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엄근오 - [2]
“예. 반지성은 영웅이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재평가 된······”
엄근오는 애써 당당히 말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참마황은 엄근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반지성의 묘비만을 노려보며 말했다.
“왜 그러는지 알겠군. 나와 한 약속을 무시하고자 그러는 거야. 약 반세기전에 한 약속을.”
“반세기 전에 한 약속?”
가온이 묻자 참마황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반지성이 길가에서 사람들을 학살할 때, 한국은 군경을 동원해도 그 조선인 소드마스터를 진압할 수 없었소. 결국엔 아스의 소드마스터에게 도움을 애걸했지. 다른 모든 소드마스터가 거절했지만 오직 나 흉턴만이 그 요청에 응했고. 어려운 요청에 응한 대가로 권리가 하나 생겼소.”
“그건······”
엄근오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참마황은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반드시 은혜를 갚겠다며 한국이 약속했지. 국가 차원에서 나 흉턴이 하는 요구를 하나 들어주기로 한 거요.”
“그래서 그 권리로 한국에 참전을 명하겠다 이건가?”
“지금까진 그러지 않았소. 요구하지 않아도 들어먹겠다 싶어 권유를 했지. 정중하게. 권유를 거절당한 지금은 그럴 수가 없겠군.”
참마황은 그제야 엄근오를 노려보았다.
엄근오가 흠칫한 가운데, 참마황이 입을 열었다.
“이제는 권유가 아니라 요구를 하겠다. 한국인들에게 전해. 또다시 대전쟁이 벌어지면 아스의 편에 서라고.”
엄근오는 더듬거리면서 겨우 말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약속했지 않나?”
“반세기 전에 한······ 개인과의 약속 하나로, 나라가 아무 이득 없는 전쟁에 끼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인과의 약속? 그래서 이행할 가치가 없나?”
“당시 각하께서는 아무런 공직도 맡지 않으셨으니, 그건 민간인과의 구두 약속에 불과······”
“그 개인은 소드마스터였다. 소드마스터가 우습게 보이나? 뭔가 착각하나 본데, 아스에서 특정한 개인은 민중 다수를 능가한다!”
다수를 능가하는 초인이 여기 있었다. 소드마스터가 윽박질렀다.
“소드마스터를 부려먹기가 쉬운 일인 줄 알았나? 소드마스터가 목숨 걸고 싸우도록 하는 게 쉬운 부탁이었나?”
“물론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부탁을 했으면 어려운 부탁을 들어줘야지.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면, 민족 영웅께서 계속 사람들을 죽이게 내버려 뒀어야 할 일이고!”
참마황이 엄근오에게 다가갔다.
엄근오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참마황은 한 발짝 더 다가가서는 입을 열었다.
“지구인들은 약속을 툭하면 어기려 하더군. 문서로 남기지 않았다면 특히. 미개하게도······ 아스인들은 아니다. 아스에서 모든 약속은 신성한 거야. 힘이 깃들었지. 옛날에 한 약속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엄근오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참마황은 계속해서 말했다.
“이제 와서 반지성은 영웅이었다고, 그를 쓰러뜨린 건 딱히 고마운 일이 아니었노라 우겨도······ 이미 한 약속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약속이 반세기 전에 이루어졌단 사실은 그 효력을 잃게 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는 힘을 잃지 않는다!”
참마황은 이제 포효하기 시작했다.
“현재를 벗어나 저 멀리 흘러가 버린 시간! 과거란 불멸의 존재다! 아무도 손댈 수 없고, 파괴할 수 없어! 그 불멸성에 힘입어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지배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과거에 속박된 존재야!”
엄근오는 뒷걸음질 치다가 그 몸이 굳어버렸다.
그 와중에 참마황은 한 발짝 더 나아갔고, 이제 두 명은 서로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워졌다.
말 그대로 코앞에서 참마황이 외쳤다.
“굴욕적인 역사를 기억해라! 복수를 이행해!”
엄근오는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위아래 턱만이 마구 부딪칠 뿐이었다.
“원래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너희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알아서 하지를 않으니 정당한 권리를 들어 요구하겠다! 귀국이 택할 것은 둘 중 하나다. 약속을 지켜 참전하든가, 아니면 기만의 대가로 짓밟히든가. 어느 쪽을 고르겠나? 일본보다 먼저 짓밟히고 싶나? 서울과 인천에 차원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스켈레톤들이 쏟아져나오길 원해?”
참마황이 외치기를 그만두었다.
그제야 엄근오는 몸의 마비가 풀렸다. 겨우 입을 열어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요······”
“그럼 참전할 건가? 약속을 지키겠지?”
엄근오가 입을 다물자 참마황은 다시 포효했다.
“대답해!”
또다시 엄근오의 몸이 마비되었다. 지극한 공포로.
그 공포는 단순히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범의 울부짖음이 그렇듯 초인 참마황의 목소리에서는 초저주파가 흘러나온다.
초저주파는 직접 공포를 유발한다. 범의 포효 앞에 노루가 얼어붙듯, 엄근오도 지금 마찬가지였다.
공포가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엄근오는 이대로면 국회의원의 책무마저 잊고 반드시 약속을 지겠노라 맹세할 것만 같았다.
“그만.”
그 와중에 구경꾼이 끼어들었다.
참마황이 뒤를 돌아보았다.
“가온 경?”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례하군. 내 체면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
참마황은 조금 뜸 들이더니 말했다.
“미안하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좋지 않은 버릇이야. 저번에도 사람 불러놓고 몇 시간째 전쟁 얘기만 해서 사람을 질리게 하더니, 이번에 또 그러는군. 그것도 친우의 묘 앞에서. 이 얼마나 무도한 일인가.”
참마황이 ‘민족 영웅 반지성’ 묘를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가운데, 가온이 말을 이었다.
“지금은 애도에 집중하고 싶군. 그러니 부탁하건대, 정치 얘기라면 딴 데 가서 해주지 않겠나?”
참마황은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러지.”
그리 말하더니 참마황은 엄근오를 노려보았다. 이내 뒤돌아서서는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사라졌다.
이 순간 엄근오는 그저 멀거니 서있었다.
한 나라의 국가원수씩이나 되는 남자가 뭐하러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주변 경계를 시켜둔 군인들은 뭐하고 있었는지 의아할 여유조차 없었다.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어떻게든 꼿꼿이 서서는 예의바르게 가온에게 인사했다.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온 경. 가온 경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감사 인사는 됐네. 내 친우의 나라 사람 아닌가. 같은 여신을 받드는 형제이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 엄근오는 이 소드마스터에게 반할 것 같았다.
울먹이고 싶은 걸 꾹 참고는 말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아, 예정보다 시간이 더 흘러서 슬슬 저녁 식사 때로군요. 후긴과 한국의 시차가 거의 같다고 알고 있는데요. 미리 만찬을 준비해뒀습니다. 모쪼록 가주셔서······”
“만찬? 미안하지만 사양하겠네.”
“예? 혹시 식사에 독이라도 탔을까 염려하시는 거라면 제 목숨을 걸고 그런 일은 결코 없다고······”
“그게 아니라. 만날 사람이 있어서.”
“만날 사람이요? 누구······”
“친구 후보들.”
그리 말하더니 가온은 사라졌다. 일찍이 지구의 만국을 경악시킨 그 텔레포트로.
그래서 엄근오에게는 소드마스터의 행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할 경우 난리난다고,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난리가 난다고 말할 틈이 없었다.
*******
「지구의 어느 나라도 맞이해본 적 없는 귀빈 (······) 가온 경과의 만남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며 (······)」
TV에서 뉴스를 내보내는 가운데, 지존무쌍은 소주를 쭉 들이키더니 물었다.
“그래서 가온 씨 진짜 가온이에요? 저기 TV에 나오는 가온이요.”
가온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라니까.”
“그럼 반지성 기일에 한국엔 왜 왔대?”
“내가 전에 말해준 설정 잊었어요? 내가 우드엘프고 반지성도 실제 만나봤다고 그랬잖아.”
이 와중에 이복동은 잠자코 안주만 집어먹고 있었다.
감히 만나자는 약속을 거절할 엄두가 나지 않아 술자리에 나오긴 했지만, 역시나 사교적으로 굴 능력은 없었다.
그저 속으로만 어이없어 했다.
‘설정이래.’
일부러 저러는 것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답답한 가운데, 여신께서도 같은 심정으로 말씀하시었다.
‘슬슬 네 여신도 내 대전사가 왜 이러는지 알겠구나. 정말 신분이 확정되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싫지만, 은근히 단서를 주어 신분을 유추하게 만들어서는 경외를 받고 싶다 이 심정이렷다.’
‘오, 드디어 이해를 하시는군요! 이러는 게 참 즐거운 일입니다. 저만 이 즐거움을 누리다니 여신께 죄송스러운데요. 천상에서도 인터넷은 쓸 수 있다던데, 언제 종교 게시판에 들어가셔서 저와 같이 처신해보심이 어떤지······’
‘네 여신은 눈물을 머금고 사양하리라. 그래서 내 대전사는 끝까지 이럴 테냐?’
‘정체 숨기는 거 말씀하십니까? 뭐 끝까지 이러긴 그렇고. 언젠가는 말해줄 수도 있겠지요. 저 둘이 반지성처럼 진짜 친구다, 확신이 들 즈음이면······’
한편 이복동은 계속 침묵하기는 껄끄러웠다. 억지로나마 대화에 관심 있는 척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반지성, 정말 친일파만 죽인 거야?”
가온은 조금 뜸 들이더니 대답했다.
“절대 아니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 마구잡이로 수천 명 죽였으니 뭐, 그중에 친일파가 섞여 있을 순 있겠지만.”
“요새 TV에선 반지성 친일파 척결설을 방송하던데······”
“당시 언론들은 죄다 칭송하다가 침묵하는 식으로 꼴불견이었으니까. 그게 창피하니 그래. 잘못을 인정하기 싫으니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거지.”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던 와중이었다.
TV 화면이 변하더니, 긴급속보를 내보냈다.
TV에 한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카르세 연방 대통령, 그보다는 소드마스터이자 테러리스트로 유명한 남자가.
참마황이 한국에 선언하고 있었다.
「한국에 고한다. 나 흉턴이 가진 당연한 권리로서, 한국이 약속을 지키도록 요구한다. 요구는 다음과 같다. 근시일 내에 아스와 지구 서방국가들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한국은 아스의 편에 참전하라.
(······)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약속을 어긴 대가로 선전포고할 것이며 다른 서방국가에 앞서 응징할 것이다. 이때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참전 아니면 아스와의 전쟁, 둘 중 하나다. 중립은 없다. 그럴 권리는 없다」
TV 화면에 자막이 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뉴스를 본 사람들은 지금 저 아스 독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뭐야?”
뉴스 하나 본다고 충격을 받기는 어렵지만, 뉴스를 본 모두가 멀거니 굳어있었다.
과민반응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 이야기인 줄 알았던 3차 대전이 한국에도 닥쳐오고 있었다.
“뭐야 이거.”
지존무쌍마저 중얼거리는 가운데, 가온은 느긋하게 안주 하나를 더 집어 먹었다.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니 새삼 놀랄 것도 없었으니까.
주변 사람들이 기겁하건 말건, 친구인지 아닌지 애매한 사람들 사이에서 가온은 추억에 잠겼다.
옛 친구와 보냈던 힘든 시절을. 힘들었지만 보람찼던 그 시절을.
어찌나 보람찼는지, 웬 한국인 얼간이들 중에서 친구 후보를 찾아헤매게 만든 그 나날을 떠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