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 길드장 류시범 - [3]
억울함에 북받치다 못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류시범은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사전에 경고도 없이······ 다짜고짜 사람 제끼려 드는 게 무슨······”
이 와중에 남자의 태도는 여전히 고압적이었다.
“경고요? 이미 했다고 압니다. 그것도 여러 차례.”
한편 가온은 싸울 준비를 했다.
“경고를 언제 했다고······”
암살자 주제에 너무 말수가 많다. 협조해주는 척하면서 시간을 끌려는 수작이다. 분명 바깥에 패거리가 있다.
과연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온은 탁자 다리를 부러뜨려서는 손에 쥔 채, 다가올 전투를 기대했다.
곧이어 창문이 깨지고, 굳게 잠갔던 문이 활짝 열렸다.
덩치 큰 남자 세 명이 동시에 진입했다.
“뭐······”
“덜 맞으려면 조용히.”
덩치의 경고는 스산했다.
류시범이 두 눈을 부릅뜬 가운데, 가온마저 기겁했다. 떨리는 눈으로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 친구들 왜 총도 안 들었어? 왜 고작 세 명이고?”
*******
습격에 전투. 그리고 도주. 영화처럼 역동적인 이 상황에 류시범은 적응하지 못했다.
여관을 나온 류시범은 달리는 차량에서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노인네 하나 해치우려고 네 명이나······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이지 감사할 따름······”
“감사는 됐어. 이게 소설이나 만화였음 방금 그건 묘사할 가치조차 없었을걸?”
가온은 시시한 상황이었다며 툴툴거렸지만 류시범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방금 본 장면을 앞으로 평생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달려드는 네 명을 그저 뺨 때려서 죄다 쓰러뜨린 판타지 전개. 그야말로 판타지 주민다운 전개였다.
그 판타지 주민이 없었을 경우, 현실적인 전개가 닥쳤을 경우는 상상하기도 두렵다.
다행히 판타지 주민의 존재로 위기는 넘겼다. 그러나 아직 안심되지는 않는다.
그 판타지 주민이 네 명을 모두 기절시킨 마당이지만, 심지어 부러뜨린 탁자 값이라며 돈도 두고 온 마당이지만 상황은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한 바였다. 모든 곳에 CCTV가 깔린 한국에서 대놓고 쳐들어왔다.
대체 어디서 습격해온 것인가?
네 명이서 여관을 습격할 정도로 대담한 걸 보니 일개 조폭이나 청부업자는 절대 아니다. 그 뒷수습이 가능할 정도로, 훨씬 강력한 무언가.
지금 류시범의 적은 국정원일 수도, 아예 국가일 수 있었다.
쓰러뜨릴 수 없는 적들.
적이 되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는 것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가온의 물음에 류시범이 대답했다.
“스폰서들한테 연락해서 도움을 청하려 합니다. 어제 도움 요청했을 땐 거절당했지만, 지금은 습격범들이 존재하는 게 확실하지 않습니까? 더 강력하게 요청을······”
“스폰서들도 다 알면서 의도적으로 요청 무시한 건 아니고?”
류시범은 한숨 쉬었다.
“그럴지도요.”
“그러면?”
“한국을 벗어나야죠. 망명이라도 가야겠습니다.”
“갈 데는 있고?”
“글쎄요······”
이런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망명 또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애국자를 자처하던 전 군인이 한국을 벗어난다니, 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인가.
그저 막막한 가운데 가온이 제안했다.
“아스는 어때?”
“아스요? 거긴 지구인들 망명 절대 안 받아주지 않습니까? 입국 심사도 지구인들 상대로는 엄청 까다롭다 하고······”
“그건 걱정할 거 없고. 모은 돈은 있니?”
“예? 예. 저 하나 먹고살 만큼은······”
“그럼 걱정없겠다. 바로 떠날까?”
가온의 물음에 류시범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말입니까?”
“왜, 계속 있게?”
이것저것 정리할 것이 많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의 적을 떠올린 류시범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가온이 류시범의 손을 붙잡았다.
류시범이 어어 하는 사이에, 가온은 텔레포트를 시작했다. 이백 미터씩 공간을 뛰어넘고 뛰어넘기를 매 0.8초마다 반복했다.
‘내 대전사는 타인이 자기 정체를 눈치채지 못할까봐 심히 걱정하는 듯하구나. 그 걱정을 덜어주고자 네 여신이 조언하노니, 은근슬쩍 회색 머리칼도 드러내는 게 어떻겠느냐? 아예 검기까지 선보이면 더 확실하겠구나.’
여신께서 비꼬시자 가온은 경건히 대답했다.
‘여신이시여. 자고로 정체를 숨겨도 능력은 숨기면 안 되는 법입니다.’
‘수만 년 살아온 경험으로도 그 이유를 도저히 유추할 수가 없어 묻나니, 어째서냐?’
‘능력을 숨기면 칭송을 못 받지 않습니까? 검기도 제 것만 유독 색깔이 유니크해서 못 쓰는 거지, 저랑 같은 색 검기 쓰는 소드마스터가 있었으면 그 사람인 척 검기도 좍좍 뿜었을 텐데요. 참 아쉬운 일입니다.’
여신께서 대전사의 검기 색상이 유일한 것임에 지극한 감사를 느끼시는 가운데, 류시범의 시야에는 배경이 마구 바뀌고 있었다. 이 초현실적인 장면에 뭘 어째야 할지 몰라 눈만 마구 깜박였다.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순식간이었다.
한국-카르세 차원문 터미널 앞에서 류시범은 멀거니 섰다.
“차원문 이용해봤니?”
“아니요······ 그런데 저, 여권도 없는데······”
“괜찮아.”
가온이 주머니에서 여권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류시범의 손에 쥐어주었다. 혹시 몰라 만들어둔 여벌 신분증.
류시범이 그것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말했다.
“이 여권 사진과 전 너무 다른데······”
“기다려봐.”
가온이 입술을 달싹인 뒤, 류시범은 무심결에 자기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변했다.
뭔가 상처라도 입었나 싶어 휴대폰으로 자기 얼굴을 확인해보고는 기겁했다.
은퇴한 전 장성의 주름진 얼굴은 사라지고, 젊은 청년의 잘생긴 얼굴이 거기 있었다. 폴리모프 주문. 누구나 이렇게 쉽고 빠르게 모습을 바꿀 수 있다면 세상에 보안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얼굴을 뒤집어쓴 두 남자가 차원문으로 나아갔다.
차원문 앞에는 여전히 마법 해제 성물을 든 검사원이 서있었다. 류시범이 움츠러들자 가온은 태연히 말했다.
“괜찮아. 내 폴리모프는 이런 걸로 안 풀려.”
반신이 쓰는 주문은 모두 신성 주문이 된다느니, 해제하려거든 마법 해제와 신성 무효를 동시에 시도해야 한다느니 자랑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과연 성물은 두 남자의 변신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둘은 아무런 문제 없이 차원문을 통과했다.
다른 세상이 둘을 반겼다.
공기부터 달라진 가운데, 두 남자는 아스를 걸었다.
이 와중에 저번과 다른 점이 하나.
웬 시위꾼이 터미널 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쟁 반대!”
웬 아줌마가 팻말을 들고 소리 질렀다. 전장은 사람 목숨을 삼키는 지옥이라느니. 정말 3차 대전이 일어나면 젊은이들은 죄다 죽고 말 거라느니.
“전장에서 뒤지면 뭐 어때? 천국 쉽게 가서 좋은 거 아닌가.”
웬 오크의 말에 시위꾼 아줌마는 눈을 부라렸다.
“남겨진 사람들은? 굶어 죽을 텐데 어떻게 천국을 갑니까?”
“아, 굶어 죽긴 왜 굶어 죽어?”
“우리 식량 다 어디서 오는지 모릅니까? 다 지구에서 수입해오는 거요! 우리 국토를 봐요. 사 할이 우드엘프들 숲이지! 얼마 안 되는 농지엔 죄다 돈 되는 맨드레이크만 심고! 그 맨드레이크를 지구에 수출해다 쌀이며 밀가루며 수입해오는 거 아냐! ”
“그럼 맨드레이크는 그만 심고 곡식을 심으면 되는 거 아뇨?”
“애초에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아스에선 화학비료도 못 만드는데? 식량 자급자족이 될 리가 없지!”
평균 학력이 초졸인 오크들에게 화학비료니 자급자족이니 하는 단어들은 지나치게 어렵다.
자길 놀린다고 생각하여 화가 난 오크가 마구 욕설을 내뱉는 가운데, 다른 행인들은 못 본 척 지나가고 있었다.
당황한 아줌마는 가온을 보고 소리쳤다.
“거기 청년들! 그냥 지나가지 말고! 전쟁 나면 다 청년 같은 젊은이들이 끌려가서 죽는 거야!”
가온에게 와닿는 말이 아니었다. 가온은 그저 저 아줌마가 마법을 꿰뚫어보지 못한 채 반말했음에 화났을 뿐이다.
‘유교 마렵네.’
결국 두 남자는 시위꾼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전쟁이 벌어지든 말든, 이 두 남자에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
이후의 일은 모두 일사천리였다.
가온은 후긴의 아는 사람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고, 그 문자 한 통이면 모든 것이 빠르게 처리되었다.
계좌 개설부터 시민권 발급까지. 이 모든 것이 불과 몇 시간 만에 처리되었다는 사실에 류시범은 놀라지 않았다. 슬슬 이 남자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저 지극한 감사를 표했을 뿐이다.
“이 은혜를 대체 어찌 해야 할지······ 이렇게까지 도와주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 이 도움에 은혜 갚을 방법이 없어요······”
가온이 생각하는 ‘은혜 갚을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남은 돈으로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죠.”
“게임은?”
“4판타지 온라인 말씀하십니까? 당연히 그만둘 겁니다. 이제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아요. 그놈의 게임 때문에 이딴 일이나 겪고, 전부터 집어치우고 싶었는데······”
그 말에 가온은 당혹했다.
‘내가 그 게임 접을 경우를 대비해서, 이 친구한테 복동이랑 지존무쌍 좀 챙겨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일부러 귀찮은 일까지 전부 처리해준 것 아닌가. 그 보람이 없어질 판이었다.
그렇다고 차마 대놓고 말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속으로 씁쓸해 하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나 보던 와중이었다.
가온은 웬 게시글을 보고는 이 글이 쓸 만하다고 생각했다.
류시범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네 길드원들이 너 걱정하는데?”
류시범에게 습격이 있었단 소식이 팬 사이트에 올라와 있었다. 거기에 백골 길드원들이 길드장의 무사를 바라는 응원 댓글을 잔뜩 달아놓았다.
류시범은 집중해서 그 댓글들을 읽어내렸다.
평소 같으면 이 버러지들이 자신에게 잘 보이려고 충성 경쟁하는 거라며 고깝게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험한 꼴을 당해 맘이 약해진 지금은 아니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 흐느끼듯 감상을 토해냈다.
“새끼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으면 좀 잘해줄걸······”
감동한 것과는 별개로 게임을 그만둘 계획은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가온이 실망한 가운데, 류시범은 계속 댓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부릅떴다.
류시범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가온은 무슨 문제 있나 싶어 류시범이 든 스마트폰을 보았다.
웬 댓글이 보였다.
왜구척결 : 뉴비들 돈이나 갈취하는 정게틀딱 참교육 당했죠~
왜구척결 : 부고 소식 언제 올라옴? 오매불망 기다리는 중인데 ㅎㅎ
게이머들 사이에서 백골부대의 평판이 어떤지 가온도 알고 있긴 했다.
그러나 그 험악한 평판을 고려해도 이 댓글은 정도가 심했다. 가온이 혀를 찼다.
“빠꾸가 없네. 이 자식 뭐지? ”
그리고 류시범이 중얼거렸다.
“강주석, 이 씨발 새끼······.”
아는 이름이 들려오자 가온은 기겁했다.
“이 댓글 쓴 놈 강주석이야? 그 항일 길드 운영하는 친구?”
“예······ 평소부터 일베충 뒤지라느니 시비 걸더니 아주······.”
얼마 전에 좋은 모습들을 여럿 보였던 그 남자가 사람 죽으란 식의 댓글을 남길 줄은 몰랐다.
가온은 딴 사람 아니냐 물으려다 말았다.
류시범이 분노에 차 중얼거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제가 은퇴하면 좋아할 놈이 많군요. 그것도 제 원수 같은 것들만 좋아하겠어요.”
“그럼 은퇴 안 할 거야?”
“예. 우선 강주석 이 종간나부터 조져버리고······ 김일성까지 조져버리긴 힘들겠지만, 엿이라도 잔뜩 먹여줘야겠지요. 절대 엘프 되지 못하게.”
그리고 지금, 류시범은 새로 생긴 원수 하나를 떠올렸다.
그 원수의 이름은 대한민국이고, 자신을 죽이려 했단 점에서 그 무엇보다 큰 원수였다.
그 원수는 이유는 몰라도 참마황이 영원한 젊음을 얻고 전쟁을 일으키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원수가 싫어할 행동은 반드시 해야 하는 법이다. 류시범은 맹세하듯 말했다.
“제 노력이 흉턴······ 아니, 참마황 폐하께 도움이 되면 좋겠군요. 참마황 폐하 만세.”
이 마음의 변화를 가온은 굳이 말리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건 의도대로 된 상황 아닌가.
그 어깨를 두드려주며 웃었다.
“힘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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