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 칼잡이 가온 - [2]
가온은 생각했다. 캐릭터 재생성을 하려면 계정비를 다시 내야 한다고?
사실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스인들은 계정비 무룐데.’
지구인들에게만 청구된다는 계정비, 얼마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지랄 맞게 비싼 모양이다. 모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짐작할 만했다.
그 짐작이 맞았다. 지존무쌍은 굴욕감에 몸을 떨면서도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계정비 십사만 원을 날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패키지를 구매하여 계정을 생성하는 데만 십일만 원에 이용요금 월 삼만 원. 그 십사만 원이 누군가에게는 적은 돈일지 몰라도 지존무쌍에게는 아니다. 토가 나올 거금이다. 월세가 반 년치 밀린 상황에는 특히.
모두의 표정이 구겨지는 가운데, 조교의 뒤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중위 계급표를 단 남자, 대충 장교가 말했다.
“실례가 많습니다······ 백골부대에서 나왔습니다. 언짢으신 건 알겠지만 모쪼록 협조 부탁드립니다. 아, 지금은 말씀들 하셔도 돼요.”
허락이 떨어져서야 겨우 지존무쌍이 입을 열었다.
“협조? 무슨?”
“여기가 우리 영역이라. 새로 시작하신 분도 여기선 우리 규칙을 지켜주십사 하는 겁니다. 별 건 아니고, 시작 아이템으로 선택한 무기들 있죠? 그것만 여기 내려놓고 떠나셔서 게임 즐겨주시면 됩니다.”
“무기들 내려놓고 떠나라면, 아예 무기 달라고?”
“예.”
“시작 무기들 계정마다 딱 한 번씩만 줘서 엄청 비싸다던데? 현금가 칠만 원 넘는다고······”
장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웃었다.
조교가 대신 말했다.
“칠만 원 아끼자고 십사만 원 날리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조교가 든 총구가 햇빛을 받아 번뜩였다. 지존무쌍은 움찔하며 중얼거렸다.
“미친······”
슬슬 모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존 유저들의 초보자 갈취.
자유도 높은 게임이라 건축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게임 시작지점 지역 주변으로 성벽을 쌓아 초보자들이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는, 시작할 때 주어진 무기를 압수하는 식으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초보자들의 반항은? 불가능하다. 단단한 요새의 총안구 틈으로 삐죽 내민 총들은 반격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이쪽은 완전히 노출된 데다 둘러싸였으니.
가온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짜 이딴 망겜을 사람들이 죽자고 한다고?”
그 말에 웬 청년이 대답했다.
“사람들이 죽자고 하는 겜이니까 이딴 짓도 하는 거죠. 보세요. 저기 성벽 위에 사람들이 보초 서고 있죠? NPC가 아니라 진짜 사람들이에요.”
“아니, 기껏 게임에 접속해서 지루하게 경계근무나 서요?”
“시급 200골드 받고 저러는 걸 겁니다. 200골드가 현금 2300원 정도 하던가? 실제 시급치곤 적어도 저 새끼들 나라에선 제법 되거든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여기 점령당했단 것도 미리 봤으면 딴 지역에서 시작했을걸, 니미.”
한편 장교가 사람 좋은 척 웃어 보였다. 신규 플레이어들을 향해 말했다.
“물론 다짜고짜 빼앗으면 깡패죠? 우리 깡패 아닙니다. 무기 계속 갖고 계실 기회도 물론 드리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요······ 혹시 여기 포병이나 군 간부 출신 있습니까?”
한 초보자가 대답했다.
“어······ 나 4.2인치 박격포병 출신이긴 한데.”
“4.2인치? 인재네! 우리 백골부대 안 들어올래요? 포병이나 군 간부 출신은 바로 정식 길드원으로 임명하고 다달이 계정비 지원해는데. 혹시 프로게이머 지망이야?”
“어, 예.”
“프로게이머 되려면 길드 들어오는 게 빨라! 석 달 수습 기간만 열심히 하면 바로 계정비 지원해주고, 길드에 더 공헌해서 간부 되면 수익 월 300 보장한다니까? 원래 수습 기간은 네 달인데 포병 출신은 특별 대우해서······”
보통 같으면 바로 수익을 올리게 해주겠단 말에 수상해 할 만하건만, 특별대우란 말에 솔깃한 모양이다.
장교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다 군 시절 보직 말해봐요.”
“통신병.”
“소총수.”
지존무쌍이 대뜸 손을 들고 말했다.
“나 운전병! 거기에 사격 만발 특등사수였어!”
저 백골부대인지 뭔지 하는 곳에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월 300 주겠단 말에 혹했나?
가온이 혀를 차는 가운데, 장교가 물었다.
“연세가?”
지존무쌍은 눈치를 살피며 대답했다.
“마흔넷.”
“아, 틀딱은 좀.”
이 말은 참지 못한 모양이었다.
“틀딱? 새끼야, 말을 해도······”
그때였다. 조교의 성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씨발?”
지존무쌍은 일순 이쪽을 향해 공격하려는 줄 알고 질겁했다.
그러나 이쪽을 향해 소리친 것이 아니었다.
“공익이라고?”
조교의 말에 그 앞에 선 청년이 움츠러들었다.
“아, 예······.”
“니미, 공익 새끼가 이 겜을 왜 해? 넌 그냥 미리 총 압수할 거니까 바로 꺼지든가 해라.”
“아니, 왜······”
“공익 새끼가 총을 왜 만져! 나가서 공익겜이나 해 씹······”
갈취하는 주제에 적반하장이다. 왜 굳이 화까지 내는가 하면, 길드에 아무나 받아주지 않음을 강조하여 길드에 들어오는 것을 마치 특권처럼 여겨지게 만들기 위한 수작질일 것이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지만 공익 청년은 죄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게임이니까 현실에서 어떻든 당당할 법도 하건만, 도저히 강하게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도 계속되는 현실감.
때문에 상황에서 느끼는 불쾌감 또한 짙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온은 화를 참으려 애쓰며 물었다.
“초보자용 무기가 하나에 칠만 원 넘는댔나? 그럼 저 친구 지금 칠만 원 삥뜯기는 거요?”
방금 거절에 모욕까지 당한 지존무쌍은 힘없이 대답했다.
“그렇겠죠 뭐.”
“정의의 수호자가 나설 때가 됐군.”
“예?”
가온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새의 구조를 파악했다.
주변을 둘러싼 원형 성곽. 안쪽에다 일방적으로 십자포화를 가할 수 있는 구조다. 그러니 싸우고 싶다면 어떻게든 저 성곽 위로 올라가야 한다.
성곽 위로 올라갈 수단은? 성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사다리 하나뿐.
“아, 공익 새끼가 개기네? 뒤지고 싶나?”
조교의 성난 목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가온은 자기 캐릭터의 능력을 점검했다.
우선 몸.
팔, 원래 몸만큼 근육이 충분히 붙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잘 움직여진다. 총기의 반동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겠다. 다리, 원래 몸은커녕 일반적인 엘프의 다리만큼도 빠르지 않지만 어쨌건 잘 움직여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신경은?
동체시력, 이 부분은 원래 몸의 것보다 나쁘지 않다. 현실에서 자신이 지니고 있던 그 수준 그대로다. 확실하다. 아까 총알이 날아오는 궤적이 살짝 보였으니까.
청각 또한 현실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엘프의 삐죽한 귀가 아니라 인간의 저능한 귀인데도 그렇다.
덕분에 저 멀리 성벽 위에서 나누는 잡담마저 들을 수 있다.
“저 찐따 쫀 거 봐라······” “저 새끼······” “”
게임 캐릭터로의 능력저하가 뇌의 영역은 간섭하지 않는 것일까?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조교가 이쪽에 다가오더니 시비 걸듯 물었다.
“넌 또 뭐냐. 왜 시작 무기로 총 냅두고 검 골랐냐?”
“검이 왜?”
가온은 시큰둥하게 대답했고, 그 태도가 조교를 화나게 한 모양이었다.
“병신인가? 전쟁 게임인데 칼을 왜 골라. 너도 공익이니?”
가온은 느긋하게 물었다.
“왜, 칼은 쓸모없으니까 이건 압수 안 하게?”
“그럼 불공평하지 인마. 너도 칼 내려놓고 꺼져.”
“싫으면?”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게임 도움말을 살폈다.
도움말, 하고 생각하자마자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게임 내 정보가 들어온다. 그 와중에는 쓸 만한 내용도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바로 적용해 볼 만한 내용이.
도움말을 살피면서 슬쩍 롱소드를 만지작거렸다.
정확히는 그 칼자루끝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롱소드의 칼자루끝장식은 꽤 유용한 물건이다. 무게중심을 잡아주도록 육중하고, 칼을 거꾸로 잡고 휘두르면 둔기로서의 타격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단단하다. 그리 중요한 물건인 만큼 망가지면 교체할 수 있도록 탈착할 수도 있다.
지금 상황에서는 모두 훌륭한 장점이었다.
물론 검술에 조예가 없던 조교는 그 장점들을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칼자루끝장식이 기어이 뽑혀나오던 그 순간에도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말이나 했다.
“싫음 뒤지―”
조교가 닥쳤다. 휙 하고 던진 롱소드의 칼자루끝장식이 그 안면을 강타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