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지금부터 싸워라
선수들은 어리둥절했다.
‘감독님이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그동안 한 번도 하지 않은 유형의 훈련이었다.
선수들의 개인기 향상과 1:1 능력 향상을 위해 미니 골대나 반코트 훈련을 하지만 오각형 안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팀 이렇게 나눈 거 실화입니까?”
구멍의 말에 선수들은 다른 팀을 살펴봤다.
이에로는 정확히 팀을 5개로 나눴다.
헤이니와 하비가 주축이 되어 외국계 선수들이 즐비한 A팀.
세찬 FC가 주축이 된 B팀.
이광인, 오쿠보가 있는 C팀.
아직 팀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송희윤을 비롯한 이적생들이 있는 D팀.
D팀과 비슷한 컬러지만 이순신이 속한 E팀이었다.
선수들은 입을 다물고 말없이 서로 눈치만 봤다.
한마디로 말해서 현재 파벌의 중심으로 나눈 것이다.
감독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감독님. 설마 꼴찌 한 팀은 방출인가요?”
누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렇다.”
이에로가 짧게 대답했다.
선수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다.
“진짜일까?”
“에이…설마…”
“하지만 우리 팀이 3부 리그치곤 선수가 많은 건 사실이잖아?”
축구에서는 한 경기도 못 뛰고 방출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선수들은 내심 어떻게 팀을 운용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누가 팀을 나가게 될지, 누가 팀에 남을지 은근히 심리전을 펼쳤다.
그런데 다짜고짜 쉬는 날 불러내서 싸우라니…
선수들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감독님. 이건 좀 아닌 거 같습니다! 우리도 엄연히 프로라고요!”
헤이니가 불만을 토로했다.
“평소의 훈련 태도로 보자면 전혀 프로라고 할 수 없는걸? 혹시 레알 마드리드나 도르트문트에서도 이랬나?”
“그…그건!”
이에로가 강력한 독설을 뱉어냈다.
헤이니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진득했다.
“아까 말한 대로 방출을 목적으로 이러한 훈련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진지하게 임하지 않고 팀 분위기를 해치는 자는 고려해볼 수 있겠지.”
오진성과 김혁규는 침을 꼴깍 삼켰다.
“15분씩 총 3피리어드로 진행될 것이다.
너희에게는 3개의 공이 주어질 것이고, 최대한 많은 골을 넣어라.
꼴등한 팀에는 방출까지는 아니더라도 벌칙이 주어질 것이다.
경기가 끝난 후에는 파티가 준비되어있으니 즐겨라.”
파티라는 말에 헤이니가 눈을 번쩍 떴다.
김혁규는 주말에도 하는 특별 훈련이라 크게 불만은 없었다.
이적생들은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기회였다.
기존에 있던 선수들 역시 자신 있었다.
5개로 나뉜 팀은 각각 골대 근처로 가서 몸을 풀었다.
“여기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는데 드디어 감독도 미친 건가?”
“내 말이…”
외국계 선수들 주축인 A팀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만약 꼴등 하면 받는 벌칙은 뭘까?”
“엉덩이로 이름 쓰기. 노래 부르기?”
“운동장 10바퀴 뛰기?”
“그 벌칙이 방출일 수도 있어…”
아직 팀에서 입지가 약한 D팀과 상대적으로 실력이 떨어지는 E팀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방출은 당하지 않을 거야.”
이순신이 박수치며 E팀과 옆에 있는 D팀을 격려했다.
그 말을 들은 선수들은 다소 안심됐다.
이에로가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손에 공을 들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규칙은 간단하다. 골을 넣어라!”
뒤에 있는 코치들도 공을 들고 서 있었다.
다들 호루라기를 보며 긴장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오쿠보가 손을 들고 말했다.
“잠시만요 감독님!”
“아씨- 뭐야!”
선수들은 긴장이 풀리자 바로 욕이 나왔다.
“미안. 미안. 그래도 꼭 짚고 넘어가야 했어.”
선수들은 오쿠보의 입을 주목했다.
“말해봐.”
“이 훈련은 만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거 같습니다. 저희에게 전혀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했을 텐데? 훈련이 아니라 가볍게 놀아보자고.”
이에로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빡대가리냐?”
“이해력이 없음?”
몇몇 선수들의 비난이 이어졌다.
그중에 하나는 헤이니였다.
그에게는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빨리 끝내고 다른 사람들이 받는 벌칙을 보면서 파티를 즐기고 싶었다.
오쿠보는 약간 시무룩해졌다.
“광인. 너는 내 마음 알지?”
“응.”
이광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상 공을 쫓아서 동네 축구처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놀이라니…
하지만 차이점은 분명했다.
이광인은 어떠한 상황이 생겨도 이겨내고자 했다.
오쿠보는 대표 팀에서도 그랬듯 납득을 하지 못하면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로가 공을 가운데에 놓았다.
선수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리고서는 살짝 멀리 떨어졌다.
‘곧 시작이다.’
선수들은 잔뜩 긴장했다.
삐이이익-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골대 앞에 있는 선수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오쿠보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선수들도 사실은 이걸 왜 하는지 몰랐다.
의외로 이 상황을 즐기는 선수가 있었다.
“난 좋은데?”
제일 먼저 헤이니가 달려나가서 공을 잡았다.
그리고서는 자신감 있게 공을 띄웠다.
“우-”
헤이니는 프리스타일 묘기를 하듯이 화려한 발재간을 선보였다.
공을 등 뒤로 넘겨서 받자 선수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어릴 때 이러고 자주 놀았지.
안 그래. 브라질리언?”
헤이니의 시선이 김혁규에게 향했다.
그러더니 공을 김혁규에게 줬다.
헤이니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해보라는 뜻이었다.
“혁규야. 너도 보여줘. 저쪽에서 도발하잖아.”
“나 저런 건 못해.”
김혁규가 속한 B팀은 고개를 외면했다.
같은 팀 선수들은 이마를 ‘탁’쳤다.
그만큼 헤이니의 개인기는 뛰어났다.
오진성이 공을 잡았다.
“혁규야. 쫄지 마. 축구는 골을 넣는 스포츠지. 묘기를 누가 더 잘 부리냐를 겨루는 스포츠가 아니잖아.”
오진성의 시선이 헤이니에게 향했다.
적어도 여기서 자신이 헤이니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걸 보여줄 생각이었다.
“맞아. 쟤네보단 골을 많이 넣을 수 있어. 짬에서 나온 바이브를 보여주자고.”
김혁규는 다른 팀은 몰라도 헤이니가 속한 A팀보단 골을 많이 넣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김혁규는 A팀을 향해 달렸다.
하비가 김혁규를 막아섰다.
“배신자 녀석.”
“배신이 어디 있어. 그냥 성향이 다른 것뿐이잖아.”
하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혁규의 등 뒤에 있던 구멍은 마음이 아팠다.
“어제의 적이 오늘도 적이 되다니. 나무관세음보살.”
김혁규가 구멍에게 패스했다.
그러자 좌우로 오진성과 윤광섭이 사선으로 튀어 나갔다.
구멍에게 A팀 선수들이 달려들었다.
그러자 키를 넘기는 패스로 오진성에게 공을 줬다.
가슴으로 트래핑한 오진성은 공을 받고 슬쩍 골대를 봤다.
‘광섭이가 노마크긴 하지만…’
오진성은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목적으로 발리슛을 때렸다.
제법 멋진 궤적을 그리며 공이 골대를 향해서 날아갔다.
퉁!
“아-”
오진성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공은 아쉽게도 골대를 맞고 벗어났다.
“아쉽다.”
“이거 골을 넣으라고 응원해야 해? 아니면 먹히라고 응원해야 해?”
다른 팀 선수들은 계속 관망하며 상황을 주시했다.
A팀 골키퍼는 공을 잡아서 멀리 찼다.
“자~ B팀이 비어있다고!”
공이 땅에 떨어지자 D팀의 송희윤이 제일 먼저 달려가서 공을 낚아챘다.
송희윤은 공을 잡자 D팀의 선수들이 라인을 끌어올렸다.
“누구지?”
“이번에 들어온 경력 신입.”
“쟤는 한국인으로 봐야 해? 싱가포르 사람으로 봐야 해?”
“무슨 상관이야. 축구만 잘하면 그만이지.”
그는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B팀이 모두 복귀했어!”
김혁규를 주축으로 한 선수들이 숨을 헐떡거리며 골문 앞을 지켰다.
송희윤은 스페인 리그의 빠른 속도에 적응하지 못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헤이니, 김혁규, 이광인, 오쿠보, 이순신이 보였다.
‘우리가 최약체란 말인가?’
송희윤은 좌절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래도 존재감을 보여줘야 해. 이대로 묻힐 순 없어.’
타지에서 누구보다 서러움을 많이 겪었던 그였다.
이 정도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늘 이런 것들과 싸우고 씨름했다.
그가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이순신이 있는 E팀이었다.
‘이순신을 뚫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다른 팀들은 골대를 지키기 바빴다.
송희윤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전진했다.
“오- 이순신을 상대로 1:1을 시도한다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수비수와 갓 들어온 공격수의 패기를 볼 수 있었다.
‘발놀림이 제법인데?’
이순신은 예전에 본 영화가 떠올랐다.
동티모르 선수들의 실화를 다룬 영화였는데 동남아 선수들의 개인기는 꽤 뛰어났다.
심지어 이순신을 앞에 두고 공을 옆으로 툭툭 차며 이동했다.
“정말 이순신을 제치려고 하는 건가?”
“애초에 저 형…욕심이 지나치네.”
“어이, 그건 너희 동네에서나 먹혀. 여기서는 절대로 안 돼.”
다들 비웃었지만, 오직 한 사람.
이순신은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고 진지하게 송희윤의 발밑을 주시했다.
송희윤은 공을 툭 치면서 빠르게 돌진했다.
이순신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속도도 빠르네.’
체력에 자신 있던 송희윤은 공을 좌우로 툭툭 차며 이순신을 끌어들였다. 이순신을 떨쳐내고자 했다.
미니 셔틀 런이 펼쳐졌다.
두 사람 다 활동량이 뛰어난 선수였다.
이순신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재밌다.’
이순신이 몰입했다.
‘활동량은 충분히 봤어. 빈 공간으로 롱패스를 찔러주면 상대 팀의 허를 찌르는 전술을 펼칠 수 있겠어.’
이순신은 문득 시험해보고 싶은 게 떠올랐다.
쿵!
이순신의 어깨가 송희윤의 어깨에 닿았다.
피지컬이 기술을 압도했다.
‘활동량에 비해선 아직 힘이 약하네. 하지만 이것도 금방 적응할 수 있는 문제. 감독님의 눈은 역시 틀리지 않았어.’
이순신이 슬쩍 감독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주변 선수들 눈에는 송희윤의 행동이 객기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역시 이순신을 뚫는 건 무리였네.”
이순신은 그대로 김혁규가 있는 곳을 향해서 달렸다.
김혁규와 B팀은 깜짝 놀랐다.
“순신아. 왜 여기로 와? 여긴 같은 편 골대라고!”
이순신이 김혁규의 말을 무시하고 가볍게 제쳤다.
“순신 시주. 마구니가 끼었소?”
구멍과 오진성이 막으러 달려왔지만 가볍게 날려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보경풍이었다.
이순신은 그대로 슛을 날렸다.
[도깨비 슛이 발동했습니다.]
보경풍은 깜짝 놀랐다.
이순신이 찬 슛은 순간 보경풍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공을 놓치다니.’
비록 시야에서는 사라졌어도, 공이 내는 특유의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보경풍은 온 신경을 청각으로 집중시켰다.
휘이익.
보경풍이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경풍이 형! 막아줘!”
안타깝게도 선수들의 염원은 전해지지 않았다.
철렁.
보경풍이 몸을 날린 방향은 옳지만,
이순신의 슛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