서 나누었다. 둘은 게임 속에서 주로 활동하다보니 자연스레 화제 또한 게임에 관련된 것이었다.
문득 대화는 게임 속 아스인에 대해 흘러갔다.
“예전부터 게임 친구였다 하셨죠? 가온 형이랑. 그땐 어땠어요?”
“엄청 친했지! 문자 하나 보내면 바로 만나서 놀고 그랬는데······”
“그때도 뭔가 무지 쎈 아스인다운 뭔가가 느껴졌어요?”
“아니?”
“그럼 평범한 게이머인 줄로만 알았어요?”
“평범하다 못해 좀 한심한 사람일 줄 알았지. 나랑 비슷한······”
지존무쌍은 술 한 잔을 쭉 들이키고서야 말을 이었다.
“그땐 나랑 같은 백수 폐인인 줄만 알았는데. 모두한테 유명한 고인물이었거든. 가온 씨, 그 게임에 한 이십 년 전에도 있었다나? 그래서 나보다 나이 많거나 비슷할 줄 알았더니······ 막상 만나보니 내가 훨씬 늙었네.”
이복동은 이백 살 넘은 가온이 훨씬 늙었지 않느냐 지적하려다 말았다. 그리 젊고 잘생긴 남자에게 ‘늙었다’는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실제 나이 따윈 중요하지 않게도.
약간의 우울감이 감돌려다 말았다. 뉴스를 본 지존무쌍이 반색했다.
“오, 마침 가온 씨 뉴스에 언급되네?”
뉴스 자막은 다음과 같은 문구를 내보내고 있었다.
현재 프랑스는 ‘재 공포증’이 재발했다고. 그러니까, 소드마스터 가온의 침입을 우려한 나머지 발작적인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고 했다. 프랑스에 있는 모든 차원문을 폐쇄하려는 명령이 있을 거라느니 어쩌느니.
뉴스를 보던 이복동은 그게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무튼 프랑스가 어느 가온을 못 오게 막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이해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순식간에 깨졌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어, 방금!”
생방송이었다. 그 화면에 잠시 한 남자가 나타났는데, 눈의 착각인 줄 알았을 정도로 잠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모두가 방금 누가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었다.
우울한 낯, 휘날리는 회색 머리칼. 허리에 찬 칼 한 자루.
재를 형상화한 것 같은 엘프를 모두 기억했다.
지존무쌍도 아주 잠시 보았음에도 그 생김새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였다. 잠시 자신이 아는 다른 가온과 방금 본 가온을 매치시켜 보았다.
쉽지 않았다. 너무 달랐으므로.
지존무쌍은 요새 ‘이 가온’이 ‘그 가온’이라는 설을 꽤 진지하게 믿고 있었지만, 지금 와서는 혼란을 느껴야 했다.
“저 가온, 우리가 아는 가온이 아닌가?”
*******
삼엄한 경계태세도, 그 어떤 조치도 재의 왕자가 프랑스에 입국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소드마스터 가온에게 프랑스 입국비자가 없음을 감안하면 명백한 불법침입이었지만, 그 정당성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재의 왕자가 아무 예고없이 프랑스 관광을 시작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 누구도 그 사실에 항의하지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날 프랑스 전역에서, 재의 왕자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었다.
소문 속에서만 살아숨쉬는 망령처럼. 그 엘프가 여기 있었네 저기 있었네 하는 말만이 떠돌 뿐이었다.
그러나 그 망령은 실체가 있었다. 현실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겼다.
에펠탑 앞에 모여있던 관광객들이 소리쳤다.
“방금!”
아주 짧은 순간, 그 유명한 그레이엘프가 여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미리 휴대폰 사진촬영 기능을 켜둔 사람들이 많았다. 덕분에 약 0.4초 정도 그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재의 왕자를 어찌어찌 휴대폰에 담아낸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이 자신이 찍은 유명 엘프의 사진을 SNS에 올렸다. 이 역사적 엘프를 실제 목격하고 그 증거를 남겼음에 감격하듯, 호들갑스럽게.
뒤이어 비슷한 목격 사진이 올라왔다. 찍힌 인물은 같았지만 장소는 모두 달랐다. 개선문 앞에서, 클레르몽페랑 시청에서, 프랑스 동부 샤모니에서, 남부 카르카손에서, 프랑스 북서단 브류타뉴에서, 이 엘프가 목격되었고 그 증거가 올라왔다.
이 엘프는 너무 갑작스레 나타나서는 너무 빨리 사라지길 반복하는지라, 단순히 순발력만으로 사진을 찍을 수는 없었다. 미리 예상하고서 동영상을 촬영한 운 좋은 사람들만이 이 엘프를 목격했음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렇듯 이 엘프를 사진에 담아 올리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올라온 목격 사진이 많았다. 너무 많았다.
이 엘프가 나타난 장소가 너무 많은 탓이었다.
유독 목격 사진이 많았던 장소는 루브르 박물관과 바스티유 광장에 였는데, 그곳에 단순히 관광객이 많아서는 아니었다.
유독 두 장소에만 재의 왕자가 일 분이나 머물렀기 때문이다.
SNS에 올라온 증언에 따르면 그 순간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고, 모두 뻣뻣하게 굳어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재의 왕자가 나타난 지 삼십여 초가 지나서야 겨우 입만 열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모두의 입에서 “I'm not French!”가 울려퍼졌다고. 관광객뿐만 아니라 프랑스인들의 입에서도 그랬다고 했다.
군경이 이 불법입국자를 상대로 뭘 할 수는 없었다. 그 전에, 프랑스의 윗분들에게는 그들에게 뭘 하라고 명령내릴 시간조차 없었다.
시간이 충분해도 뭘 하라 명령내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만 개의 마지노선이 있어도 이 망령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 귀쟁이가······”
로랑 의장의 말에 다른 의원이 발작했다.
“입조심! 들을지 몰라! 엘프들은 귀가 좋소!”
아무리 엘프의 귀가 좋아도 여기 대화를 들을 리는 없을 텐데.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병적인 공포를 느끼는 모양이다.
로랑은 굳이 지적하지 않고 정정했다.
“아무튼, 이 엘프가 지금 뭐하는 거요? 왜 여기저기 나타나길 반복하는 거지?”
“좌표를······ 수집하는 거요. 텔레포트를 경유할······”
로랑은 신음했다.
“단순히 무력시위는 아니란 말이지.”
그래서 더 나은가 하면, 결코 아니었다.
뚜렷한 목적이 있는 행위라면 뚜렷한 무언가가 뒤따를 수 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그것을 두려워했다.
아주 짧은 시간, 불과 십 분도 안 되는 그 시간에 엘리제 궁전의 핫라인은 마치 여름철 풀벌레들처럼 마구 울었다.
여기저기서 목격정보가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오베르뉴에서, 생테티엔에서, 다음에는 근처 군용 무선국에서.
마지막 목격 정보는 특히 모두를 섬뜩하게 만들었는데, 핵 발사명령이 경유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에서 연상되는 몇 가지 암울한 전망은 여기 모인 모든 책임자들을 반쯤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불청객을 계속 모른 척할 테요? 이대로면 이 엘프가 프랑스의 그 어떤 군인보다 프랑스 내 군사시설 위치를 더 해박해지겠군. 그러도록 내버려둘 거요?”
“그런 순 없지.”
“그럼 무엇을······”
로랑은 짧게 고민하고는 명령을 내렸다.
“만남을 주선하시오. 최대한 빨리.”
만남을 주선하는 데에는 공무원은 물론 경찰과 군인까지 모조리 동원되었다.
수백만 명이 바삐 움직여 재의 왕자가 나타날 만한 곳에 대기한 것이다. 만나자고 전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이 재의 왕자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하기는 불가능했다. 앞서 방문한 두 장소를 제외하고, 재의 왕자는 한 장소에 가장 오래 있을 때도 일 초 이상 머무르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두 단어 이상을 말하기는 너무 빠듯한 시간이다.
서둘러 ‘만나길 원한다’고 적힌 팻말을 제작하는 동시에 프린터까지 총동원했다.
수십만 대의 프린터가 똑같은 전단지를 찍어내서는, 프랑스 모든 곳에 배포했다. 공무원들이 옥상에 올라가 뿌리는 동시에 저공비행기까지 동원해서 전단지를 살포했다.
그 노력 덕분에 전단지는 마치 비처럼 쏟아내렸다.
“하늘에······”
그것을 프랑스의 시민들이 보았다.
평온한 마음으로 보지는 못했다.
그것은 마치 공습을 예고하는 전단지 투하를 연상케 했다.
마침 비행기 하나가 그들 사이로 지나갔다. 불안 반, 흥미 반의 심정으로 스마트폰을 들고 있던 사람들이 그 순간 떠올린 단어는 하나였다.
3차 대전.
거기서 연상되는 또 다른 단어를 누군가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폭격이다!”
전단지가 투하된 직후에 폭격이 오는 것은 누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지만 지금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비명지르며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한 가운데에 재의 왕자가 나타났다.
도망자들의 한 가운데에서, 가온은 자신을 알아보고 비명지르는 남자를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잔뜩 떨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텔레포트를 방해하려는 수작인 줄 알았다. 텔레포트할 위치에 공기 이외 무언가가 있다면 확실히 텔레포트하기 어렵게 되니까.
그러나 가만 보니 자신에게 뭔가 전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가온은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를 보았다. 흘긋 시선만을 주었다. 왕족은 평민들 앞에서 고개 숙이거나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그래서 가온은 전단지를 주우려는 대신, 칼을 뽑았다.
그 순간, 찢어지는 비명이 울리더니 기어이 남자가 졸도했다.
다행히 가온의 칼은 그 남자를 향하지 않았다.
살짝 움직인 칼은 한 장의 전단지를 찍었다.
그것을 살며시 위로 올려 읽어내렸다.
「가온 경께
불미스러운 역사에 깊이 사죄드리며, 프랑스 정부는 이번 사태에 대해 해명할 의사가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경께서는 충분히 관광을 즐기셨다면 모쪼록 여기 적힌 장소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재의 왕자는 초청에 응했다.
그러니까 0.3초 뒤에, 가온은 엘리제 궁전에 있었다.
그곳은 이미 비상사태였지만 이제 더욱 비상사태가 되었다.
“가온······ 경.”
귀빈이자 불청객인 엘프를 맞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바삐 움직이던 사람들은 모두 몸이 굳었다. 가온이 여기저기 비상적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 바로 당도하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수 킬로미터를 0.4초마다 이동하는 엘프란 시간 감각이 적응하기엔 너무 초자연적인 탓이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다 멈춰버린 사람들을 가온은 우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프랑스에 발 디딘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예의가 없군. 초청창을 보내고는 손님을 맞을 준비가 안 되었다니.”
이 와중에 한 의원이 책임감을 떠올렸다. 너무 놀란 와중에도 겨우 입을 열었다.
“이해해주십시오. 하찮은 평민들이라 왕족을 맞이하는 예를 잘 알지 못한 까닭입니다. 모쪼록 이해해주시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그리 답하면서 가온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외교적 무례에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그저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에 깊은 안도를 느꼈을 뿐이다.
“깊이 사죄드리며, 동시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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