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 길드장 류시범 - [2]
“뭐야······”
류시범이 당황한 가운데, 가온은 모두에게 들리도록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동방예의지국이 어쩌다 이렇게 됐냐? 너희 선조들이 너 이렇게 어른한테 막 대하는 거 보면 피눈물을 흘리겠다 이놈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식이, 세상이 이 꼴이 되니까 공맹의 도리를 몰라 가지고······”
“뭔 소리야? 댁 몇 살인데······”
이복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분 아스인이에요. 그것도 엘프.”
엘프란 단어만으로도 가온의 나이를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만 년 넘게 산 남자조차 활발히 전장에서 뛰어다니는 게 저놈의 종족 아닌가.
“아스에 사는 엘프가 공맹을 왜 따지는데······”
류시범이 따지자 가온은 더 큰 목소리로 따졌다.
“내가 인마, 소싯적에 조선인이랑 친구 먹고 그랬는데! 그 친구한테서 삼강오륜 좀 배웠다! 그 친구가 나 보고 대한제국 사람들은 다 예의범절이 깍듯해서 언제 나 한국 놀러 오면 사람들이 큰 어른 대접해줄 거라드만, 이 불학무식한 후손 놈은 제 선조를 사기꾼으로 만들어!”
가온이 계속 소리질렀고, 류시범의 동공이 흔들렸다.
“알겠으니까, 어르신? 진정 좀 하십시오. 제가 실수했습니다.”
“이 썩을 놈이 어른 보고 닥치라네! 늙으면 죽어야지, 서러워서 살겠나!”
지존무쌍이 웃어댔는데, 류시범은 노려보려다 말았다.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딴 데 보냐!”
이후로도 가온은 계속해서 분노를 토해냈고, 일부러 그러는지 멈출 기색이 없었다.
견디다 못한 류시범이 항복했다.
“죄송합니다······.”
“잘못한 줄은 알아?”
“예, 예.”
“왜 알면서 잘못을 하니?”
결국 류시범이 가온과 나머지 두 명을 돌려보낼 수 있었던 것은 십 분 후였다.
겨우 한숨 돌린 류시범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드원들이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들 있었다.
‘씹······’
분통이 터진 류시범이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는 중이었다.
부관 역할의 장교 출신 플레이어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장유유서 정신이 투철하십니다? 나이고 뭐고, 어차피 프로게이머 나부랭이들이니까 그냥 직위로 찍어누르셔도 됐을 텐데.”
“어떻게 그래 인마······”
“아무튼 그 칼잡이 양반, 소드마스터일 거라 하셨던 거 같은데 말입니다. 지금 보니 소드마스터 아니라 결론 내셨습니까?”
류시범은 피곤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 양반 소드마스터 맞아.”
“예?”
“이번에 올라온 영상 안 봤냐? 흉턴 폭격해서 죽일 수 있었던 거, 저 양반이 흉턴 상대로 시간 끌어준 덕분이잖아. 그럴 능력 있는 것만 봐도 딱 소드마스턴데, 왜 그걸 모르냐?”
당연하다는 듯한 그 대답에 부관은 이렇게 묻고 싶었을 것이다.
정말 소드마스터라 생각했다면 왜 대놓고 시비를 걸었나? 정말 소드마스터라면 자칫 모욕감이라도 줬다간 현실에서 목이 날아갈 텐데?
그러나 부관은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류시범이 자신을 표적 삼아 마구 갈구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최신 정보 체크하랬는데, 올라오는 영상들 안 보고 술이나 처마셨냐? 내 말이 우습냐 자식아? 개인정비 시간이 곧 자기단련 시간인 거 몰라? 이 발전이 없는 새끼는 하여튼······”
부관은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씹······’
*******
김종일은 백골부대원이고, 이 길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중에 월급 꼬박꼬박 받으며 게임할 수 있단 말에 혹해 들어왔더니 숫제 재입대한 기분이다.
그러나 지금 방금은 제법 유쾌했다.
김종일은 진지에 찾아온 세 명을 진지로 안내했다.
“아니, 가온 씨 왜 이리 든든해! 왜 이리 든든하냐구!”
이동하는 중에 지존무쌍이 마구 웃으며 떠들었는데, 그것을 백골부대원 그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살짝 미소지은 채 경례할 뿐.
김종일도 웃었다. 저 칼잡이가 김종일이 제일 싫어하는 꼰대를 괴롭혀주었기에 김종일의 목소리에는 호의가 넘쳤다.
“자자, 그만 웃으시고. 여기 뭐하러 오셨는지는 알죠?”
지존무쌍이 대답했다.
“예! 빨갱이들 때려잡으러.”
“맞아요. 우리의 주적은 북한입니다.”
김종일은 능선 너머에 펼쳐진 참호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복동이 망원경으로 보니 능선 위로 드문드문 올라온 하이엘프 몇 명이 보였다.
엘프 족속임을 믿을 수 없을 만치 못생긴 하이엘프들.
“저기 저 귀쟁이들이 죄 북한 놈들이에요.”
조선인민군과의 대치가 백골부대의 주 활동이었다. 조선인민군에게 이쪽에 전선을 유지하게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아린 벌판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다.
김일성이 우승하지 못하도록. 그 독재자가 아니라 자신이 우승하고 싶어하는 회장들이 백골부대에 후원금을 보내주고들 있었다.
“드래곤 나온다는 건?”
“아, 나옵니다. 진짜 자주 나와요. 저기 산맥 보이시죠? 저기가 아토루리움인가 하는 도마뱀 영역이랍니다. 그래서 지구 진영과 아스 진영이 격돌하면 아스 편에 붙어서 공격해오는데요. 북한군 입장엔 공짜로 와주는 지원군이나 다름없죠.”
김종일은 그놈의 도마뱀 때문에 진격을 못 하고 있다고, 그놈만 잡을 수 있음 북한군 후방을 깊숙이 찔러줄 수 있을 거라 설명했다.
“아무튼 놈 잡는 게 중요하다 이거지?”
“예? 아, 예.”
가온이 웃는 가운데, 김종일은 덩달아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한동안 잡담을 나누었는데, 대화에 낄 엄두를 내지 못한 이복동은 적진을 집중해서 경계하는 척했다.
“당분간 여기 계셔주시면 됩니다. 그럼 전 이만.”
김종일이 물러난 뒤에야 이복동은 말을 걸 엄두를 낼 수 있었다.
“가온 형? 저번에 저랑 나이 비슷하다고 하셨던 거 같은데······.”
가온은 씩 웃으며 말했다.
“에이, 삼백 살 아래론 다 동갑이지! 친구야 친구!”
나이가 삼백에 가깝구나.
이복동으로서는 새삼 저 아스인과 자신의 차이를 실감했다. 역시 다른 세상 사람이다.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자 노력하며 주변을 살폈다.
이곳 전장은 그야말로 전장다운 전장이었다. 너무나도 넓은 나머지 눈에 다 담기지도 않는, 드넓은 영역에 펼쳐진 전선. 하나하나가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전쟁 무기들이 즐비한 진지.
수많은 프로게이머들이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는 진정한 전장이 여기 펼쳐져 있었다.
이복동이 감격한 가운데, 가온도 주변을 조용히 살폈다.
광대한 전장. 초인 소드마스터들조차 뛰어다니며 허우적거리다 죽게 만든 현대의 전장이 보였다.
자신이라면 저기서 허우적거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백 년 노력하여 얻어낸 힘으로, 영광을 쟁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십수 년만 더 빨리 돌아왔더라면. 혹은 전쟁이 십수 년만 더 오래 지속되었더라면······.
지존무쌍이 물어왔다.
“그런데 가온 씨? 엘프라고 하셨는데, 그럼 엘프 죽이는 거 껄끄럽지 않아요?”
“음? 괜찮아요.”
“아니, 한국인으로 치면 일제에 가담해서 조선독립군 죽이는 격이잖아? 그것도 동족을. 아무리 겜이라도 좀 껄끄럽지 싶은데?”
“괜찮다니까! 애초에 저거 하이엘프들이잖아. 그게 왜 내 동족이야······ 맘 같아선 싹 다 죽여버리고 싶은데.”
그제야 지존무쌍이 입 다문 가운데, 가온은 마침 저 앞에 있는 하이엘프 군대를 노려보았다.
사실 고증 따윈 집어치운 일이었다. 현실에서 하이엘프의 전체 수는 수천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저기 보이는 엘프들은 아무리 봐도 만 명이 넘는······.
저기 보이는?
신호탄이 울렸다. 여기저기서 무전이 거세게 진동했다.
“씨발, 기습이다!”
조선인민군의 공격준비사격은 몇 박자 늦게 시작되었다.
적진에서 포성이 울리는 가운데, 이쪽도 마주 포격을 시작했다.
수많은 천둥 속에서 적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인민군의 선봉은 단단하게 차려입은 몬스터들이었다.
비싼 돈을 주고 고용했을, 오거 용병들이 능선을 넘어왔다.
강한 동력은 곧 방어력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동력이 강하면 더 큰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바, 장갑을 더 두껍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괴력을 지닌 오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보이는 저 오거들은 철판으로 온몸을 가렸다. 노획한 전차 장갑을 뜯어내어 대충 용접해서는 몸에 두른 것이다.
그렇듯 철로 중무장한 와중에 무기 또한 큼지막했다. 오거들의 손에 들린 개틀링건. 마구 쏴 갈기며 달려오고들 있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오거들 뒤에서 쿵, 쿵 거리며 다가오는 인조 거인들이 보인다.
골렘들.
한때 골렘으로 지구인들의 전차를 제압하겠다는 발상이 있었지만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느려빠진 골렘들은 도저히 전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만 증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실패를 거듭한 끝에, 골렘이 아무리 느려빠졌더라도 돌격하는 보병들을 엄폐하는 용도로는 충분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바였다.
스톤 골렘 수백 대, 아이언 골렘 수십 대가 나란히 서서 전진해오고 있었다.
마치 참호 벽에 발이 달려서 이쪽으로 접근해오는 것 같은 광경이다.
몇몇은 골렘의 머리 위에 철판을 용접해서는 전면장갑으로 삼은 뒤, 기관총을 올려놓았다.
하이엘프 조선인민군 몇 명이 마구 흔들리는 골렘 위에서 이쪽에 기관총탄을 쏴 갈기고 있었다.
하나하나가 실제 기계화 장비와 비교하면 초라한 병력이지만, 방어진지를 돌파하기는 충분하다.
좋든 싫든 그쪽에 화력을 집중해야 한다.
포병 지원과 함께 류시범은 전차들을 출격시켰다. 당연히도 전차들의 주포는 저 가짜 기갑 병력을 짓밟기 충분하다. 화력에서 압도할 수 있다.
그렇다고 쉬운 전투가 되지는 않는다.
“철덩이 쭈거어어어어!”
개틀링을 집어던진 오거들이 거대한 슬레지해머를 들고 전차를 내리찍고자 달린다.
전차들의 회피기동, 두 발로 달려오는 오거들을 뿌리치기는 충분하지만 여유롭지는 않다.
양 병력이 뒤섞이는 가운데, 류시범은 적들의 장비가 생각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았다. 저리 비처럼 쏟아지는 기관총탄들이라니? 이쪽 보병들은 참호 너머로 고개 내밀 엄두조차 못 내고들 있었다.
“개발사 씹새들, 고증 쥐뿔도 안 했어! 실제 역사였음 저 새끼들 무장 저리 안 충실한데······”
초조함에 손톱을 깨물었다. 당장 막아내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적들은 판타지 진영의 특권으로, 말도 안 되는 비대칭 전력을 투입해올 것이었다.
‘드래곤······’
언제냐? 어디로 올 것이냐?
막아낼 준비를 해두었다. 숨겨둔 전차 예비대. 화력을 집중시키고자 미리 포구를 돌려둔 야포들. 전투기들.
나름대로 막아낼 자신이 있다. 이미 몇 번 드래곤을 격퇴한 적이 있다. 심지어 투명화 주문을 걸고 새로 변해 날아오는 것마저 막아낸 적이 있다. 열적외선 장비가 제 일을 해준 덕분이다.
그때 죽였으면 좋았을 텐데, 날개 하나 찢고 살아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운이 좋았으면 좋겠다. 가능하면 놈이 너무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 화력을 집중시킬 수 있어야······.
딴 생각을 할 틈이 없다. 이 전선에서 류시범은 귀와 눈 모두를 모든 전선에 집중시키고 있어야 한다.
곳곳에서 교전을 알리는 무전이 전해져 온다.
이 넓은 전장에서 육안으로 확인할 수야 없는 일이지만, 적 보병들은 이리저리 기동하며 이쪽을 포위하려 하고 있다. 측면으로 기동해서 이쪽 후방을 돌파하고자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놀랄 이유는 전혀 없다.
「고블린 분대, 100m 접근······」
이 역시 그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잠시 후, 별 것 아니었던 그 보고는 전장 전체에 울리는 위험 신호로 변했다.
「고블린······ 아니, 고블린이······ 고블린이 드래곤으로 변합니다!」
보고할 필요가 없었다.
류시범의 눈에도 측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인다.
측면 기동해온 적 분대에, 고블린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식으로 이쪽에 최대한 접근해온 드래곤은 변신을 풀고 본 모습을 드러냈다.
체고 52m에 이르는 드래곤이 참호선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에 다 담기도 어려울 만치 넓은 전장이지만 그 와중에도 그 거대한 존재는 뚜렷하다.
큼지막한 황금색 비늘들이 햇빛을 반사해 태양과 같은 광채를 발한다.
류시범이 이마에 손을 짚는 가운데, 가온은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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