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4판타지-23화 (23/135)

LV.19 대전사 가온 - [1]

소드마스터가 도시에 나타난 밤, 전리품을 잃지 않고자 도주했던 플레이어들의 일부는 탈출에 성공했다고 했다.

누군가가 그 소드마스터를 유인하며 시간을 끌어준 덕분이었는데, 덕분에 생겨날 칭송들을 가온은 벌써 기대하고 있었다.

저번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덕분에 재산을 지켜낸 플레이어들이 많았던 것이다.

지존무쌍도 그 덕에 전리품을 지켜낸 바였다. 그래서 가온은 그에게서도 칭송을 얻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휴대전화 너머, 지존무쌍이 하소연했다.

「그러니까 그놈들이 나만 공로 보상금 안 줬다니까요. 복동이는 줬는데 나만 안 줬다고. 이게 말이 돼?」

“집결명령 무시하고 튄 거 걸려서 그렇다며?”

「아니, 나만 튀었나? 다 튀었는데」

“튄 놈들한텐 다 보상금 안 줬다던데? 애초에 진짜 전쟁이었음 도망치다 걸리면 참수였어요.”

「21세기에 총살도 아니고 뭔 참수······」

“말꼬리 잡지 말고. 애초에 블랙리스트에 안 올라간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응? 나 어디 갈 데 있으니 끊어요.”

전화를 끊은 뒤 가온은 한숨쉬었다.

여신께서도 통화를 들으시고는 한 말씀 하시었다.

‘그자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금전뿐이구나. 관계를 끊는 게 좋지 않겠느냐?’

“제 몇 없는 친구라······”

‘그자를 친구라 할 수 있거든 빈대와 모기는 혈육이리라.’

“그 말씀이 옳다 하더라도 역시 관계를 끊긴 좀 어렵습니다. 여신께 아뢸 이유가 둘 있는데요.”

‘말해보라, 가온.’

“우선 하나는, 그 양반이 말입니다. 제 친구인지는 둘째 치고, 제 휴대폰에 연락처가 등록된 유일한 사람은 분명하단 겁니다.”

여신께서는 잠시 옥음을 잇지 못하시었다.

‘참으로 통곡할 일이로다······ 네 여신이 휴대전화를 공물로 얻어 그 번호를 하사할까? 그리 하면 내 대전사가 지닌 연락처는 두 배가 되리.’

“괜찮습니다. 여신이시여. 정말 괜찮습니다. 아무튼 두 번째 이유는, 전에 하던 게임에서 그 양반이랑 어울려 다닐 때 상당히 즐거웠단 겁니다. 지금이야 그 양반이 돈이 쪼들리는지 돈 얘기뿐이지만 어느 정도 돈 좀 모여 여유가 생기면 예전처럼 돌아올 거예요. 어울리기 다시 즐거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여신께서는 그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더 훈계하지도 않으셨다.

‘뭐, 좋다. 더는 간섭하지 않으리라. 오늘처럼 좋은 날엔 그러면 안 되는 법이니.’

슬픈 날인데.

가온은 그리 중얼거리려다 말았다.

게임에 접속하지 못하는 오늘, 가온은 여신의 명에 따라 그분의 교단 집회에 참여하기로 약속했다.

평소 같으면 눈물을 짜내서라도 참여하지 않았겠지만 오늘마저 그럴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약속드린 승리를 바치지 못한 지금은.

어쨌건 여신께서는 기꺼워하시었다.

‘이번에는 둔갑하여 참여할 것이냐?’

“예. 여신의 대전사가 대중 앞에 연속으로 모습을 보이긴 뭐하니······ 대전사의 거동이 가벼워 보이면 그 여신의 위엄마저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폐관 수련 중인 소드마스터가 자꾸 모습을 내보이면 덜 신비해 보일까 봐 걱정한 바였다. 가온은 폴리모프했고, 자신의 모습을 인간의 그것으로 바꾸었다.

여신께서는 한탄하시면서도 즐거워 하시었다.

‘아쉬운 일이다. 모처럼 단장했거늘. 그래도 용납하마. 가온? 그럼, 가자꾸나.’

“예.”

‘참으로 경사로다. 내 대전사가 네 여신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함은 수십 년 만이 아니더냐?’

그 자리에 차를 타고 갈 필요는 없었다. 예전에 가본 장소라, 공간 좌표를 이미 알고 있었다.

가온은 텔레포트했다.

********

불과 화로의 여신께서는 위대한 천상의 주신(主神) 중 한 분이다.

인류가 움막에 불을 피워보고 그게 참 좋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래, 지존하신 그분의 교세는 보잘것없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21세기에 이르러, 그분의 교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커졌다.

어느 미천한 인간이 달과 순결의 여신을 신앙하노라 밝힌다면 처녀나 밝히는 유니콘이라 욕먹기 마련이요, 어느 꽃다운 여대생이 미와 사랑의 여신을 신앙하노라 밝힌다면 분명 걸레일 거라며 뒤에서 욕먹기 마련이다.

힘과 전쟁의 신을 신앙하는 자들이 밀덕 우익이라 비난받고, 죽음과 영혼의 신을 신앙하는 자들이 중2병이라 비웃음 받는 것처럼.

자유로이 신앙을 가지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그러나 불과 화로의 여신을 신앙하노라 밝힌다면, 그다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불과 화로의 여신께서는 가정의 수호자이시기도 하다.

모름지기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가장 무난한 덕목이다.

무난한 것이 널리 퍼지는 법이다.

그리하여 지금, 그분의 교세는 천상의 그 어떤 신도 능가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온 아스인 중 36.4%가 그분의 신도였다. 신도 수가 곧 발언권에 연결되는 바, 천상의 의회에서 그분이 차지한 의석은 현재 34.3%였다. 단독으로도 법안 한둘쯤 기각시키기 어렵지 않은 대신격(大神格)이신 것이다.

그분의 대전사는 오늘 그 사실을 실감했다.

텔레포트하여 나타난 그곳은 여신의 대신전 앞이었다.

가온은 여기 모인 여신의 신도들을 보며 질겁했다.

“정말 많이도 모였군요. 인간 잔뜩, 드워프에 고블린도 많고······ 와, 오거도 있네? 트롤과 엘프를 제외하고는 모든 종족이 여기 다 모였는데요.”

‘엘프는 여기 있지 않으냐, 내 대전사여?’

심지어 지구인들까지 있었다. 지구인들의 신앙은 천상의 의석에 반영되지 않음을 고려해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니었다.

이게 전체 신도 수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하다니? 평생 이런 인파를 본 적이 없었던 가온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여신의 미사를 지켜보았다.

교단 지도자, 성녀가 마이크에 대고 암송했다.

“재 속에서 불사조가 날아오르리다. 이 시련을 무사히 넘기게 하시고······”

이어지는 수십만 명 신도의 합창.

“시련을 무사히 넘기게 하시고······”

“저와 가정과 나라의 평안을 지켜주시옵길 바라오며······”

교단의 성녀는 올해로 예순아홉 살인 노파였다.

가온은 그 주름진 얼굴에서 어린 소녀의 얼굴을 보았다.

‘저번에 봤을 때는 쬐끄만 수녀였는데. 출세했네.’

가온이 웃으며 그 얼굴을 지켜보던 와중이었다.

미사가 끝난 뒤, 여신의 대전사에게서 웃음을 거두게 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기자들.

대부분이 지구 출신으로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감히 성녀 앞에 몰려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길 마다하지 않았다.

“그분의 대전사께서 며칠 전 카르세 연방의 주전파 정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동안 주화파의 거두로 명망 높으셨던 여신님의 뜻과 완전히 상반되는데요. 그 행보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습니까?”

“여신께서는······”

“여신께서도 결국 전쟁 찬성파로 태세를 바꾸신 겁니까? 혹시 그렇다면 그동안 평화를 바라며 교단을 지원해온 지구인들을 심히 슬프고 실망케 하는 결정인 줄로······”

늙은 성녀는 기자 한 명 한 명의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고자 노력했지만, 기자들의 성난 대답은 도무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가온이 보기에는 심히 신성모독적인 일이었다. 울분을 느끼며 여신께 말씀을 올렸다.

‘여신이시여. 허락하신다면 저 기레기들의 목을 베어 성화에 바치겠습니다!’

‘허락하지 않겠다. 네 여신이 언론을 탄압한다고 비난 받기를 원하느냐? 네 여신이 신성하듯 알 권리 또한 신성하기에, 신당 앞에서도 기자들이 당당한 것은 흔한 일이로다. 내 대전사도 이 시대에 적응해야 하리라.’

가온은 이를 갈았다.

‘아무리 흔한 일이라도, 보기 좋은 일은 아니군요. 절 이 자리에 참석하게 하신 여신의 뜻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미안하다. 가온. 그러나 예언이 있었노라.’

‘예언이라 하시면?’

‘갑작스러운 위협이 미치리니 조심하라는 예언이었다. 간악한 세무조사를 경고함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니었느니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위협에 대비코자 내 대전사를 움직였나니.’

이 와중에 기자 하나가 다른 기자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섰다.

다른 기자들마저 눈살을 찌푸리는 가운데, 앞으로 나선 기자가 외치듯 물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심히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여신께서 보여주신 평화의 뜻은 사실 화전양면전술이 아니었나 의심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성녀도 참지 못했다.

“신성모독이다! 지금 감히 여신께서 모략가라 모욕하는가?”

“그럴 의도는 아니었음을 밝히며, 깊이 사죄드립니다! 그러나 화내는 식으로 어영부영 넘어갈 일도 아닙니다. 이는 속히 해명이 필요한 일로······”

지금은 도저히, 가온은 화를 참기 어려웠다.

“저 자식 뭐하는 겁니까? 미친 겁니까? 혹시 저런 무례한 언사마저 흔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여신께서도 지금마저 넘어가지는 않으셨다.

‘흔한 일은 아니다. 저자가 아무리 지구인이요 간이 아무리 부었기로서니 이럴 수는 없는 법인데. 지구에만 네 여신의 신도가 이십사억 명이 넘거늘 어찌?’

당연히도 성녀의 기자회견을 듣던 신도들은 이 상황에 참지 못했다.

“저놈 무슨······” “저 새끼 뭐야? 끌어내!”

“끌어내!”

여기저기서 분노 어린 질타가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발언한 기자마저 슬슬 뒷걸음질 치던 그때,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방금 그 기자에게서 나온 발언이 아니었다.

경악스럽게도, 신성 모독을 하려는 자가 또 하나 있었다.

웬 인간 남자가 앞으로 나와 외쳤다.

“헛소리하지 마라, 마녀야! 싸구려 신에 무슨 신성이 있어 모독이 가능하단 말인가?”

여기 모인 모두가 그 말을 들었다.

잠시 정적. 모두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 정도의 발언이었다. 뭐라 반응해야 알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신성모독.

이 와중에 가온 또한 화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역시 충격을 받아서는 아니었다.

가온은 엘프고 소리에 민감하다. 화내기 전, 이상함을 느끼고 경계했다.

‘저 새끼 목소리가 어떻게 나한테까지 들리지? 확성기도 안 들었는데.’

여기 모인 인파와 그들이 내는 소리가 어느 정도인지 고려하면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계속해서, 남자의 목소리는 모두에게 울렸다.

“「싸구려 신들! 아브리캇타―망령되게 신의 이름을 참칭 하는 귀신들! 그들을 숭배하는 너희 모두에게 죽음이 있으리라! 아으드―죽기 전에 유일한 절대자의 이름을 알라! 사로니쿠―그분께서는 성자요 성부이며 성령이시니마세뎀소카쿨라!」”

남자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주변의 습기가 응결되고 있었다.

응결된 습기가 형체를 이루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방금 남자가 은근슬쩍 주문을 섞어 읊었음을 알아챘다.

“마법이다!”

남자의 주변에 생겨난 날카로운 얼음 파편들. 마법이었다.

그 마법을 익힌 당사자로서, 가온은 곧 생길 참극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제 곧 저 파편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세열수류탄의 구슬들처럼.

굳이 수류탄이나 다이너마이트 대신 쓸 이유가 없어 요즘에는 잘 쓰이지도 않는 전쟁 주문인데, 화기가 봉인되는 이 장소에서 쓰기 위해 일부러 준비한 모양이었다.

마법 테러. 모두가 비명지르는 가운데 남자가 외쳤다.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카르투라인카토라」!”

덩어리진 얼음 파편 다섯 개가 사방으로 발사되었다. 이제 그 얼음 파편들은 더 나뉘어 발사될 것이다. 근방의 사람들을 크게 다치거나 죽게 만들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을 여신께서 지켜보고 계시었다.

신도들이 크게 죽고 다칠 이 상황에, 여신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시었다. 자비롭고 온화하신 여신께서 피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탓은 결코 아니었다.

‘가온?’

여신께서 자신을 부르시매 그 대전사가 응답했다.

‘예, 염려 마십시오. 여신이시여.’

********

기자들 또한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

이 와중에 한 기자가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직업정신의 발로라기보다는 다른 행동을 할 정신조차 없었던 탓이다.

모두가 혼비백산한 와중에, 기자는 한 남자가 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남자가 제자리에서 칼을 휘둘렀다.

허공에 칼질.

그러면서 발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갑자기 베기 동작을 연습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약 백 미터 바깥에서 동작한 그 베기는 저 앞에 닿았다.

덩어리진 얼음 파편 다섯 개가 발사된 그때, 남자는 다섯 방향에 동시에 있었다.

그리고 방금 벌인 한 번의 칼질은, 그 역시 다섯 방향 모두에 영향을 끼쳤다.

회색 재로 물결치는 칼날이 나아가면서 얼음 파편들을 소멸시켰다. 소멸시키고 또 소멸시키기를 다섯 번 반복했다. 서로 5m씩 떨어진 그 얼음 파편 모두에 연속적으로, 한 번의 칼질이 모두 닿았다.

그 남자가 칼을 휘두르며 0.3초 간격으로 텔레포트했음을 기자가 알아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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