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 칼잡이 가온 - [1]
소드마스터 가온은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시여. 저는 당신께 그 게임이 망하지 않게 해주십사 몇 번이고 빌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선 제 기도를 끝내 들어주지 않으셨지요. 아주 간절히 빌었는데도······.”
기도에 응해 여신께서 답을 내리시었다.
‘내가 화로의 여신이지 전자오락의 여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전자오락의 여신이었다 해도 그 사행성 게임은 망하게 두었을 테고.’
“슬프게도, 결국 그 게임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내 수만 년 삶에 그리 기쁜 일이 또 없었지 뭐냐?’
“그러니 이제 새 게임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 전에······ 당신의 허락을 구합니다.”
여신의 옥음이 끊기었다. 잠시 후에야 애타는 목소리가 가온의 뇌리에 울려 퍼졌다.
‘이제 게임은 그만하고 밖에 좀 나가면 안 되겠니? 왜, 얼마 전에 시내에서 오크 구해줄 땐 참 보람찼잖느냐.’
“불과 화로의 여신이시여. 저 가온은 당신의 대전사입니다. 집안에 머무르며 당신의 화로를 지키겠습니다.”
‘가온아, 네 여신이 거기 강림해 등짝을 때리지 못한다 하여 헛소리를 하진 말아라! 잔말 말고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그래라! 제발, 넌 올해로 이백삼십 살이 넘었다. 그 나이 먹고 잔소리를 들어야겠느냐?’
“전 엘프고 반신이니까 이 정도면 아직 젊습니다······”
여신의 한숨.
또다시 침묵이 흘렀고, 가온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선즙필승(先汁必勝)의 교리를 실천에 옮길까 하고.
다행히도 이백삼십 살 넘어 우는 척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자비로우신 여신께서 마지못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었다.
‘이번만이다, 가온. 이번 게임만 하고 다음부터는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하자, 응? 설마 여신이 복장 터져 슬피 우는 걸 보고 싶진 않겠지? 내 간절히 부탁하마. ’
여신께서 허락을 내리셨으므로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가온은 여신의 전자난로를 향해 깊이 절하여 감사를 표한 뒤, 전용기기에 들어가 게임을 시작했다.
가상현실 게임을.
******
의식이 어둠 속으로 침잠한다.
검은 시야. 일종의 로딩인 모양이다.
로딩 중에는 검은 화면만 쭉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게임에 대한 정보나 명언 따위를 보여주기 마련이다.
검은 시야에 떠오르는 몇 줄의 문구.
「소드마스터 :
참호전의 악몽, 시가전의 제왕, 유격전의 신.
예비 대량살인마, 예비 독재자, 민주주의의 억압자」
자신과 관련된 문구인지라 가온은 눈살을 찡그렸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었다.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
오프닝은 일종의 영상이었다. 게임의 배경을 보여주기 위한 도입부.
마치 영화 같다.
척, 쿵, 척. 규칙적인 발소리들이 울리는 가운데 수십 년 전 군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행진한다.
영상과 함께 일종의 나레이션이 머릿속에 파고든다.
「지구인들이 진군한다. 그들의 가슴은 자부심······ 혹은 우월감으로 가득 찼다.
수만 년 인류사에 전례 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우월감이다.
거대한 차원문이 열리자, 지구인들은 다른 세계를 발견했다.
지구인들은 새로운 세계가 자기네보다 못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문명에서든, 전쟁 기술에서든 간에.
지구의 정치가며 자본가들은 자기네 문명과 기술, 종교와 전염병 따윌 새로운 세계에 기꺼이 선물했다. 선물의 대가로 자원과 온갖 권리, 드높은 존경과 경외를 얻어오리란 기대와 함께.
지구산 전차와 전투기가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새로운 세계를 가로지른다.
아스를.
수만 년 동안 증기기관을 발명하지 못한 판타지 세계를」
영상 속 배경이 바뀐다. 이번에도 군대의 모습이지만, 아까와는 다른 군대다.
총과 함께 검과 지팡이를 든 군대.
「아스인들도 진군한다. 원주민들. 방어자들. 복수자들.
아스의 성지와 왕국은 모두 군홧발로 짓밟힌 지 오래다.
자부심이라곤 모조리 증발한 지금, 아스인들의 가슴에는 분노만이 가득 찼다.
수많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전사들의 행군은 멈추지 않는다. 승리의 희망 대신 복수의 욕망이 연료로 작용한다. 그저 악에 받쳐 전장에 나선다.
아스인들의 무기는 보잘것없고 기술은 더더욱 보잘것없지만, 의외로 쉽게 밀리지는 않는다.
엘프와 드워프, 오크와 고블린······ 드래곤과 천상의 신들이 그들의 분노에 함께한다」
또다시 화면이 바뀐다. 이번에는 양쪽 군대 모두를 보여준다.
양군이 맞붙는 전장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로부터 수십 년 지나 서기 1943년. 2차 대전 말기.
두 세계는 지겹게도 오래 싸웠지만 아직 결판은 나지 않았다. 예전도 지금도, 양쪽 전선은 확장을 거듭할 뿐이다.
광대할 만치 넓어진 전장은 더 많은 병력을, 더 많은 피를 요구한다.
당신 또한 피 흘리기 위해 전장에 불려 나온 용병이다」
오프닝은 여기서 끝.
머릿속에서 웬 목소리가 질문했다.
「당신은 침략자 지구인입니까, 아니면 원주민 아스인입니까?
*실제 출신과 다르게 대답해도 무방합니다」
일종의 시스템 메시지인 모양이었다.
가온은 미리 정해둔 대로 대답했다.
“지구인.”
「지구 출신은 오직 인간 종족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까?」
“어.”
「당신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질문과 함께 화면이 웬 남자의 모습을 비추었다.
회색 머리칼에 삐죽한 귀, 전형적인 그레이엘프의 모습.
「원래 모습 그대로 유지하기를 원합니까?
*승낙할 시 캐릭터 외형설정이 종료됩니다」
“아니. 변경.”
가온의 대답과 동시에 화면 속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다.
캐릭터 외형설정이 시작되었다. 어지간히 솜씨가 없으면 어려운 일이지만, 가온에게는 아니었다. 가온은 자기 모습을 바꾸는 일에 익숙했다.
약 일 분 지나, 아주 잘생긴 동양인 남자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당신이 전장에서 쓸 무기는 무엇입니까?」
“검. 길이 상관없이 무게 1.4kg 이하 롱소드로.”
그것이 마지막 질문인 모양이었다. 시스템 메시지가 캐릭터 생성이 끝났다고 알렸다.
「이제 여정을 시작하십시오. 지구의 용병이여. 눈에 보이는 원주민들을 모조리 죽이고 범하여 당신네 자본가들의 배를 불려주십시오」
의식이 전환되는 가운데, 가온은 자기가 만든 작품에 감탄하지 않고 혀를 찼다.
“난 여캐 안 하면 죽는 병에 걸렸는데.”
*******
어둠이 지나 빛이 스며들었다.
눈을 뜬 가온은 놀라움에 신음했다.
이게 게임이라고?
가온도 VR 게임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수십만 원, 혹은 백만 원이 넘는 비싼 기기와 고성능 컴퓨터로 입체감을 부여한 게임들.
그러나 지금 이 게임은 입체감을 부여한 수준이 아니었다. 가온은 주변의 경치를 보며 생각했다.
‘향기며 소리며 죄다 현실과 분간이 안 되는 수준······’
또 다른 세상, 정말로 세상다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대체 어떻게?
정말이지 이백 년 넘게 산 엘프에게도 놀라운 광경이었다. 가온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와중이었다.
“가온 씨?”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웬 인간 남자가 보였다. 커스터마이징 재주가 없었는지 너무나도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가온은 살짝 웃으며 물었다.
“그쪽은 지존무쌍님 맞죠?”
닉네임-지존무쌍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 바로 만나네! 좋다! 그럼 빨리 돈 벌러 갑시다!”
만나자마자 하는 말이 저거라니? 가온은 조금 당황했다.
“지금 바로? 주변 감상도 하고 그러지.”
“멍 때리기엔 계정비 너무 비싸!”
“아니, 왜 이렇게 맘이 삭막해? 봐봐. 이게 게임이라니 놀랍잖아. 막 감탄하고 그럴 맘 안 들어요?”
가온의 말에 지존무쌍은 시큰둥했다.
“놀랄 게 뭐 있나? 판타지 세계에서 만든 게임이니까 마법으로 뭐 어떻게 했겠지 뭐.”
“마법은 무안단물이 아닌데.”
“아, 뭐 어때! 빨리 돈 벌자니까, 응?”
그러나 가온은 급하게 굴 마음이 없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여기엔 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남자 여섯. 이쪽과 똑같이 기초적인 군복을 입은 사람들.
가온이 그쪽에 다가가 물었다.
“방가방가. 님들도 신규죠?”
“아, 예. 님? 음, 여기서 님이라 부르기 어색하네. 아저씨도 처음이에요? 커스터마이징 진짜 잘하셨네.”
보통 온라인 게임이었다면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어색할 이유가 없으련만, 이 게임에서는 아니었다. 너무나도 현실 같은 나머지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의 그 어색함이 여기서도 흐르고 있었다.
그 어색함을 무릅쓰고서라도 친목을 다지려던 와중이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고함.
“모두 입 다물고, 주목!”
이 게임은 서로 친해질 기회를 주려 하지 않았다.
“모두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붉은 모자를 쓴 남자, 군대의 조교처럼 차려입은 남자가 그리 외치면서 이쪽에 총을 겨누었다.
위협적인 것은 저 조교뿐만이 아니었다.
가온은 주변의 변화를 보고 한쪽 눈을 치켜떴다.
‘포위된 상황 연출?’
주변을 둘러싼 것은 일종의 요새였다. 포격에 바로 무너지지 않도록 세운 20세기형 요새.
요새의 총안구(銃眼口)로는 총구들이 삐죽 빠져 나왔다.
그 총구들이 여기 모인 신규 플레이어들을 겨누었다.
‘오······’
가온은 흥미로움에 살짝 웃었다. 지나친 현장감이 놀랍긴 하지만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모름지기 소설이든 게임이든 시작은 강렬해야 하는 법.
“이게 게임 프롤로근가본데.”
그렇다면 저 손들라고 외치는 놈은 NPC일까?
아니었다.
군대를 나왔거나 계급문화에 익숙해진 한국인들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가 있다. 잔뜩 내리깐, 살얼음 낀 말.
조교는 정확히 그런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입 다물란 말 씹냐? 닥치라고.”
어쩐지 스산하여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신규 플레이어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아, 프롤로그 왜 이리 띠껍······”
탕, 하는 총성이 뒷말을 지워버렸다.
조교가 든 총구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방금 중얼거린 남자는 펄떡거리며 쓰러졌다.
피가 흘렀다. 비린내가 풍겼다.
지나친 현장감, 게다가 총성은 지나치게 컸다. 총성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몇몇이 까무러질 듯 기겁하여 움찔했다.
조교는 계속해서 말했다.
“더 떠들면 그냥 쏜다. 뒤지면 24시간 뒤에나 부활 되고, 너흰 뉴비 새끼니까 근처 도시가 아니라 뒤진 자리에서 부활한다. 그럼 또 뒤져야 돼. 이 망겜, 캐릭터 다시 만들고 싶으면 계정 새로 사야 하는 거 알지? 돈 많으면 뒤져보든가.”
슬슬 모두 이게 튜토리얼이 아니란 것을 눈치챘다. NPC는 저따위로 말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