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소드마스터 하고 - [2]
엘프 정도로 오래된 종족이면 신화를 비현실적 은유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하기 마련이다.
몇몇 나이 든 엘프, 그러니까 인간들이 뗀석기를 꽤 신식 문물로 여기던 시절에도 늙은이라 불리던 우드엘프들은 특히 그렇다.
그 나이든 엘프들은 달과 순결의 여신이 언젠가 남자 사냥꾼과 연애하다 발각된 스캔들을 기억하고 있다. 이후로 여신이 남자를 꺼린 것은 자기가 레즈비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유니콘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이유가 아님도 알고 있다.
그 인기 없는 여신이 찾아와 인기 없는 신앙을 강요한 이유도 알고 있다.
자기네가 성생활을 어찌 즐기든, 피임만 잘 해내면 신들이 화내지 않으리란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우드엘프들은 순결의 맹세를 했음에도 자주 성생활을 즐긴다.
그렇듯 엘프들의 신앙심이 깊지 않은 것은 썩 놀라운 일이 아니다. 어차피 엘프들은 잘 죽지 않으니 사후세계를 썩 두려워하지도 않는 데다, 몇몇 우드엘프들은 자기네 여신보다도 나이가 많다.
물론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일부 엘프들은 신들의 존재를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엘프들은 자기네 여신과 그 가르침에 종교적으로 심취했다.
가르침 그대로 순결하기 위해, 남녀 모두가 일체의 성욕을 외면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 엘프들은 자신들을 하이엘프라 불렀다.
자기네가 엘프들의 영적 지도자이며 다른 엘프들을 천국으로 이끌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이후로 하이엘프들은 겁간당한 우드엘프 소녀에게 자결하여 수치를 씻어야 하노라 주장하다가 분노한 우드엘프들과 이별했으며, 숲을 떠나서는 웬 커다란 나무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그 커다란 나무에 달과 순결의 여신이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위대한 신성을 나무에 심어 여신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세계수의 탄생이다.
그 역사적인 경사 이후, 만 년이 흐른 지금.
그 신성한 나무는 이제 없다. 그 나무가 자랐던 자리에는 이제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란 건물 한 채가 솟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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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회장님! 어디 가시는지 알겠네? 물 빼러 가십니······”
가온에게 인사하던 플레이어는 자기 말이 무시당하자 머쓱했다.
평소 같으면 대답이 돌아왔는데. 지금 가는 곳이 가는 곳이다 보니 창피해서 저러나?
한편 가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닥치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지금 가온은 기분이 좋지 않다. 아주 좋지 않다.
‘미친 게임. 거지 같은 개발사.’
그 쓰레기 유니콘이 마치 엘프의 수호자인 것처럼 구는 상황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화가 나는 걸 넘어 머릿속이 냉정해질 지경이다.
지존무쌍이 알려준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소름 끼칠 만치 거대한 인파가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실린 절실함을 보기만 해도 가온은 욕지기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는 척하는 사람이 없도록 투명화 주문을 걸었다.
사람들이 선 줄을 무시하고, 한 건물에 들어섰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가상현실 매춘업소에.
내부에도 사람이 끔찍하게 많았다. 요금이 비싸다더니, 그 사실은 썩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기야 이상형과 관계하는 데 고작 칠만 원이라면 혹할 만도 하다.
이상형은커녕 그 어떤 평범한 이성과도 연애할 능력이 없는, 그래서 이성이라곤 TV 속 연예인들만 본 나머지 눈만 높아져 버린 하류 인생들.
그 대표주자인 4판타지 플레이어들에게는 이 업소가 너무나도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종업원의 인사를 무시하고 방에 들어갔다.
방은 이상할 만치 널찍했다. 칼을 뽑아서는 벽을 그어보았다. 실선조차 그어지지 않았다.
‘벽은 파괴 불가 오브젝트······ 검기 쓰다 들킬 염려는 없겠네.’
주변 환경을 파악하는 중에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말씀해주십시오. 간략하게도 좋고, 구체적이어도 좋습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목소리는 거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판타지 주민쯤 되면 이런 일에 놀라지 않는다.
가온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이엘프 남자.”
동성애자를 위한 서비스가 가능하다더니, 사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당신에게 봉사를······”
거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아름답게 생긴 하이엘프 남자였다.
가온은 그 목에 칼을 찔러넣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뭘 봐.”
하이엘프 남자에게 쏘아붙이고는 칼을 뽑았다.
그리고 기다리자니, 인터넷에서 본 그대로의 현상이 일어났다.
가온 특유의 예리한 감각이 경고를 토해냈다.
저 멀리서 날아오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로부터 몇 초 지나, 창문 유리가 와장창 깨지더니, 그 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와 방안에 착지했다.
이 미터짜리 포탄처럼 발사된 남자. 그 얼굴을 알아본 가온이 이를 악물었다.
‘하고.’
얼굴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하반신이었다.
근육이 꽉 찬 사슴의 다리.
수화(獸化). 달 여신이 자신의 대전사에게 내린 권능이다. 여기에 온갖 마법 주문을 추가로 걸어 하고는 폭발적인 다릿심을 낼 수 있다. 최대 1.2km를 도약할 수 있는 것은 그 덕이다.
그 초인적인 도약의 대가로 권능이 하고의 몸에서 사라져갔다.
사슴의 다리가 엘프의 다리로 돌아오는 가운데······.
하고가 초승달처럼 구부러진 칼을 뽑았다.
방안에 달빛이 가득 찼다. 달 여신을 모시는 엘프들 특유의 검기다.
신성하기까지 한 그 달빛, 그러나 가온은 감흥이 없다.
이쪽도 칼에 검기를 씌울 뿐이다.
달빛 받은 재가 일렁인다.
“유니콘 새끼, 다리 사이 뿔을 뽑아주지.”
가온이 도발하던 그때, 하고의 손이 움직였다.
도발에 화가 나 선제공격을 했나?
아니다. 달빛의 목표물은 가온이 아니라 멀뚱히 있던 불운한 몽마였다.
하이엘프 남자의 목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깔끔하게 잘려나가 바닥을 구르는 그 머리.
가온의 몸이 떨린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결과물들을 본 적이 있다.
잘려나간 그녀들의 두개골, 가끔 꿈에도 나오는······.
이런 역사적 사실마저 재현했나? 야사에 가까워서 역사책에도 안 나오는데?
가온으로서는 그리 생각하며 놀라거나 분노할 여유도 없다.
공포가 아닌, 분노로 인해 이성이 마비된다. 꽤 풍화되었다고 여긴 울분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가온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아닌 무언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여신께서 말씀하시었다.
‘내 대전사여, 네 여신의 말을 잊었느냐? 모름지기 열 살이 넘었다면 오락과 현실을 구분해야 하는 법이다!’
‘여신이시여, 저는······’
‘당장! 과몰입을 그치라! 내 대전사가 현실과 오락을 구분할 줄 앎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콤퓨타는 압수다!’
수십 년 전에도 그랬듯, 여신의 말씀에 비로소 진정할 수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여신이시여. 컴퓨터 압수는 안 됩니다. 모바일로 못 들어가는 사이트가 얼마나 많은데······’
‘좀 평온해졌느냐?’
‘예. 덕분에 비장함도 사라졌군요. 더 진지하게 싸우려면 패배에 패널티가 있어야 할 거 같은데······ 이번에는 기필코 여신께 승리를 바치겠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여신께서 내리시는 명을 뭐든 수행하겠습니다. 제가 12시 이전에 잠들란 명도 포함해서······’
‘앞으로 오락을 그만두란 것도?’
가온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것만은 빼고.’
두 소드마스터의 대치가 이어지던 중, 하고가 먼저 움직였다.
머리를 향해 뻗어오는 굽은 칼날. 거리 감각을 무시하고, 초승달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온다.
가온은 달빛을 가르며 재를 뻗는다. 반격에 대한 반격.
하고는 거기에 또 반격을 해온다.
가온은 검술이 아닌 반사신경에 의지해 그 공격을 피한다.
달빛이 계속해서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 달빛의 권세에서 재는 명줄을 이어나가기 급급하다······
‘젠장.’
실력이 대폭 늘어 이제는 좀 할 만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만용이었나?
신음하는 와중에 또다시 초승달이 빛난다. 급소를 노려오는 날카로운 베기를 가온은 마주 베어 막아내었다.
이번에는 반사신경이 아닌, 익혀둔 검술을 통한 방어에 성공했다. 가온은 웃으려 애썼다.
‘아니, 전보다는 좀 할 만해진 것 같기도······’
하기야 예전 싸움은 현실의 육체로 벌였다. 반신의 가공할 육체. 지금보다 몇 배 빠르고 강한 그 육체가 아니라 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의 육체로 버티는 것은 꽤 대단한 발전이다.
가온은 조금이나마 위안을 해보지만, 결국 밀리는 것은 변함이 없다.
사십 분가량 사투를 치른 끝에, 가온은 죽었다.
게임 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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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 기기를 나온 가온은 패배의 분을 삭이려 애썼다. 씩씩거리며, 여신께 여쭈었다.
‘이제 게임사에 항의하러 갈까요? 게임에 그딴 놈 출연시킨 거 따지러 말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느냐, 가온? 생각해보면 썩 나쁜 일은 아닐 텐데.’
그렇다. 생각해보면 게임사의 이번 조치는 자신에게 유리하긴 하다.
지금까지 게임에서 소드마스터 하나를 만나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었다. 이제부터는 아니다.
한편 여신께서 말씀하시었다.
‘아무튼 내 대전사가 이제 여신과의 약속을 지킬 때가 왔도다. 네 여신은 마침 내 대전사에게 시킬 일이 있었나니. 어서 외출할 준비를 하라, 가온.’
‘지금 말입니까?’
‘내 대전사는 네 여신의 말을 오해없이 들었도다. 지금 나갈 준비를 하라.’
‘하지만······ 지금은 비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운에 잠겨있어야 할 때입니다. 여신이시여.’
외출하기 싫었던 가온이 말했지만, 여신의 뜻은 변함이 없으셨다.
‘그렇다면 비극적인 분위기에서 여운에 잠긴 채 네 여신의 청을 들어주면 되겠구나. 비극적인 분위기와 여운 속에서 머리를 감고 의복을 입으라, 대전사여.’
가온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예. 기꺼이 그리하지요. 그런데 시킬 일이라 하시면······’
‘선거를 도와야 함이라.’
가온은 잠시 굳어있다가 물었다.
‘선거 준비라니요?’
‘네 여신이 대전사가 수행할 거룩한 임무를 일러주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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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차원문이 열린 이래, 엘프 게릴라들은 제국주의자들의 골치였다. 화력만으로 제압할 수 없는 적들.
그들 중에 섞인 엘프 소드마스터들은 아예 악몽이었다. 병영에 침투해 지휘관들을 참살하는, 막을 방법도 없는 악몽 말이다.
하도 살해된 나머지 장교들의 수가 부족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미군은 보복에 나섰다. 비겁한 게릴라들에게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
우드엘프들의 숲에 고엽제를 뿌리고 세계수를 불태웠다. 그 나무가 있던 자리에 문명의 증거인 마천루를 세웠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이 벌인 가장 멍청한 짓 중 하나로 꼽히는 일이었다.
절대 늙어 죽지 않는, 그래서 절대 잊지도 않는 자들에게 크나큰 원한을 심어주는 일이었으므로.
원한 품은 하이엘프가 원수들을 노려보았다.
수화의 권능 덕에 달 여신 대전사의 시력은 매의 그것과 같다.
소드마스터 하고는 2km 너머 미군 전초기지를 보았다.
조그마한 열화상 카메라 드론들이 날아다니는 가운데, 상공에는 열원탐지 장비가 달린 무인기들이 수두룩하게 떠다니고 있다.
언제 봐도 그의 적은 강력하다. 초인이자 여신의 대전사인 하고조차도 저 경계를 그냥 뚫기는 버겁다.
그래서 적의 적과 손을 잡았다.
IS인지 하는 것들. 자기네도 하이엘프들처럼 순결의 가치를 중시한다면서 손을 잡자고 권해왔다.
그러나 정작 와서 보니 남자들부터가 순결을 지키지 않는 쓰레기들이다. 남녀 모두가 순결해야 하는 하이엘프의 기준에 그것은 두 배로 역겹다.
약속된 습격이 시작된다.
종교적인 함성이 울린다.
소총을 든 IS 대원들이 미 전초기지를 공격하는 가운데, IED 차량들이 질주했다.
이 자살 폭탄 테러는 하도 악명 높은 나머지 대응이 완벽하다. 전초기지에서 로켓탄들이 날아와 폭탄을 가득 채운 차량들을 폭파했다.
그러나 기어이 자살 폭탄 차량 한 대가 기지에 도달했다.
성대한 폭발. 연기가 기지를 뒤덮는다.
그 순간, 하고의 주변에서 울리는 소리. 그 말뜻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거기 섞인 열띤 달아오름은 느낄 수 있다.
동료의 죽음에 IS 대원들이 환호하고 있다. 역겨운 것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하고는 해야 할 일을 한다.
아까부터 열심히 몸에 온갖 주문을 걸고 있었다. 보호의 주문, 신체 강화의 주문, 경량화 주문까지 걸고는 오거 포션까지 들이키고서야 모든 준비가 끝났다.
옛날 같으면 약물 복용은 몸의 순결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했겠지만, 요즘은 어쩔 수가 없다. 저 강대한 적들과 싸우려면······.
하고는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여신이시여. 분노를 노래하소서.”
대전사의 기도에 응해 달의 여신이 노래했다.
하고의 다리가 사슴의 그것으로 변했다. 이미 온갖 주문이 더해진 지금, 그 근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땅을 박차고, 사상 최대의 서전트 점프를 했다.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1km 하고도 240m를 더 날아가서는 착지에 성공했다.
“Oh, God! oh, God······”
테러리스트들의 습격으로 혼란에 빠져있던 미군은 소드마스터의 등장에 경기했다.
달과 순결의 여신은 사냥의 여신이기도 하다.
사냥감들의 공포를 안주 삼아, 여신이 분노를 노래한다.
달빛이 춤춘다.
그날, 미 전초기지 하나는 13분 만에 궤멸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폐허에서 IS 대원들은 성전이 그 어느 때보다 순조롭다며 환호했다. 악명 높은 미 공군 화력이 이쪽을 향하기 전에, 부랴부랴 전리품들을 옮겨 담았다.
전리품에는 노예도 포함되어 있었다.
픽업트럭에 실리는 여의사를 보며 하고는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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