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 길드장 류시범 - [1]
“그래서 정말 도우러 가시겠다고? 백골 길드에서 돈 좀 줬나 본데, 가온 형은 돈 필요 없잖아?”
이복동의 질문에 가온이 대답했다.
“돈이야 필요없지만 가줘야지 뭘 어째? 목숨의 위협을 받는다는데. 아무튼 이번에 한국 갈 거니까 현지인들이 한국 안내 좀 해줘. 왜, 귀찮아?”
가온은 지금 백골 길드의 수장을 경호하러 가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이복동이 떨떠름한 가운데, 지존무쌍이 얼른 대답했다.
“아니, 하나도 안 귀찮아!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뭐가 귀찮아? 아무튼 잘 생각했어요! 잘 생각했어!”
“아, 지존무쌍 아저씨가 안내해주실 거면 전 필요없······”
이복동이 빠지려던 차였다. 지존무쌍이 그 귀를 잡아당기더니 속삭였다.
“이놈아. 백골 길드장이랑 얼굴 보게 해주려고 배려하는 거잖아.”
“예? 아······”
요새 거대 길드 수장들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만나긴 했지만, 사실 프로게이머들에게 그들과의 만남은 아주 드문 일이요 어려운 일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회이기도 하다. 게임 내 모든 이권이 거대 길드 수장들의 손에 쥐어진 것이다.
당연히도 게임에서 친해지는 걸 넘어 현실에서 만날 기회는 더욱 귀하다. 은혜를 팔아둘 기회는 더.
결국 이복동이 고개를 끄덕이자 지존무쌍은 만족했다.
씩 웃다가 문득 가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가온 씨, 비자 없다고 하지 않았나?”
가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없지.”
“그럼 어떻게 입국하시려고? 한국만 해도 아스인 밀입국자들 막으려고 보안 엄청 철저한데?”
“세관원이 따지면 이렇게 대답하면 되지······ 너희 지구인들은 아스에 허락받고 들어왔냐? 민주주의며 전염병이며 그 지랄 맞은 것들 죄다 우리 허락받고 배달한 거냐? 너희는 맘대로 드나들었는데 왜 난 그러면 안 돼!”
“우리 한국인들은 멋대로 안 들어갔는데······”
“나 그런 거 몰라! 다 똑같은 지구인이야······ 이건 농담이고, 괜찮아요.”
“왜?”
“안 걸리면 되니까.”
가온이 지나치게 당당해서 두 한국인은 당황했다.
한편 가온이 말했다.
“아무튼 곧 갈 거니까 다 로그아웃하고 약속장소에서 기다려요.”
그리고 가온은 로그아웃했다.
여신께서 한탄하시었다.
‘내 대전사가 외출함은 네 여신에게 천상의 연회를 아득히 능가하는 기쁨이라. 그러나 이번 외출에는 네 여신뿐만 아니라 전쟁 신마저 기꺼워 하겠구나.’
‘전쟁 신이 어째서 기뻐합니까? 아, 소드마스터인 제가 멋대로 지구에 들어선 게 들키면 국제문제로 발전할 것이다, 그 결과 전쟁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뭐 이런 우려의 말씀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신이시여.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내 대전사가 지구에 멋대로 드나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면 전쟁 신이 보고는 환희할 것이 문제다. 지금도 내 대전사를 보는 전쟁 신의 안광이 흉포한 기대에 벅차 빛나고 있나니.’
전쟁 신이 지켜보고 있단 말에 가온은 바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남한테 관심받을 기회가 생길 때면 늘 그러듯이.
전쟁 신이 나중에 칭찬과 함께 박수라도 쳐주길 기대하며, 가온은 지구로 향했다.
후긴에는 차원문이 없지만 상관없었다. 다른 나라에 있으니까.
가온은 우선 카르세까지 이동했는데, 이때 비행기나 자동차는 필요하지 않았다. 텔레포트를 반복하면 되었다. 반신 특유의 강력한 마나는 그 장거리 이동을 가능케 했다.
수천 킬로미터를 지나, 순식간에 목적지에 다다랐다.
철조망과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보였다.
무장한 군인들이 건물을 빈틈없이 경계하고 있었다.
카르세-한국 터미널.
양 세계를 잇는 차원문이 설치된, 특급 보안시설이다.
차원문에 이어진 양 세계 모두 이 시설을 엄중히 관리했다. 지구로서는 차원문을 통해 가난한 아스인들이 건너오는 걸 막아야 해서. 아스로서는 귀중한 차원문 기술이 지구에 넘어가는 걸 막아야 해서.
각자의 이유로 차원문의 보안에는 빈틈이 없었다. 공항을 능가하는 경비인력이 깔린 가운데, 투명화 주문을 염려한 열 감지 카메라까지 잔뜩 설치된 마당이었다.
그 철저한 보안시설의 한 가운데를 가온은 당당히 걸어갔다.
사실 신분증과 여권이 있기는 했다. 완벽하게 위조된 가짜 신분증과 가짜 여권. 온갖 부정이 넘치는 후긴에서 돈을 주고 구하지 못할 물건은 없는 법이었다.
여러 절차를 순식간에 지나쳤다.
저 앞에 차원문이 있었다.
파랗게 일렁이는 에너지. 보기만 해도 몸을 넣고픈 유혹이 들게 하는······.
가온이 홀린 듯이 다가가니 웬 공무원이 막아섰다.
“잠시! 아직 마지막 절차가 남았습니다!”
공무원은 웬 낡은 종을 내밀었는데, 가온은 짜증스레 물었다.
“그건 뭐요?”
“성물인데요. 여기에 닿으면 어떤 마법이든 해제되는 물건입니다.”
“귀한 거네. 이건 또 언제 마련했답니까?”
“그게, 요새 흉흉해서······ 얼마 전에 웬 리치가 폴리모프한 채로 교단에 테러했지 않습니까? 폴리모프 대비하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이후로 형식상으로나마 마법 관련으로도 검사를 하는 거죠.”
그 말에 가온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무원은 별 생각 없이 성물을 가온의 몸에 갖다댔다.
그리고 잠시 후, 별 생각 없이 말했다.
“이상 무. 통과.”
가온은 한 발짝 내딛었고, 차원문에 발을 디뎠다.
옛 친구의 고향, 한국이 엘프를 맞이했다.
*******
약속장소에서 이복동은 안절부절못했다.
약속이 잡히자마자 바로 와야 했다. 머리를 깎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복동의 머리는 길었는데, 패션으로 기른 것이 아니라 사람 만날 일 없는 백수다운 장발이었다.
게다가 얼굴에 수두룩한 여드름 흉터며 성인 여드름까지.
이 못난 꼬락서니를 그 잘난 아스인에게 보여야 한단 말인가?
현실에서 만나기로 한 사실을 새삼 후회하는 가운데, 지존무쌍이 나타났다. 다행히 이쪽은 저번에 이미 만난 바였다.
“오, 복동이!”
지존무쌍을 본 이복동은 살짝 웃었다.
‘마흔 넘었다더니 쉰은 넘어 보여······’
보잘것없게 생긴 중년 남자. 심지어 머리까지 벗겨진 지존무쌍의 현실 모습을 보니 이복동은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시 후, 약속장소에 익숙한 얼굴이 또 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이복동의 모든 자신감은 사라졌다.
“현실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지? 방가방가!”
보통 현실의 모습은 게임에서보다 초라한 법인데, 저 아스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게임 모습 그대로의 가온이 거기 있었다. 잘생긴 동양인 남자, 이복동에게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하는 그 모습이.
“이게 누구야, 몰라볼 수가 없네? 가온 씨! 저번에 만나자고 할 때는 못 온다더니!”
“지금도 무리해서 온 거야!”
가온과 지존무쌍이 즐거이 대화하는 가운데, 이복동은 입 다물었다.
지존무쌍이 끌고 온 차에 올라타서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와중에도 내내 침묵했다.
차는 백골 길드원들이 알려준 장소에 가 닿았다.
으리으리한 고급아파트. 류시범의 집이었다.
이복동이 더욱 주눅 든 가운데, 세 명은 류시범의 문 앞에 섰다.
가온이 벨을 누르니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빨리 대답해······」
“가온이랑 나머지 둘.”
「뭐? 왜······」
“경호하러 왔지. 왜, 설마 길드원들이 말 안 해줬나?”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나 지키러 와줬다고? 기대도 안 했는데······”
류시범의 현실 모습을 본 이복동은 조금 놀랐다.
전 장성이라더니? 그 화려한 경력이 의심스러울 만치 류시범은 평범하고 초라해 보였다.
게임에서도 류시범의 노인의 외견이었지만 거기서는 풍채가 당당하고 눈에 힘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니었다.
등은 굽었고, 어깨는 좁았으며 제대로 챙겨 먹지 않았는지 비쩍 말랐다. 게임과 같아야 할 목소리마저 어째 힘이 없었다.
“고맙게도 와줬어요······ 고마워. 정말 고마워······ 그런데 가온 씨가 맞아요? 엘프라 말씀 안 하셨나······”
류시범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리 묻자, 가온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다시 보였다.
오크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또다시 가렸다가 보이니, 이번에는 웬 서양인의 얼굴.
모두가 눈을 크게 뜬 가운데 가온이 말했다.
“진짜 얼굴은 못 드러내요. 이해해줄 거지?”
한편 이복동은 섬뜩했다. 며칠 전에 이복동은 저 아스인이 수백 좀비를 손짓만으로 불살라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런 대량살상 병기가 한국에서 마음대로 모습을 바꿔대는 것이다.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류시범은 그걸 신경 쓸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그저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할 뿐이었다.
가온이 물었다.
“그래서 현피를 당했다니 뭔?”
류시범이 설명했다.
얼마 전, 류시범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만성적인 신경 불안 탓에 잠은 잘 오지 않았다. 그저 눈 감고 누워있기만 했다고.
그런데 갑자기 웬 발소리가 울리더니,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빛났다는 것이다.
눈의 착각인 줄 알았지만 아니라고 했다. 그 빛나는 날붙이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더니, 내리찍혔다······.
“바로 침대 위에서 몸 굴러서 목숨 건졌지. 그리고······ 장교 시절에 장식용 칼 선물 받은 거, 벽에 걸어뒀거든? 겁나서 그거 막 휘두르니까 사라지긴 했는데······”
“아무튼 자다가 습격당했다 이거지. 경찰은 불렀나?”
가온의 물음에 류시범은 공손히 대답했다.
“불렀지요. 불렀는데······”
고급 아파트답게 보안은 훌륭했지만 습격범은 CCTV에 찍히지 않았다고 했다. 그것을 확인하더니, 경찰은 단 한 번 출동한 이후로는 류시범의 모든 전화를 무시한다고 했다.
“씨발 놈의 경찰. 씨발 놈의 게임. 그 북괴 새끼가 보냈나본데, 뭔 놈의 게임이 물러 주기 안 했다고 사람을 죽이러 와······”
신경 불안이란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류시범이 울부짖듯 흐느끼는 가운데, 지존무쌍이 말했다.
“일단 경찰 다시 불러보죠?”
류시범은 그 말에 동의했지만, 자기 목소리를 들으면 경찰들이 무시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지존무쌍이 전화를 걸어 경찰들을 불러내야 했다.
다행히 경찰들은 출동했다. 그리고는 이미 와본 집주소임을 확인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도둑당했다며? 허위신고로 경찰을 불러?”
지존무쌍이 따졌다.
“부르는데 안 오는 건 괜찮고? 살인미수라잖아 살인미수!”
“살인미수는 무슨······ CCTV에 여기 드나드는 사람 한 사람도 안 찍혔구만. 들어오는 사람도, 나가는 사람도 안 찍혔는데 뭔······”
경찰이 혀를 찼다.
류시범이 버럭 소리질렀다.
“텔레포트로 왔다가 사라졌다고!”
그 말에 경찰이 류시범을 노려보았다.
“텔레포트가 만만해 보여요? 그거 아무나 쓰는 거 아냐.”
비웃듯이 그리 말하더니, 경찰은 스마트폰을 켜서 웬 글을 보여주었다.
“자, 읽어봐요.”
지존무쌍은 시키는 대로 했다.
“텔레포트는 특1급 주문이다. 이 주문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특1급 마법 자격을 인정 받는다······.”
경찰이 마저 읽어내렸다.
“드래곤조차 텔레포트를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신체 질량이 클수록 텔레포트 난이도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폴리모프 주문으로 몸을 바꾸는 것은 이 경우에 소용이 없다······ 뼈밖에 없는 리치들이 그나마 쉽게 텔레포트를 해내지만, 그 뼈에 살이 붙은 인간들의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 뭘 말하려는지 알겠어요?”
“텔레포트, 되게 어렵다 이거지.”
“어렵다 못해 이것만 해도 최고등급 마법 자격 인정받는다니까! 2급 마법 자격만으로도 어느 대기업이든 들어갈 수 있는 거 몰라요? 그러니까 텔레포트할 수 있는 마법사라면 뭔 단체에서든 모셔갈 엄청난 인재라는 건데. 그런 인재가 고작 살인 청부 받고 와? 그것도 게임에서 생긴 트러블 때문에? 말도 안 되는 거지! 그냥 연구소에 앉아있는 게 더 벌 건데 왜? 애초에 범죄에 텔레포트니 폴리모프니 하는 것들이 쓰인다 가정하면 경찰 노릇 못 해요. 뭔 수로 막고 뭔 수로 알아내?”
마법과는 평생 인연이 없었던 지존무쌍도, 마법 주문이라곤 학창 시절에나 몇 번 봤던 이복동도 입을 다물었다.
심지어 류시범조차 욕설을 지껄일 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가온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는 경찰의 등을 쿡 하고 찔렀다.
“뭐······”
짜증스레 고개 돌린 경찰이 가온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기겁했다.
눈앞에서 가온이 사라졌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뒤통수를 찔렀다.
다시 앞을 바라보니 방금 사라졌던 가온이 거기 서있었다. 무슨 마법을 썼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제 내가 누구 죽이면 경찰 안 오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