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언성 히어로
리베로.
배구에서는 수비 전문 포지션을 뜻하는 단어였다.
축구에서는 배구와는 다르게 쓰였다.
수비수이면서 공격적인 선수를 일컫는 말이었다.
쿠만, 이에로, 홍명보, 베켄바우어 등을 축구 팬들은 리베로라고 불렀다.
즉 ‘골 넣는 수비수’들을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감독님이 보시기에 이순신은 그들의 뒤를 잇는 최고의 리베로입니까?”
“이순신은 리베로가 아니오.”
그를 지도하고 있는 이에로 감독이 아스널전을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다.
의아한 기자는 물었다.
“그렇다면 그의 포지션은 무엇입니까?”
“스나이퍼.”
“네?”
“굳이 정의하자면 나는 그를 스나이퍼라고 부르고 싶다는 뜻이오.”
이에로는 급기야 새로운 포지션을 만들어냈다.
“와…”
충격을 받은 기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순신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8시 스포츠 뉴스에도 나왔다.
그것을 본 시청자들은 의아했다.
“스나이퍼? 그게 무슨 포지션이야?”
“그런 포지션이 있는 종목은 아예 없을걸?”
단 한 번이라도 이순신의 경기를 제대로 봤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료화면으로 짧게 나온 영상만 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 이순신 같은 선수를 스나이퍼라고 부르는구나.”
“아버지. 전 오늘부터 스나이퍼가 될게요!”
단순히 골을 잘 넣기에 붙여진 별명이 아니었다.
‘판타지 스타’처럼 골을 넣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한국의 판타지 스타 안태리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올림픽에서 내가 먼저 말했는데…”
파급력은 안태리보다 이에로가 훨씬 컸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
순신이가 저렇게 엄청난 놈으로 성장할 줄 누가 알았겠어.”
안태리는 내심 뿌듯했다.
세컨드 찬스에서 이순신을 뽑은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저격수는 오직 순신이한테만 붙일 수 있는 별명이지.”
상대편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수준급의 드리블,
뛰어난 위치선정,
헤딩 능력과 골 결정력을 갖춘 이순신이기에 가능했다.
수비수는 상대적으로 공격수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다.
이순신은 달랐다.
세계적인 공격수들을 막아냈다.
세계적인 골키퍼들을 절망에 빠트렸다.
이순신의 인지도는 점점 올라갔다.
“인지도 이제 그만 올리고 싶다.”
괜한 푸념이 아니었다.
실제로 경기에서 골 찬스는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이순신이 유명해질수록 견제가 심해졌다.
상대편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수비 진영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하지만 골을 넣기 위해 무작정 슛을 난사하지 않았다.
잘해야 한두 번의 기회가 찾아오는데 이순신은 그걸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당 한 골만 넣자.’
그것이 이순신의 목표였다.
그런데 이번 유로파리그에서 모두 아스널을 이긴다면?
‘경기당 두 골은 넣을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만 돼도 세계 최고의 공격수 수준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이었지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아스널을 이기고자 싶은 마음이 더더욱 간절해졌다.
“지금부터 진심 모드다!”
상대편 공격수가 슈팅하지 못하도록 약한 발을 괴롭혔다.
“뭐해? 이대로 뺏길 거야?”
이순신이 심리전을 펼쳤다.
“빌어먹을!”
상대편 선수가 어쩔 수 없이 불안정한 위치에서 슛을 쏘도록 만들었다.
마치 리버풀의 주전 수비수이자 네덜란드의 주전 센터백 ‘다이크’를 보는 듯했다.
“양 팀의 센터백이 오늘 치열합니다.”
“꿈 FC가 경기 초반에 골을 넣지 않았더라면 힘든 경기가 될 뻔했습니다.”
양 팀의 공격 모두 센터백에서 정리됐다.
그 순간이었다.
아스널의 ‘언성 히어로’에게도 퀘스트가 발생했다.
[거북선을 뚫고 골을 넣으세요.]
[보상 : 오니 슛]
“이게 뭐야?”
깜짝 놀란 타케히로의 눈이 커졌다.
오니 슛.
명칭만 다를 뿐이었다.
이순신의 도깨비 슛과 성능은 같았다.
“이 슛을 얻기 위해선 보다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건데…
상대편 진영까지 진출해본 적은 없는데…”
타케히로는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언성 히어로’는 아군 진영 한정이었다.
의외로 체력 소모가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상대편 지역에서도 은신 효과가 발동했다면,
수비수가 아닌 공격수를 했을 것이다.
‘그래도 보상이 있으니 해보는 수밖에…’
타케히로는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모험을 택했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욕심이 화를 불러일으켰다.
아스널은 후반전에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타케히로 선수가 수비 라인을 끌어올립니다!”
“마치 이순신 선수를 보는 거 같아요!”
타케히로는 후방 빌드업을 적극적으로 진두지휘했다.
이순신과 다른 점은 측면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이다.
아스널은 측면이 강한 팀이었다.
“이순신은 괴물이란 말인가?”
타케히로는 측면과 윙백을 오가며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순신의 위세에 눌렸다.
‘은신 효과가 전혀 없는데도 이 넓은 수비 반경은 뭐란 말인가?’
타케히로도 이순신과 맞붙어보니 그의 진가를 깨달았다.
이순신의 넓은 수비 범위는 스킬이 아니었다.
열심히 갈고 닦은 체력과 의지였다.
“타케히로! 공을 빼앗깁니다!”
“꿈 FC의 역습!”
“김혁규가 잡은 볼은 송희윤에게 넘겼습니다!”
“송희윤의 슛!”
“튕겨 나온 공.”
“오쿠보가 가볍게 밀어 넣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스널은 대응할 수 없었다.
“타케히로! 오늘 좀 이상해!”
“맞아. 평소답지 않게 너무 흥분하는 거 같아.”
“미안하다.”
타케히로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휙.
고개를 돌려서 이순신 쪽을 바라보았다.
“진짜 거북선 같은 놈일세…”
[미즈후사가 가슴을 치며 답답해합니다.]
그런다고 한들 갑자기 타케히로의 실력이 라모스나 다이크 급으로 올라가진 않았다.
[미즈후사가 제안합니다.]
[이길 수 없다면 자폭을 하는 게 어떠냐고.]
타케히로는 미즈후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새로운 스킬은 분명 탐이 났다.
그러나 이순신을 다치게 하면서까진 얻고 싶지 않았다.
“이번 경기는 어쩔 수 없어.”
남은 시간은 20분.
타케히로는 수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불만스럽게 경기를 지켜보던 미즈후사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스널! 페널티킥을 얻어냅니다!”
뭔가 석연찮은 판정이었으나 꿈 FC의 센터백은 옐로카드를 받았다.
‘어?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멀리서 지켜보던 타케히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독님!”
재빨리 감독에게 달려갔다.
아스널 감독은 살짝 곤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탁입니다. 이번 페널티킥은 제가 꼭 차고 싶습니다!”
그나마 타케히로가 아스널에서 오늘 가장 좋은 활약을 펼쳤다.
평소답지 않게 적극적인 모습에 감독은 기회를 주기로 했다.
“알았다. 꼭 만회 골을 넣어라!”
“감사합니다!”
타케히로는 넙죽 절을 했다.
“아스널에서는 타케히로가 페널티킥을 준비하는데요?”
“아무래도 이순신 선수에게 오늘 자극을 많이 받은 모양입니다.”
이순신은 스킬 공유를 노이즈캔슬링에서 방패연으로 변경했다.
어차피 보경풍은 영어를 잘 몰랐다.
심지어 그는 귀나 눈으로 공을 막는 선수가 아닌 촉감으로 막는 선수였다!
“보경풍 선수. 몸을 날립니다!”
[방패연이 발동합니다.]
“타케히로의 슛을 잡아냅니다!”
보경풍이 긴 머리를 휘날리며 일어났다.
“나이스. 경풍이 형!”
보경풍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방패연은 공을 따라가는 스킬.
페널티킥에서 사용한다면 공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골키퍼의 능력이 받쳐주지 못하면 쓸모없는 스킬이었다.
만약 다른 선수였다면 눈으로 공은 따라갔을지언정 보경풍처럼 몸을 날리긴 힘들었다.
“아… 안 돼…”
타케히로는 절망에 빠졌다.
퀘스트는 포기했다.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더더욱 수비에 열중했다.
경기 막판.
“꿈 FC가 2분을 남겨놓고 선수 교체를 합니다.”
좋은 활약을 보여준 오쿠보가 윤광섭과 교체됐다.
윤광섭의 눈빛이 심상치 않더니 기어이 일을 냈다.
추가시간까지 거의 다 끝났을 무렵,
이순신의 마지막 빌드업이 펼쳐졌다.
[현무가 발동합니다.]
이순신의 롱패스가 윤광섭에게 향했다.
“크흑!”
[빙결진이 발동합니다.]
현무의 특수효과로 타케히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빙결 효과에 걸린 그는 몸이 둔했다.
“윤광섭 선수가 공을 내줍니다.”
측면에서 중앙을 향해 대각선으로 치고 들어가던 윤광섭은 김혁규에게 공을 툭 차 줬다.
김혁규는 개인기를 펼쳤다.
공을 살짝 띄우는 로빙 패스로 두 명의 수비를 뚫었다.
“이런!”
아스널의 수비수들은 당황했다.
“윤광섭!”
윤광섭은 숨도 쉬지 않고 재빠르게 달렸다.
뒷공간 침투를 훌륭히 마친 윤광섭은 보상으로 멋진 패스를 받았다.
곧바로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더니,
고민 없이 슛을 때렸다.
“윤광서어어업!”
평범한 슈팅이었다.
아스널 골키퍼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에 맞은 공은 굴절됐다.
아스널의 수비수들은 뒤엉킨 상태라 누구 하나 대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골대로 향하는 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와아아!”
주먹을 불끈 쥐고 윤광섭은 미친 듯이 뛰었다.
게임으로나마 자주 봤던 팀하고 경기를 하는 것도 미칠 노릇이었다.
그런데 그런 팀을 상대로 골까지 넣었다.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교체 들어온 윤광섭이 추가 골을 성공합니다!”
이순신의 발끝에서 시작된 공격.
어시스트는 김혁규,
골은 윤광섭,
자신의 이름은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늘 준비되어있던 윤광섭에게 주어지는 훌륭한 보상이었다.
이순신은 씨익 웃으며 동료의 골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이것이 언성 히어로의 참모습이었다.
삐이이익-
심판이 휘슬을 불었다.
마침내 경기가 끝났다.
“어…어? 꿈 FC가 아스널의 3:0으로 물리치고 4강전으로 향하는 관문에 한 걸음 다가섰습니다.”
아스널한테는 뼈아픈 패배였다.
타케히로를 비롯해서 아스널 선수들은 2차전을 기약했다.
‘최소한 4골을 퍼부어주겠어!’
타케히로는 여기에 한 가지 목표가 더 있었다.
[다음 경기에서 꿈 FC가 이기면 이순신은 언성 히어로를 익히게 된다.]
[최소한 무승부라도 기록하십시오!]
타케히로의 눈빛은 비장했다.
그렇게 되면 이순신의 팀을,
이순신 자체를 이기는 건 더더욱 힘들어진다는 뜻이었다.
‘이런 선수가 있다면, 일본은 아시아에서 이인자로 머물게 된다.
그것만큼은 안 되지.’
그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