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52화 (52/135)

LV.16 길드장 강주석 - [2]

류시범은 이 엘프를 생각하면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어제 뉴스에서 본 역사적 엘프, 각국 대사들조차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던 이 엘프 앞에서 편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온······ 경?”

어제 뉴스에서 본 역사적 엘프는 헛소리를 시작했다.

“난 그 가온이 아니라 재의 왕자 가온 경을 존경하는 우드엘프라니까? 편하게 가온 씨라 부르렴.”

혼란 속에서 류시범은 깊이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한숨 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예, 아무튼 가온 씨가 한국인들 전쟁에 관심이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휴전을 명하러 오신 겁니까?”

“아니, 내가 왜? 난 그냥 사절단 호송 의뢰받고 온 거야. 여기까지 데려와서 자네랑 만나게 해주는 데 성공했으니 여기서 내 일은 끝이고.”

“그럼 제가 그놈들 휴전 요청에 마음대로 대응해도 괜찮을까요?”

“그거야 당연히 자네 마음이지. 왜? 빚진 것도 있고 하니 내가 지시하면 따르려 했나? 그럴 필요 없어. 그때 빚은 그냥 저 둘 챙겨주는 거로 갚으면 되는 거야. 알지? 나 게임 그만두면 둘한테 일감 좀 몰아달라 부탁했던 거.”

류시범은 저 멀리 서 있는 이복동과 지존무쌍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걸로 빚을 갚은 셈 치자니 너무 쉬운 부탁인데요.”

“뭘, 나는 뭐 어려운 일 했나? 아무튼 요새 카르세에서 잘 지내고?”

“예, 덕분에······”

“말은 그리 하지만 타향살이가 쉽지 않을 텐데. 뭔가 부탁할 일 있음 형한테 말하고······ 아무튼 난 신경 쓸 거 없으니까, 이만 가서 일 봐. 협상하러 온 애들 저기서 기다리고 있더라.”

류시범은 울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오랜만에 진정으로 고마운 감정을 느끼는 가운데, 문득 입을 열어 경고했다.

“그런데 우드엘프라 소개하시는 거, 이젠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왜?”

“진짜 우드엘프가 와있거든요. 여기에 말입니다.”

가온은 눈을 크게 뜨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루?”

“아, 역시 아시는군요.”

그 여동생이 말해줘서 알고 있기는 했지만, 정말 이 게임을 시작했다니? 새삼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나루라면 내가 절대 만나선 안 될 소드마스터······.’

이쪽의 우드엘프 설정이 가짜임을 단번에 파악하리라는 점에서, 이쪽이 이길 수 없으리란 점에서 그러했다.

나루는 공식적으로 소드마스터 사이의 대결에서 가장 높은 승률을 기록하는 검객이다. 소드마스터들의 친선대전에서 그녀의 기록은 2승 27무인데, 소드마스터들이라면 이 기록의 대단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의 능력이 동등한 소드마스터들끼리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는 대결을 벌이면 승부가 가려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그녀는 기어이 두 번이나 승리해내는 데 성공했으며, 그로써 그녀의 검술이 소드마스터들의 기준에도 놀라운 수준임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가온이 그녀와 대결하면, 그녀의 승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것이다. 가온은 그런 식으로 자기 부족한 실력이 탄로 나는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아니, 왜 소드마스터씩이나 돼서 한가롭게 게임이나 하고 그래······.’

가온은 속으로 신음하며 물었다.

“나에 대해 말한 건 아니지?”

“예. 숨기시는 것 같아서, 가온 경이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야, 목소리가 너무 커······.”

가온은 엘프 특유의 청력이 발휘될 것을 걱정했는데, 과연 나루는 귀 좋은 엘프였다.

“가온이 여기 있다고?”

청량한 목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 그럼 전 이만······”

자신을 원망하는 엘프를 내버려 두고, 류시범은 협상을 하러 떠났다.

걸으면서 표정을 관리했다. 최대한 딱딱하게. 엄격하게.

소드마스터와의 유쾌한 시간이 끝난 지금, 분수도 모르는 버러지들과의 시간이 찾아왔다.

*******

백골부대는 군대처럼 굴기로 유명하다. 경계를 서던 백골부대원은 길드장의 입장에 다 같이 경례를 붙였다.

“충! 성!”

사단장 시절에 그랬듯, 류시범은 뒷짐 진 채 느긋하게 걸어와 좌석에 앉았다.

맞은편, 휴전 협상을 요구하러 온 길드장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기가 질린 얼굴. 그들을 보며 류시범은 딱딱한 얼굴로 만족했다.

백두 길드의 부길드장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휴전 협상을······”

류시범은 허 하고 웃었다.

“휴전? 항복이겠지.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우린 아직 지지 않았습니다.”

“꼭 끝까지 해봐야 아나? 너흰 내 상대가 안 돼.”

“기어이 우릴 이기시더라도 피로스의 승리가 될 겁니다. 우리 땅을 다 뺏으시면 거지가 된 우리가 울면서 게임을 접겠습니까? 어차피 죽어도 24시간 뒤면 되살아나는데, 좀비 어택이나 계속하겠지요.”

“귀찮긴 하겠지. 그래서 협박하시겠다? 구질구질하게 굴겠다고?”

“아니요. 우린 협박이 아니라 협상을 원합니다. 휴전에 응하실 경우, 저희는 감사의 뜻에서 귀 길드에 몇 가지 양보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백두 부길드장은 자신들이 할 ‘양보’에 대해 말했는데, 그 양보란 사실상 패배자가 승리자에게 치르는 피해보상이나 다름없었다.

“저희는 귀 길드의 기로스 강 너머 모든 영역권을 인정할 것이고······”

백두 부길드장이 이쪽에 줄 이득들을 열거하는 가운데, 류시범은 생각했다.

‘괜찮네. 이 정도면 휴전할 만해. 어차피 내 주적은 김일성이기도 하고.’

처음 쳐들어갈 때부터 협상할 생각이 있기는 했다. 계속해서 이기고 있는 지금, 공세종말점에 도달할 즈음에야 가장 좋은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이고자 휴전을 거부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부길드장이 내놓는 조건들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이 정도면 확실히 지금 물러나는 것이 이득이다.

그 생각을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며, 류시범은 시선을 돌렸다.

백두 길드장 강주석 또한 여기 참석한 마당이었다. 놈의 얼굴을 보며 류시범은 불만스레 깍지를 꼈다.

강주석, 자신이 습격당할 때 크게 다치지 그랬냐고 막말한 개자식. 이전부터 자기 정치 성향을 문제 삼아온 원수이기도 했다. 백골부대의 일베 이미지는 반쯤 저놈이 부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주석을 향해 류시범이 말했다.

“그래서 사과의 말은 없고? 왜, 일베 틀딱한테 사과하자니 자존심이 상하나?”

정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류시범의 말에 강주석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한국의 운명이 지금 우리에게 달렸어요.”

“한국의 운명? 뭔 개소리야.”

“어제 뉴스 보셨죠.”

“봤는데, 뭐.”

“이제 우린 서로 아웅다웅할 게 아닙니다. 우린 다 같이 참마황의 우승을 저지해야 합니다.”

“뭐?”

“참마황을 늙어 죽게 만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뭔······”

류시범이 말을 흐리는 가운데, 강주석이 말했다.

“참마황은 늙었고, 이 게임 보상이 절실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3차 대전은 참마황이 새 육체로 갈아탄 이후에 벌어질 것이라더군요. 카르세에서 참마황의 게임 보상 획득을 위한 병력을 꾸릴 겁니다. 막아야 합니다! 놈들과 맞서려면 한국인 유저들의 전력을 보존해야 합니다!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요.”

류시범은 당황했다. 저 정보를 저딴 놈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물론 류시범이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왜, 일본 무지 싫어하면서. 이참에 아스와 함께 일본을 공격하자 하지 않고?”

“지금 사람 조롱할 때가 아닙니다. 류시범 씨도 한국 사람 아닙니까? 뭐가 우선인지를 아셔야지요.”

류시범의 표정이 굳었다. 류시범은 하루아침에 자기 국적이 바뀐 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남들한테 말하지 않을 정도로.

한편 류시범의 표정 변화를 강주석은 자기 말이 먹힌 걸로 해석한 모양이었다.

살짝 웃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 게 아닌가.

“개인적인 원한은 잊고 한국을 위해 헌신해봅시다, 류시범 씨. 전 군인 아닙니까? 나라의 녹을 받아온 분답게 나라에 보답을 하셔야지요!”

류시범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강주석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던 그때였다.

“꺼져.”

류시범이 소리지르자 모두 놀랐다.

류시범은 계속해서 마구 외쳤다.

“다 꺼져! 씨발 새끼들, 막말 사과하랬더니 어디서 가르치려 들어!”

“그럼 협상은······”

류시범은 무전기를 집어던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대로면 혈압이 올라 쓰러질 것 같았다. 더 저놈들의 얼굴을 보기도 싫었던 류시범은 자리를 박차고 협상장을 나왔다.

그때 총성이 울렸다.

탕 하고. 멀리서 난 소리였다.

류시범은 잔뜩 화난 중에도 눈을 크게 떴다.

가온이 있던 곳에서 난 총성이었다.

기겁한 류시범은 부랴부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나루는 현실에서야 아름답겠지만, 여기서는 지나치게 평범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커스터마이징 설정을 할 줄 모르는 탓에 기본 캐릭터를 골라버린 탓이다.

그러나 엘프답게도, 그 웃음만은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루는 가온을 향해 웃었다. 더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가온. 내 먼 친척. 만나서 정말 반가워. 우리 아이들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거든. 늘 감사를 전하고 싶었지. 우리 애들이 네 걱정을 많이 해. 만날 수 없어서 많이 불안해하고. 나도 그렇단다. 그 사건 이후로 정신적으로 위태로웠다고 들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그런데 지금 오락도 즐기는 거 보니 지금 좀 괜찮아진 거 같구나. 그렇다면 다행이네. 정말······”

그리고 이 순간, 가온은 그 어느 때보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다. 저 여자는 자신의 비극의 소드마스터 설정을 망치려 하고 있었다.

“아가씨, 저는 그 가온이 아닙니다.”

나루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동생 말 들어보니까 불과 화로의 여신님을 신앙하는 사제라던데? 거기에 소드마스터라고도 하고. 그럼 가온밖에 더 있나.”

“사제는 맞는데 소드마스터는 아닙니다.”

“그래?”

“예.”

그 순간, 탕! 나루는 몰래 감춰온 권총을 뽑아 쏘았다. 소드마스터답게 그 속사는 간결하면서도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날아온 총알. 가온이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러 막고는 실수를 깨닫던 그때였다.

류시범이 다가와 물었다.

“뭐하십니까?”

나루가 대답했다.

“이 애가 소드마스터인데 아니라고 우기더라. 그래서 시험해봤더니 소드마스터가 맞네. 총알 잘 막아. 이 거리에서 날아온 총알은 소드마스터도 막기 힘든데, 정말이지 감탄스러운······”

가온이 눈치를 줬고, 류시범은 도움에 나섰다.

“그런데 나루님, 방아쇠 당기실 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짓말을 들킨 나루는 소드마스터답게도 즉시 반격에 나섰다.

“오래 살면 뭐 할 줄 아는지 잊을 수도 있지. 어린놈이 어디서 어른 말에 트집을 잡니?”

말을 돌릴 기회라 판단한 가온이 거들었다.

“류시범 이 자식, 정말 한반도를 떠났다고 공맹의 도리를 다 잊은 거냐?”

류시범은 혼미함 속에서 중얼거렸다.

“아니, 제가 알아보니까 유교를 공부한 조선 사람들도 그리 나이만 따져서 상명하복하진 않았다던데······”

“어디서 어른을 가르치려 드는 거지.”

“인터넷에서 좀 본 거 가지고 아는 척이네? 애초에 난 조선 사람이 직접 가르친 유교를 배웠어, 인마!”

류시범은 엘프들에게 저따위로 유교를 가르친 누군가를 죽이고 싶노라 진심으로 생각하며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두 분끼린 장유유서 안 따집니까? 두 분 나이 차이가 꽤 날 것 같은데요.”

“엘프들끼린 괜찮아.”

“어째섭니까?”

“117세 이상이면 다 동갑이거든. 자네도 맞먹고 싶으면 116살만 넘기고 오라고.”

“왜 하필 116살입니까? 설마 그게 인간 수명 기네스 기록은 아니겠지요?”

정답인 모양이었다.

“어린 놈이 어디서 어른 말에 따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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