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46화 (46/135)

LV.3 우드엘프 나리 - [3]

“그러니까 복수할 만한 일이 아니라니까요.”

“왜요, 다 가짜라서?”

“예.”

우드엘프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인간 사고방식에 물든 꼴통’을 말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깨우쳐 줘야겠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따라와요! 다들 살아있는 거 보여줄 테니.”

우드엘프 여자는 가온의 손목을 붙잡더니 숲속으로 끌고 갔다.

가온은 어어 하고 끌려가서는 웬 마을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우드엘프들의 마을이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 세워진 목조 건물들.

마을의 주민들인 우드엘프들이 보였다. 키가 훤칠한 남녀 엘프들과······ 그들 사이에서 뛰어노는 조그만 아이들.

“숨어!”

인간의 모습을 한 가온이 다가가자 우드엘프들은 질겁했다.

그 혼비백산한 반응들은 대단히 제각각이었다. 도망치려는 우드엘프가 있는가 하면 싸울 준비를 하는 우드엘프까지 있었다.

게임 속 우드엘프들의 다채로운 반응을 보며 가온은 속으로 신음했다.

‘진짜 살아있는 거 같긴 하네.’

이쯤 되면 확실히 현실의 사람과 구별하기 어려울 법하다. 순진한 우드엘프가 보기엔 특히.

그 순진한 우드엘프 여자가 외쳤다.

“그만! 이 남자는 그 막돼먹은 놈들이랑 한패가 아니래요!”

그 말에 비로소 우드엘프들은 진정했다.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그들 중 한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들과 한패가 아니라면, 개척 마을에서 오신 분이겠군요? 그들을 대신해서 용병들한테 잘 말해주십시오. 저희는 인간과 적대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여자는 자기 뒤에 숨은 조그만 아이를 가리켰다.

“하프엘프입니다. 우리 중 몇몇은 여러분 동족과 결혼까지 했다고요.”

가온은 또다시 질겁했다. 이 우드엘프에게는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설정된 모양이다. 그 스토리에 걸맞게 대사를 읊고 있었다.

‘이 게임 AI는 왜 이따위로 천차만별이야?’

가온은 교관을 상대로 함부로 굴지 않았다. 너무 사람답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저들에게도 막 대하기 힘들었다.

진짜 우드엘프를 대하듯 공손히 대답했다.

“예. 그러지요.”

그리 안심시킨 뒤, 가온은 우드엘프 여자와 함께 마을을 나섰다.

우드엘프 여자는 가온의 복잡미묘해진 표정을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제야 좀 생각이 달라지신 거 같네?”

우드엘프 여자는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이십만 명이 넘던 우드엘프가 21세기에 이르러 육만 명으로 줄어든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모르겠느냐고. 이게 다 지구인 탓 아니냐고. 이게 현실이든 아니든, 그 지구인들이 와서 또다시 엘프를 죽이다니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모르겠느냐고.

그리 말하면서 복수의 필요성을 주장하고픈 모양이었는데, 가온은 역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복수할 것까진 없어요.”

“아니, 아직도 그런 말씀을?”

“걔네는 한국인입니다. 우리랑 동맹이었다고요. 여기 와서 몬스터 사냥하다가 우연히 우드엘프랑 마주쳐서 죽인 모양이지만, 그걸 무슨 제국주의자의 엘프 학살쯤으로 확대해석할 이유는 없단 말입니다. ”

다행히도 우드엘프 사이에 한국은 나름 이름이 알려진 마당이었다.

우드엘프 여자가 중얼거렸다.

“일본인인 줄 알았는데?”

“지구 쪽 동양인들이 다 똑같이 생기긴 했죠. 하지만 분명히······”

“그게 아니라. 그놈들이 엘프 죽이면서 웃어서요.”

그 말에 가온은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웃어요?”

“예. 죽이면서 즐거워하던데요?”

가온은 조금 생각해보다 말고 말했다.

“오해였겠지요. 변태도 아니고 엘프를 죽이면서 왜 웃습니까? 그네들 보기에 엘프는 죄다 엄청난 미남미녀라서 불가피하게 죽인 뒤에도 죄책감을 느낄 텐데요.”

“그럴까요?”

“예. 도둑맞은 와중엔 누구나 다 수상해 보이는 법 아닙니까? 그러니 나쁜 놈이라 생각하고 보니까 그 표정마저 괴상해보인 거라 생각합니다.”

“아닌데······ 진짜 막 웃었는데······”

우드엘프 여자는 탐탁치 않은 듯 그리 중얼거렸고, 가온은 마지막으로 설득했다.

“아무튼 여긴 게임이고. 플레이어들은 죽은 뒤에도 곧 되살아나는 건 아시죠?”

“예. 그런 세계인 건 알아요.”

“그럼 그냥 살려 보내주시죠. 어차피 지금 죽여봤자 나중에 또 올 텐데요. 그러느니 차라리 다시 오지 않겠단 약속 받아내는 게 더 이득 아닙니까?”

이 말에는 우드엘프 여자도 동의했다.

결국, 그 인간들이 다시는 이 숲에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우드엘프 여자는 그들을 용서해주기로 했다.

“그럼 이제 가서 그 인간들 설득해보겠습니다.”

“바로 떠나라 해주세요.”

“예.”

돌아가는 길에 가온은 또 골머리를 썩었다.

우드엘프가 보기에는 보기 좋지 않았을지라도, 어쨌건 플레이어들이 여기서 사냥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 또 무슨 이유로 금지해야 한단 말인가?

생각하면서 왔던 곳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전민 마을이 나타났다.

가온의 귀환을 눈치챈 플레이어들이 건물에서 나와 반겼다.

“영웅의 귀환이다!”

“저격수 잡았어요?”

가온은 고개를 저은 뒤, 설득에 나섰다. 다시는 여기서 사냥하면 안 된다는 설득을.

가온의 설득을 듣고 난 사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니까 그 저격수는 현실의 우드엘프였고, 우리가 동족 죽이는 걸 안 좋게 본단 말이죠······.”

“그렇다니까요. 내가 우드엘프면서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우리 우드엘프들, 과몰입 심한 거 알지? 게임과 현실 구분을 못 해요. 그러니까 게임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현실에서 공격당할 수 있다? 한국에 산다고 안심하면 안 돼. 고층 아파트에서 살던 엘프 차별자가 건물 기어올라 침입한 우드엘프한테 습격당해 죽는 경우 많은 거 알지? 가뜩이나 그 우드엘프 아가씨, 당신들한테 엄청 화나 있더라. 글쎄 웃으면서 자기 동족을 죽였다던데······.”

“아니, 아니, 으······”

다행히 설득하기 위한 허위가 먹힌 모양이었다.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이 움츠러들고 있었다.

겁먹은 그들의 눈이 데굴데굴 굴렀다.

한 방향으로.

소드마스터는 상대 어깨의 움직임, 시선의 이동에 민감하다.

그래서 그들이 웬 문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음을, 그 사실을 가온에게는 숨기려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설득하다 말고 가온이 물었다.

“자꾸 저길 쳐다보는데. 뭐야? 저기 뭐가 있는 거요?”

“아무것도······”

사장이 말을 흐렸지만 가온은 무시했다.

직접 확인해보기로 했다. 벌떡 일어나 저들이 쳐다보던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문 뒤에 있는 것은 시체였다. 한 여자의 시체.

“뭐야 이거?”

조심스럽게 뒤따라온 사장이 말했다.

“우드엘프 여자 시체요······.”

“아니, 그걸 누가 몰라서 묻나? 그 시체가 왜 여기 있냐고?”

“사냥하는 중에 마주쳐서 죽였는데요.”

“아니, 사냥하는 중에 마주쳤음 그 시체가 숲에 버려져 있어야지 왜 건물 안에 있는데? 게다가 시체 주변에 조명들은 또 뭐고?”

사장은 어떻게든 변명을 짜내보고자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결국에는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녹화 기능으로 사진이랑 영상 찍으려고요······”

“사진이랑 영상? 시체의?”

“예.”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고, 한숨 쉬었다.

게임에서도 시체 스크린샷을 찍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물며 이 게임은 실제 현실과 거의 똑같고, 이 게임의 시체는 현실 시체와 아주 흡사하다.

그리고 현실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사진 혹은 영상에 담는 것 또한 제법 흔한 일이다.

“사냥하러 왔다더니, 몬스터 사냥이 아니었네. 엘프를 사냥하러 온 거였어.”

“예······”

“사냥한 뒤엔 스너프를 찍고 있었단 말이지. 우드엘프로.”

이때 플레이어들은 ‘진정해요. 실제 엘프들 죽인 것도 아니고, 고작 게임에서 그런 건데······’라고 변명하지 못했다.

다들 여기 있는 가온이 우드엘프임을, 그것도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치 강력한 엘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엘프가 만약 이 일에 화가 났다면? 현실의 위협을 걱정할 만하다.

한 사장이 변명하듯 소리쳤다.

“전 쟤네들이랑 같은 목적 아닙니다!”

“그럼?”

“전 새끼원숭이 잡으러 온 거예요!”

“새끼원숭이를? 왜? 키우려고?”

“잡아서 괴롭히려고요. 미도리 14호가 죽었거든······.”

“동물 학대하려고 호위까지 고용했다고?”

“현실에서 하면 범죄지만 게임에서 하면 아무도 피해 보지 않으니까······”

그 사장은 현실에선 햄스터는커녕 개미도 안 건드린다고 변명했는데, 가온이 보기에는 한심하기 마찬가지였다.

“이건 화나진 않지만 더럽긴 마찬가지네. 뭐 이런 의뢰를 받았어?”

이복동은 고용주가 변태 찌질이라서 상대적으로 대하기 편하다고, 그래서 일부러 이런 일을 골랐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복동이 그저 움츠러든 채 침묵하는 가운데, 가온은 생각했다.

‘실컷 칭찬받은 값은 해야지.’

그리고는 말했다.

“복동이 이 친구 봐서 이번만은 봐준다.”

“그럼 용서하는······”

“그럴 테니까 다들 꺼져. 다시 이딴 짓 하면 죽을 줄 알고.”

그 말에 플레이어들은 모두 도망치듯 떠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가온은 혀를 찼다.

사실 정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우드엘프 연기를 해야 하니 격하게 반응했을 뿐이다. 만약 그레이엘프 여자가 이 꼴을 당했다면 자신은 게임이고 뭐고 격하게 반응했을 테니.

가온은 다시 한번 우드엘프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그 아가씨가 보면 현피하고 싶어 미치겠네.’

도망친 그들이 현실에서 봉변을 당하지 않도록 애썼다.

조명을 창밖으로 던져버린 뒤, 빠르게 시체를 수습했다. 다행히도 약 이백 년 정도 해본 덕분에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고 있자니 한 여자가 다가왔다.

우드엘프 여자는 가온과 시체를 보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제가 해야 할 일 대신해주고 계시네요.”

“뭘요.”

“사제가 있으면 좋을 텐데. 편히 갈 수 있게요.”

가온은 어차피 게임 속 NPC니까 죽어도 리젠될 거라 알려주려다 말았다.

‘흉턴은 죽은 뒤 부활하지 못했는데. 그 드래곤도 그때 해치운 이후 리젠되지 않았다 하고. 어쩌면 엘프도 한 번 죽이면 끝일지도······.’

그리 생각하고는 말했다.

“마침 저도 사제긴 합니다.”

“달 여신님의?”

“아뇨. 그쪽 종파는 아니고.”

“기독교는 아니죠?”

“아닙니다. 불과 화로의 여신님을 모셔요.”

“뭐······ 아무 장례 없이 가는 것보단 낫겠죠.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예.”

가온은 잠시 건물의 화덕에 가서 재를 몇 줌 주워왔다. 그것을 시체 위에 뿌리며 기도문을 읊었다.

“재를 더럽다 여기지 말라. 재 속에서 불사조가 날아오를 테니.”

가온은 명색이 사제인지라, 게임 속에서도 장례를 주관하며 대충 하지는 못했다.

자기 MP를 써서 축복까지 해서는 마저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니 재 속에 편히 묻히소서.”

그 기도는 경건했고, 실제 성직자가 봐도 감탄할 만치 실제 신성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실제 성직자의 장례 행위로 인정되었다.

장례에 시체가 반응했다.

가온은 시체에서 빠져나오는 영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그리고는 기겁했다.

영혼이 시체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게임 속 시체에서.

영혼마저 게임답게 구현한 것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영혼은 실제 다른 영혼들이 가는 세계로 사라졌다. 사제로서 가온은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가온이 물으니, 여신께서도 황망히 대답하시었다.

‘모르겠구나. 이게 대체?’

‘이 게임의 후원자들은 천상 아닙니까? 마법으로도 구현할 수 없는 기술을 지원해주시었다고······’

‘그것은 사실이나, 그 일에 네 여신은 관여하지 않았다. 다른 신들이 그러했지. 그들을 추궁해야 하리라. 네 여신이 알아보마.’

*******

지구에서 넘어온 상인들은 화전민들에게 총을 팔았다. 싸구려 총을, 귀한 맨드레이크를 받고서.

화전민들로서는 불공평한 거래를 한 보람이 있었다.

화전민들이 총을 들고 쳐들어오자 우드엘프들은 밀렸다.

유격전의 명수인 우드엘프들이 고작 총 든 화전민들에게 숲에서 밀리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당시는 1920년대였다. 모두가 총에 익숙하지 않은 시기.

엘프들의 예민한 청각에 화약 무기의 천둥이란 정말이지 경천동지한 것이었다. 수백 년 살아온 베테랑 엘프 유격대원조차 질겁해서는 전의를 상실했다.

우드엘프들은 후퇴를 거듭했고, 그 과정에서 몇몇 우드엘프들은 아예 항복했다.

항복한 우드엘프들, 화전민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숲에 들어갈 때마다 쏴 죽이는 원수이긴 했다. 그런데도 어쨌건 아름다운 종족이었다.

양쪽의 화해를 주선한답시고 양 종족간의 반강제적인 결혼이 이루어졌다.

이것을 달과 순결의 여신은 굴욕적으로 생각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결국 그 우드엘프들은 사후 지옥에 떨어졌다. 자신이 믿는 신들의 교리에 어긋나게 살아온 자들이 가는 그곳에.

그로부터 수십 년 지나, 21세기.

천상의 신들은 지옥의 죄수들에 주목했다. 그들이 그냥 고통받게 내버려두기는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죄수들을 쓸 방법을 생각했다.

*******

“그러니까 여기 우드엘프들은 지옥에서 데려온 우드엘프들의 영혼이라 이거죠?”

우드엘프 여자의 말에 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지옥에서 정상참작이 되는 죄수들을 주로 이 게임에 넣은 모양입니다. NPC나 몬스터로요.”

“정상참작이 되는 죄수라 하면?”

“예를 들어······ 총기 앞에 위압 당해 순결의 맹세를 깨고 인간과 결혼한 우드엘프라든가.”

가온은 그리 말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우드엘프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물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영혼은 어디로 갔나요? 다시 지옥에?”

“아뇨. 지옥에 가진 않을 겁니다.”

형량을 마치고, 환생의 강에 갔을 것이다. 자그마치 여신의 대전사가 축성했지 않은가.

그 사실을 직접 알려주진 않았지만 우드엘프 여자는 만족한 눈치였다.

“그래요? 그럼 다행이고······ 정말 감사해요. 이번 일을 반드시 언니한테 말해줘야겠네요. 동족 영혼 몇몇이 여기 갇혀있다고요.”

“그러고보니 사전조사 하러 이 게임 들어오셨다 하셨죠?”

“예. 언니한테 이 게임인지 뭔지를 알려주려고요.”

“그걸 언니 분께 왜 알려줍니까? 소드마스터씩이나 돼서 게임을 할 것도 아닐 텐데요.”

“할 거라는데요.”

“정말?”

“예. 그래서 시간 남는 제가 미리 체험해 보고 어디서 뭐 하면 되는지 언니한테 알려줄 생각이에요.”

*******

포성이 울린다. 지상에서 때 아닌 천둥이 울린다.

게임 속 전선에서 류시범은 우울했다. 자길 욕한 강주석을 혼쭐내는 마당이지만 기껍지는 않다.

한국 플레이어들 모두가 자신을 욕하고 있음을 안다. 어쩌면 다른 한국 국민들도 모두 자신을 욕하고 있을지 모른다.

졸지에 자신은 한국을 버리고 카르세 국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생이 이따위로 순식간에 바뀔 줄은 몰랐다······.

이런 생각을 전에도 또 했었는데. 언제 그랬더라?

그래, 전처와 이혼할 때 이런 느낌이었다.

전처는 이혼하면서 재산의 반뿐만 아니라 인생의 절반까지 가져 가버렸다. 삶의 행복이며 추억까지. 심지어 신앙마저도.

본디 류시범은 불과 화로의 여신을 믿는 신도였지만 그 믿음을 포기해야 했다.

화로의 여신께서는 가정의 수호자이시다. 가정을 파괴한 이혼남은 그녀의 가호를 받아 천국에 들어설 수 없다. 지옥에나 가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면 칼과 전쟁의 신은 모시기에 어떨까 문득 생각했다.

중세에는 주로 귀족들이 모시던 신. 전쟁신의 기준에 선행이란 전쟁의 승리라고 했다. 그러니까 성공적으로 정복을 거듭하면 그 신에게 선행을 인정받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자신도 전쟁에서 꽤 이기고 있긴 하다. 게임에서지만 어쨌건.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전선은 고착상태로 보였지만, 실은 이쪽이 착실하게 포위하고 있는 마당이었다. 이대로면 자신이 지휘하는 병력들은 착실하게 저 민병대만도 못한 오합지졸들을 박살 낼 것이다.

그리 죄다 박살낸 다음에는 김일성을 혼쭐내러 갈 것이다. 그것은 아스의 신들이 보기에도 좋은 일일 것이다.

‘듣고 계십니까, 전쟁 신이시여?’

류시범은 칼과 전쟁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허상에서의 승리마저 승리로 여길 수 있거든, 이 전쟁의 승리를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앞으로도 계속······ 참마황은 당신의 대전사라 들었습니다. 그를 위해 움직일 예정입니다. 그 점을 어여삐 봐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뒤, 류시범은 처량하게 웃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다.

그리고는 잘 준비를 했다.

가상현실 기기를 나왔다. 카르세의 황량한 아파트가 드러났다. 이혼남이 사는 집답게 아무도 없는······.

다른 세계에 홀로 살게 된 신세를 자조하려다 말고, 류시범은 흠칫했다.

인기척. 누군가가 여기 있었다. 한국의 암살자?

아니었다.

어색한 한국말로 웬 여자가 말했다.

“네가 류시범인가? 참마황이 이렇게 말하던데. 전쟁 신께서 네게 가보라 하셨다고.”

류시범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물었다.

“참마황이? 그리고······ 전쟁 신께서?”

“오늘 기도했다던데 아닌가? 사람 잘못 찾아왔으면 돌아가지.”

“기도하긴 했는데······ 그쪽은 누구요?”

여자는 자기 소개를 했다. 입이 아닌 손으로.

여자가 검을 뽑았다.

어두운 방 안에 초승달이 빛난다.

태양의 권세를 압도하는, 강렬한 달빛이 퍼진다.

그것이 우드엘프들 특유의 검기라는 것까지는 류시범이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하여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류시범이 홀린 듯이 바라보는 가운데, 달빛은 여자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뾰족한 귀.

우드엘프 여자가 말했다.

“우드엘프 연금 수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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