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5 칼잡이 가온 - [3]
이복동과 지존무쌍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가운데, 방송이 계속되었다.
「반복합니다. 백골단에서 군대를 몰고 쳐들어 왔습니다. 얼마 전에 자기 뉴비들 털어먹는······」
지존무쌍은 겨우 입을 열어 물었다.
“경매장에 묶인 물건들 다 뺏긴단 게 뭔 소리야?”
이복동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왜······ 이 게임은 아이템이 죄다 실물이 있어서 현실처럼 직접 사고팔아야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도시가 점령되면 경매장에 등록한 물건도 죄 뺏긴다 이거죠······.”
“그럼 얼른 다 팔아야······”
“곧 뺏길지도 모르는 물건을 누가 제값 주고 사나요? 당장 팔려면 헐값에 팔아야 하는데······ 지금 보면 헐값에도 안 팔릴 거 같은데.”
지존무쌍은 벌벌 떨며 말했다.
“그럼 물건이라도 다 챙겨서 빠져나가자, 응? 경매장에서 회수해다 트럭에 실으면 되잖아? 딴 데서 팔면 되니까······”
“아니, 트럭 한 대로 포위망 뚫으시겠다고? 게다가 사람들 반응 들어봐요. 우리만 템 건져서 나가겠다면 순순히 보내줄 분위기가 아니야······”
때마침 바깥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요새 턴 새끼 누구야! 알아서 도시 밖으로 쳐나가, 민폐 끼치지 말고!”
보통 게임이라면 도시에 딴 군세가 쳐들어오는 상황은 재미난 이벤트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 게임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난 사람들이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자진 출두해! 자진 출두하라고 새끼들아!”
졸지에 공격받게 생긴, 그리하여 현금 가치를 지닌 아이템들을 잃게 생긴 플레이어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욕설은 물론 발소리까지 쿵쿵 울렸다. 방송에 거론된 뉴비들을 찾아내서 여기 몰려왔다는 군대에 바치려는 것일까?
“어쩔까요. 순순히 자수하러 나갈까요?”
이복동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지존무쌍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뭔 미친 소리야. 수백만 원 버리겠다고?”
“아니, 그래도······”
“안 돼. 안 돼!”
그리 외치면서 지존무쌍은 주변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네에게 덤벼들면 언제든 총 쏠 준비를 하며.
다행히 검술 교습소에 모인 ARMA 회원들은 이들을 냉큼 잡아다 바치려고 하지 않았다.
ARMA 회원들이 가진 아이템이라곤 칼 몇 자루뿐이었고, 이 게임에서 검은 장난감 검들보다도 훨씬 쌌다.
그렇듯 재산이 없는 그들은 도시가 점령당할 경우 모든 재산을 뺏기게 되리라는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예 저 방송에 관심조차 없었다. 다들 자기 검을 휘두르며 수련하기 바쁠 뿐.
가온 또한 저들처럼 검이나 휘두르고픈 사람 중 하나였다.
“어서 숨어야······”
“어디로······ 아, 아니다. 로그아웃하자. 로그아웃.”
“로그아웃? 아, 이거 게임이지?”
두 명이 중얼거리는 중에 가온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이래.’
이대로 상황이 흘러갈 경우의 미래를 생각해보았다.
재산을 잃어 화난 사람들, 그들은 여러모로 귀찮게 굴 것이다. 수련 환경에 좋지 않다. 아주 좋지 않다.
고민 끝에, 가온은 짜증을 느끼면서도 입을 열었다.
“경매장에 내놓은 물건들 팔리면 얼마 벌린다고?”
로그아웃하려다 말고 지존무쌍이 대답했다.
“약 이백육십······”
“그거, 내가 대신 줄 테니까 자수하러 나갑시다.”
“예?”
“자수하러 나가자고.”
*******
기가 시는 한국 플레이어들의 스타트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도시다.
그런 주요 도시답게 높은 가치가 있는데, 어찌나 가치가 있는지 심지어 투표로 뽑는 시장 자리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현 시장은 정진영이란 이름의 남자였다. 정진영은 창밖을 보았다.
지금 있는 건물은 40층 빌딩이었기에 도시 바깥 풍경이 어느 정도 보이고 있었다.
시야에 가득한 점들. 이 도시를 치러 온 백골부대였다.
언뜻 보기에도 천 명은 넘어보였다. 어떻게 저리 많은 인원이 대뜸 몰려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진영은 저들과 맞서 싸울 사람들을 모집하고자 방송을 이어나갔다.
「반복합니다. 백골단에서 군대를 몰고 쳐들어 왔습니다. 얼마 전에 뉴비들한테 털······」
그 와중에 현실에서 알고 지내는 동생이 말했다.
“형, 제발 싸우지 말죠. 나 여기 땅 사서 전 재산 묶였단 말이에요. 도시 점령당해서 다 뺏기면 나 한강 다이브해야 돼.”
“인마, 안 뺏기면 되지.”
“어떻게 안 뺏겨? 백골단 저 새끼들 좆나 센데. 쟤네 대빵 장성 출신인 거 몰라요? 그 밑에 있는 새끼들도 다 군복 입고 군대놀이 하는 미친놈들이란 말이야.”
정진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누가 그걸 몰라.’
정진영 또한 싸우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싸우고 싶겠는가? 승산은 많지 않고 잃을 것은 많은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적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은 정의감 때문은 아니었다.
‘일베 길드에 뉴비들 넘겨줬다고 인터넷에 하소연 글이라도 나돌면 나 어쩌라고. 근근웹 유머베스트에 며칠 내내 출연하라고?’
어쩔 수 없이 싸울 생각이 있는 척하고 있긴 했다. 그러면서 내심 이 방송이 도시의 플레이어들을 자극하길 바랐다.
제발 그 간 큰 뉴비들을 찾아내서 끄집어내 주길.
그리 속으로 빌긴 했지만, 사실 가능성을 높게 치지는 않았다. 이것은 게임인 것이다. 그 뉴비들이 지금 접속해있는지 알 수도 없거니와, 설령 접속해있다고 해도 로그아웃하면 끝 아닌가.
그리 게임 밖에 있다가 상황이 종료되면 은근슬쩍 로그인해서는 게임 속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발뺌하면 끝이다.
역시 정말 싸워야 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절망하던 와중이었다.
똑똑 하고, 시장 사무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정진영은 짜증스럽게 물었다.
“누구야!”
문밖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방송에 나온 주인공이들이요.”
사무실에 모여있던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정진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와요.”
이윽고 세 남자가 들어왔다. 겁에 질린 남자 두 명과 짜증 난 남자 하나.
정진영은 욕하고 싶은 맘 반, 울고 싶은 맘 반으로 물었다.
“방송에 거론된 그분이라고요, 선생님? 그러니까, 그놈들 요새 털어먹었다는?”
그 말에 가온이 짜증스레 대답했다.
“선생님인 건 모르겠고, 내가 저기 털어먹은 놈은 맞습니다. 뺏은 물건들 다 돌려줄 테니까 다 꺼지라 해줘요.”
정진영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선생님.”
즉시 무전을 시도했다. 저 바깥에 진을 치고 있는 백골부대에.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연락이 돌아왔다.
웬 노인의 목소리가 무전기에서 들려왔다. 백골부대의 간부쯤 되는 모양이었다.
「노획품들, 돌려주겠다고?」
정진영은 즉시 대답했다.
“예. 예. 다행히 그 친구들이 나와줬네요. 물건들 다 돌려드리겠답니다. 지금 바로 트럭에 실어서 다 드릴 테니까 쏘지 말아주시고······”
「갑자기 왜 이렇게 정중하실까. 벌레 새끼한테」
“예?”
「도시에 방송하시는 걸 들었는데 말이야. 벌레 새끼들 싫은 놈 다 싸우러 나오라 선동하시더라고」
정진영은 당황했다.
“예······ 그러긴 했는데, 기분이 상하셨는지······”
「상했지 물론. 우리 일베 아니라고 인벤에다 한 열 번은 글 올린 거 같은데 말이야. 백골단이 아니라 백골부대라고도 몇 번이고 정정 시도했고」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하면 단가?」
“그럼 어떻게······”
「괘씸해서라도 못 봐주겠는데······ 혹시 도시에 묶인 재산 많나?」
“예? 예. 많지요. 잃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제 동생은 그거 다 뺏기면 한강물에 뛰어들 거래요.”
「동생한테 한강물 온도 체크하라고 전해」
그러더니 무전이 끊겼다.
정진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씨발, 이젠 내 책임이야? 내 책임?’
벌벌 떨면서, 정진영이 물었다.
“바깥에 싸울 사람들 모였어?”
“예. 삼백 명 정도······.”
“그럼 도······ 돌격.”
“예?”
“돌격시키라고!”
그 말에 주민 대표로 나와 있던 어느 플레이어가 따졌다.
“뭔 소리야. 저 새끼들 가져온 기관총만 몇 정인데. 소드마스터도 기관총 앞으로 직접 돌격 안 하는 거 몰라요?”
정진영은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주장했다.
“아니, 그렇다고 저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되지. 저 새끼들 참호 다 파고 포진지도 다 구축할 거 아냐. 그럼 저 멀리서 안전하게 포격하고 지랄 난다고. 그리되면 그냥 앉아서 죽는 건데······”
“그렇다고 개활지에서 무작정 돌격하는 건 병신짓이라니까! 우리가 뭐 소련군이야? 시가전을 해야지!”
“아니, 시가전은 무슨 시가전? 도시 내부에서 싸우면 손해인 거 저 새끼들도 뻔히 아는데, 병신도 아니고 왜 먼저 돌격해와? 분명 저대로 진지 구축할 거라니까······”
“아, 그래도 돌격은 안 된다고! 지원을 부르던가 그럼. 연락 넣으면 올 거 아냐?”
이쪽이 그나마 그럴듯하게 들렸다.
정진영은 계속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창을 조작했다. 기도하듯이 이곳저곳에 구원 요청을 보냈다.
답변은 바로 오지 않았다.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모두 굳은 얼굴로 바깥을 살폈다.
“벌써 포위는 당했고······”
바깥에는 길쭉한 참호선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빨랐다. 사람들이 직접 삽질을 해서 땅을 파내는 중에 시스템적 도움이 그 속도를 훨씬 앞당겨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공사를 벌이느라 몇 시간씩 노동할 필요가 없게 하기 위한 시스템적 배려지만, 지금은 그저 불합리한 요소로만 느껴졌다.
“연락 아직이야?”
“예, 아직.”
그로부터 한 시간이 흘렀다. 죽을 것 같았다. 정진영은 게임 속 캐릭터임에도 이러다 기절할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다 겨우 통신담당이 말했다.
“연락 왔어요.”
“뭐래?”
“지원 못 온다는데.”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왜?”
“백골단에서 자기네들한테도 쳐들어 왔대. 보니까 동시에 쳐들어온 거야. 이왕 요새 털린 거 보복하는 김에 영토 확장하기로 작정한 거지 아주.”
방안을 잠식하는 침묵.
한참 지나서야 겨우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어떡해?”
“싸워야지 뭐······.”
싸워야 한다. 그리 맘을 다잡으며 다시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적진이 보였고, 이미 기관총 진지 같은 핵심 요소는 완벽하게 완성된 뒤였다. 정진영은 신음했다.
“벌써 참호 거의 다 팠네. 그러니까 진작 돌격했어야 한다니까······”
“그럼 이미 다 뒤졌겠지!”
그때였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적군에 포위당하셔서 맘이 좋지 않으신가본데」
정진영은 질겁하여 목소리가 들린 곳을 노려보았다.
웬 해골이 보였다. 말 그대로 해골이었다.
정진영은 까무라질 듯 놀라 소리쳤다.
“뭐야! 누구야!”
자기소개하란 것은 아니었겠지만, 방에 나타난 해골은 기꺼이 자기소개를 했다.
「죽은 자들의 용병단을 이끄는 카샬이라 하오. 보다시피 불사왕 폐하의 은혜를 입은 리치로서, 자그마한 도움을 주러 왔소」
“자그마한 도움?”
「용병단이 줄 도움이라면 무엇이겠나? 대가를 받고 병력을 빌려드리는 게지」
뜬금없는 제안. 모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서있는 가운데, 문득 한 플레이어가 외쳤다.
“아, 저 이거 인터넷에서 본 적 있어요! 전투 벌어질 조짐이면 순간이동으로 나타나서 병력지원 제안하는 언데드 리치 NPC!”
이길 희망이 생긴 것인가? 기대감을 품고 정진영이 물었다.
“그래서 병력은 얼마나 빌려주실 수?”
언데드 리치가 대답했다.
「스켈레톤 200구. 2억 골드만 받고 기꺼이 내드리지. 어떤가?」
잠시 생겨났던 기대감이 깡그리 소멸했다.
모두가 기겁하는 동시에 분노했다. 2억 골드면 현금으로 20억이 넘는 거금이다. 그 돈을 받고 겨우 해골 200마리 주겠다고?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차마 언데드 리치에게 썩 꺼지라 말할 수 없어 모두가 닥치고 있던 와중이었다.
침묵을 깨고, 가온이 말했다.
“다들 돈 없나? 그럼 내가 내지.”
지존무쌍이 질겁했다.
“미쳤어요?”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