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소드마스터 반지성 - [2]
4판타지 온라인 운영진 사이에서 자기네 게임을 하는 소드마스터의 존재는 극비였다.
그 소드마스터가 재의 왕자라는 사실은 특히 더.
이 정도면 국가기밀 못지 않은 비밀 아닌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직원 두 명과 회장, 오직 세 명만이 이 놀라운 비밀을 공유했다.
이후로 그 직원 둘은 아예 소드마스터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이 주 업무가 되었다.
경력 삼기는 어려운 업무지만, 불만족스러운 업무도 아니었다. 덕분에 승진도 했겠다, 무엇보다 이 소드마스터를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재밌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가온 경 생각보다 유쾌한 분이네요, 진짜 너무 웃겨······ 이거 저만 알고 있기 너무 아까운 사실인데······”
후임 직원의 말에 선임 직원이 대답했다.
“그렇다고 떠벌리고 다니진 마라. 가온 경 실은 허당이니 뭐니 퍼뜨렸다간 물리적으로 모가지 날아가는 거 알지?”
“가온 경 성격 좋아 보이는데요? 지구 쓰레기들한테도 잘해주고. 소문 좀 퍼뜨렸다고 사람 죽이진 않으실 거 같은데?”
“가온 경이 직접 안 죽이셔도 그 추종자들이 널 죽일걸.”
“가온 경, 추종자 많아요? 그리 오래 은거하셨는데?”
“많지 엄청. 우드엘프들만 해도······”
잡담하던 와중에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본 두 직원은 몸이 굳었다.
후임은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선임에게 말했다.
“회장님께서 지시 내리셨습니다······ 반지성 AI 패턴 변경하랍니다.”
“어떻게?”
“‘일본 국적 플레이어 적대’에서 ‘한국 국적 플레이어 적대’로 바꾸라 하십니다.”
정당한 지시는 아니었다. 회장은 이미 NPC 군대로 한 플레이어들의 세력을 휩쓸라 지시한 마당이었다. 거기에 한 번 더 조작하여 특정 세력에 더 큰 피해를 주라 지시하고 있었다.
게임 운영의 공정성을 심히 훼손하는 지시였지만, 두 직원은 거기에 불만 품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누구 지시라고 꺼려한단 말인가?
두 직원은 그저 역사적인 드래곤께서 자기네에게 지시를 내렸음에 감격했다.
즉시 지시를 따랐다.
게임 속 NPC의 행동이 바뀌었다.
*******
일찍이 이 소드마스터를 상대해야 했던 한국인들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반지성은 군인들이 상대하기 아주 어려운 소드마스터에 속한다.
반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지성은 소드마스터 중에서도 두 번째로 강력한 스펙을 자랑하는 초인이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난 초월적 신체와 끝 모를 마나 총량.
그 덕에 반지성은 흉턴처럼 칼을 길지만 얇게 만들 필요가 없다.
반신 특유의 괴력 덕에 무게를 줄일 필요가 없고, 강대한 마나 덕에 검기를 유지할 면적을 줄일 필요도 없다.
타협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반지성의 칼은 유치할 정도로 웅장하다.
건물처럼 거대한 그 칼에 빈틈없이 검기를 둘렀다. 이 정도면 비현실적인 수준을 넘어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대로봇이 써야 어울릴 모습이다.
그동안은 그런 칼로 일본인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곤 했다. 아이러니함에 백두 길드원들은 실컷 웃어왔다.
더는 웃을 수 없었다.
그 비현실적인 칼이 자신들을 향해 덮쳐오는 지금은.
반지성이 한국 플레이어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16미터짜리 빛 덩어리를 한국인들에게 겨누고 있었다.
오직 일본 플레이어만을 공격하던 반지성이 표적을 바꾼 것이다.
“대체 왜?”
가온의 물음에 백두 길드원이 대답했다.
“모르죠. 일본 애들 방금 좀비들한테 싹 털렸으니까 이참에 공격 대상을 바꾼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우리도 지구 진영이니까 아스 편인 반지성한텐 꼴 보기 싫은 놈들이었을 테니······ 아무튼 가능하겠습니까? 반지성, 잡아주실 수······”
“해볼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두 길드원은 거의 울 것처럼 거듭 감사하더니 떠나갔다.
다시 싸우기 전에 잠시 휴식을 취해야 했다. 가온은 랭커들에게 돌아왔다.
랭커들도 상황 변화 자체는 알고 있었다.
다들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상황이 너무 우리한테 편하게 흘러가는데······.”
“우리 고용주, 실은 운영 관계자 아냐? 저 말도 안 되는 병력 동원한 것도 그렇고.”
“그럴듯하네. 애초에 소드마스터 때려잡는단 목적 자체도 군사 시뮬레이션이란 이 게임 의도에 들어맞지?”
다들 혼란스러워하는 가운데, 가온이 말했다.
“아무튼 다들 싸우는 건 확정이지?”
“예, 물론.”
“그럼 빨리 작전대로 하자. 알지? 내가 반지성이 유인해와서, 붙들고 늘어질 거야. 그리 위치 고정 시킨 틈에 너희가 사살해야 하고.”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며 유인하기, 그 어려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흉턴 전에서 증명한 바였다. 본인이 소드마스터는 아니라지만 어쨌건.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가온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지성이, 어느 정도까지 유인할까?”
“최대한 가까운 게 좋죠.”
“저번엔 1.1km 거리에서 쐈잖아? 그것도 시내에서.”
“그건 로그인 위치가 고정이니까 미리 영점 잡아둔 덕분입니다. 중간에 딴 표적도 많을 텐데, 막 빠르게 움직이기까지 하는 걸 지나치게 멀리서 쏘긴 좀······”
“아무리 그래도 너무 깊이 유인은 못해. 보니까 위험 느끼면 튀더만, 적진 깊이 들어오진 않을걸? 가능하면 700m까지 유인해볼 테니까 한번 쏴봐.”
“예, 그럼······”
지형이나 장애물에 방해받지 않고 저격하기 좋은 장소는 이미 물색해두었다.
돌격소총과 저격총을 든 저격수 팀, 그리고 저격수 팀을 엄호할 분대가 전장 진입에 나섰다.
그들 랭커들에게 이복동이 물었다.
“저는?”
전장 진입에는 은밀함이 필요하다. 랭커들은 솜씨도 모를 누군가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 없었다.
“여기서 참관해.”
“아······ 네.”
이복동은 문득 지존무쌍을 보았다.
할 일이 없어 시무룩해진 자신과 달리, 지존무쌍은 지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온이 다시 고용주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는 덕이다.
“좋다, 아주 좋아······”
이복동은 돈만 받으면 다냐고 속으로 비난하다 말았다. 결국 지존무쌍이나 자신이나 직접 하는 일이 없긴 마찬가지 아닌가.
그냥 응원이나 하자 싶어 쌍안경을 들고 전장을 바라 보았다.
반지성이 보였다.
좀비들을 고기 방패 삼아, 그들과 함께 달려와서는 터무니없이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기관총 진지며 바리케이트 따위를 마구 찢어발기고 있었다.
언뜻 보면 그저 마구 부수는 것 같지만 실은 계획된 파괴였다. 지금 반지성은 좀비들이 지나가기 힘들 장애물들, 건물과 철조망 따위를 주로 파괴하고 있었다.
적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것만큼 효과가 확실했다. 막히기 시작하던 언데드들의 전진에 다시 속도가 붙고 있었다.
‘진짜 다 부수네······’
멀리서 보면서도 이복동은 신음했다.
벽이나 담장 따위 장애물을 파괴하는 것은 실제 전장에서 장갑차와 불도저가 맡는 임무다.
저 소드마스터는 그런 기계들보다 훨씬 우수한 파괴자였다. 거대한 빛이 한 번 허공을 휘저으면 모조리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소드마스터에게 돌격하는 것은 터무니없이 거대한 기계에 정면으로 들이받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한 남자가 정면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가온, 저 아스인의 실력을 알고 있음에도 숨이 턱 막히는 장면이었다.
‘투명해질 수도 있으면서 왜 굳이?’
그러나 지금 가온은 냉정하게 돌격하고 있다.
가온은 반지성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반지성을 상대로 투명해지는 것은 소용없는 일임을, 그 검술과 버릇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파악한 내용으로 전술을 세워 행동했다.
“지성아, 형 왔다!”
달려드는 가온을 향해 반지성은 대답이 없다.
말없이, 칼을 휘둘렀다.
백색 광채가 세상을 뒤덮는다. 사상 최대 규모의 횡베기. 삼십 미터 범위 내 사람과 지면이 모조리 쓸려나간다.
육중한 공격이라 느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소름 끼치게 빠르다. 헤이스트 주문을 쓴 가온이 보기에도 그렇다.
가속된 사고로 상황을 판단한다.
오거 포션을 복용한 마당이지만 정면으론 막을 수 없다. 절대.
가온은 위험을 감수하고, 껑충 뛰어 피해내서는 더 가까이 파고들려 했다. 반지성은 거대한 칼을 대각선으로 휘둘러 막으려 했다.
그 순간 두 소드마스터 사이에서 이루어진 복잡한 수 싸움을 소드마스터 아닌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수 싸움에서 가온이 이겼다. 거리를 좁히는 데 성공했다.
한 발짝 더 파고드니 둘은 서로 코앞이다.
초근거리.
이로써 이쪽이 유리한 상황이다. 검기 두른 칼로는 하프소딩도 할 수 없을 테니.
이제 가온이 걱정하는 것은 너무 쉽게 이기면 소드마스터로 의심받으리란 것뿐이다.
오른손에 든 권총을 연달아 쏜다. 바로 앞에서, 가속된 속도로 쏘는 총은 소드마스터도 피하기 어렵다.
그러나 어떻게든 피해낸다. 총알들을 지나 반지성이 옆으로 몸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가온이 예상한 바다. 노림수이기도 하다.
피해낸 그 자리에 가온의 칼이 덮친다. 섬광 같은 찌르기.
그에 맞서 반지성은 반격한다. 방금까지 놀고 있던 오른손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롱소드를 휘두른다.
그처럼 칼집에서 칼을 뽑아 휘두르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술이다.
특이한 일은 아니다. 서양 검술이든 동양 검술이든, 칼집에서 칼을 빨리 뽑아내는 기술은 생각보다 유용하기에 시간을 들여 연마하는 법이니.
그러나 이 순간 가온은 이상함을 느낀다.
반지성은 일본인들을 싫어했고, 칼집에서 칼을 빨리 뽑는 기술 또한 왜색이 짙다며 싫어했다. 의도적으로 그런 기술을 연마하지 않았다.
그런데 뭐 이렇게 빨리······.
가온의 찌르기보다 반지성의 휘두르기가 더욱 빨리 완성되었다.
가온은 눈앞에서 번뜩이는 백색 광채를 본다.
그리고 기겁한다.
반지성의 롱소드는 칼집에서 뽑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칼은 칼집에 방해받지 않고 나왔다. 놀라운 괴력으로, 아예 칼집을 부수면서 휘둘러졌다.
칼날이 가온의 시야를 뒤덮는다.
가온은 부랴부랴 회피하며 마주 칼을 휘두른다.
둘 다 괴력을 지녔다. 그래서 두 칼이 부딪친 순간, 폭음이 울려 퍼진다.
지상에서 터진 천둥.
폭발 같은 접전이 시작된다. 반지성이 16미터짜리 칼을 휘두르던 아까만큼 화려하지는 않다.
그러나 더욱 빠르고 치열하며, 청각적으로는 더욱 괴로울 지경이다.
가온이 뒷걸음질 친다.
계속해서 철과 철이 얽힌다. 그 사이에서 천둥은 계속 울린다.
맞붙는 그대로, 두 칼잡이가 전장을 가로지른다.
모든 사람들이 두 칼잡이를 바라보고 있다.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도 마찬가지다.
“와 씹, 저게 말이 되나? 소드마스터랑 진짜 정면으로 붙네?”
“저 양반 소마 맞다니까 진짜······ 앞으로도 저 양반 앞에서 행동 조심해. 잘 보일 수 있으면 최대한 잘 보이고.”
“본인은 소마 아니라던데?”
“소마 아니건 말건. 정말 소마면 소마니까 잘 보여야 하고, 소마가 아니면 소마가 될 가능성이 커 보이니까 잘 보여야지.”
그리 중얼거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까부터 침묵하는 사람들이 있다.
2인 1조 저격수 팀이 제 위치에 도달했다.
지금은 빗나갈 리 없는 위치까지 표적의 접근을 기다리는 중이다.
대기하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린다. 게임 속이라지만 소드마스터 아닌가. 그 초인을 일개 총잡이들이 해치우는 위업은 가히 전설이 될 것이다.
새삼 성공 가능성을 점검했다.
가능성은 생각보다 있어보였다.
가져온 온도계와 풍향계를 통해 주변 환경 파악이 끝난 가운데, 거리 목측은 원래부터 완벽하다.
조력자의 솜씨마저 초인적이었다. 소드마스터에 대한 저격을 어렵게 하는 가장 큰 요소, 소드마스터가 지나치게 빨리 위치를 옮겨 다닌다는 난점은 저 소드마스터와 맞붙는 남자 덕분에 사라졌다.
놀랍게도, 저 소드마스터는 저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상대해야 할 만큼 위협적이라 느낀 모양이다. 덕분에 계속 시야에 잡힌다.
마침내 조력자가 약속한 지점까지 도달했다.
저격수가 방아쇠를 당기자 소리보다 빠른 총알이 공기를 찢으며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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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성을 상대하며 가온은 힘에 부치는 것을 느꼈다.
우선 너무나도 힘에서 밀렸다. 반지성은 지금 오른손으로 칼을 휘둘렀는데, 왼손잡이인지라 오른손에 잡은 칼에는 검기가 생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의 충돌은 순수하게 힘 싸움이었다. 그리고 힘 싸움에서 반신을 이길 수야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굴욕스럽게도, 가온은 기술 면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지성아, 형 없을 때 연습 많이 했니? 그러지 말지 비겁하게······”
힘겨운 나머지 목소리마저 떨리는 가운데, 반지성의 칼이 쇄도했다.
가온이 기억하는 그 천둔검법이다. 하나하나의 동작이 지나치게 커서 도저히 실전성이 있다고 보기 힘든, 그나마 괴물들을 상대로는 쓸 만했던 검술.
그러나 지금, 그 검술은 놀라운 예리함과 세련됨을 지닌 채 덮쳐왔다.
방어만을 거듭하는데도 아슬아슬하다.
가온이 두 발짝 더 뒷걸음질 쳤고, 반지성이 거리를 좁혀왔다. 펜싱 경기였다면 이미 판정패.
가온은 마지막 힘을 실어 칼을 휘둘렀다. 반지성 또한 마주 칼을 휘둘러왔다.
충돌의 순간, 가온의 손에서 칼이 떨어져 내렸다.
가온은 입술을 깨물면서도 웃었다.
전투는 졌지만, 전쟁에선 이쪽이 이겼다.
저 멀리서 총알이 날아왔다. 강렬하게 충돌하고 있던 반지성은 피할 틈이 없었다.
총알이 반지성의 몸통을 관통했다.
그리고 반지성은 신경 쓰지 않고, 칼을 놓쳐 무력화된 가온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