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53화 (53/135)

LV.16 길드장 강주석 - [3]

류시범이 두 엘프의 유학 교육에서 풀려난 것은 무전 덕분이었다.

전선의 지휘관이 보낸 무전이었다.

「회의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제야 류시범은 방금까지 자신이 협상장에서 분노했었음을 깨달았다. 두 엘프에게 시달리다 못해 정신적으로 공격받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렸을 뿐이다.

“결렬됐어.”

「그럼 다시 교전에 돌입해야겠습니까?」

“그래야지. 어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그리 지시를 내린 뒤, 류시범은 나루에게 말했다.

“자, 다시 싸움 일어날 겁니다. 이제 일할 시간입니다. 레벨 올리셔야지요?”

나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전선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가온이 정체가 발각되는 상황을 넘겼노라며 안심하던 그때였다.

나루가 가온을 돌아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온? 이유는 몰라도 신분을 밝히기 싫어하는 거 같은데.”

“그 가온 아니라니까······”

“그럼 그 가온 아닌 가온. 하나만 전하자.”

“무얼 말입니까?”

“우리 애들이 보고 싶어 해. 다들 네가 자신들을 위해 헌신했음을 기억한단다. 이백 년의 헌신이 고통으로 돌아와서 진심으로 안타깝게들 생각하고. 언제 만나서 지금 괜찮게 지낸다는 걸 보여주면 그 애들에겐 큰 위로가 될 거야. 기쁨이 될 테고.”

가온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가온은 아니지만 기억해두지요.”

이 와중에 류시범은 전율했다.

지금 자신은 역사의 한 현장에 있다. 소드마스터 둘이 자신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옛 역사의 편린이 느껴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악명 높은 사행성 게임에서 말년을 보내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수치스러웠는데.

“가실까요? 그럼 방아쇠 당기실 줄 안다는 것도 드러났으니, 이제 기관총 진지에 대기하시다가 적 오면 마구 쏴서 경험치 벌어들이시면”

류시범이 웃으며 말하니, 나루에게서 방금 가온에게 말하던 그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나루는 칭얼거리듯이 중얼거렸다.

“총 싫어. 귀 아파. 활 줘······”

“아니, 활을 어디서 구합니까. 가뜩이나 지금 근력 약해서 활 장력 감당을 못하시면서.”

“너 지금 나 힘 약하다고 구박하니? 넌 나이 먹으면 정정할 거 같아? 나이 먹었음 죽으라 이거지, 응?”

“아니 대체······ 나루님께 뭔 말 하려면 단군이라도 모셔와야겠습니다그려.”

“단군? 몇 살인데?”

“반만 년 한민족의 시조시니까 살아계시면 반만 살이지요.”

“내가 여섯 살 많네. 누나라 부르라 전해.”

이 순간 류시범이 느낀 공포는 너무나도 강렬한 것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물든 나머지 116살 넘으면 동갑 아니었느냐 따지지도 못했다.

나루를 어찌어찌 기관총 진지에 앉히는 데 성공한 뒤, 류시범은 지휘 본부에 돌아왔다.

부관을 비롯한 부하 장교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내가 꼰대짓 하면 뺨 때려라.”

“예?”

“엘프 둘이 내게 깨달음을 줬다. 별 논리 없이 권위만으로 찍어누르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일인지······. 내가 그동안 얼마나 너희에게 스트레스를 줬는지도 알겠다. 이젠 안 그럴 거다.”

백골부대원들은 두 엘프와 한 전 장성 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오래 산 자들의 지혜가 이 늙은 꼰대를 일깨웠구나 싶어 감동할 뿐이다.

류시범의 부관 또한 깊이 감격하는 가운데, 평화 협상 결렬 소식이 양 진영에 퍼졌다.

백골부대원들은 교전을 개시했다. 오랜만에 웃으면서.

그러나 반대 측 진영은 그러지 못했다.

*******

백골부대와 그에 맞선 길드들의 전투는 일주일을 넘게 끌었다. 한 전선에서 대치를 끝없이 반복했다.

백골부대에 맞선 연합, 소위 ‘길드 연합’으로서는 이렇게 긴 전투를 경험해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실제 전쟁이야 이렇듯 지겨울 정도로 길기 마련이다. 기관총과 참호전의 등장으로 인한 현대전의 특징 아닌가. 별 진전이 없는 가운데, 끝없이 소모만을 반복하는.

그동안 4판타지 온라인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여지껏 4판타지 길드들의 싸움은 조그만 영역을 놓고 싸우는 점령전이었다.

특정한 영역을 뺏거나 뺏기는 순간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밀려 후퇴하기만 해도 승패가 결정되고 싸움이 끝나곤 했다. 이번 전쟁에서 그렇듯, 사력을 다해 적을 밀어냈다 싶으면 끝없이 몰려오는 증원에 다시 대치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길드 연합에 소속된 한국 플레이어들은 사실 제대로 된 현대 전쟁을 이번에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에 감동을 받았느냐면 그렇지 않았다. 절대 그렇지 않았다. 모두 협상이 결렬돼서 이 지겹고 이득 없는 싸움이 계속되리란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국의 운명이니 뭐니 개소리는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백두 길드 부길드장의 외침에 강주석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게 왜 개소리야? 너 한국인 아니야? 한국인이 한국의 안위를 위해 힘쓰자는 게 뭐가 개소리야!”

“저쪽에 아무런 이득이 없는 소리 아냐! 애초에 게임에서 힘을 모아 적 국가원수를 죽이자니, 그게 뭔 등신 같은 소리야? 그딴 소리 듣고 누가 전쟁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해?”

“아니 씹, 다 아는 있어서 하는 소리였어! 모르면 닥치고 있지 어디서 욕을······”

“결국 댁이 협상 마쳤는데 욕이 안 나와?”

“애초에 협상 자체가 맘에 안 들었어! 일베 길드랑 평화조약을 왜 맺어?”

“이러다 망하니까, 새끼야! 지금 총탄이랑 포탄 소모로 돈 엄청나게 빠져나가고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종전 안 하면 망하는 거 모르고······ 길드원들 생계가 걸렸는데 역으로 화를 내?”

말다툼을 묻어버릴 만치 강렬한 포성이 울렸다.

포성과 함께 전투가 개시되었다. 모두 그 사실을 알았다.

“평화 협상 깨졌나봐요. 이러면 안 되는데······”

이복동의 말에 지존무쌍은 웃었다.

“뭐, 어쨌건 우린 돈 좀 벌었으니까 괜찮지 않나? 차 운전만 했는데 이백만 원, 개쩔어······”

이복동도 같은 금액을 받았지만 지금 기뻐할 수는 없었다.

이복동은 단순히 돈만 받고 협상단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그 평화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한국의 운명이 달렸느니 뭐니 하는 프로파간다가 먹히면 좋았을 텐데. 그리 인터넷 사이트에 광고하면 게임 이미지도 좀 좋아질 거고, 떠난 유저들도 돌아올 거고. 게임 수명도 늘어날 거고······’

어제 뉴스는 너무나도 타격이 컸다. 사장이니 회장이니 불리며 유저들에게 돈을 쓰던 부자 플레이어들 상당수가 어제 뉴스로 게임을 그만둔 것이다.

이대로면 이복동과 같은 프로게이머가 맡을 만한 일거리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게임 이미지 악화가 계속되다 보면 결국 한국인들은 이 게임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 되면 훈련하는 것도 무소용······’

여전히 하루 여섯 시간 이상 훈련하는 가운데, 불안이 갈수록 커진다.

한편 저 멀리서 거대 길드 운영진의 다툼은 계속되고 있었다.

“개돼지 새끼!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고작 돈 나간다고 징징거려! 한국 망하면 ”

“그동안 모은 돈 갖고 베트남 이민 가려 했다 새꺄! 떫냐!”

“어쭈, 그딴 고백을 해? 이런 매국노 새끼가······”

*******

전투가 계속되는 중, 류시범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평화 협상 맺게 여기까지 데려와 주신 거요. 저놈들 의뢰 받고 오셨다 하셨잖습니까?”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돈도 많으신 분이 고작 돈 때문에 의뢰를 받으신 건 아닐 테고. 혹시 저놈들이 한국의 운명이 걸렸느니 뭐니 했습니까? ”

“그래. 그거 알고 받은 거 맞아. 왜?”

“혹시 참마황이 늙어 죽길 바라시는 겁니까?”

“왜. 흉턴이 내 친구 족쳐서? 거기 원한을 품었을 거 같아?”

“예······”

“설마. 원한 같은 건 없어.”

“어째섭니까?”

“그건 잘한 일이었어. 더 죽이기 전에 멈춰줬으니. 이상한 짓 하는 친구를 막아줬으니 오히려 감사를 느껴야겠지.”

“아무튼 참마황에게 복수하고 싶진 않으시다 이거죠? 그 복수를 위해 평화협상을 유도하신 것도 아니고······”

류시범이 조심스럽게 묻자 가온은 웃었다.

“설마. 복수하고 싶으면 직접 결투 신청이라도 하지 찌질하게 게임 속에서 그러겠니? 애초에 나라의 운명이 게임에 걸렸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게 말도 안 되지. 강주석 그 친구가 게임이랑 현실 구분을 못해.”

“그럼 왜?”

“게임 이미지 개선에 도움 될까 해서. 가뜩이나 4판타지 온라인이 세간에 막장 게임으로 악명 높았는데, 어제 뉴스로 아예 나라 팔아먹는 게임이 돼버렸잖아?”

“한국인들 사이에 게임 이미지가 왜 중요하신지 모르겠는데 말입니다.”

“ARMA라고, 동호회 회원들 몇 명이 게임 접었거든. 어제 뉴스 때문에 겜 이미지 확 나빠져서. 겜 이미지 좋아져서 다시 돌아오면 좋겠어. 뭐,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랑 내가 정말 친구인 건 아니었으니까 안 돌아온다고 슬플 것까지는 없고······ 그러니 자네가 평화협상 맺건 말건 난 신경 안 써.”

“그래도 굳이 어느 쪽이 좋은지 말씀하신다면?”

“뭐, 평화 협상하면 좋지. 그러는 김에 한국의 운명을 위해 결정했다 떠들어서 게임 이미지 회복에 도움 주면 더 좋고.”

류시범은 고심 끝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평화 협상, 하겠습니다.”

*******

평화 협상이 결렬되어 교전이 개시된 지 한 시간 만에, 다시 양 진영이 만났으며 이번에야말로 평화 협상을 체결했다.

협상을 받아들이며 백골부대 길드장 류시범은 이렇게 말했다. 따로 은혜를 입은 가온 씨가 설득해서 겨우 맘이 바뀐 거라고. 그 분께 고마운 줄 알라고.

그리고 백두 길드원들이 이때 느낀 감사함이란 정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죽다 살아난 기분으로 감사를 전해왔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탁드린 보람이 있다 못해 넘치는군요. 우리 길드를 벌써 두 번이나 구해주셨습니다.”

백두 부길드장이 허리를 숙이자 가온은 씩 웃었다.

“감사할 것까지야.”

별로 설득다운 설득 따윈 하지 않았는데 모두의 칭송을 받게 되어 기분이 좋다. 그래서 가온은 그저 웃을 뿐, 다른 사례는 거절했다.

백두 부길드장은 거듭 감사를 전해오며 중얼거렸다.

“부외자인 데다 돈도 많은 가온 씨도 이렇게 우릴 위해 열심히 행동해주셨는데, 반면 길드장 저 새끼는······”

새끼라 불린 강주석은 벌컥 성냈다.

“너 이따구로 굴면서 자리보전 할 수 있을 거 같냐?”

“왜, 욕했다고 부길마 자리 쫓아내게?”

“그 이유 말고 딴 이유로도 쫓아낼 수 있지. 너 그 동안 횡령하는 거 모를 줄 알았냐? 아는 동생이라고 봐줬더니 지가 길드장인 줄 알아. 너 이제 부길마 노릇하며 떼돈 버는 것도 끝이다, 분수도 모르는 새끼.”

백두 부길드장의 낯이 하얗게 질린 가운데, 강주석은 애써 웃으며 가온에게 감사를 전해왔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국의 운명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어요.”

결국 평화협상이 체결되었다.

그 평화협상을 강주석은 백두 길드장으로서 인터넷 사이트에 열심히도 광고했다.

한국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 한국 플레이어들이 모두 뭉쳤노라고. 게이머들이 단결하여 참마황을 무찌를 것이라고.

그러나 그 광고는 생각만큼의 이미지 개선 효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극한의 사행성으로 소문난 4판타지 온라인인 것이다. 그 게임의 프로게이머들이 한국을 위해 뭘 하겠다느니 하는 말은 별로 설득력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게임에서 힘을 합쳐 한국을 위하겠단 말 또한 허무맹랑한 헛소리로 느껴질 뿐이었다.

결국 게임 이미지 자체는 그다지 회복 되지 않았고, 날이 지날수록 4판타지 온라인의 이미지는 악화될 뿐이었다. 그에 따라 플레이어들의 수가 줄어드는 가운데, 프로게이머들은 위기감을 느꼈다.

“이러다 좆되는데······”

“게임사 대책 없나? 한국 유저가 제일 많으니까, 한국 유저가 대거 이탈하면 게임사 입장에도 타격일 건데?”

4판타지 플레이어들은 모두 게임사의 대책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자기네는 아스 주전파와 상관없노라 발표한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이미지 악화를 해결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리 바라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플레이어들과 소통하지 않기로 유명한 4판타지 온라인이다. 이 게임 운영진은 평소에 공지사항 하나 올리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다음 날, 4판타지 온라인 공식 사이트에 공지사항 하나가 올라왔다.

이 게임사가 아스 주전파와 무관하다는 발표는 아니었다. 게임 이미지 개선에 도움 될 만한 발표 또한 아니었다.

“와우!”

그러나 모든 프로게이머들은 이 발표에 열광했다. 예고된 업데이트는 그 어느 발표보다도 더 확실하게, 떠나버린 4판타지 플레이어들을 복귀시키고도 남을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떠난 것보다 더 많은 이들이 오고도 남을 발표였다.

공지사항의 업데이트 예고를 본 가온은 충격을 받았다.

“게임 내 성행위 제한 해제? 성행위 관련 시설까지 추가하겠다고?”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