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반지성 - [1]
반지성은 산속에 살았다. 아버지와 둘이서.
아버지는 당신께서 독립운동가라 하셨다.
정말이지 독립운동가다운 분이셨다.
언제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민족 수호의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느니. 언젠가 민족을 독립시켜야 한다느니.
그 점을 몇 번이고 당부하며 가르침을 내리셨다.
“천둔검법이라 한다. 김시습 선사께서 내려주신 검법이니라.”
이 검법을 익히면 능히 왜적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 숭고한 목적을 위해 당신 또한 수련 중이라고도.
“이 동작은 악룡참수다. 여동빈이 칼을 휘둘러 악룡의 목을 베었듯 사악한 뱀과 같은 왜구의 목을······”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반지성은 칼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확실히 수련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외부와 차단된 깊은 산속, 친구도 없는 와중에 단련 말고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산속에서 칼만 휘두른다고 밥이 나오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쌀을 얻으러 하산했다.
그러다 왜놈에게 걸렸는데, 조선놈이 칼 차고 다니는 것을 왜놈은 좋게 보지 않았다.
시비를 거는 왜놈을 반지성은 쉽게도 때려 눕혔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해졌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곳곳에서 왜놈들이 달려와 반지성을 옭아매고는 수용소로 보냈다.
수용소에 오래 있지는 않았다. 왜놈들은 어디서든 싸우기 바빴고 늘 병력이 모자랐다.
급기야는 수용소의 죄수들을 죄다 최전선에 보내버렸다.
다른 세계 전선에 .
14살 소년에 불과했던 반지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총 한 자루를 들고 전장에 내몰렸다.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고통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수십 초마다 죽음이 귓가를 스치는 나날.
그렇듯 육체적으로도 끔찍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죽을 맛이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셨는데 자신은 왜놈들 밑에서 다른 세계 사람들을 상대로 총질이나 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더없는 비참함을 느끼는 가운데, 강제징용된 지 이 년 뒤에야 반지성의 왜놈 졸병 신세는 끝났다.
이동 중에 반지성이 속한 부대가 패한 것이다. 왜놈들은 처형당했지만,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은 포로로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유가 되었느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아스는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는 전통이 있다.
이제 반지성은 노예로서 또 이 년을 보내야 했다.
이 또한 힘겹기는 했지만 반지성은 묵묵히 견뎠다.
노예 신세가 아무리 끔찍해도 어쨌건 왜병 노릇보다는 낫지 않은가.
무엇보다 반지성은 자신을 노예 삼은 아스인들을 원망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교육으로 인해 반지성의 도덕 기준은 드높기 그지없었는데, 그 드높은 도덕 기준에서 자신은 죄인이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총질한 죄인.
왜놈들의 명령에 불복종하거나 탈영이라도 해야 했는데. 아스인들은 지구인들을 보는 족족 잡아먹는다는 소문을 믿고 겁먹은 나머지 그러질 못했다. 너무나도 비겁한 일이었다.
그렇듯 반지성의 마음에는 소년 시절부터 크나큰 죄책감이 싹터있었다.
반지성은 속죄를 원했다.
그래서 반지성은 아주 좋은 노예가 되었다. 절대로 반항하거나 게으름 부리지 않았다. 아스인이 명령하면 언제나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 순순한 태도를 아스인들이 좋게 본 모양이었다.
“이 노예는 아주 열심이고, 주인에게 칼질할 놈도 아니다. 이번 임무에 데려갈 만해.”
그리 말하더니 반지성은 어디론가 보내졌다.
도착한 그곳에는 소년들이 모여있었다.
반지성보다 어린 소년들. 여자로 착각될 만치 아름다운 우드엘프 소년들과 엘프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인간 소년들이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들 앞에 있는······
푸른 문.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크기의 푸른 문이 일렁이고 있었다.
‘에너지’라는 단어가 그 문을 표현하기 적합하겠지만, 산골짜기 조선인은 그런 고급스러운 표현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통과한 적이 있었던 까닭이다.
“차원문이군요······ 지구로 가는 겁니까? 왜놈들을 죽이러 가는 거면 좋겠는데요.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선봉에 서겠습니다. 기꺼이 목숨을 바쳐 속죄하지요.”
반지성이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더니, 아스인은 허 하고 웃었다.
“왜놈들? 일본인들을 말하는 거라면 당연히 죽여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나중에 죽이게 될 거다. 내 기준으로는 금방이지만 네 기준에서는 꽤 오래 뒤에······”
그때 한 남자가 소년들의 앞에 섰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우울해 보이는 남자였다. 표정이 그렇듯 몸에도 힘이 없었다. 어깨는 움츠러들었고 허리는 잔뜩 굽었다.
볼품없는 외견과 달리 남자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나중에 알게 됐기로, 대마법사가 말했다.
“여기와는 시간 흐름이 다른 세상이 있다. 여기보다 시간 흐름이 수십 배 빠른 세계가. 여기서 일 년이 그 세계에선 수십 년······ 그러니까 그 세계에서 일 년쯤 훈련해도 우리 세계에선 며칠 지난 셈이지.”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반지성은 놀랐다.
‘상대적인 기준에서 훈련 기간이 대폭 단축될 거란 말이지?’
역시 아스는 놀랍고 신비하며 대단하다. 왜놈들 따위가 짓밟아도 좋을 곳이 아니다.
경외 속에서 반지성은 대마법사의 말을 경청햇다.
“그 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겠다. 덜 자란 몸을 키우면서, 훈련하라. 숙련된 전사가 되어 돌아와라.”
반지성이 각오를 다지던 와중이었다.
반지성의 주인인 아스인이 말했다.
“넌 노예로서 저들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내게 성실했듯 저들에게도 성실해야 해. 약속할 수 있나?”
반지성은 일순 실망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래, 속죄가 먼저다. 그리 자신을 다독이며 반지성은 노예로서 짐을 짊어졌다.
소년들이 차례차례 차원문에 들어가는 가운데, 반지성의 차례가 돌아왔다.
문을 향해 걸으며 반지성은 웃었다.
생각해보면 참 기이한 일이었다.
조선 토박이인 자신이 다른 세계인 아스로 넘어와,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 아닌가.
반지성이 마지막으로 한 발짝 내딛자, 푸른 에너지가 몸을 삼켰다.
다른 세계가 반지성을 맞이했다.
*******
반지성이 처음 다른 세계를 본 감상은 이러했다.
‘너무 어둡네.’
정말이지 어두운 세계였다. 태양도 달도 없는지 빛 한 줄기 없었다. 그저 칠흑만이 펼쳐져 있었다.
차원문에서 스며드는 빛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다.
“사제님? 부탁드립니다.”
누군가의 말에 웬 소년이 대답했다.
“기꺼이 그러지요······ 불과 화로의 여신이시여, 당신의 화로에서 불을 나눠주소서.”
기도처럼 들렸는데, 아스에서 기도란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행위다.
주변으로 휘황한 불이 타올랐다.
덕분에 불을 피워낸 소년의 얼굴이 보였다.
아스인이 보기에도, 심지어 조선인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엘프 소년이 거기 있었다. 아름다움이야 엘프들의 특징이지만 이 엘프의 경우 유독 눈에 띄었는데, 그 머리칼이 회색이었기 때문이다.
‘회색 머리칼 엘프, 성직자······’
반지성은 그 특징을 기억해두었다.
“자, 얼마쯤 걸읍시다.”
“왜, 차원문 근처에 캠프 지어야 하지 않나?”
“좀 떨어진 곳에 지을 겁니다. 노예들이 도망 못 치게요.”
그 말에 반지성은 속으로 불평했다.
‘도망칠 생각 없는데.’
어쨌건 반지성이 열심히 짐을 옮기는 가운데, 한 남자가 다가왔다. 서른 중반의 남자로, 소년들을 훈련 시키러 들어온 교관이었다.
“짐을 다 옮기면 식사를 준비해라, 노예야.”
교관의 지시에 반지성은 눈을 크게 떴다.
반란 가능성을 우려했는지 노예들의 수가 부족했다. 고작 다섯 명. 그들끼리 백 명이 넘는 이 소년들을 먹이기는 힘들 터였다.
반지성은 미리 봐둔 인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제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사제님?”
그 말에 회색 머리칼의 엘프 사제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회색 머리칼의 엘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반지성은 말을 흐렸다.
“예······”
“정말? 내가 노예와 같은 일을 해야 한다고?”
사제면 성직자 아닌가. 성직자 하면 스님만을 기억하던 반지성은 왜 저러는지 몰라 당황했다. 모름지기 스님은 주변 농사일도 도와주고, 공사가 있으면 팔 걷어붙이고 그러는 분들 아닌가.
그때 훈련 교관이 달려오고 있었다.
부리나케 달려온 교관은 흉악한 표정으로 반지성을 후려쳤다.
“미친 노예 자식이 어딜 감히 귀하신 분에게!”
반지성이 당황했다. 귀하신 분?
교관이 계속해서 반지성을 걷어차는 가운데, 회색 머리칼의 엘프가 제지했다.
“그만.”
훈련 교관은 순순히 엘프의 말에 따라 발길질을 그만두었다.
그것을 본 반지성은 속으로 신음했다. 귀하신 분이 맞기는 한 모양이었다.
교관은 반지성을 끌고 가서는 윽박질렀다.
“또 미친 짓 했다간 몸소 죽일 줄 알아라, 노예야.”
반지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대로 식사나 챙기기로 했다. 다른 노예들과 함께 짐을 옮기고, 또 옮기고. 계속 일하던 와중이었다.
발소리가 울렸다. 아주 작은 발소리.
인간은 그 소리를 놓쳤지만, 귀 좋은 우드엘프들은 반응했다.
엘프들은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고는 속삭였다.
“뭐가 온다.”
불길한 일이었다.
분명 대마법사는 이 세계에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오직 빠르게 흐르는 시간만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그런데 뭐가 있다니? 저쪽도 잘못 알고 있었단 말인가?
“뭔가 잘못됐다. 당장 차원문으로 달려!”
교관의 지시에 따라 소년들은 모두 차원문을 향해 달렸다.
한편 식사 준비를 위해 짐을 옮기고 있던 노예들은 뒤처졌다. 결국 여기로 다가오는 무언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순간, 반지성은 여기 다가온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기겁했다.
‘괴물······’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몬스터니 뭐니 해서 온갖 괴생물체가 즐비한 아스의 기준에도 괴상망측한 괴물들.
사자의 몸에 인간의 머리가 붙은 놈, 뱀의 하체에 인간의 상체가 붙은 년, 머리 둘 달린 거대한 개······.
“억······”
괴물들의 손에 붙들려 노예 넷이 순식간에 어둠으로 끌려갔다.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신경 쓰지 못했다. 같은 노예 신세인 반지성조차도.
차원문 앞에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거대한 무언가였다.
그것은 거인이었다. 너무나도 거대한 나머지, 하반신만 겨우 보이는 거인.
“뭐야······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엘프가 아니라 인간들도 저런 거인이 이동했다면 그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인은 아무런 소리 없이, 그냥 차원문 앞에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여기 존재했던 것처럼.
거인이 움직였다. 산과 같은 상반신을 움직여, 얼굴을 움직였다.
10미터쯤 되는 거인의 얼굴이 차원문을 향했다.
거인이 차원문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거인의 머리가 차원문보다 훨씬 컸다. 그 거대한 머리에 차원문이 가려졌다.
그리하여 차원문을 통해 들어오던, 원래 세상에서의 빛이 소멸한 그때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다른 빛마저 사라졌다.
회색 엘프가 유지하던 불꽃이 사라진 것이다.
“사제님! 불 왜 꺼요! 다시 켜요!”
웬 소년이 외치자 회색 엘프는 비명 지르듯 외쳤다.
“내가 끈 게 아니야!”
회색 엘프뿐만 아니라 모두가 비명 지르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쫓아오는 가운데, 유일한 탈출구가 막혔으며 이제는 빛마저 사라진 것이다.
이 와중에 지시를 내려야 할 교관들은 맨 뒤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교관을 대신하여 웬 마법사가 행동에 나섰다.
“아쿨스 라 오데스!”
발광 주문. 사제의 신성 주문에 비하면 초라한 광원이 하나 생겨나 주변을 비추었다. 비로소 소년들이 비명을 멈춘 그때, 마법사가 외쳤다.
“모두 달려. 반대 방향으로 모두 달려!”
모두 그 말에 따랐다.
죽을 힘을 다해, 어둠 속으로 달려나갔다.
*******
마법사는 열일곱 살이었고, 이 무리에서는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다.
애써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아까 모두 봤듯, 차원문을 그 거인이 완전히 틀어막고 있습니다. 빛 한 줄기 새어들지 못하게. 이게 뭔 상황을 뜻하냐면······”
“이제 탈출할 수 없다는 거?”
“그거 말고도 또 있지요. 원래 세계와의 연결이 물리적으로 차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천상과의 연결도 차단된 겁니다.”
“그럼 신성 주문은······”
“못 쓰지요. 당연히.”
그 말에 회색 머리칼의 엘프는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지, 그와 얽혀 험한 꼴을 당했던 반지성마저 동정이 들 정도였다.
“그 괴물들이 오는지 안 오는지는 엘프들이 소리 듣고 알 수 있죠? 그렇담 빛은 당분간 꺼둡시다.”
“왜요······
“빛을 보고 적들이 올 테니까요.”
그리 다른 세계에서의 하룻밤이 지나갔다. 귀 좋은 우드엘프 소년들이 불침번을 서는 가운데, 이 어둠 속에서 그 누구도 잠들지 못했다.
반지성도, 회색 엘프도 마찬가지였다.
회색 엘프는 마법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빛을 내는 그 주문, 저도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성 주문이나 일반 주문이나 발현 방법은 비슷하다고 아는데요.”
마법사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뭐 둘 다 자기 마나를 소모하는 것이긴 하죠. 그런데 일반 마법 쓸 줄은 아십니까?”
“모릅니다. 모쪼록 가르쳐주십시오.”
“아니, 기초에만 1년은 걸리는데.”
“그래도 배워야겠지요. 1년 안에 나가지 못할지도 모르니.”
“불길한 소리를······”
불길한 말은 언제나 현실이 되는 법이었다.
다음 날, 일행은 다시 차원문이 있던 장소로 향했다.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빛을 비춰보고는 신음했다.
차원문이 있던 장소에는 여전히 거인이 있었다. 차원문에 얼굴을 들이민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이 와중에 괴물들을 막고자 후방을 지켰던 교관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어둠 속에 소년들만이 남겨진 것이다.
*******
사흘이 지났고, 변화는 없었다.
마법사는 빛을 피우길 싫어했지만 모두의 요청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빛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저 어둠 속에만 있자니 모두 미쳐버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빛이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마법사처럼 빛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제였던 회색 엘프는 졸지에 마법 공부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회색 엘프는 밥도 먹지 않고 책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다 못한 반지성이 다가가 건량을 내밀며 말했다.
“드십시오.”
회색 엘프는 거뭇한 눈으로 반지성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됐네.”
“아니, 식사는 하셔야죠. 그러다 기절해요.”
회색 엘프는 반지성을 노려보다 말았다.
“그래, 도움도 안 되는 중에 기절까지 할 수야 없지. 내 감사히 들겠어.”
회색 엘프는 반지성이 내민 건량을 바로 삼키더니, 다시 마법 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계속. 계속.
시중을 들고자 그 옆에 대기하던 반지성마저 졸음을 견디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좀 주무시지······”
“마법만 다 익히고.”
“1년 걸린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단축해야지. 어떻게든 도움이 되려면.”
결국 반지성이 먼저 잠들었다. 그리고 일어나 보니, 회색 엘프는 계속 책을 보고 있었다.
소름이 끼친 반지성이 물었다.
“왜 이렇게?”
“이 사태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해.”
“누가······”
“내가. 유일한 사제고, 가장 신분이 높으니까. 무리를 이끌 책임이 있다.”
그 순간 반지성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쓸모가 없어졌으니 발악하는 거라며 속으로 욕하고 있었는데.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엘프는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엘프가 어른스럽게 구니, 반지성은 일순 열등감마저 느껴버렸다.
‘엘프니까 어려보이는 거지, 실은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을 거야.’
그리 생각하며 반지성이 물었다.
“연세가······”
“열넷. 너는?”
또 다시 부끄러움을 느낀 반지성은 나이를 속였다.
“열셋······”
반지성은 열여덟 살이었다. 슬슬 소년이라 하기도 어려운 나이.
다행히 거짓말을 믿었는지, 회색 엘프가 중얼거렸다.
“나와 비슷하군.”
“우연히도······”
“이름은 뭔가?”
“반지성입니다.”
“난 가온이다. 그리고 반지성? 이제부터 넌 내 친구다.”
반지성은 일순 감동할 뻔했다. 챙겨줘서 고마운 걸까?
아니었다.
가온이 말을 이었다.
“신과의 연결이 끊긴 사제는 노예만큼 가치가 없으니까. 노예와 동급이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반성해야 해.”
그러면서 부연하기를, 사제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지금 자신은 가장 비천한 존재라고, 그 비천함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기꺼이 노예의 친구가 되겠다고 했다.
“그러니 내게 존대하지 마라. 알겠나, 친구?”
가온의 말에 반지성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래.”
그날 저녁이었다.
가온은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는데, 그것은 단순히 소리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법이 힘을 발휘했다.
마법을 배운 지 나흘째 되는 그날, 가온은 어둠 속에 빛을 피워내는 데 성공했다.
빛에 굶주려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가온에게 쏠렸다.
“아니, 어떻게 벌써?”
마법사가 기겁한 가운데, 그제야 가온은 안심했는지 잠이 들었다.
*******
가온은 기어이 마법을 익히는 데 성공한 바, 다시 무리에 빛을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쓸모가 생겼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온 스스로는 지금 역할에 만족하지 못한 눈치였다.
가온은 계속해서 반지성을 친구로 임명했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시련인 모양이었다.
친구끼리는 잡담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 이유에서 가온은 툭하면 반지성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는지. 거기는 어떤 곳인지. 그 문화는?
반지성은 최선을 다해 조선의 문화를 소개하고자 애썼다. 한자는커녕 훈민정음도 모르는 무식쟁이지만 유교에 대해 가르쳐보았다.
“삼강오륜에 장유유서라는 게 있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 명령하면 나이 어린 것들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규율이야.”
반지성의 말에 가온이 물었다.
“음, 자네 나라의 지배계층도 엘프인가?”
“아닌데. 왜?”
“지배층의 학문이 엘프에게 유리하길래. 후긴 같은 곳인 줄 알았지.”
“후긴은 엘프가 왕족이야?”
“그래. 수백 명의 그레이엘프가 후긴을 다스리지. 사실상 일족 경영인 셈이다.”
“엘프는 모두 아름다우니 국민들이 모두 잘 따르겠네.”
“아니, 국민들 사이에 우리 일족이 인기가 썩 좋지는 않아. 지구인들이 온 이후로는 특히 그렇지.”
“지구인들이 온 거랑 왕족의 인기가 무슨 상관인데?”
“뭐라던가. 분열시켜 지배하라? 영국인들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 그거네. 민족 갈등을 유발시켜 서로를 원망하게 만든 다음, 자기네 영향력을 크게 만드는 거지. 후긴은 아예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종족부터 다르니 얼마든지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었을 테고. 그레이엘프가 아니면 요직에 들기 어려워 예전부터 중간계층 불만도 컸고 말이야.”
가온은 한숨 쉬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 오기 얼마 전만 해도 왕가에 대한 백성들 불만이 상당하더군. 부왕께서 이번에 카르세에 지원병력을 보내려 하시는데, 왜 저 멀리 있는 전장에 자기네 백성을 파병하느냐 이거지. 카르세가 삼켜지면 다음은 우리 차례라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
“그거 참 고생이 많네.”
“사실 내가 여기 오길 자처한 것도 왕가에 대한 불만을 좀 가라앉힐 수 있을까 생각한 까닭이야. 직접 험한 일에 나서는 왕족은 모름지기 인기가 좋은 법이니까. 정말이지, 이 고생을 하는 게 민심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언젠가 내가 다스릴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
“백성들이 자넬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
“그렇다니까.”
“그럼 덜 거만해져야 하지 않을까?”
가온은 순간 ‘노예 주제에’ 하는 표정을 짓더니, 허 하고 웃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군.”
“우선 말투부터 바꾸는 게 어때? 말투만 좀 저렴해져도 사람이 겸손해보일 텐데.”
“그것도 괜찮겠군. 지금은 아니고. 나가서.”
지금 털털하게 굴 수는 없었다. 가온은 사제요 왕족이었다.
게다가 마법을 익히는 데 성공한 지금, 이 무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가온이었다.
무리에 빛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마법사 또한 빛을 제공했지만, 무리의 구심점이 되기에는 사교성이 너무나도 없었다.
결국 가온은 이 무리의 리더가 되어버렸다. 사제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가온은 그 역할을 기어이 받아들였다.
무리의 리더로서 가온이 제안했다.
“식량이 곧 다 떨어질 것 같군요. 그동안 웬 작은 생물들의 기척이 느껴졌는데······ 사냥을 합시다.”
“괴물들이 있는데······”
“만나면 싸워야지요.
“괴물들과 싸우다니, 칼을 들고요?”
당연하지만 칼은 인간 외의 무언가와 싸우기 부적합한 무기다. 그러나 소년들 중에 소드마스터가 나오기를 기대했는지, 어른들은 소년들에게 칼 몇 자루씩만 들려 여기 보냈다.
“어쩔 수 없지요. 칼밖에 없는데.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 갇혀있다간 다 굶어죽습니다.”
“창이나 활이 있어야······”
소년들이 불안해하는 가운데, 가온은 애써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웬 우드엘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실례지만 사제님, 칼 쓰실 줄은 아십니까?”
“모릅니다. 가르쳐주십시오. 괴물들과 싸우려는 거니까 찌르기 베기, 이런 것만.”
우드엘프는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그리하여 가온은 순식간에 몇 가지 동작을 배우더니, 자기가 필요한 만큼은 다 익혔노라 주장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제 사냥하러 갑시다. 따라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