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침묵의 시간
평화로운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애석하게도 그리 길지는 못했다.
만찬의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들은 다시금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점차 커져나가고 그 생각이 가슴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서로를 믿지 못한 채로 대화의 단절을 불어왔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소통을 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렇지 못하면 점차 미쳐가며 스스로를 파괴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뭘?”
테일러는 멍하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답을 바란 말은 아니었지만 헉스는 그런 테일러의 말에 즉시 대답을 했다.
강준이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기에 그 동안 헉스도 입이 근질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대부분의 이들이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테일러와 헉스만이 대화라는 것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그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평안해짐을 느끼고 있었다.
“살고 죽고를 떠나서 왠지 사람을 못 죽일 것만 같아요. 뭐 또 닥치면 죽일 테지만 말이에요.”
테일러는 아주 잠깐이지만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인간성을 느끼고서는 자신이 살자고 다른 이를 죽이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테일러를 보며 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놈.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말이야. 너 같은 말을 하는 놈은 꼭 죽더라고.”
헉스의 저주가 깃든 듯한 의미의 말에 테일러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꼭 제가 죽을 것 같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네요.”
테일러는 지금까지 억척스럽게 살아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자신이 오래지 않아 싸늘한 주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런 테일러의 모습에 헉스는 왠지 걱정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상대를 죽여야지만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눈 앞의 생존자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상대에게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을 쉽사리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테일러조차도 다른 이에게 할 수 없었다.
그 것을 인정해 버리면 정말로 죽음의 바로 뒤에 서 있을 것만 같은 공포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대화가 다시 단절이 되어버릴 것만 같을 때 헉스는 그 침묵이 너무나도 견디기 싫어 이번에는 자신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그 놈들은 어디에 있는거야?”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헉스의 말에 테일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는 말을 하면서도 대충 누구인지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 놈들! 우리를 이 곳에 쳐 박아 놓은 그 놈들 말이야. 내가 이 곳을 구석구석 뒤졌는데도 아무리 해도 찾을 수가 없어.”
헉스의 말에 테일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찾아도 인간의 흔적은 느낄 수가 없다.’
인류학자이자 제법 노련한 발굴가이기도 한 테일러는 헉스의 의문의 실체를 찾아왔었다.
비록 미치광이처럼 살인을 위해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 사이사이 단서들을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 것이 과거의 인간의 흔적일 수도 있었지만 자신들을 이 곳에 가두었던 존재들이 남긴 흔적도 찾고 있었던 테일러였다.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귀신처럼 이 곳에서는 아무도 없던 공간입니다.”
“응? 무슨 소리야? 니 놈 뭔가를 알고 있는 거냐?”
헉스는 테일러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생각에 그러면 그렇지라는 듯이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강준이 테일러를 죽이지 않고 잡아온 그 이유가 풀리는 듯 싶었다.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 대학에서 인류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뭐 영화 속의 인디아나 존스처럼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 의해 자연이 변형된 흔적을 찾아내는 방식을 알고 있는데 이 곳은 전혀 그런 것이 없습니다.”
테일러는 누군가에게 꼭 하고 싶었던 그 말을 이제야 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본래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테일러였기에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끊임없이 외부로 표출하고 싶어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헉스는 그런 테일러의 말을 이해 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쉽게 말해서 이 곳은 우리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인간도 존재하지 않았던 땅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별 자리를 보면 이 곳은 대륙과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육지랑 가깝다고?”
육지와 가깝다는 테일러의 말에 흥분을 한 듯이 얼굴이 붉어지며 몸에 힘이 들어가는 헉스였다.
잘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 것이었다.
“예! 육지와 너무나도 가깝습니다!”
테일러가 말하는 가까움이란 헉스가 생각하는 가까움과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테일러는 인류학적 인간의 이동의 범위를 떠올리며 가깝다고 강조를 했다.
“그러니까 인간이 존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가까워도 너무 가까워요. 그런데 이 곳에 들어왔던 인간의 흔적이 전혀 없어요!”
“그…그게 무슨 문제야. 오기 싫어서 안 왔을 수도 있지.”
헉스는 인간의 흔적이 없다는 것보다는 육지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테일러의 말을 잘랐다.
“어디로 가면 육지로 나갈 수 있지?”
“예?”
테일러는 헉스의 질문에 멍해졌다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이 새끼야!”
헉스는 테일러의 명백한 비웃음에 울컥해서는 우악스러운 손으로 테일러의 멱살을 붙잡았다.
“빨리 말해! 어디로 가면 육지가 나오는 거지?”
“으윽! 그…게.”
테일러는 육지 방향을 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테일러의 말이 시작되기도 전에 강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쪽. 저 쪽으로 가면 아프리카가 나온다.”
“……!”
강준은 대충 방향을 가늠하고서는 손가락으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런 강준의 말과 행동에 헉스는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글 속이었기에 바다조차도 보이지 않았지만 헉스는 그 쪽으로 가면 자신은 살 수 있을 것이고 자신을 이 따위로 만든 놈들에게도 복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그래? 저 쪽 너머로 가면 그 흑인 깜둥이들이 사는 아프리카란 말이지?”
헉스는 어느덧 자신이 바다를 넘어 자유를 찾는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갈 수 없어.”
강준의 말에 헉스는 피식 웃었다.
“그래. 바다 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겠지. 아마 니들 말대로 적어도 땟목 타고 일주일은 가야 나오겠지? 나도 멍청한 놈은 아니야.”
헉스는 강준과 테일러가 육지가 있는 곳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이유를 대충 짐작했다.
식량과 식수 뿐만 아니라 자신들은 일주일 밖에는 살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너! 설마 이 놈 붙잡아 온 것이 그 일주일 때문이었냐?”
헉스는 광기에 찬 눈빛을 한 채로 무표정한 강준을 바라보았다.
육지에 도착을 한다고 곧바로 인간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었고 더욱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를 만나는데 까지도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 시간을 벌어줄 라이프, 생명이 필요했다.
일주일의 생명 연장을 위한 자신보다 약한 인간을….
헉스는 핏줄이 터져 붉어져 오는 눈동자를 한 채로 강준을 바라보았다.
“흐흐! 한 놈 더 잡자. 그리고 나와 같이 가자. 너도 혼자는 힘들 것 아니겠어?”
헉스는 강준에게 제안을 했다.
아니 자신도 강준의 계획에 끼어주라는 말이었다.
절대 거절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헉스의 단호함이 느껴졌다.
“…….”
테일러는 그런 헉스와 강준의 모습에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일주일의 시간을 번다고 해도 힘들 텐데…. 훗! 하긴….’
테일러는 그 계획이 엄청나게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내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뭐라도 하는 것이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