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8 총잡이 이복동 - [2]
“그 새끼 어디 갔다고요?”
이미리의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용병 사무소장은 화가 치밀었다.
내가 여기선 왕인데. 만만해 보이나?
“그라트 포위전. 왜? 거기 가게? 함부로 못 가. 아무나 보내주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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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판타지 온라인의 세계는 실제 세계보다 작지만, 그런데도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꽤 되었다.
세 남자가 탄 트럭은 오래 달려야 했다.
이동하는 동안 여유가 있었다. 이복동과 함께 트럭 짐칸에 탄 가온은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능력치 점수를 분배하고, 칼을 만지작거렸다.
한편 이복동은 사교적 대화를 즐기는 성격이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둘만 있는 상황에 먼저 말을 꺼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다.
애써 관심 있는 척 입을 열었다.
“그 칼 못 보던 건데, 뭔가 멋있다?”
가온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보네? 아다만티움 도금 칼! 매물도 없어서 구하기 어려웠는데, 특별히 장만했지.”
“얼마에요? 아니, 얼만데?”
“원화로 삼백팔십만 원 하더라?”
이복동은 기겁했다.
“아니, 총도 아니고 칼이 사백만 원 가까이 한다고? 그걸 또 샀고?”
“현실이랑 비교하면 무지 싼 거야. 이 겜에서야 칼이 인기 없어서 이 가격이지, 원래 아다만티움이 얼마나 귀한데? 현실에서 아다만티움으로 도금된 칼 하나 사려면 항공모함 몇 척 팔아도 모자랄걸? 아다만티움 갑옷쯤 되면 신이 내려준 국보라서 나라 팔아도 못 산다. 흉턴 경도 아다만티움 갑옷 구하고 싶어했지만 결국 못 입었잖아.”
“그래도······”
“필요한 지출이었어. 내가 소드마스터랑 붙고 싶어 하잖아? 그런데 검기가 말이야. 완전 단분자 커터거든? 강도 상관없이 철이고 뭐고 싹 다 잘라버리니까, 똑같이 검기 뿜을 거 아니면 보통 칼로는 못 붙어. 아다만티움쯤 돼야 검기에 버티지.”
아까부터 항공모함이니, 국보니, 소드마스터니 하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같이 일상사에서 접할 일이 없는 단어들뿐이다.
이 남자가 정말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복동이 주눅 들어 입 다문 가운데, 가온은 곧 있을 전투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게임 속 소드마스터와의 전투.
‘NPC 흉턴 경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지 아마?’
승산은 제법 있다고 생각했다. 흉턴은 전형적인 인간 소드마스터 아닌가. 경험도, 할 줄 아는 일도 별로 없는 나약한 인간.
아무리 검술의 수준이 살아온 세월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엘프 소드마스터들과 비교하면 약하리라고 추측했다.
‘오우거 포션으로 근력 보강하고, 헤이스트까지 쓰면 오히려 내 쪽이 흉턴보다 육체 능력 면에서 강해질지도. 마력이 너무 부족한 게 문젠데, 이거야 뭐 어찌어찌······.’
트럭이 멈췄다.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주변은 평원이라 시야가 탁 트인 가운데, 여러 군용차량이 돌아다니며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중 한 군용차량이 달려와 세 명이 탄 트럭 앞을 가로막았다.
군용차량에 탑승한 남자들이 외쳤다.
“정지! 움직이면 쏜다. 이름!”
아무나 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모양이었다.
가온은 순순히 차량에서 내려 대답했다.
“가온, 이복동, 지존무쌍. 이미 예약됐죠?”
군용차량에 탑승한 남자는 무슨 목록을 읽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 트럭에 인식 스티커 붙이고 들어가요.”
다시 트럭이 달렸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 앞에 도시가 있었다. 지금껏 지내온 초보자용 도시와는 명백히 다른 규모.
실제 도시 수준으로 큼지막한 도시였다.
그 거대한 도시는 들개 한 마리 몰래 들어갈 틈 없이 막혀있었다.
주변 간선도로는 봉쇄되었고, 도시는 참호선으로 둘러싸였다. 참호선 뒤로는 이 도시가 원래 제국의 도시였던 시절 쌓은 중세적 성벽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 성벽에는 조명등이 빼곡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도시를 공격하는 플레이어들이 포위 공격하면서 세워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도시 안으로 통하는 성문 또한 보안이 철통같았다.
차량 한 대 겨우 통과할 수 있는 성문에서 또 검문이 있었다. 병사들이 신원 확인을 거친 후에야 들여보내 주었다.
“오케이. 들어가요.”
이후로도 여러 귀찮은 절차를 거친 끝에 겨우 도시에 들어설 수 있었다.
‘흉턴 경 진짜 올 수 있는 거 맞나······’
가온이 보기에, 이 모든 방비는 정말 괜찮은 수준이었다. 소드마스터라 해도 무식하게 뚫고 지나가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닐 정도로.
도시 안에는 고층 빌딩이 수두룩하게 세워져있었다. 2차 대전 당시의 아스 도시치고는 대단히 현대적이었다.
“여기가······ 그라트였나? 영국이 점령해서는 투자해서 현대식으로 만들었지 아마. 원래 역사에선 독립운동 일어나서 지구인들 다 죽거나 내쫓겼고. 그렇게 도시가 원주민들 손에 넘어갔으니, 지구인들이 다시 탈환하려는 모양인데······”
가온이 설명해주었지만 이복동과 지존무쌍은 이 도시의 역사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둘은 제대로 된 첫 일이라는 사실에 긴장했을 뿐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집결하기로 돼있습니다. 일찍 오신 분들은 자리 지켜주시고······”
이후로 세 명은 정해진 위치에서, 증원 병력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 지구인 플레이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웬 여자가 집결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 저년 저거?”
지존무쌍이 삿대질했고, 가온은 눈을 크게 떴다.
“이미리?”
지존무쌍이 중얼거렸다.
“저 여자 취미충 아냐? 취미충이 여긴 왜 왔대?”
“취미충이 뭐예요?”
“이 겜 진지하게 안 하고 취미로만 하는 놈들 그리 불러요. 저 여자처럼 교습소에서 칼만 휘두르는 놈들도. 여긴 돈 벌러 오는 곳인데 왜 나타났대?”
게임은 취미여야 정상인 거 같은데.
가온은 그리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자칭 프로게이머 두 명의 기분을 상하게 할 테니까.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나 노리는 거 같은데?”
“음?”
“말했다시피 저 여자가 나 습격했던 거, 나랑 검 주고받으면 자기 실력이 올라갈 거라 믿고 그런 거잖아요. 여전히 실력 올리고 싶을 테니 또 습격하고 싶은가본데?”
“왜 여기까지 와서?”
“나름대로 대련해주려 해도 본 실력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며 싫어하더라구······ 실전 와중이라 급한 가운데 습격해오면 정말 본 실력을 볼 수 있을 거라 믿나 본데요.”
지존무쌍이 성냈다.
“아니, 아무나 전장 못 오게 막는 거 아니었어? 희귀한 여자 플레이어라고 프리패스 시켜줬나? 아무튼 되게 웃기네. 저년 저거 칼만 챙겨온 거 봐라······.”
한편 이복동은 이미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기가 평생 연애할 수 없음을 확신한 사람은 이성에게 적대적으로 되는 법이었다. 이복동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 내기 전에 콱 죽이죠?”
이복동의 말에 가온은 눈을 치켜떴다.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가온 씨 마법도 쓸 수 있잖아? 투명해지는 거. 남에게도 걸어줄 수 있으니까 나나 지존무쌍 아저씨한테 걸어주면 몰래······”
괜히 사고 치기 싫었던 지존무쌍이 만류했다.
“그럼 소란 생길 거 같은데. 굳이 전투 시작하기도 전에 그래야 하나? 아직 트롤링 의도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 내버려 두죠. 어차피 우리 둘이 가온 씨 엄호하며 다닐 거니까 덤벼들면 그때 쏴 죽이면 되고.”
지존무쌍의 말이 더욱 그럴듯했다. 결국 이미리를 내버려두기로 결정한 가운데, 가온은 슬쩍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우울해 보였다. 어째서?
알 수 없었지만 당장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증원 병력이 모두 모였다. 지휘관쯤 되는 플레이어가 나와 말했다.
“다들 모여줘서 감사하고. 음, 연설은 됐죠? 빨리 브리핑부터 하자면 보다시피 우리가 거의 다 이긴 상황입니다. 포격전이며 도시 포위는 이미 다 끝났고, 지금은 그냥 도시 내부로 진입해서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놈들 하나둘씩 때려잡는 상황이거든요.”
여기 모인 플레이어들은 거의 다 인맥과 뇌물을 총동원해 여기 온 마당이었다. 혹시 자기네를 속이려는 게 아닐지 몰라 불안한 심정으로 물었다.
“이기고 있으면 병력은 왜 더 모았는데요?”
“이대로 계속 싸우기만 하면 당연히 점령은 끝나지만, 포위전이 늘어지면 안 되거든요. 단순히 물자 소비가 늘어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소드마스터가 난입할 수 있으니까.”
“소드마스터가 나타날지 모른다고요?”
“음······ 어쩌면. 보다시피 시가전 진행 중이죠? 소드마스터가 시가전에서 거의 무적인 건 유명한 사실입니다. 역사적으로 도시 포위 점령전 중에 소드마스터가 나타나서 철수한 상황이 꽤 많았어요. 그러니까 다 이긴 싸움이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최대한 빨리 점령을 마쳐야 해요.”
지휘관들이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누구누구 모여라, 어디로 가라 등등.
분대 구성부터 빠르게 끝났다. 여기 모인 육십 명의 플레이어들은 각각 열 명씩 나뉘었고, 각자 분대장을 정했다.
분대장이 썩 인기 있는 직위는 아니었다. 전리품을 더 챙길 수 있는 이득이 있긴 하지만 실패 시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모두가 그 자리를 꺼리게 만들었다.
결국 가온의 분대에서 분대장을 맡은 것은 가온이었다. 가온을 알아본 누군가가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와, 영상에 나온 그분이네? 개쩔었는데! 이 분이 분대장 맡으시면 되겠다, 다들 찬성?”
다른 플레이어들도, 쩔었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가온도 그 결정을 잠자코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가온이 분대장으로서 내린 첫 지시는 이러했다.
“그럼 이제 싸우러 갈까요?”
“예? 벌써?”
“지휘관 아저씨가 우리가 싸울 지점 다 정해줬잖아? 빠르게 도시 점령해야 한다니까 빠르게 일 해줘야지. 어서 가죠.”
분대원들이 다들 당황했다. 정말 벌써? 지금 바로?
그러나 가온은 정말 빠르게 임무에 나섰다. 간결하게 수신호를 맞추고는, 분대원들을 거느린 채 자기 분대가 맡은 지점으로 향했다.
건물과 건물들로 둘러싸인 길가.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도시를 점령하려는 플레이어 부대와 그에 맞서는 NPC 아스인들이 대치 중이었다.
“이제 저기 합류해서······”
“노, 노!”
가온이 짧게 답하더니, 달려나갔다. 자신을 엄호하라 외치며.
모두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이복동과 지존무쌍은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다들 뭐해? 엄호해!”
둘이서, 총을 들고 적을 향해 겨누었다. 그 와중에 가온은 적들이 도사린 바리케이트를 향해 돌격하는 중이었다.
그 무모한 돌진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저렇게 혼자 달려나가면 무조건 죽는 법인데, 어째서인지 죽지 않았다.
마치 스톰트루퍼 부대를 향한 주요 인물의 돌격 같았다.
가온을 향해 쏟아지던 총알은 죄다 빗나가거나, 분명 명중할 게 분명했던 총알마저 가온의 앞에서 튕 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눈썰미 좋은 몇몇만이 그게 칼을 휘두른 결과임을 알아채고 경악했다.
“진짜 키리토야?”
계속 달리면서 가온은 실시간으로 적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적들은 건물의 창가에, 담벼락 뒤에, 바리케이트 뒤에 도사리고 있었다.
바리케이트 위로 상반신을 내밀고 사격하던 적들은 모두 쓰러진 지 오래였다. 노출된 신체 부위가 아무리 조금이더라도 가온의 총알은 빗나가지 않았기에.
창가에서 저격하던 적마저 달리면서 쏴 맞히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자 더는 날아오는 총알이 없었다. 가온은 계속 달리면 되었다.
그리하여 충분히 접근한 지점, 바리케이트 위로 수류탄을 든 손이 올라왔다.
적은 수류탄을 던지거나 안전핀을 뽑을 기회조차 없었다.
정확히 수류탄의 중심부를 가온이 권총으로 쏴맞혔다.
쾅 하는 폭발. 그 주변이 초토화된 가운데, 가온은 바리케이트 너머로 뛰어들었다.
이후로 총성이 몇 차례 울렸고, 조용해졌다.
고요 속에서 가온이 외쳤다.
“다 죽였어. 넘어와!”
가온은 진정한 분대장이 아니라 대충 정한 임시 분대장이었다. 그 명령에 진심으로 복종할 분대원들은 없다.
과연 너무 충격스러운 상황에 모두가 멈춰있었다.
“달려!”
그러나 지존무쌍과 이복동은 부리나케 달려나갔다. 둘이 바리케이트를 넘었다.
이후로 총성이 세 번 더 울리더니, 완전히 잠잠해졌다.
그로부터 십 분 뒤, 시가전의 추이를 보고받던 지휘관은 뜬금없는 보고를 들어야 했다.
“12지점 점령 끝났다고? 벌써?”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믿기 힘든 보고였다. 지휘관은 확인하고자 현장으로 나아갔다.
과연, 접전 중이어야 할 그곳은 이미 아군 병력에 점령된 뒤였다.
“아니 뭐야. 뭘 어떻게 한 거야?”
지휘관은 분명 수십 분 전까지는 적군 바리케이트였어야 할 곳에 나아갔다.
오크, 드워프 등, 적들이 모두 쓰러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