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34화 (34/135)

LV.4 오크 요으 - [3]

오래된 뱀파이어 하나가 이를 악문다. 뱀파이어 특유의 뾰족한 송곳니가 입안을 찌르자, 피 대신 흘러나온 재가 입속에 퍼진다.

뱀파이어로서는 그 통증과 이물감 따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저 소드마스터의 앞에 놓여있는 지금, 핵탄두가 자신들을 향해 겨눠진 기분이다.

왜 저 소드마스터의 심기가 불편한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감히 이유를 물어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밤의 귀족들은 최대한 눈에 덜 띄기 위해, 잔뜩 웅크린 채 입을 다물었다.

숨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침묵 속에서 가온이 입을 열었다.

“내 땅에 들어온 모기들······ 요즘도 실컷 피 빨고 다닌다더군. 예나 지금이나, 그 모기들 행패에 가려워서 미치겠단 목소리들이 자자해.”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는······”

흡혈귀가 변명하려는 가운데, 가온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바로 끊었다.

“그건 괜찮다. 용납할 수 있어. 내가 왜 막겠나? 여긴 공화국이고 나는 왕이 아닌데. 일개 평민이 질서를 잡겠다며 나설 순 없지. 자경단 활동은 위대한 공화국 형법에 위배 되는 일 아닌가.”

“전하께서는 후긴의 적법한 왕위계승자요, 절대 미천한 평민들과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하지만 일개 평민조차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들려오더군. 모기들이 애새끼들을 피 빨아다 장구벌레로 만들어 팔아치운다던데.”

뱀파이어들이 다시금 침묵했다.

가온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건 꽤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야. 내가 그동안 아동 포르노업자들의 금을 받아들였단 말이니. 모기들이 방금 내가 왕위계승자라고 했나?”

“예, 당연히······”

“그렇다면 왕족에게 추잡한 금을 바쳤단 말이군.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야. 모름지기 왕족의 곳간엔 먼지 한 톨 없게 잘 닦인 금만이 쌓여야 하는 법인데.”

“맹세코 저흰 그러지······ 않았습니다! 애완 흡혈귀 양성은 수십 년 전에 이미 금지된······”

“저질러진 일은 있는데 저지른 자는 없나 보군. 신의 기적인가, 아니면······”

가온의 시선이 한 뱀파이어의 머리 위에 가 닿았다.

“더러운 모기 이름을 왕족의 입에 담게 할 셈인가, 그라노트?”

그라노트, 거대 제약회사의 주인인 이 뱀파이어는 평소에 어찌나 냉정한 모습만을 보이는지 직원들 사이에 감정이 없다는 평판을 받고 있었다.

지금 모습을 봤다면 그 평판이 틀렸음을 모두 알게 될 것이다.

“부디 용서를······ 전하······”

진동하듯 몸이 떨리는 그라노트에게 가온은 굳이 계속 시선 주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들은 꼴 보기 싫다는 듯,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양치질할 물건이 없는 게 한스러워. 그런 식으로 왕족의 입을 더럽히면 기분이 좋은가? 이런 식으로 왕족의 격이 낮아진다 하여 모기의 격이 높아지지는 않을 텐데.”

“죽을······ 죽을까요? 명하신다면 바로······”

“이 와중에도 왕족의 눈을 더럽히겠다니. 왕가를 향한 그 원한이 참으로 놀랍군. 민주투사 나리였나, 그라노트?”

이제 그라노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거의 기절할 것처럼 꺽꺽거리는 가운데, 가온은 굳이 무엇을 명함으로써 그 맘을 편하게 해주지 않았다.

그저 다시 고개를 내려 다른 흡혈귀들을 바라보았다.

“모기들······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 불쾌한 존재들이지만, 그 윙윙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만 않는다면 용납할 수 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기들이 알겠나?”

“저흰······”

“지난 수십 년간 그래왔듯, 후긴에서 계속 피를 빠는 것은 상관이 없다. 모기들의 할 일이 그것 아닌가? 계속 그러라고. 하지만 그놈의 주머니에 피 채우는 과정에서 왕족의 체면을 더럽히면 안 되지. 절대 안 돼.”

결국 그라노트가 호흡을 멈추고 기절했다.

시종들이 그 몸을 끌고 나갔는데, 지금 상황을 벗어났다 하여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눈을 뜬 후, 분노한 뱀파이어들과의 대면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이 와중에 모기들이 영광으로 알아야 할 일이 있다. 내가 모기들은 일을 어찌 처리하는지 전해 들을 계획이다. 물론 모기들의 주둥이가 아니라 다른 입을 통해서. 최대한 일이 깔끔하게 처리되면 좋겠는데. 알겠나?”

가온의 말에 뱀파이어들이 부르짖었다.

“예, 물론!”

“모기 식으로 깔끔하게 굴란 것이 아니야. 사람 기준의 깔끔함이다. 그러니까, 모기들이 일을 처리하는 중에 피와 재가 흩날리면 안 된단 뜻이다. 혹시 모기들의 조그만 뇌로는 왕족의 말을 담기 어렵나?”

“아닙니다!”

뱀파이어들이 이제 어찌 처신할 것인지 경쟁하듯 외치는 가운데, 가온은 관심 없는 듯 다른 곳을 쳐다보면서도 특유의 청력으로 모두 귀담아들었다.

가온이 듣기에도 꽤 만족스러운 약속들이 쏟아져나왔다. 이번 일의 주동자들을 확실히 처벌할 것이라느니, 관련된 자들을 피해자로 간주하고 보상까지 확실히 할 것이라느니.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판단한 가온이 말했다.

“오늘은 눈과 귀와 입이 모두 더러워진 날이다. 이런 날이 더 없기를 바란다.”

“예, 절대!”

“그럼, 왕족의 눈을 그만 더럽히고, 이제 가라. 가서 하던 일들을 계속해라. 물고, 피를 빨고, 윙윙거리고······”

그리 말하더니 가온이 사라졌다.

텔레포트로 사라졌는데, 그러면서 주문을 소리 나게 외우거나 떠날 것이라 말해주지 않았다.

고개 숙인 채 절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은 눈앞에서 가온이 떠났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한참을 계속 절하고들 있다가, 수십 분 뒤에야 겨우 알아차리고는 분노하는 게 아니라 안도했다. 겨우 괴로운 시간이 끝났노라고.

한편 가온은 다시 후긴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아까 쭉 걱정한 내용을 여신께 물었다.

“저 대사 좀 괜찮았습니까? 안 쓰던 말투 지어내느라 좀 연극 투 같았을까 봐 불안한데요. 너무 무게 잡아서 오글거리진 않았을까도 좀 걱정인데······.”

‘심려할 것이 없나니, 내 대전사는 언제나 멋지노라.’

”게임할 때도 말입니까?“

‘그때는 당연히 제외지. 왜 헛소리를 하여 네 여신의 귀를 더럽히느냐, 가온아?’

*******

「소랄시 장로는 후긴 내 뱀파이어 가문들을 대표하여 (······) 애완 흡혈귀 유통의 재발에 깊은 유감을 표했으며 (······) 후긴 재계 서열 3위의 재벌 총수 일가조차 이번 처벌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혈족의 이름으로 공표했습니다. 가온 경께 염려를 끼쳐드린 바 깊은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는 말을 덧붙여 (······) 그것을 보아 후긴에 실질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가온 경이 이번 사건의 적극적인 해결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 (······)」

훈련장 내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애써 들으면서 이미리는 이를 악물었다.

“저 적폐 새끼는 지가 싸지른 똥 남 보고 치우라 시켜도 칭찬을 받네.”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하던 와중에도 굳이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일종의 자기 응원이었다.

게임으로 치면 최종보스의 악행을 보고서, 놈을 쓰러뜨리기 위한 레벨 업 의욕을 북돋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니까, 저 최종보스와 같은 소드마스터가 되기 위해서.

물론 게임과 달리 현실에서 레벨 업은 보장되지 않는다. 최종보스의 발치까지 가기도 너무나도 힘들다.

요즘따라 이미리는 그 사실을 실감했다.

이미리는 소드마스터 양성을 위한 국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높으신 분들이 뜯어먹는지, 참여자들을 위한 지원은 영 시원찮다. 90만 원밖에 안 되는 월급 중에 1/4 가까이가 그놈의 게임 계정비로 빠져나간다.

훈련시간 외에도 훈련하고자 자발적으로 그놈의 게임을 시작한 것인데, 사실 여기 훈련장에서 훈련하는 것보단 그 게임하는 시간이 검술 증진에 더욱 나을 지경이다.

아무리 열심히 연습한들 소드마스터가 되리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훈련하는 놈들이나 훈련을 시키는 놈들이나 프로젝트에 아무런 기대가 없는 눈치다.

뭔가 제대로 하는 것들이 없다.

‘훈련생들은 대충 칼 휘두르는 척하면서 시간 죽이다 집에 가고······ 검도협회가 로비를 했는지, 공무원 저 병신들은 자꾸 수련 시간에 실전성 쥐뿔도 없는 검도 영상 틀어주곤 죽도나 휘두르게 하고.’

가뜩이나 최선을 다해도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가운데,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이미리는 미칠 지경이다.

*******

일이 모두 해결된 가운데, 뱀파이어들의 위협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봐라니는 부모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돌아갈 집이 이미 없었다.

“걔 엄마나 아빠나 집에 없던데요으. 전화도 안 받고으,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도 않고으······.”

요으의 말에 가온은 어이가 없었다.

“왜?”

“글쎄요으, 자기 딸을 팔아버렸다고 동네에 소문나는 것이 싫어서 떠났나? 문 따고 방 들어가 보니 온통 쓰레기만 가득 차 있던데요으. 월세 살던 사람들이니까, 이참에 방 치울 수고도 덜 겸 야반도주한 걸지도 모르겠어요으.”

“막장이네. 그래서, 넌 앞으론 어쩔 거야?”

“계속 살던 대로 살아야죠. 돈 벌면서.”

“계속 오크 브라더들이랑 약 팔겠다고?”

“요즘엔 약만 파는 게 아니라 딴 일도 시작했어요으. 프로게이머.”

“아니, 너도 4판타지 프로게이머 하게? 차라리 롤 프로게이머를 하지, 4판타지 프로게이머는 사회적으로 존중도 못 받는데 대체 왜 그 망겜을······”

“뭐 어쨌건 약이나 파는 것보단 백 배 나은 일이고으······”

가온은 차마 그 말에 뭐라 하지는 못했다. 잠시 입 다물고 있다가 물었다.

“봐라니는? 네가 키우겠다는 말, 아직도 변치 않았나?”

“예, 뭐······”

“그럼 계좌 불러봐.”

“계좌는 왜?”

“알면서 왜 눈치 없는 척하나? 빨리 불러.”

잠시 후, 요으는 송금된 액수를 보고 눈이 떨렸다.

“이걸 정말 받아도 될지······”

“되지 물론. 어차피 내 지갑에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세금으로 주는 건데 뭐. 혹시 소드마스터 계좌에서 돈 받으면 모기 새끼들이 눈깔 부라리면서 지켜볼까 봐 걱정이라면, 그 눈깔들 뽑아버릴 거라 이미 경고했으니까 괜찮아.”

“그럼 감사히······.”

“이만 가봐.”

“예, 정말 감사를······ 멍청한 오크놈 부탁 들어주시느라 정말 수고가 많으셨어요으. 거듭 감사합니다······”

거듭 절한 뒤에야 요으는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가온은 생각했다.

저 오크. 그러고 보니 로그아웃을 자신과 같은 도시에서 했던가? 기껏 멋지게 헤어진 뒤에 웃긴 일이지만, 게임에 접속하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같은 동네에 사니까 현실에서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지.

어쩌면 그 뱀파이어 여자애도 또 만나게 될지 모른다.

그 아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일단 살해당하지만 않는다면 썩 나쁠 것 같지는 않았다. 옛날이라면 뱀파이어가 된 소녀가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자살을 도와버렸겠지만, 요즘에는 아니다.

뒤를 봐주는 누군가만 있다면 예쁘고 어린 뱀파이어가 할 일은 널렸다. 넘쳐나는 수명을 활용한 돈놀이이든, 뭐든 간에.

어쩌면 예쁘고 신비스러운 외모를 활용한 아역배우 활동마저 가능할지 모른다. 요즘 시대에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요즘 사람들은 뱀파이어들을 경외하고 동경한다. 어차피 천국에 가지 못할 바에야 지상에서 낙을 누리자는 식으로, 뱀파이어들의 불완전한 영생을 탐낸다.

그것은 엘프의 완전한 영생과 달리 남에게 베풀 수 있기에 탐낼 가치가 있다.

옛 평민들이 귀족이 되길 원했듯, 요즘의 평범한 사람들은 뱀파이어가 되길 원한다.

그들의 간절함을 뱀파이어들도 알고 있다. 원하는 바를 줄 듯 말 듯 하면서 무일푼으로 조종한다. 평민 젊은이들에게 영지와 작위를 내려줄 듯 굴며 적은 보수로 일을 시키던 중세 귀족들처럼.

이제 뱀파이어들은 현대의 귀족이 되었다.

약 수십 년 전만 해도 뱀파이어들은 동굴과 지하에서 숨어살았다. 그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이렇듯 달라진 세상에서 소드마스터가 할 만한 일은 언제나 하나였다.

가온은 게임을 시작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