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협상
이순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나. 어디라고요?”
“레알 마드리드.”
“레알? 진짜요? 거기서 왜요?”
이순신과 레알 마드리드는 인연이 깊었다.
저번 시즌 국왕컵에서 레알을 괴롭히기도 했으며, 회장으로부터 직접 선물을 받기도 했다.
그러한 관심은 그저 존중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유니폼은 받았어도, 그 뒤로 구체적으로 제안이 온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놀랍게도 레알 마드리드는 월 단위로 꾸준히 이순신을 체크했었다.
***
리그가 끝나고 올림픽이 열리기 전부터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인 플레티스의 일과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요즘 이순신은 어때?”
“여기 있습니다.”
플레티스는 지속으로 스카우트 보고서를 받았다.
“올림픽에서는 손민흥이 주장을 맡을 테니 팀원으로 능력이 어떨지 볼 수 있겠군.”
올림픽은 향후 세계 축구를 지배할 유망주를 검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당연히 19세 이하 대회에서 활약한 선수보다는 올림픽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선수가 좀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올림픽이 진행될수록 플레티스는 깜짝 놀랐다.
“이건 생각 이상의 성적을 거뒀군.”
축구계뿐만 아니라 올림픽에서 가장 핫한 키워드는 이순신이었다.
독일, 스페인, 브라질을 꺾은 것도 모자라서 결승전에서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비록 올림픽에서는 득점왕이나 최우수 선수를 선발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최고의 활약을 보인 건 이순신이었다.
팀원으로서의 모습과 리더로서의 모습 두 가지를 확인한 플레티스는 더더욱 이순신이 탐이 났다.
“다른 구단들의 관심도도 높아질 테니 서둘러 이적을 준비하도록 해.”
“하지만 회장님. 바이 아웃이 무려 1000억 원입니다. 4부 리그 선수에게 1000억 원은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자네는 아직도 이순신이 4부 리그 선수로 보이나?”
“물론 이번 시즌부터 3부 리그 선수로 뛰긴 하지만, 1년만 더 기다려보심이 어떨까요?”
플레티스의 심기는 불편했다.
자신의 의도를 캐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경영진은 꿋꿋이 자신의 전략을 어필했다.
꿈FC는 다음 시즌에 1등을 해도 승격이 불가능했다.
안타깝게도 협회 룰이 그랬다.
논 유럽 룰.
팀에서 유럽 국적 외 선수는 3명까지만 출전시킬 수 있었다.
그 말인즉슨 한국계 선수를 3명만 남기고 전부 방출하거나,
3부 리그에서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때가 바로 최적의 영입 타이밍이라고 봅니다.”
이순신이 계속 3부 리그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3부 리그에서 우승을 하고도 2부 리그로 승격하지 못한다면,
선수 커리어에는 치명적이었다.
그때는 바이아웃 조항보다 낮은 금액으로 선수를 영입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플레티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호나우두, 베컴, 라모스 등 레알의 슈퍼스타 계보를 이순신이 이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일단은 계속 주시해.”
“알겠습니다. 회장님.”
올림픽이 끝난 후 플레티스는 좌절했다.
“젠장. 우승이라니. 이 바보들아. 이순신의 몸값이 더 올라가게 생겼잖아!”
그런데 의외의 일이 일어났다.
이순신의 바이 아웃이 200억으로 낮춰졌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스페인 3부 리그 선수의 몸값치고는 여전히 높은 금액이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역시 플레티스 회장이었다.
“바이아웃 조항이 갑자기 200억으로 낮아졌다고?”
“그렇습니다. 회장님.”
도무지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200억은 레알 마드리드에 큰 금액은 아니었다.
“신중할 필요는 있겠어.”
“올림픽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는 정보는 없습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봐.”
“넵.”
이순신의 바이아웃 조항이 낮아진 것이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선수에게 결함이 생겼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나마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건 선수 스스로가 이적의 필요성을 느끼고, 구단에게 이적 요청을 했을 때다.
꿈 FC는 재정적으로 이순신에게 계약금으로 많은 돈을 지불할 수 없었으니까.
하루 뒤.
플레티스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보고서를 받을 수 있었다.
“으흠. 이런 사정이 있단 말이지.”
가족 문제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원인을 파악한 플레티스의 고심은 깊어졌다.
가벼운 육체적인 상처는 금방 치료되지만, 이순신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꽤 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플레티스 회장의 예상대로 이순신이 스스로 이적을 요청했다.
강대범, 임청수, 이에로의 표정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그들 앞에는 신자영과 이순신이 앉아있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이런 요청을 해서요…”
이순신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프로의 세계에서는 돈이 전부라지만, 이 팀은 단순히 돈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는 팀이 아니었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강대범 구단주였다.
“아니야.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한걸.”
구단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강대범의 시야는 좀 더 넓어야 했다.
꿈FC는 이순신을 위한 팀이 아니었다.
제2, 제3의 이순신을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한 팀이었다.
“사실 너 정도 되는 선수가 이곳에 있는 건 생태계를 교란하는 일이지.”
이에로도 거들었다.
오히려 더 큰 팀으로 가면 성장할 수 있는 선수였다.
하부리그에 오래 머물다간 나중에 1부 리그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순신이 없다면 작년 같은 활약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3부 리그 우승을 목표로 할 예정이었다.
선수의 이적과 영입을 담당하고 있는 임청수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임청수는 침묵했다.
이순신을 영입한 것도,
꿈FC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임청수의 공이 컸다.
그의 말 한마디로 스페인 축구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고, 잠잠히 지나갈 수도 있었다.
“이순신의 이적을 허용합니다. 바이아웃도 200억으로 낮추겠습니다.”
“단장님.”
꿈FC는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순신의 의견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대신 아무 팀에나 안 보낼 거야. 널 제대로 키울 수 없거나, 감히 후려치기를 시도하는 팀에는 국물도 없어!”
“감사합니다. 단장님.”
이번엔 신자영이 감사 인사를 했다.
임청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우리 순신이 잘 부탁해요. 우리 순신이는요…”
왠지 ‘i believe’를 배경음으로 깔아줘야 할 분위기였는데 신자영이 제지했다.
“단장님 그만!”
“아쉬워서 농담 한 번 해본 거 가지고…너무하네!”
임청수는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50억 복권에 당첨되고, 스페인에서 시작된 실시간 축구경영 시뮬레이션.
그 사이에 이순신이 구단에게 벌어다 준 돈이 거지는 200억 가까이 됐다.
그래서 바이아웃 조항도 이 정도로 책정했다.
이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다!
마치 딸을 둔 아빠의 심정 그 자체였다.
“누나. 잘 부탁해요.”
이순신이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맡겨줘.”
신자영이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었다.
***
이순신은 일주일 동안 특별 휴가를 받았다.
신자영은 스페인에 남아서 생애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순신이 매물로 나오자 이적 요청이 물밀 듯이 쏟아졌다.
많은 구단들이 이순신의 가치와 잠재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시장 논리는 냉정했다.
어떻게 해서든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했다.
1부 리그를 미끼로 10억에 영입하려는 팀,
연봉을 1억으로 깎으려는 2부 리그 팀,
3부 리그에서 활약하는 경쟁 팀 등.
“이 정도에 우리 순신이를 팔순 없지.”
신자영은 일단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다 쳐냈다.
50억 이상 지불하겠다고 의지를 보인 팀은 추려보니 5팀 정도가 남았다.
스페인 하위권 1부 리그 팀이 2팀, 2부 리그 팀이 1팀, 이탈리아 1부 리그 팀에서 1팀,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1팀이었다.
신자영은 그중에서 우선 프리미어 리그에서 제안한 팀을 살펴봤다.
“손민흥이 있는 토트넘은 확실히 메리트가 있지만…”
이적료 100억에 연봉이 10억 원이었다.
다른 팀들도 이적료는 50~70억 사이, 연봉은 3~10억 원 수준이었다.
일반 직장인들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지만, 터무니없이 낮은 연봉이었다.
그나마 손민흥의 강력추천으로 토트넘이 가장 높은 금액을 책정했다.
“그래도 일단 제안을 해볼까?”
신자영은 제안이 온 구단들에게 선수의 요구사항을 말해줬다.
1년 동안 꿈 FC 임대 후 해당 팀으로 이적.
그 조건이 공개되자 구단들은 난색을 표했다.
당장 영입해서 쓸 수 없는 선수에게 몇십억 원을 투자할 구단은 없었다.
“역시 무리인가…”
신자영 역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영의 협상 전략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당장 쓰고 싶다면, 돈을 더 내라는 뜻이었다.
이순신에게 제안한 다섯 구단도 이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구단들도 얼마 정도 추가 금액을 제시하면 좋을지 회의가 열렸다.
그 사이에 신자영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 제안 메일이 왔다.
레알 마드리드의 제안이었다.
“이적료로 1000억을 지급하겠다고?”
바이아웃을 훨씬 상회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되면 꿈FC 입장에서는 선수를 무조건 협상 테이블에 앉혀야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번째 조건이었다.
“레알이 이런 제안을?”
현재 책정된 바이아웃 조항인 200억을 제안했는데,
놀랍게도 1년 동안 꿈FC에 임대 후 이적 조항이었다.
“이렇게까지 치밀하게 준비하다니.”
신자영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
꿈FC 경기장에 레알 마드리드가 보낸 리무진이 도착했다.
선수들은 깜짝 놀랐다.
“순신 시주. 성공했구려. 까만 리무진이라니. 언젠가 나도 저걸 갖게 되겠죠.”
선수들은 부러웠다.
구멍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해줬다.
이순신과 신자영은 리무진을 타고 경기장에 도착했다.
“반갑다. 오랜만이지? 올림픽에서 활약 잘 봤다.”
“벤제마?”
이순신은 깜짝 놀랐다.
레알 마드리드의 베테랑이자 살아있는 전설인 벤제마가 친히 마중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순신이 신자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이순신이 레알 마드리드 사무실에 도착한 순간부터 협상작업이 시작됐다.
벤제마의 친절한 투어가 끝났다.
“어때?” “역시 명문은 명문인 이유가 있네요.”
“같이 한 팀에서 뛰게 되면 좋겠다. 나중에 보자.”
벤제마가 웃으면서 인사를 한 후 사라졌다.
“이쪽으로 가시죠.”
구단 관계자는 이순신과 신자영을 다음 장소로 안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