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30화 (30/135)

LV.1 길드장 류시범 - [3]

끝내 저 앞까지 도달한 오거들. 그 뒤에서 함께 돌격해오는 하이엘프들.

들이닥치는 적들을 상대로 가온은 완벽하게, 그러나 스스로는 만족스럽지 못하게 싸우고 있었다.

전장의 소음 탓에 소리만으로 적들의 위치를 알 수는 없었다. 상관없었다.

참호 너머로 얼굴을 살짝, 총구도 살짝 내밀어 연달아 쏴댔다.

탄약 한 발이 곧 적 하나의 죽음을 보장했다.

비워낸 탄창만 열두 개가 넘는다는 것을 고려하면 가온은 홀로 백 명 넘게 죽인 셈이었다.

가히 전쟁영웅의 위업이라 할 만했지만, 현대적 전장에서 영웅은 쉽게 돋보이지 않는다.

수천 명이 총을 쏘는 전장에서 누가 누굴 죽였는지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다. 머리 위로 총알이 빗발치는 마당에 참호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적들의 죽음을 보고 환호해줄 이들도 없다.

“백십이 명째 킬!”

남들이 자기 전과를 몰라주니 직접 어필해보았지만, 애초에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지존무쌍도, 이복동도 그저 총 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신께서 안쓰러운 듯이 말씀하시었다.

‘가온아, 그리 외쳐봤자 전장의 소음 때문에 잘 들리지도 않으리라. 또한 스스로 자기 공적을 자랑하는 자에게 기꺼이 칭송을 바칠 자들은 없으리니, 네 여신을 위해 겸손을 알라.’

당신께서 창피할 지경이니 제발 입 다물고 싸우라는 드높은 뜻을 가온은 영광된 대전사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가온 본인이 생각해도 영 창피한 일이었으므로, 이후로 가온은 조용히 싸웠다. 더없이 우울한 얼굴로.

[경험치 1900 상승]

[레벨 업]

이제 레벨 20. 지겨울 정도로 많이 싸워온 플레이어들 중에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레벨이 되었다.

그러나 이 또 한 번의 성장조차 가온을 들뜨게 하지 못했다.

성장의 즐거움보다 좋은 것, 영광.

가온은 영광을 원했다.

모두에게 주목받을 스포트라이트를 원했다.

원하는 것이 돌아오지 않자 지루하고 기계적인 총격을 이어나가던 와중이었다.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었다.

“‘KRWARWARAW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

천상의 과수원에 첫 감이 열린 이래 유서 깊은, 드래곤의 포효다.

거대한 괴성에 담긴 초저주파가 모두의 몸을 잠시 굳게 했다.

’으······‘

소리에 예민한 가온은 거의 몸이 마비될 뻔했는데, 그 와중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약 백 년 전에도 이런 상황을 겪었다. 거기 갇혀있던 원시적 드래곤들도 저런 식으로 울었다. 그때마다 가온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야 했다.

당연히, 소리는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았다.

전장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오거들도, 하이엘프들도, 인간들도 모두 굳은 가운데 이 자리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오직 저 오만한 짐승뿐이었다.

대전차 화기를 장비하고 있던 플레이어들도 제 장비를 쓰지 못했다. 정면으로 날아오는 저 드래곤을 향해 뭔가 하자니, 손조차 움직이지 않았기에.

아직도 모두의 몸이 저리는 가운데, 날아온 드래곤이 참호벽을 들이받았다.

드래곤의 거체가 그 안에 숨어있던 것들을 깔아뭉갰다.

굉음. 피어오르는 흙먼지.

그 지저분한 것들을 헤치고, 그 무엇보다 선명한 불줄기가 먼지 속에서 폭발하듯 분출되었다.

드래곤 브레스(Dragon Breath).

단 일 초 만에, 화염과 열기가 참호 안을 모조리 채웠다.

참호선 하나가 순식간에 전멸했다. 기다랗게 이어진 참호선은 이내 끊임없이 연기만을 토해내는 연옥의 구덩이로 전락했다.

연기에 가려진 드래곤의 몸은 하나의 거대한 실루엣으로만 보였다. 형체 없는 거대한 짐승이 연기 속에서 흉포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드래곤이 다시 날아오르기 위해 날갯짓했다. 드래곤의 날갯짓은 폭풍, 문장 그대로의 표현이다.

폭풍으로 인해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것이 바로 앞을 가리는 연막처럼 작용했다.

포병들을 잠시나마 혼란스러웠던 그때, 드래곤이 다시 날아오기 시작했다.

누구 하나가 주목받기 어려운 이 광대한 전장에서도 그 존재감은 신화적이었다.

모두가 저 드래곤을 바라보는 이 상황에 가온은 겨우 몸의 마비가 풀렸다.

“저 트로피 따내러 갈 테니까, 엄호 좀 해줄래?”

가온의 말에 이복동이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온이 웃었다. 그리고 달려나갔다.

*******

아스 역사에서 드래곤은 소드마스터와 비견되는 힘의 상징이었다.

가닿을 수 없는 저 상공에서 이 지상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거인들. 아스인들이 보기에는 신의 현현과 같았다.

지구인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드래곤들의 거대한 몸집은 화력을 투사하기 적합한 표적이었으며, 그 두꺼운 비늘은 화살을 튕겨낼 정도로 견고했지만 88mm 대공포 앞에서는 쉽게 벗겨졌다. 그 비행 속도는 1차 대전 시기의 복엽기보다도 느렸고 선회 능력은 비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드래곤 편대가 출격했다 하여 열강의 군대가 제공권을 빼앗기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드래곤을 격추한 에이스 파일럿의 무용담은 지구 문명의 우월함을 입증하는 신문 기삿거리에 불과했다.

그러나 간혹 기총탄에 관통되지 않을 정도로 비늘이 두꺼운, 비늘이 그리 두꺼워질 만큼 오래 산 드래곤들의 경우에는 예외였다.

에인션트 드래곤.

그 나이 많은 드래곤들은 혼자서 군대였고 실제로 지구 군대와 전면전을 벌이곤 했다.

지구 열강의 군대는 18세기 전열보병 전술만으로도 아스 군을 쓸어버리며 진격하고도 남았지만, 에인션트 드래곤의 존재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지루한 참호전을 벌이고 넓은 전장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 거대한 몸뚱이에 깔려 수천 명의 병사가 한꺼번에 짓이겨지고 말 것이므로.

방금 참호선 하나가 궤멸한 마당이지만, 실제로 참호는 드래곤을 상대하는 데 나름의 도움이 되었다. 어쨌건 이 안에 있으면 당장 저 거체에 깔릴 걱정은 없다.

참호 안에 숨어 김종일이 그리 생각했다.

실제로 참호 바깥에 나가면 저 거체에 받혀 죽을 위험이 있었다.

드래곤은 지나치게 지상 가까이서 날아오고 있었다.

두꺼운 비늘로 뒤덮이지 않은, 그래서 가장 빈약한 부위인 배를 보호하기 위한 저공비행이다.

하늘에서는 드래곤이 상대하기엔 지나치게 빠른 전투기들에 둘러싸일 뿐이니, 차라리 지상 가까이 싸우는 게 낫다는 사실을 드래곤들은 대전쟁 당시 굴욕스럽게나마 받아들인 바였다.

폭풍을 일으키는 날갯짓. 드래곤 주변을 휩쓰는 풍압이 모두를 움츠러들게 했다.

드래곤은 여러 겹 참호선을 관통하여 후방 포대를 향해 비행했다.

여기는 아군 진지고, 아군 진지란 곧 아군 포병들의 포격 범위다. 백골부대의 포병들은 수십 번의 실전을 거쳐 최고의 솜씨를 자랑한다.

순식간에 좁혀진 포망, 저 멀리서 날아온 포탄들이 드래곤의 주변을 타격했다.

쾅 하고, 명중탄까지 나왔다.

드래곤은 두꺼운 비늘에다 보호 주문을 두르고서 전장에 나섰지만 포탄을 무시할 수는 없다. 명중한 탄은 확실히 충격을 주었다. 사방에 비늘이 비산했다.

그러나 드래곤은 포탄에 얻어맞고도 여전히 날아오고 있었다. 포격은 드래곤을 잠시 움츠러들게 만들었을 뿐이다.

계속해서, 드래곤과 후방 포병들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끝내 막지 못할 것 같은데, 이대로는?

대전차 화기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2차 대전 시기에 포병이 무력화되면 끝장이다. 보병만으로는 에이션트 드래곤을 상대로 충분한 타격을 줄 수가 없다.

「1km 이내에 접근!」

류시범이 공포를 느끼는 가운데, 다가온 드래곤과 가까이 있던 김종일은 보았다.

누군가가 드래곤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뭐 하려는 걸까. 더 빨리 죽으려고? 아니면······.

‘드래곤 몸뚱이에 올라타려고?’

누구나 생각해봄직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드래곤 전투 경험이 많은 김종일이 보기에는 병신 머저리 같은 짓이었다.

기차에 들이받히면 죽는다. 그냥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 마찬가지로 거세게 움직이는 드래곤에게 올라타려다가는 죽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김종일은 다음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미끄러지듯이 드래곤의에게 달려간 남자가 무언가를 했다.

그리고 굉음이 울렸다.

“‘KI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AK―!’”

드래곤이 낸 소리였다. 이번에도 대단히 컸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이번 것은 비명이었다. 고통에 못 이긴 비명.

*******

가온은 드래곤을 보며 가진 것을 파악했다. 총과 아다만티움 제 칼 몇 자루.

남들 앞이니 검기를 쓸 수는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검에서 검기를 좍좍 뿜지 못하던 시절에도 드래곤을 잡은 적이 있으니까.

그 드래곤들은 마법도 쓸 줄 모르고, 이성까지 없는 반편이들이긴 했다. 어쨌건 상대하는 법은 알고 있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가온은 슬라이딩하여 드래곤의 앞으로 나아갔다. 드래곤의 바로 앞에서, 바닥에 칼 한 자루를 칼날이 위로 가게 내리꽂았다.

그 위로 드래곤이 날아가자 거대한 피의 선이 그어졌다.

용의 크기가 크기다보니 뱃가죽만 좀 찢었을 뿐이었다. 그 안의 내장을 나오게 하지는 못했다.

역시 상관없었다. 예상한 그대로였다. 끔찍한 고통이 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었으니.

날갯짓이 멈춘 그때 가온이 펄쩍 뛰었다.

발이 드래곤의 비늘에 닿았다.

드래곤의 비늘은 미끄럽고, 촘촘히 연결되어 있어 그 틈이 거의 없다.

그러나 가온은 그 비늘들이 마치 계단이라도 된 것처럼 밟고 밟았다.

순식간에 드래곤의 등에 올랐다.

“오.”

드래곤은 눈길이 닿지 않는 자기 등에다 나름의 방어체계를 준비해둔 모양이다.

등 위 비늘에 새겨진 문양이 빛나더니, 얼음 파편을 드래곤의 등 위에 퍼뜨렸다. 마치 크레이모어 같았다.

그리고 지뢰에 당해 죽은 소드마스터는 역사상 아직 없다.

틈새가 없는 것 같은 파편의 범위에서, 가온은 그 틈새를 찾아내어 달렸다.

순식간에 목까지 닿아서는 칼을 아래로 들고는 휘둘렀다.

검술에 조예가 있는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 휘두름은 검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검으로 벌이는 작업에 불과했다.

그러나 검술보다도 효과가 있는 작업이었다.

주문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진, 거대한 비늘이 곧바로 벗겨져 하늘을 날았다. 지레의 원리니, 정확한 힘의 배분이니 하는 설명이 이 경우에는 검술 원리 설명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벗겨진 비늘 틈으로, 가온이 가져온 TNT를 넣어 터뜨렸다.

*******

드래곤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었고, 그 움직임이 잠시나마 멈추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드래곤의 등 위에서 뭐가 벌어지는지 볼 수 있었다. 본 사람들이 자기가 본 것을 보고했다.

보고는 사령관에게 가닿았다.

“뭐야 저거······ 진짜 소마 맞나 본데요······.”

부관의 말에 류시범이 쏘아붙였다.

“그렇다니까, 새끼가. 안 믿었나?”

“아니······”

“이따 얘기해.”

사령관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류시범은 다시 무전기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휘에 집중되지 않았다.

곳곳에서 포탄이 터지는 와중에 딴생각이 든다.

드래곤을 도살하기 시작한 저 소드마스터는 대체 누구인가?

일단 소드마스터인 것은 확실하다. 소드마스터씩이나 되는 족속이 게임을 할 이유가 있으니까.

소드마스터 참마황은 지나치게 늙었고, 그것은 이 게임 보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 아닌가.

누군가는 신들이 고작 게임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보상을 내건 것 자체가 참마황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어느 신도 특정한 인간을 수명이 긴 다른 종족으로 바꿔주면 안 된다는, 지상에 인간 영웅 출신 엘프들이 넘쳐나는 걸 막기 위한 특별법이 천상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게임 보상으로 종족 변환을 내건 것은 언뜻 보기에 특정한 인간을 지목한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실은 특별법을 우회하여 참마황을 엘프로 만들어주기 위한 수작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괜히 고증까지 어겨가며 2차 대전에 참여하지도 않은 가온을 게임 내에 삽입한 것이라고 했다. 참마황이 아닌 누군가가 최종 목적을 달성하여 보상을 가로채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말이지 가온은 최종보상을 지키는 수호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가온은 현대에서도 상대할 방법이 극히 제한되는 소드마스터 아닌가. 2차 대전 당시의 장비로 가온을 상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서 가온을 쓰러뜨리려면 어떻게?

소드마스터가 필요하다. 소드마스터만이 일국의 군대를 홀로 저지하고 있는 가온을 쓰러뜨리고 최종보상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고작 게임에 소드마스터를 동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참마황뿐이다. 본인이 직접 게임을 해서든, 참마황이 늙어 죽지 않길 바랄 다른 소드마스터에게 게임을 시켜서든 간에.

‘생각해보면 참마황 본인은 아니겠지. 아까 본인이 자긴 엘프라고도 말한 데다, 뭣보다 참마황 그 인간은 대통령직 수행하느라 바쁠 테니까. 어차피 본인은 길드장 직함만 달아 놓으면 게임을 직접 할 필요가 없으니, 시간 넘쳐나는 다른 소드마스터한테 부탁했을 거야. 그럼 누구?’

이 문제에 류시범은 깊은 관심이 있다. 그에 관한 생각을 계속 이어나간다.

‘성격 보니 가온은 아니겠고······ 하고도 아니겠지. 그 자식은 가온이란 가명을 쓸 수 없을 테니까. 빨갱이 해골이 보낸 소마 출신 데스나이트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인이랑 친했단 말을 한 거 보니 우드엘프 소드마스터 셋 중 하나 같은데?’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