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 소드마스터 참마황 - [1]
카르세 연방의 현 정권은 장검정권이라 불리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게도 현 대통령이 소드마스터이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로 그리 불리는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과 그 측근들이 허리에 찬 롱소드를 보노라면 저들이 정치집단인지 아니면 무식한 정치깡패들인지 헷갈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장검정권의 경우, 둘 다였다.
대통령―참마황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뱃지 혹은 감투를 단 칼잡이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정치깡패 짓을 도맡았다.
가끔은 대통령 본인도 비슷한 일을 직접 벌이곤 했다.
대통령으로서의 첫 임기 6년이 지난 시점, 참마황은 재선을 위해 선거운동 따윈 벌이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유력한 대통령 후보들을 찾아가 강제로 결투를 신청하여 패배시켰다.
그리하여 재선에 성공했다. 결투의 패배자가 저 멀리 떠나야 하는 케케묵은 전통을 내세운바, 자기 이외 모든 후보를 국외추방 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21세기에 일어난 실화였다. 이 반민주적인 상황에 쿠데타 따위는 일어날 수 없었다. 군부는 예산을 언제나 과도할 만치 주는 대통령에게 무한한 호의를 보였으므로.
아마 다음 대통령도 참마황일 것이다.
그 사실을 모두가 의심하지 않았기에 장검정권의 정책 연속성 또한 강력했다. 그리고 장검정권의 정책이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였다.
지구와의 전쟁.
유유상종인 법이다. 이번 장검정권의 수립 10주년 행사에 참여한 각국 인사들 또한 그 정책에 찬동하는 작자들뿐이었다.
‘개꼴통 적폐 새끼들······’
기자는 속으로 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행사장의 면면을 살폈다. 전 세계 꼴통만을 모아왔음에도 종족 다양성은 훌륭했다.
드워프 파시스트들······
포드식 생산체제를 혐오하는 저 드워프들은 중세적 수공업만으로 매일 전차와 전쟁 골렘을 수십 대 찍어내는 미치광이들이다.
군수 계약을 맺고자 왔을 것이다.
우드엘프 장로들······
우드엘프들은 거의 모두가 2차 대전 참전자인 덕분에 반세기 내내 국가유공자 연금을 타먹었다. 늙어 죽지 않는 종족이다. 이대로라면 아마 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 연금을 타먹을 것이다.
연금 기한 무제한 연장을 담보로 전쟁 참여를 확약하러 왔을 것이다.
‘거기에 카샤드 서기장까지······’
카샤드 서기장을 본 순간 기자는 몸을 떨었는데, 아스 초강대국 수장을 본 전율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샤드 서기장은 고대 리치 아닌가. 그 해골에는 산 자의 영혼을 삼키는 새파란 안광이 맴돈다.
천사백만 스켈레톤 군단, 2차 대전 출신만으로 일으켰기에 전원이 실전 경험자로 유명한 좀비 포병대를 기꺼이 지원하겠노라 약속하러 왔을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기자는 오늘은 더 놀랄 일이 없겠구나 자조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후긴의 귀빈들께서 드십니다!”
후긴? 후긴 공화국?
거긴 참마황의 전쟁에 별 관심이 없는 나라다. 그런데 거기서도 손님을 보냈다고?
그 손님들을 바라본 기자는 충격을 받았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창백한 피부의 미남미녀들이었다.
뱀파이어들. 후긴 공화국을 지배하는 재벌들이 자기네 영지를 떠나 여기에 왔다.
이부터가 드문 일인데, 그보다 드문 일이 하나 더.
뱀파이어들 못지않게 미남이요, 피부는 더욱 창백한 엘프가 하나 보인다.
엘프의 머리칼, 그 회색 머리칼에서 기자는 눈을 뗄 수가 없다.
길게 자란 회색 머리칼이 우울하게 흔들린다. 그 머리칼 색만 봐도 누구인지 알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재의 왕자. 마지막 그레이엘프.
소드마스터 가온이 수십 년의 은거를 깨고 이 자리에 참석했다.
기자는 저 유명한 엘프를 향해 카메라를 돌리면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카메라 렌즈가 담는 그 얼굴에는 엘프다운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그 밖에 다른 요소들이 함께였다.
비극적인 집념이 담긴 거뭇한 눈가. 온 세상에 대한 증오를 품고 충혈된 안구가 차례로 카메라에 담긴다.
그 의미를 깨달은 기자는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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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온에게 행사 초청장이 날아온 것은 한 달 전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몬스터 사냥이며 레이드에 바빠 초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여신을 기쁘게 할 겸 거절을 번복하고 참여했다.
그리고 지금, 가온은 행사에 참석하기로 한 것을 마음속 깊이 후회했다.
가온이 외출했음은 물론 사교적 행사에 참여하는 대업을 이루었음에 여신께서는 대단히 기뻐하시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않으셨다.
‘가온아, 네 여신이 어제 엄숙히 뜻을 전하길, 내일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일 것이니 일찍 잠들라 몇 번이고 당부하였다. 그러자 너는 무어라 맹세했더냐?’
여신께서 하문하셨으므로 가온은 경건히 대답했다.
‘게임 조금만 더 하고 잠들리라 맹세했지요. 맹세를 어기고 밤새 게임하는 불경을 저지른 점, 너무나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허락하셨다면 이 자리에서 슬피 울며 잘못을 빌 텐데······.’
‘네 여신 또한 울고 싶노라.’
‘옥루를 흘리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신이시여, 심려치 마소서. 당신의 대전사는 그 정신이 아다만티움과 같으니, 하룻밤 샌 고통쯤은 능히 견딜 수 있습니다.’
‘밤샌 고통이 문제가 아니다. 밤새워 생긴 다크서클과 충혈된 안구가 문제지! 거울을 보아라, 가온아. 그 꼬락서니는 사람들 앞에 내보이기 합당한 모습이 아니다! 머리라도 좀 깎고 올 일이지, 그 잘난 얼굴을 이리 망쳐놓고 나오다니? 여신의 대전사가 정녕 여신의 수치가 될 셈이냐?’
‘이번 일이 끝나면 미용실에 가기로 맹세하겠습니다.’
‘이번 맹세는 지켜지기 바란다. 이번 맹세마저 허공에 흩어진다면 너는 여신이 몇 시간 내내 울 수 있는지 알게 될 테니.’
가온은 속으로 신음했다. 약속을 잊은 척 은근슬쩍 바로 집에 가서 게임이나 할 작정이었는데.
보람차게 보내야 할 시간을 헛되이 보내야 한다니, 벌써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온의 표정에 우울감이 깃들었다. 그러자 왠지 자신에게 카메라를 내밀고 있던 한 남자가 몸을 떨었는데, 가온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여기 모인 각국 인사들이 얼마나 거물인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도 가온은 관심이 없었다. 행사가 언제 끝나나가 문제일 뿐.
그 와중에 단 한 여자만이 가온의 눈길을 끌었다.
드래곤 아타락시아. 2차 대전 당시 런던 공습을 주도한 바 있는 이 드래곤은 역사적 배경과는 다른 이유로 가온의 관심을 끌었다.
‘4판타지 온라인 개발사 회장······’
가온과 얼굴이 마주친 아타락시아가 싱긋 미소지었다.
“위명은 익히 들었는데 처음 뵙는군? 가온 경.”
비극의 소드마스터 컨셉을 유지하고 싶었던 가온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댁 회사 게임 때문에 내가 하던 게임이 망했다며 따지지는 않기로 했다. 새로 시작한 이번 게임도 맘에 드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썩 좋아하는 게임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 행사는 아스의 의기를 모아······”
지겨운 개회사가 진행되는 동안 가온은 어제 게임에서 즐긴 뒤풀이 축제를 떠올렸다.
이길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 파티였다. 놀랍게도 미각과 후각마저 구현된 그 게임에서 가온은 평소에 잘 먹지도 않는 치킨과 맥주를 실컷 즐겼다.
그리고 치킨과 맥주보다 감미로운······ 칭송들.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가온은 칭송을 들었다. 전투에 참여한 대가로 훌륭한 보수를 받은 플레이어들, 그리고 덕분에 도시에 지닌 재산을 지켜낸 주민들의 환호였다.
지루하고 갑갑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가온은 머릿속에 어제 들은 칭송을 무한히 반복하기 시작했다. 지금 접속 중이었다면 경험치를 벌든 수련을 하든 시간을 알차게 쓸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빨리 돌아가고 싶다. 그리 속으로 되뇌던 와중이었다.
“참마황 폐하께서 드십니다!”
이번 행사의 개최자로서 카르세 대통령이 입장했다.
참마황. 구성원의 대부분이 언데드 아니면 엘프인 소드마스터들 중에서 유일한 인간인 남자였다.
수명 짧은 인간으로서는 이미 죽었어야 정상일 나이임에도 참마황은 여전히 정정해 보였다. 지구인들에게는 심히 유감스러울 일이었다. 전신에 어찌나 활력이 넘쳐보이는지, 원자로 붕괴마저 죽이지 못한 저 테러리스트를 세월이 대신 죽여주길 바라는 지구인들의 소망은 당분간 이루어지지 않을 듯했다.
드워프들도, 우드엘프 장로들도, 고대 리치 서기장도 모두 저 인간 남자를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참마황 또한 그들에게 예를 표하고는 단상에 올랐다.
연설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무식한 칼잡이답게 참마황은 바로 이 행사를 연 본론을 꺼냈다.
“결전의 날이 다가왔소. 여기 모여주신 동맹들에게 감사드리오. 드워프 장인 여러분, 값은 톡톡히 치러드릴 거야 약속하지. 이미 참전을 약속해준 우드엘프 여러분, 연금기한 연장은 당연한 일이고, 이번에 전쟁 하나를 더 참여하여 공훈이 오르는 셈이니 연금액 상향도 이 자리에서 약속해 드리겠소. 서기장 나리······ 지구쪽 공산권이 죄 무너져서 그쪽과 연대는 불가능해졌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가장 든든한 동맹이지. 기대하겠소. 그리고······”
참마황의 시선이 가온을 향했다.
“······가온 경. 정말 참여해줬군.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바요. 폐관수련으로 보내는 값진 시간을 이쪽에도 할애해줄 줄이야.”
그 말을 듣자마자 가온은 후회했다. 초대장을 받았을 때는 이런 전쟁광들의 자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누군가 알려준 적이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가온은 반쯤 당한 기분으로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 뉴스에는 뭐라 나올까?
‘충격. 소드마스터 가온, 전쟁 참여 의지 보여. 현 방어체계로는 막을 수 없는 위협. 당장 모든 원자로를 폐쇄해야······ 뭐 이따위로 대서특필될 거 같은데.’
위키에도 몇 줄 더 쓰이게 생겼다. 그것도 더 안 좋은 쪽으로.
가온이 입 다물고 있자 참마황은 문득 드래곤에게 물었다.
“아타락시아 회장, 당신네······ 가상현실 오락? 거기도 가온 경이 나온다지? 거기선 지구인들을 가장 많이 쓸어버렸기로 악명이 자자하다던데.”
아타락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통계표를 보면 가온 경의 플레이어 킬(Player kill) 기록은 다른 모든 소드마스터들의 기록을 합친 뒤에 17을 곱해야 하더군. 그리고 알다시피 우리 게임은 현실 기반이고.”
“훌륭하군. 아주······ 가온 경, 행사 끝나고서 나 좀 봤으면 좋겠는데. 괜찮겠나?”
가온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참마황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백 살을 훌쩍 넘긴 인간 늙은이답지 않게, 너무나도 힘이 넘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