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5 칼잡이 가온 - [1]
「소드마스터 대통령, 즉 초인 독재자에 의한 (······) 장검정권 수립 10주년을 맞이하여 (······)」
「참마황, 아스 각국에 영미를 위시한 지구 서방세력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미제 추종자들에 대한 응징을 거듭 촉구하다」
「참마황, 대한민국에 전쟁 발발 시 같은 피해자로서 아군으로 참전할 것을 강권. 정상회담에서 충격 발언」
“한국은 말로만 위안부의 비극이며 일제강점의 굴욕 따위를 떠들지 말고 당장 군대를 보내 끔찍한 이웃에게 복수해야. 그 정당한 복수를 우리 군이 도울 것”
「하이-우드 엘프 장로들, 참마황의 강력한 전쟁 의지에 거듭 지지 의사를 밝히다」
“옛일이라 하지만 고작 백 년 전의 일, 늙어 죽지 않는 엘프가 분노를 잊기엔 너무 부족한 시간.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내내 군사훈련을 해왔다. 모든 엘프들은 당장이라도 전장에 나설 수 있노라 장담할 수 있어”
「소드마스터 하고, IS에 합류 확인. 이라크전의 참사가 재현될 위험 (······)」
“꼴통 귀쟁이 새끼들.”
신문은 볼 때마다 우울해질 뿐이었다. 사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십 년 전에도.
가온은 신문을 구기고는 눈을 감았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맘을 가라앉힐 방법으로 좋은 것은 둘이었다. 종교와 게임.
둘 다하기로 했다. 우선은 종교 먼저.
가온은 엄숙한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제가 하고, 그 유니콘을 조지는 걸 모쪼록 지켜봐 주십시오. 기필코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화로의 여신께서는 천상에서 가장 자비로운 분이셨다. 게임 속에서 누군가를 죽이는 것으로 원수를 갚겠다니 네가 정녕 미친 것이냐 꾸짖지 않으실 정도로 말이다.
‘그로써 맘이 편해진다면 그 또한 좋은 일이겠지. 힘내렴.’
여신께서는 지나치게 따스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가온은 여신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눈치채고 다급히 설명에 나서야 했다.
“그러니까, 게임에서 놈을 죽이고선 진짜 하고를 죽인 것마냥 복수를 달성했노라 즐거워하겠단 말이 아닙니다! 게임에서 죽이는 게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건 당연히 알지요.”
‘내 대전사가 아직 현실과 전자오락의 구분이 되는구나! 네 여신의 가장 큰 근심 중 하나가 지금 사라졌음을 선언하노라. 장하다, 가온.’
“현실과 게임 구분이야 당연히 됩니다! 그러니까 제가 계획이 있는데······”
가온은 열심히 설명했고, 여신께서 들어주셨다.
그로부터 삼십 분 뒤, 가온은 정신적으로 지친 채 게임을 시작했다.
*******
4판타지 온라인은 현실의 물리법칙을 기반으로 하는 게임이다. 수치화된 데미지나 방어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레벨과 능력치 개념은 있다.
가온은 저번 전투에서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하여 레벨 5가 되었다.
보상으로 받은 능력치 점수는 넷. 가온은 그 모든 점수를 MP에 투자했다.
[Mana Point 10/10 → 20/20]
그리 레벨 업의 성과를 누리고는 기쁘게 웃었다.
눈에 보이는 성장. 게임을 끊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착실한 성장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무언가 이루어냈다는 성취감을 준다.
약간의 행복감 속에서 도시를 둘러 보았다.
지구인들에게 점령된 20세기의 개척 도시. 근대의 물결이 스며들고 있는 도시답게 전통적 건물과 근대적 건물이 공존했다.
이 시대를 어찌나 잘 재현했는지, 20세기 풍경을 기억하는 가온마저 자신이 정말 게임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여행을 해낸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물론 시간여행은 아니었다. 길 한복판에서 서로 욕설을 지껄이는 플레이어들.
“니네 뉴비들한테 개털렸다매? 좆나 대단하네 벌레 새끼들?”
“근첩 새끼 안 닥치냐?”
저따위 한국적인 대화가 들려오는 걸 보니 역시 게임이긴 한 모양이지.
쓴웃음을 지으며 계속 주변을 감상하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와 앞에 섰다.
지존무쌍이 입을 열었다.
“겜 다시 하신다니 정말 잘 생각했어요. 정말 잘 생각했어! 그래, 그게 맞아.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이렇게 보장된 돈벌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내가 돈 벌 방법 다 알아봤어요. 왜, 들어보니까······”
또 만나자마자 그놈의 돈 타령이다.
더 듣기 싫었던 가온이 말을 끊었다.
“저도 알아본 것 좀 있는데. 그래서 당분간의 일정을 세웠거든?”
“일정?”
“이 게임에 전투 훈련소가 있다더라고. 게임 시작하는 사람들은 다 전투 초보일 거 아냐? 그네들한테 무료로 훈련시켜주는 거지. 저도 당분간은 훈련소에서 훈련만 할 건데 지존무쌍 씨도 이참에 훈련 좀 하죠?”
지존무쌍은 눈을 껌벅이더니 말했다.
“나 군필이야. 특등사수였다니까? 훈련 전혀 필요 없는데······ 게다가 가온 씨는 아예 혼자 다 쓸어버릴 실력이면서 왜······”
“훈련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라 레벨 올리려고 그래. 초반에 레벨업 하려면 훈련장에서 훈련 마치는 게 빠르다더고요.”
“이 게임에선 레벨 별로 안 중요한데? 저번에 렙 1이면서 여럿 학살하셔봐서 알잖아요. 이 게임 완전 물리법칙 기반인 거. 어차피 총으로 싸우니까 스탯 올린다고 데미지가 오를 것도 아니고. 총 맞으면 고렙이든 뭐든 한 방에 죽는데 굳이 능력치 올릴 이유가······”
“나한텐 중요해요.”
“왜?”
“나 마법 쓸 거야. MP 올려야 돼.”
“아······ 마법이요, 예. 그래요. 그러고보니 마법 쓰셨지.”
그제야 지존무쌍은 수긍했다. 아니, 굽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진짜 판타지 주민 맞구나······.”
어쩐지 기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는 사람이 끌고 온 고급 스포츠카를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가온은 그런 반응의 이유를 이해했다.
‘하기야 지구인이 마법을 쓰려면 값비싼 약을 잔뜩 복용해야 한다지? 그 약값 대려면 정말 고급차 가격을 뛰어넘으니 지구에서 마법은 부의 상징이라 하고. 그러니까 내가 정말 돈 많은 걸 깨달아서 열등감 느끼나본데······’
혼자 수십 명을 쓸어버린 위업보다도 이쪽이 저 남자를 더욱 주눅 들게 하는 모양이다.
가온이 어이가 없어 속으로 웃는 가운데, 지존무쌍은 힘없이 물었다.
“훈련만 계속할 건 아니죠?”
“당연하지. 경험치만 좀 벌면 바로 싸우러 나갈 거예요. 당장엔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대로 올리는 게 목표거든.”
“왜? 말했다시피 총만 잘 쏴도······”
“아, 총질만으로 못 이길 적이 있어서 그래! 돈이나 벌지 왜 자꾸 레벨에 집착하냐 불만인가 본데, 어차피 레벨 올리려면 이놈 저놈이랑 싸워야 할 거고 그 과정에서 돈 벌려면 벌 수 있을 겁니다. 오케이?”
차마 불만 있으면 갈라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온은 친구랄 만한 존재가 딱 둘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연락이 끊긴 지 수십 년째였다.
그러니까 이 돈에 집착하는 중년 한국인은 가온의 유일한 인간관계였다. 사 년 동안 같이 게임했을 뿐이니 썩 소중한 인연은 아니었지만 어쨌건.
다행히도 지존무쌍은 더 짜증 나게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리 결정되었다. 둘 다 당분간 훈련이나 하기로.
가온은 제 할 일을 하러 나섰다.
인터넷에서 본 대로, 거리를 향해 소리쳤다.
“야, 심부름꾼! 와서 길 안내 좀 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도 자유도가 넘치는 게임이다. 그런 게임에서는 자칫하면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헤매기 마련이었다.
그런 혼란을 막기 위해 안내용 NPC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예, 가요!”
꾀죄죄한 꼬맹이가 허겁지겁 달려와 허리 굽혀 절했다. 누리끼리한 전통 복장을 보아하니 현지인, 그러니까 아스인임을 알 수 있었다.
지구인 용병들의 구두를 닦아주는 등 잔심부름을 하며 연명한다는 설정인 NPC였다. 그리고 가온은 지구인 용병이란 설정이었으므로, 꼬맹이 NPC는 비굴하게 헤헤거렸다.
“길 안내,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어르신! 동전 한 닢 주시면 어디로든······”
애국적인 아스인이라면 역사고증에 충실한 이 상황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온은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저 NPC가 너무 사람 같아 떨떠름할 뿐이었다.
“검술 교습소로.”
안내를 받아 도착한 검술 교습소는 크고도 화려했다.
가온이 그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더 힘줘, 힘!”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강은 부드러움으로 제압하고 부드러움은······”
교습소는 놀라울 정도로 북적거렸다.
심지어 옆 사격 훈련장보다도 사람이 많았는데, 전쟁 게임이라 주된 무기가 총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즐기지 않는 유저들도 있음을 고려하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아예 훈련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 상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술 훈련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
“검을 감아! 지레의 원리! 지레의 원리 생각해!”
ARMA 회원들이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중세 검술 동호회. 현실에서 검술을 즐기자면 온갖 비싼 장비를 사고 모임 약속을 잡아야 하는 등 까다롭지만, 여기서는 그저 계정비만 내면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검술을 즐길 수 있어 살판난 부류였다.
‘귀여운 것들.’
가온은 여유롭게 웃으며 걸어 나갔다.
그러자 웬 지구 서양인이 다가왔는데, 이곳에서 검술 훈련을 맡은 NPC였다.
“못 보던 얼굴이군. 내가 교관이오. 훈련하러 오셨나?”
서양인의 말에 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입 교습생은 언제나 환영이오. 실력은?”
“엄청난 고수. 빨리 이런저런 시험 내리고 경험치 줘요.”
“흠.”
교관 NPC가 경험치란 용어를 이해했을진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건 이쪽이 오만하게 군다는 것쯤은 이해한 모양이었다.
교관은 살짝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어디 허세꾼인지 아닌지 실력 좀 봅시다.”
교관이 양손으로 쥔 롱소드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독일식 천장 자세.
그러나 가온은 롱소드를 양손으로 잡지도 않았다. 한 손으로 잡은 롱소드를 대충 가슴 위로 들었을 뿐이다.
“그게 자세 잡은 거요?”
교관이 지적하자 가온은 재촉했다.
“예. 빨리. 빨리 실력 봐요.”
이 태도에 화가 난 모양이다.
교관이 경고 없이 한 발 내딛으며 칼을 내리쳤다. 강력한 사선베기.
이 동작을 취하면서 교관은 상대가 같은 사선베기로 대응하리라 예상했다. 그나마 저 자세 아닌 자세에서 할 수 있는 것이 그뿐이니까. 그리고 사선베기가 맞붙으면 바인딩 상태가 될 테고, 그 상태에서 적을 제압할 방법을 교관은 수십 가지는 알고 있다.
그러나 가온의 동작은 교관의 예상을 벗어났다.
갑자기 가온의 검이 찔러왔다. 교관은 질겁했다.
그냥 역으로 냅다 공격하기? 이러다 크게 다치는데. 너무 도박적인 데다 위험해서 훈련 중에 할 짓이 아니다.
빨리 때려눕히고 혼쭐을 내야겠다는 생각. 교관이 내리치는 검에 힘이 실렸다.
다음 순간, 열이 차오른 교관의 머리에 당황이 서렸다.
가온의 찌르기는 교관의 검 옆면에 명중했다. 그 탓에 사선베기의 궤도가 어긋났다. 공격 실패.
듣도 보도 못한 짓거리에 교관은 당황하면서도 얼른 적절한 자세를 취했다. 달인답게 바로 역습에 나섰다.
“흡!”
머리를 노린 찌르기. 그러나 역시 기괴한 방식으로 막혔다. 뭘 어떻게 막았나?
교관으로서는 묘사할 수가 없다. 그 방식이 너무 기괴해서 기억에 남지도 않은 까닭이다.
교관은 자기 수가 읽히고 있다고 여기고 당황했다.
실제로 읽히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초능력적인 전투 감각.
알파고가 수많은 경우의 수중 가장 높은 승률이 예상되는 수를 취하듯, 소드마스터는 각 상황에 대한 최선의 수를 본능적으로 취할 수 있다.
교관은 기세로라도 이겨야겠다 결심했다. 잠시 거리를 벌려 숨을 고른 뒤, 돌격하며 칼을 휘둘렀다.
가온도 마주 칼을 휘둘렀다.
힘의 충돌.
그러나 가온의 근력이 부족한 데다 애초에 한손으로만 휘둘렀다. 칼에 실린 힘이 약했다.
튕 하는 소리, 결국 가온의 손에서 롱소드가 벗어나 허공을 날았다. 패배를 직감하던 교관은 당황했다.
어, 내가 이겼나?
아니었다.
왼손을 벗어나 허공을 나는 롱소드. 그때 가온은 대각선으로 껑충 뛰었다. 그리하여 교관의 공격가능 거리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뛰어간 그 방향으로 튕겨 난 검이 회전하며 날아왔다.
가온은 검의 회전방향과 궤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놀고 있던 오른손을 살짝 휘둘러 정확히 칼끝을 잡을 수 있었다. 잡은 그대로 칼을 내리쳤다.
턱 하고, 칼자루끝이 교관의 어깨를 강타했다.
“억······”
교관이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더니, 겨우 말했다.
“내가 졌소.”
[경험치 300 획득]
확실히 훈련만으로도 경험치를 주는 모양이다. 가온은 만족스레 물었다.
“고수 맞죠?”
교관은 멀뚱히 고민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겠군.”
“뭐?”
“내 안목으론 전혀 모르겠어. 언뜻 보면 막 휘두르는 것 같아. 그걸 보면 기초가 아예 없는 것 같은데 막상 볼품없이 패배한 건 나로군. 이건 대체······ 내 부족한 식견으로 감히 추측하자면······”
혹시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서 저러나?
가온이 눈살을 찌푸린 가운데, 교관이 속삭이듯 물었다.
“혹시 소드마스터 가온 경 아니십니까?”
가온은 기겁했다.
“가온은 그레이엘프잖습니까. 내가 물론 엘프만큼 잘생기긴 했지만, 내 귀 삐죽해 보여요?”
“가온 경이 폴리모프 마법의 달인인 건 유명하지요. 혹시 인간으로 변신해계신 게 아닌지······”
당황한 가온이 화냈다.
“내가 소드마스터 가온이라 치면, 진짜 소드마스터 가온은 아닌데, 아무튼 정말 소드마스터 가온이라면 이백 살 넘게 검 휘두른 주제에 까마득한 후배 이겨먹고 잘난 척한다는 거요? 소드마스터씩이나 돼서 그리 한심한 짓을 할 거 같아요? 이백 살 넘어 힘숨찐을 할 거 같냐고. 어?”
다행스럽지는 않게도, 교관은 순순히 사과했다.
“아······ 확실히 검의 종사께서 그리 할 짓 없는 사람처럼 구실 리는 없지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