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47화 (47/135)

국회의원 엄근오 - [1]

“몇몇 길드 이러다가 진짜 망하겠다. 백골부대가 진짜 쫙쫙 밀고 있다던데. 백두쪽 전선은 계속 뒤로 밀린다고만 하고.”

“아니, 류시범 그 새끼 그따위로 깽판 치는 걸 스폰서들이 용납하나? 일반인들 길드 상대로 깡패 짓 하라며 후원금 주는 게 아닐 거 아냐. 확 후원금 끊어버려야 정상 아닌가?”

“글쎄, 보급은 오히려 풍성해졌다던데?”

훈련소에 다른 인원들이 잡담하는 가운데 이복동은 땀을 흘렸다.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이복동은 NPC 교관의 지시에 따라 온갖 훈련을 수행했다. 직접 몸을 움직여 하는 훈련은 물론, 거리 목측이니 풍향 파악이니 저격 관련 교육까지 이수했다.

얼마 전보다 더 오래, 더 열심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복동은 하루 여섯 시간 훈련했다.그러나 이제는 하루 일곱 시간 넘게 훈련을 반복했다.

자신이 이만큼 노력할 수 있다는 것을 이복동은 처음 알았다.

“모두의 귀감이군, 훈련생?”

NPC 교관마저 칭찬하는 가운데, 이복동은 기뻐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스파르타 교육을 자처하는 것은 새삼 열정이 솟아나서가 아니었다.

불안이 커진 탓이었다. 얼마 전 일 때문에.

우드엘프 숲에서의 일 말이다.

그때 자신은 무력했고, 심지어 자신이 빌붙다시피 하는 아스인에게 밉보이기까지 했다.

그 아스인은 어찌나 화가 났는지, 거의 하루 동안 게임에 접속하지 않을 정도였다.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하루 열네 시간은 기본으로 접속했을 텐데.

‘어쩌면 이제 그 옆에서 이득 보는 것은 포기해야······’

그리 각오를 다지며 필사적으로 훈련에 임했는데, 역시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훈련의 성과가 있다며 자신감에 차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헛된 자신감이었다.

그 자신감은 얼마 전에 모조리 사라졌다. 몇 주 열심히 훈련한 뒤 야심차게 일을 나섰건만, 게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우드엘프 한 명에게 전멸할 뻔했지 않은가.

자신이 이토록 노력해도 그와 같은 일만 반복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다. 예전부터 걱정했듯, 게임 속에서 실력을 키워봤자 다 무용지물 아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이 게임이 얼마나 오래 갈지도 모르는 판에, 현실에선 쓸모가 없는 일이니······.

불안 속에서 훈련을 거듭했다.

계속 그러다가 겨우 한 숨 돌리던 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 술이나 한잔 할까?”

이복동은 질겁했다.

“가온 형?”

“응. 그래서 술 마실래 안 마실래?”

저번 일로 화나지 않은 걸까? 이복동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떻게요······ 형 아스인이잖아요?”

불안한 나머지 존댓말이 절로 흘러나왔는데, 가온은 그저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갈 일이 있어서 그래. 6월 3일이 무슨 날인지 아나?”

“아뇨······”

“반지성 기일.”

그게 무슨 소리인가? 이복동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이복동은 TV를 켰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6월 3일, 반지성의 기일을 맞이하여 (······) 현충원에서 (······) 초청 귀빈으로는 후긴의 가온 경이 왕림하기로 (······) 온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어······」

*******

반지성의 죽음은 확인된 적이 없다. 그러니까 기일 따위는 존재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 새로 생겼다.

반지성이 흉턴에게 패하여 실종된 날, 6월 3일을 이번에 정식으로 기일로 정하기로 결정했다. 그날을 애도하기로도 결정했다.

연쇄 살인마의 죽음을 애도하다니? 그러기로 결정한 것은 웬 반사회적 단체가 아니라 한국 정부라는 점에서 특히 놀라운 일이었다.

당연히도 각지에서 시위를 벌이며 그 미친 결정을 비난했다. 유족들 또한 입 다물고 있지 않는 마당이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기어이 이 결정을 강행했다.

결국 6월 3일이 된 오늘, 반지성의 묘를 세운 현충원에서 기념식을 벌이기로 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이따위 정신 나간 행사에는 정신 나간 놈들만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합리적인 예상은 틀렸다.

식에 귀빈 하나가 참석하기로 발표되었다. 지구의 그 어느 나라도 맞이해본 적이 없을 만치 귀한 손님이었다.

재의 왕자, 소드마스터 가온이 직접 모습을 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식의 격이 변했다.

정신 나간 정치꾼들의 행사가 되어야 했던 반지성 기일은 졸지에 국민적인 행사가 되어버렸다.

귀빈을 맞이하는 것인 만큼 준비는 철저했다.

차원문 터미널 주변으로 1개 사단 규모의 의장대가 나열했다. 그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차원문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린 순간, 사람들은 잠시 침묵했다가 소리질렀다.

“가온 경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정치인들, 그리고 잘생기고 유명한 엘프를 구경하러 온 꽃다운 여고생들까지.

“씨이발 조옺나아아아 사랑해요오오오오오오!”

그 어느 연예인보다 유명한 이 역사적 엘프를 보러온 사람들만 해도 수만 명이요, 교단의 대전사를 직접 보는 영광을 얻길 원했던 종교인들까지 수만 명 넘게 모여있었다.

덕분에 환영 행사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저기서 축포가 터지는 가운데, 기자들은 카메라 버튼을 누르기 바빴다. 이 얼마나 귀중한 기회인가.

그러나 직접 다가갈 엄두를 내는 기자는 없었다.

감히 저 소드마스터 앞에서 기레기처럼 굴었다간 절대 봐주지 않으리라고 정부 차원에서 경고 받은 마당이다.

게다가 저 소드마스터를 슬쩍 보기만 해도 그럴 용기는 사라졌다.

저 회색 엘프가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재가 흩날리는 듯하다. 검기를 쓰고 있지 않은 지금 실제 그럴 리는 없지만, 그 걸음을 보는 모두가 같은 감상을 공유한다.

수백 년 지기 친우의 죽음을 애도하러, 재의 왕자가 이 먼 타국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자의 무표정 속에 슬픔이 묻어나온다.

*******

실제로 가온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후회에 가까운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게임오버도 안 당했는데 게임을 하루나 못 하다니······.’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찝찝했던 탓이다. 그 탓에 접속하지 못했다.

그 탓에 이런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원래 같으면 적당히 핑계대고 거절했으련만, 심란한 와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불안을 키운다는 사실을 가온은 알고 있었다. 뭐라도 하고자 일부러 참석을 결정했다.

덕분에 여신께서만은 기뻐하시었다.

‘정말 잘 결정했다 가온! 네 여신의 대전사쯤 되면 이렇듯 공식석상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법이니라. 사춘기 소년이나 근사하다고 여길 신비의 소드마스터 설정은 집어치우고 말이다.’

‘아니, 실제로 근사한데······’

현충원에 다가가니 한 무리의 정치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얼마 전에 본 인물도 있었다.

국회의원 엄근오가 외쳤다.

“왕림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허리 굽혀 절하다시피 하더니, 주변에 깔린 장성들에게 경고했다.

“근방 경계는 제대로 했겠지? 경계를 뚫고서 기자라도 하나 출몰했다간 알아서 하십쇼.”

“예. 절대.”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이번에 보안은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해야 해. 그 어떤 놈도 여기 접근하지 못하게 해. 알겠습니까? 유족이고 뭐고 뭔 수를 써서라도 쫓아내요. 두들겨 패서라도······”

가온이 끼어들었다.

“과격하군. 유족들의 항의는 정당한 것일 텐데. 폭력으로 입 다물게 할 것은 없지 않은가?”

고압적으로 굴다 말고, 엄근오는 쩔쩔맸다.

“귀하신 분을 언짢게 할 수는 없으니······”

“언짢지 않을 테니 염려 말게. 정당한 분노를 터뜨릴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

엄근오가 듣기에 자신을 시험하는 줄 안 모양이었다.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그건 정당한 분노가 아닙니다. 반지성 투사께서는 실로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연쇄살인마가?”

“알고보니 연쇄살인마가 아니었습니다! 저도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분이 죽인 건 다 친일파나 그 후손이었지요. 그 영웅이 생전에 어떤 모습이셨는지, 감히 가온 경의 감상을 듣고 싶습니다.”

가온은 어이가 없어서 뭐라 하려다 말았다.

순순히 친구의 옛 모습을 읊조렸다.

“좋은 친구였지. 독립운동과 민족 수호의 정신을 입에 달고 살았어. 검법도 그걸 위해 수련해온 것이라 했지.”

“역시······”

엄근오는 마치 감격한 듯 중얼거리더니 반지성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한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느니, 오천만 국민이 그 영웅에게 빚을 졌다느니. 그 위대한 영웅이 친우인 가온 경을 얼마나 칭찬했는지도 잊지 않고 떠벌렸다.

듣다 못한 가온이 말했다.

“자신도 안 믿는 헛소린 됐네.”

“헛소리라뇨? 이건 모두······”

“귀국에서는 전쟁을 염려한다더군. 자국에 우호적인 소드마스터를 억지로라도 초청하고 싶을 정도로.”

엄근오는 표정을 굳혔다가 이내 말했다.

“예, 그건 그렇지요.”

“이해가 되지 않아.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조선은 직접적으로는 상관이 없지 않나. 경제적인 영향이 걱정인가. 배부른 걱정이라 말하고 싶군. 다른 나라들은 아예 참사에 직접 휘말릴 것 아닌가.”

“분명 그럴 겁니다. 미군은 아예 신의 지팡이를 실전 배치했지요. 소드마스터가 오는 족족 도시째로 뭉개버릴 계획이라더군요. 자국 도시는 물론 동맹국 도시의 피해까지 감수할 예정이라며, 유사시 도시 포격에 동의하랍시고 아국에 압박하더군요.”

“그래서 동의했나?”

“아니오. 하지만 급한 상황에 동의를 받지 않았단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 같군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가성비가 좋지 않기로 유명한 그 전략병기는 굳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연구되고 배치되었다. 어느 소드마스터의 존재 때문이다.

그 소드마스터가 말했다.

“확실히 전쟁 발발 자체를 꺼릴 만하군.”

“그렇지요. 하지만 아국은 전쟁에 직접 휘말릴 가능성 또한 깊이 우려합니다. 흉턴은 한국을 강제로 참전케 하리란 발언도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역사를 잊은 조센징에게 매를 들겠다더군요. 노골적으로 이쪽을 내버려두지 않겠단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난 그런 발언을 듣지 못했는데.”

“외부에는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선가?”

“아예 공개적인 발언이 되어버리면 저쪽에선 발언을 철회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못 들은 척하고 넘길 계획입니다. ”

굴욕적이다시피 한 외교였다. 그만큼 한국 정부가 전쟁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쯤은 알 만했다.

그래서 가온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참마황에 대해서. 그 행동방식에 대해서 가온은 남들보다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생각한 끝에 중얼거렸다.

“그래. 그자라면 그럴 만하지.”

엄근오가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흉턴이 한국에 그러는 이유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가온이 뭔가 말하려던 차였다.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 뒤에서.

“참마황에 대해서라면 본인한테 직접 묻지 그러나?”

미리 눈치챈 가온은 놀라지 않았지만 엄근오는 기겁했다. 급히 뒤돌아서서는 숨을 삼켰다.

“참마황 각하······”

초대받지 않은 손님, 소드마스터 참마황이 말했다.

“각하 말고 폐하를 붙이는 게 좋겠군. 평민.”

그리 쏘아붙이다 말고, 참마황은 가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귀공이 여긴 왜 있소?”

가온은 심드렁히 대답했다.

“친우의 기일이라는데 올 수밖에. 연락도 끊긴 친구, 얼굴은 못 보니까 묘비라도 봐야 할 것 아닌가.”

참마황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거 참으로 미안하군. 진심으로.”

“미안할 것까지야.”

이 순간 엄근오는 실망했다. 흉턴이 반지성을 제압하고 끌고 간 것은 유명한 일이다. 그러니 좀 더 두 소드마스터의 사이가 험악하면 좋았을 텐데. 적의 적은 아군인 법이니까······.

한편 참마황은 묘비를 보았다. 눈을 가늘게 뜨더니 물었다.

“뭐라 쓰인 건가?”

엄근오는 조심스럽게 한자를 읽고는 대답했다.

“민족 영웅 반지성이라 적혀있습니다.”

참마황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민족 영웅 반지성······ 민족 영웅?”

참마황은 허 하고 웃더니 중얼거렸다.

“영웅이라. 이제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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