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115화 (116/161)

115화. 악마를 보았다.

“경기장을 둘러보시느라고 배고프시리라 생각됩니다.”

이순신과 신자영이 이동한 곳은 식당이었다.

‘la esquina’

직역하자면 ‘모퉁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가게는 모퉁이에 있지 않았다.

경기장 안에 있는 식당이었다.

주변에 손님이 없었다.

레알 마드리드 측에서 오롯이 이순신과 신자영을 위해 이곳을 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테라스를 열면 경기장이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가진 식당은 흔치 않았다.

“여름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죠.”

그만큼 특별하다는 걸 강조했다.

“애피타이저 나왔습니다.”

탁구공 같은 크로게따가 나왔다.

생선, 닭가슴살, 하몽 같은 재료와 감자를 빚어서 튀긴 음식이었다.

“와- 이거 정말 맛있는데요?”

이순신은 한 입 베어 물고 깜짝 놀랐다.

바삭한 식감과 부드러운 닭가슴살의 식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신자영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두 눈을 크게 뜬 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한 번 먹어봐.”

신자영이 자기 앞에 놓인 크로게따를 썰어서 이순신에게 건네줬다.

“이건 생선 살로 만들었군요!”

부산의 동그란 어묵 맛이 느껴질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맛이었다.

“외국인들이 피쉬 케이크라고 하면 혐오하더니 이런 건 잘 먹고 있네요.”

“응. 나도 깜짝 놀랐어.”

사실 처음 먹어본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유독 이곳에서 먹은 크로게따는 맛있었다.

그다음으로 나온 음식은 하몽이었다.

“누나. 이거 솔직히 돼지 육포 아니에요?”

“야. 그렇게 말하니까 없어 보이잖아. 흐흐.”

이순신과 신자영이 동시에 웃었다.

하몽은 스페인에서 질리도록 먹었다.

한국에서는 비싼 음식에 속하지만, 스페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만들 수 있는 흔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만든 사람에 따라서 미묘하게 맛이 달랐다.

루비 같은 선홍빛을 띠는 하몽을 먹는 순간 입에 침이 고였다.

익숙한 짭짤한 맛.

그러나 이곳에서 파는 하몽은 뭔가 달랐다.

‘씹을수록 고소하고, 점점 부드러워져.’

이순신은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신자영은 바게트 빵에 올려서 베어 물었다.

“어떡해. 너무 맛있어!”

최소한의 소금으로 맛을 낸 바게트가 짭짤한 하몽을 중화시켜줬다.

“이럴 때 와인이 빠지면 섭섭하죠.”

가게 매니저가 와서 와인을 따라줬다.

“전 괜찮아요.”

신자영은 프로였다.

협상을 앞두고 스스로 알콜을 거절했다.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넙죽 받았다.

어디서 본 건 있었다.

“흐음.”

향기를 맡은 뒤 그대로 입속으로 털어 넣었다.

향긋한 와인향이 목 안을 가득 메웠다.

“좋은 날이잖아요.”

“순신이 너 계약을 앞두고 너무 들뜬 거 아냐?”

부러운 신자영이 핀잔을 줬다.

그녀는 술을 싫어하진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큰 계약이기 때문에 집중하고 싶었다.

“응? 난 계약 때문에 그런 거 아닌데?”

신자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누나랑 한 약속을 지켜서 기분 좋아서요.”

“아-”

신자영은 두 손으로 볼을 가렸다.

그제야 생각났다.

이순신이 메달을 따오겠다는 약속.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런데 이순신은 하고자 하면 하는 남자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순신이 많이 컸다.”

신자영이 흐뭇한 미소로 이순신을 바라봤다.

처음에 이곳에서 이순신과 만났을 때는 꿈 꾸는 5부 리그 소년이었다.

지금의 이순신은 스페인 최고의 명문 팀인 레알 마드리드가 주목하는 선수가 됐다.

“음. 혹시 나 변했어요? 거만해졌다거나, 좀 재수 없다던가.”

이순신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런 거 없어. 오히려 더 겸손해져서 재수 없는걸?”

“진짜요? 그럼 앞으로 좀 거만해져 볼까?”

“으이그! 어울리지 않는 짓 그만 하세요!”

두 사람이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음식은 계속 나왔다.

토마토 파스타, 빠에야. 감바스가 연이어 나왔다.

“한 잔 더 주세요.”

이순신이 와인 잔을 들었다.

“순신아. 그만 마시는 게 어떨까?”

신자영이 부러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레알 마드리드의 협상 전략이란 생각이 들었다.

“혼을 쏙 빼놓고, 계약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거겠지?”

이순신은 축구는 잘하지만, 이런 쪽은 서툴렀다.

그래서 에이전트인 본인은 정신을 더더욱 바짝 차려야 했다.

‘이게 내 일이니까!’

‘아- 누나는 내가 술을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한다는 걸 모르지.’

허준이란 살아있는 숙취해소제가 있음에도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알았어요. 나 혼자만 계속 마시면 반칙이니까.”

이순신은 웃으면서 컵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얼굴에서 열이 올랐다.

‘취할 리가 없는데?’

[열병은 약이 없습니다.]

이순신은 깨달았다.

와인이 아닌 신자영의 웃는 얼굴을 보고 취했다는 걸.

‘정신 차리자. 순신아.’

이순신은 얼른 냉수를 들이부었다.

“메인 요리 나왔습니다.”

이곳의 자랑인 스테이크였다.

“빛깔 미쳤다.”

두 사람의 입가에는 바로 침이 고였다.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입에 넣는 순간!

두두두.

저 멀리서 투우 소가 미친 듯이 달려왔다.

이순신과 신자영 사이를 그대로 관통하는 맛이었다.

너무나 만족스러운 점심이었다.

“누나. 우리 다음에 여기 또 올래요?”

“자주 먹으면 질리지 않을까?”

“오늘 계약 안하면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래도 이 스테이크 먹으러 다시 올 거 같긴 해요.”

이순신이 씨익 웃었다.

신자영의 감정이 복잡 미묘했다.

스테이크 때문에 잠시 복잡함을 잊고 있었는데, 이순신은 곧 있을 협상에 대해서 생각한 모양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니까.”

“누난 오늘 협상이 어떻게 진행됐으면 좋겠어요?”

“둘 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긴 해.”

“하지만 누나가 챙길 수수료는 차이가 클 텐데요?”

순간 신자영의 눈빛이 변했다.

“나 돈 때문에 너 에이전시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요?”

“기적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 싶었으니까.”

“기적이요?”

“사실 네가 축구 선수로 재기하는 거 자체가 사람들이 불가능이라고 했어. 그런데 너라면 왠지 할 수 있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고, 거기에 내 인생을 맡겨보기로 한 거니까.”

“와- 그 정도 각오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꿈FC는 돈을 벌기 위해 모인 곳이 아니라 꿈을 이루고자 모인 거니까.”

이순신은 가슴에서 무언가 벅차올랐다.

“이제 진짜 이별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 그러니까 정신 단단히 차려야 해. 감상에 젖어서 판단이 흐트러지면 안 돼. 비즈니스적인 조언은 내가 해줄 수 있지만, 결국, 최종 선택은 네가 할 거니까.”

“누나.”

이순신이 지그시 신자영을 바라봤다.

“왜?”

“고마워요. 누나가 없었다면 난 이 자리에 없었을 거예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은 씨익 웃었다.

일생일대의 계약을 앞두고 레알 마드리드의 사무실로 이동했다.

***

사물에 들어가니 플레티스가 앉아있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순신 선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이순신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순신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역시 동양 친구들이 예의가 바르다니까. 하하.”

플레티스는 이순신과 악수를 나눴다.

‘이 사람이 레알 회장?’

이순신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이내 궁금증은 더 커졌다.

‘왜 이 사람이 나를 영입하고 싶어 하는 걸까?’

이제 그 궁금증을 풀 시간이었다.

자리에 앉은 세 사람은 본격적으로 비즈니스 모드에 돌입했다.

“제안한 조건은 살펴보았소?”

“네. 회장님. 다만 두 조건의 격차가 워낙 커서요.”

플레티스가 씨익 웃었다.

그가 제안한 첫 번째 제안은 이적료 1000억 원에 당장 이적이었다.

“바이아웃은 200억 정도였는데 이적료를 1000억 원으로 책정하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원래 이순신 선수의 몸값을 그 정도로 책정한 거 아니었습니까?”

여기에 연봉은 무려 5년간 매년 30억 원 수준이었다.

신자영이 받을 에이전트 수수료만 무려 100억 남짓이었다.

그야말로 잭팟이었다.

어쩌면 이순신이 원하는 이적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팀이었다.

꿈FC도, 신자영도, 이순신도 적어도 돈으로 불행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조건은 이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일까?

터무니없이 낮은 조건이었다.

두 번째 조건은 이적료 200억, 연봉 20억 원 수준이었다.

애초에 이순신이 원하는 조건이기도 했다.

이 형편없는 조건 차이에도 이순신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하나였다.

이적 시점이 지금 이 시점이 아니라 다음 시즌이었다.

즉 1시즌은 더 꿈FC에서 뛸 수 있었다.

“회장님께서 왜 이런 조건을 내세웠는지 궁금합니다.”

신자영이 물었다.

이것이 이순신이 직접 온 이유이기도 했다.

“이순신 선수가 왔으니 이제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군요.

최근에 어머님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이순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협상 테이블에서 가족을 건드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회장님. 그건…”

신자영이 말리고자 했지만, 플레티스는 손을 들고 계속 발언을 이어나갔다.

“축구계에서 꽤 보기 드문 낭만을 가진 선수인 거 같습니다. 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연봉을 0으로 책정한 바르샤의 다니엘 선수처럼 말이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번 이적 조건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신자영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일단 꿈FC의 취지는 재밌었소. 매년 상위권 팀들에게 오퍼가 와도 가지 않았던 건 의리. 그래서 궁금했습니다. 천억을 제안하면 과연 올까?”

“구단 진의 반대가 심했을 거 같은데요?”

레알 마드리드는 사기업이 아닌 시민 구단이었다.

“설득하는 데 애를 먹긴 했지요. 이순신 선수가 최근에 보여준 스타성과 잠재능력은 지금의 금액을 지불하기에 충분하지만,

4부 리그 선수에게 그만한 돈을 쓰는 건 돈 낭비라고 했으니까.”

“바이아웃은 200억으로 낮췄는데요?”

“내 말이 그 말이오. 무려 바이아웃 금액보다 800억이나 더 쓰다니. 다들 나보고 미친 노인네라고 하더군. 하하하.”

협상 테이블의 분위기는 어느새 플레티스가 압도하고 있었다.

신자영도 이순신도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우선 내 머릿속에는 1000억을 지불해도 회수할 방법이 있소.

또한 올해 같은 기량을 선보인다면 내년에 과연 1000억으로 영입할 수가 있을까?

빌어먹을 파리랑 첼시랑 바르샤 같은 똥파리들이 달라붙으면 그 이상이 될 수 있지!”

그래도 역시 1000억은 과한 숫자였다.

“그래도 과하다고 생각하고 있겠지요? 하지만 난 궁금했소. 이순신 선수가 가진 낭만을 우리가 돈으로 살 수 있을지 말이오.”

‘악마…’

이순신과 신자영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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