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삼위일체
김혁규는 오늘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공간 침투도 활발하고,
슈팅도 과감하게 때렸다.
전방에서 꿈FC의 공격을 진두지휘하는 돌격 대장이었다.
어쩌면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한을 이 경기에서 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선배들한테 결코 뒤지지 않아!’
김혁규는 승부욕에 불탔다.
잡초는 밟혀도 일어나는 법.
좌절이 김혁규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이순신은 포효하는 김혁규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한 골이 훗날 혁규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르겠는데?’
경기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김혁규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의 커리어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는 불씨를 살렸다.
앞으로의 행보는 온전히 김혁규의 몫이었다.
그와 별개로 AS 로마의 파상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만치니, 엘샤라위, 엘도르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광인의 드리블.”
“태클로 끊어내는 만치니!”
골을 먹힌 이후로 만치니의 플레이는 좀 더 거칠어졌다.
그럼에도 냉정함은 유지됐다.
파울을 하고도 옐로카드를 받지 않을 정도로 선을 딱 지켰다.
“저쪽 수비가 갑자기 빡세졌는데?”
“괜찮아. 지금처럼만 해. 어차피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까.”
이순신은 불안해하는 동료를 안심시켰다.
“1골을 지키려면 방법은 하나.
지키는 게 아니라 공격이야.”
이순신은 선수들에게 당부했다.
공을 끌지 말고,
동료에게 패스해서 기회를 만들라고.
무리한 공격은 역습을 내줄 수 있지만,
지금처럼 패스하며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전략을 펼쳤다.
그렇게 전반전을 끝냈다.
‘후반전에는 갑자기 타오른 사기가 좀 꺾였겠지?’
그러나 그것은 이순신의 착각이었다.
라커룸에서 무티뉴가 호통을 쳤는지, 선수들의 눈빛은 더더욱 매서워졌다.
“역시 명문은 명문이네.”
이순신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왜요?”
임단결이 물었다.
“쟤네들 눈빛 봐. 아직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어. 생각해보면 선취골을 먹고 경기를 풀어나가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닐 테니까.”
창단한 지 10년도 안 되는 팀에게는 없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후반전은 꿈FC가 궁지에 몰렸다.
“뭐지. 이 압박감은?”
“뭐긴 뭐야. 간만에 느껴보는 개 같음이지.”
구멍 역시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오히려 수비형 미드필더인지라 상황파악이 더 빠를 수 있었다.
후반이 되자 AS 로마는 더더욱 강해졌고, 꿈FC의 전력은 다소 약화됐다.
골을 넣은 상태였기 때문에 ‘배수의 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여러 번의 공격이 실패하자 공격 의지가 꺾이는 것도 자명한 사실.
무의미한 공방전이 계속될 때 만치니가 이빨을 드러냈다.
송희윤의 슈팅을 막아낸 만치니는 전방을 살폈다.
‘역습 찬스다.’
만치니는 길게 공을 찼다.
“달려!”
공을 받은 엘샤라위는 속력을 냈다.
기량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중국 팀으로 이적한 게 뼈아픈 실책이었지만,
다시금 AS 로마로 돌아왔던 그는 여전한 스피드를 보여줬다.
“엘샤라위가 달립니다!”
전방 압박을 하는 이광인과 오쿠보는 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오쿠보도 스피드에는 자신 있었지만,
엘샤라위는 바람처럼 잡을 수 없었다.
구멍이 그를 막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으윽!’
태양에 비친 구멍의 머리 때문에 순간 엘샤라위의 시야가 차단됐다.
“이때다!”
구멍이 재빨리 달려들었다.
하지만 등을 지고 구멍이 달려드는 걸 막아냈다.
구멍이 발을 뻗으면, 팔로 막아냈다.
시야가 회복된 엘샤라위는 뒤늦게 달려오는 엘도르를 발견했다.
“늦잖아!”
“네가 빠른 거잖아.”
엘도르는 미친 듯이 골문을 향해 달렸다.
툭!
엘샤라위가 구멍의 다리 사이로 공을 빼냈다.
“알까기?”
구멍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엘샤라위가 패스한 공이 빠져나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을 잡은 건 우즈베키스탄 특급 공격수 엘도르였다.
26살의 젊은 공격수인 이 선수는 AS 로마가 미래로 점찍었다.
10대의 나이에 국가대표팀에 데뷔해서 현재까지 21득점을 했다.
키가 무려 190cm나 되는 장신이었지만,
스피드가 매우 빨랐다.
이순신과 순식간에 매치 없이 이루어졌다.
엘도르는 등을 지고 버텼다.
그러면서 주변을 살폈다.
엘샤라위가 도와주러 달려왔다.
“받아!”
엘도르는 키가 큰 전봇대형 공격수가 아니었다.
동료와 협업을 할 줄 아는 선수였다.
측면으로 빠진 엘샤라위가 임단결하고 맞붙었다.
“속도에선 안 져!”
하지만 임단결은 따라잡지 못했다.
“뭐야?”
임단결은 당황했다.
엘샤라위의 속도는 이탈리아 리그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단결을 떨쳐낸 후 중앙을 향해 드리블을 쳤다.
2:1의 상황.
“둘 다 막을 순 없어.”
이순신이 이를 악물었다.
선택을 해야 했다.
이순신이 엘샤라위를 막기 위해 달려갔다.
패스를 차단하면, 엘도르가 슛을 할 수 없으리란 판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순신이라도 역동작을 피할 순 없었다.
이순신이 달려오는 것을 본 엘샤라위는 휘어지는 패스를 꽂아줬다.
엘도르가 가슴으로 공을 트래핑 했다.
그런데 서투른 나머지 공이 뒤로 넘어갔다.
[방패연이 발동합니다.]
이순신은 날아가다시피 엘도르를 향해 뛰었다.
엘도르는 뒤로 넘어간 공을 보더니,
몸을 틀어서 그대로 슛을 날렸다.
“엘도르 선수의 바이시클슛!”
뻥!
트래핑에서는 다소 미스가 있었으나, 슈팅에서는 전혀 없었다.
빠르게 날아간 공은 정확히 우측으로 향했다.
“골입니다! 엘도르 선수가 멋진 슛으로 동점골을 만듭니다!”
“이순신 선수 아깝습니다. 저건 어쩔 수 없었어요.”
엘도르가 동료들과 기뻐하는 사이,
이순신은 안타까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패배감이었다.
‘동료들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내가 방심했던 걸까?’
이순신은 자신의 플레이를 되짚어 보았다.
팀원들이 너무나 쉽게 뚫린 것일까?
아니었다.
구멍은 최선을 다했고, 임단결 역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비를 했다.
다만 엘샤라위가 엄청나게 빨랐고,
엘도르는 공격에서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순신은 막을 수 없었다.
“으음. 이번 골은 느낌이 좋지 않아요.”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강대범은 불안감을 느꼈다.
옆에 있던 임청수도 턱을 어루만졌다.
‘싸늘하다.’
예상했던 바와 조금은 다르게 흘러갔다.
이 상황에 대해서 가장 먼저 분석을 끝낸 건 신자영이었다.
“강 구단주님. 혹시 미러전이라고 아세요?”
“미러전이요?”
“네. 게임에서 쓰는 용어인데 상대와 똑같은 캐릭터로 싸우게 되는 걸 뜻해요.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요.”
“아! 이해됐네요. 그러고 보니 우리 자영 에이전트는 예전에 게임방송도 진행했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AS와 우리 팀이 똑같다는 말인가?”
임청수가 신자영에게 물었다.
“네. 어떻게 보면 더 까다롭죠.”
“그게 무슨 말이지?”
“이순신이 공격과 수비. 동시에 있는 것과 같으니까요.”
임청수는 AS 로마 진영을 살펴봤다.
“아!”
신자영의 설명을 듣고 나니 단박에 이해됐다.
“만치니는 이순신의 수비적인 모습, 엘도르는 이순신이 공격할 때 모습하고 비슷하고, 엘샤라위는 이순신의 이타적인 플레이와 상황을 뒤집는 능력이 비슷하네. 일명 크랙.”
“맞아요. 완전히 순신이를 나눠서 운동장에 뿌려서 배치한 꼴이죠.”
“흐음.”
임청수는 고민에 빠졌다.
그 시각 이에로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을 공격수로 돌리면 저런 모습일 텐데.”
이에로 감독은 엘도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역시 이순신의 공격력이 아쉬워서 몇 번이나 포지션 변경을 시도해보려고 했으나,
수비수로 있을 때만큼의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대로 수비수로서 많은 골을 넣어주긴 하지만,
공격수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늘 있었다.
장신임에도 킥력 좋고, 빠른 선수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AS 로마에는 마치 이순신을 셋으로 나눠서 배치했다.
이런 경우는 이에로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완성형 이순신이 있다.’
이에로는 결코, 남의 떡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이미 손안에 최고의 패를 쥐었기 때문이었다.
이순신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위기에 강했다.
분위기가 넘어갔다는 건 최고의 위기였다.
“어쩔 수 없지. 나라고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이순신은 차분히 마음을 다잡았다.
곱씹어 생각해보면 자신도 몇몇 상대편의 공격을 놓친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뒤에서 버티던 보경풍이나, 다른 수비수들이 대신 막아줬다.
모든 걸 다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이순신은 해방됐다.
구멍, 임단결, 이광인, 오쿠보, 송희윤 등은 각 나라에서 국가대표에 뽑힐 만큼 실력이 출중하지만,
AS 로마도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소속팀은 월드컵 우승 후보였으며, 개개인의 능력치가 매우 뛰어났다.
‘AS 로마 선수들보다는 아쉽지만, 그래도 우리 선수들을 믿어야 해.’
이순신은 볼 경합을 마다하지 않았다.
엘도르와 부딪히면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꾹 참았다.
엘샤라위를 한 번 막고 나면 진이 빠졌지만, 그래도 버텨냈다.
“순신 시주! 걱정 마시오!”
구멍의 활약으로 엘샤라위의 발이 점차 묶였다.
그렇게 꿈 FC는 밀리던 경기 양상을 바꾸고 있었다.
‘물결이 바뀐다.’
이순신의 눈빛도 바뀌었다.
“이순신 선수 달립니다.”
“젠장!”
역습을 허용한 AS 로마의 만치니는 반칙으로 끊어냈다.
1:1 동점인 상황에서 이순신이 프리킥을 찼다.
하지만 심기일전한 AS 로마의 골키퍼인 파트리시우도 추가 골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단합니다. 파트리시우!”
그에겐 인생 게임이 펼쳐졌다.
이광인의 패스를 받은 송희윤의 슛도,
오쿠보의 허를 찌르는 중거리 슛도 모두 막아냈다.
체력이 떨어진 김혁규가 윤광섭과 교체되었다.
이순신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앞으로 10분만 더 버티면 되는데…”
이미 세컨드 윈드도 쓴 상태였다.
그 순간이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가 발동합니다.]
‘여기서 이게 발동된다고?’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놓여진 상황이 독이 든 성배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AS 로마를 잡고 싶다는 마음만 있을 뿐이었다.
엘샤라위도 실수를 하고, 엘도르도 헛발질을 했다.
그들 역시 지쳤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아니었다.
“으아아아!”
내지른 기합 소리에 힘입어 마지막 역습을 시도할 수 있었다.
롱패스로 이광인에 공을 줬다.
그는 측면을 달렸다.
“따라붙지 마!”
만치니는 수비에게 지시했다.
크로스나 스루패스를 내주더라도 골을 확실하게 넣을 수 있는 선수만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힐끗 보니 이순신이 달려오고 있었다.
“막는다!”
이광인이 땅볼 패스를 찔러줬다.
만치니의 시선이 공을 향했지만,
이순신의 시선은 이미 골대를 향했다.
[천궁이 발동합니다.]
이순신이 찬 슛은 파트리시우의 손에 맞고 골문으로 들어갔다.
“골입니다! 꿈FC의 역전 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