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골 넣는 수비수-110화 (111/161)

110화. 리빙 레전드

“뭐야. 뭐야. 진짜 있는 거야?”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다.

이순신이 덥석 물었다.

월척이로구나!

김혁규는 신나서 질문했다.

말이 빨라지고, 억양도 높아졌다.

“순신아. 누군데! 말해줘어.”

이순신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여자 친구는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 있어.”

김혁규는 놀랐다.

이순신은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인 줄 알았다.

“미쳤네. 얌전한 고양이가 사고 친다더니. 고양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대하긴 하지만, 하는 짓이 거 너무 앙큼한 거 아니오?”

이순신은 그저 웃기만 했다.

“누군데?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면 좀 만나볼 필요가 있지 않아?”

김혁규는 악마의 속삭임을 건넸다.

“혁규. 뒤질래?”

“농담이다! 그런데 누군지 나한테만 살짝 알려주면 안 됨?”

“응. 안 돼.”

이순신은 단호했다.

“이순신. 합격!”

“뭐, 인마?”

이순신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남자가 그 정도 순정은 있어야지!”

“동정인 너한테 들을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전쟁이다. 이 개…”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 식당으로 향했다.

그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광인과 임단결이었다.

두 사람은 이순신이 외국 미녀들에게 대시 받을 때부터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재빨리 달려갔다.

“순신이 형!”

“응?”

“밥 먹으러 가죠? 같이 가요!”

“어. 그래.”

“아까부터 쭈욱 지켜봤는데 외국 선수들 누구예요?”

“말도 마라. 이 고자 새끼가…”

김혁규는 아까 있었던 일에 MSG를 왕창 넣어서 풀었다.

“역시 순신이 형. 대단해.”

“응. 놀랍다. 운동선수가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다니.”

“그런데 내심 부럽기도 하다.”

“동감.”

“나도.”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자!”

이순신은 쑥스러운지 빠른 걸음으로 먼저 앞으로 치고 나갔다.

“같이 가!”

김혁규가 재빨리 달려나갔다.

이광인과 임단결도 이순신을 향한 존경심이 더더욱 올라갔다.

***

일본과의 결승전.

Day – 1.

손민흥이 감독과 면담 중이었다.

“민흥아. 상태는 좀 어때?”

“감기 기운은 거의 다 나은 거 같아요.”

아직 목소리가 좀 가라앉긴 했지만,

손민흥은 빠르게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그렇다고 정상 컨디션이라고 하긴 좀 그래요.”

팀 닥터의 말에 손민흥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뛰면 몸에 열이 올라오고 어지러웠다.

코치가 말했다.

“아무래도 민흥이는 선발로 나가기 힘들겠는데요.”

안태리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저 뛸 수 있습니다.”

손민흥이 출전 의지를 보였다.

후배들이 차려놓은 밥상을 숟가락만 뜨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소속팀에서는 차출을 거부했지만, 손민흥이 고집을 부려서 온 대회였다.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네 마음은 안다. 민흥아. 그런데 너 잘못되면 나 잘려.”

안태리의 농담 속에는 뼈가 있었다.

현재 가치로 1000억인 선수가 잘못되면 그 비난은 온전히 안태리의 몫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카드지.”

안태리는 고심 끝에 손민흥을 교체선발명단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감독님.”

손민흥도 안태리도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었다.

한편, 선수들은 마지막까지 러닝을 하면서 몸 상태를 끌어 올렸다.

다른 팀이 상대였다면,

적당히 해도 졌지만 잘 싸웠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대의 이름이 일본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지더라도 아깝게 져야 한다.

이기더라도 스코어뿐만 아니라 경기 내용도 좋아야 한다.

완벽한 승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 선수들의 사명이었다.

한일전은 그런 것이다.

“솔직히 일본은 대진운빨이 심했지.”

“맞아. 맞아.”

대표 팀 중에 이미 기세부터 진 선수들이 있었다.

이순신은 그 소리를 듣자 달리기를 멈췄다.

저벅저벅.

그들을 향해서 걸어갔다.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못 들어주겠네. 진짜.”

“순신아. 그게 아니라…”

“나중에 지고서 대진 운, 홈그라운드 탓하려고?”

“…”

두 선수는 말문이 막혔다.

이순신은 예민한 상태였다.

손민흥은 어떻게 하는지 지켜봤다.

“일단 메달은 확보해서 의욕이 없는 건 알겠어. 감독님한테 말해서 벤치에서 쉬는 게 어때?”

“누가 뛰기 싫대?”

“그럼 하기도 전에 일본한테 쫄음?”

“솔직히 그렇잖아. 객관적인 전력은 일본 애들이 앞서니까.”

“누가 그래? 너의 주관적인 평가겠지.”

팀 동료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

덤벼도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속으로 부글부글 댔다.

선수들이 몰려들어서 두 사람 사이를 멀찌감치 떨어트리려고 했다.

손민흥은 자신이 나서야 할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기다려. 어쨌든 좀 더 지켜보자.”

안태리가 손민흥을 말렸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3자의 개입은 자칫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손민흥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순신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급기야 이기지가 말리러 왔다.

이순신은 결승을 앞두고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그 날카로움으로 이기지를 흘겨봤다.

“제가 틀린 말 했어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쟤네가 자꾸 밑밥 깔잖아요.”

“순신아.”

이기지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아- 형 왜 그러세요.”

“순신아. 참아.”

이기지가 말리는 선수를 뿌리쳤다.

멀리서 지켜보던 기자들은 카메라를 눌러댔다.

“무슨 일이야?”

“결승전을 앞두고 내분이라도 일어난 건가?”

일본 기자들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코칭 스태프들이 촬영을 중지시켰다.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내일 경기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의 상상력만 잔뜩 자극하고서는 해산시켜버렸다.

“이순신!”

“네.”

“자꾸 그러면 내가 할 말이 없어지잖아. 나도 한소리 좀 하자!”

이기지는 고개를 돌려서 밑밥 깐 선수들에게 말했다.

“이 쓰벌 놈들아. 너네들이 그러고도 대표야!”

이기지의 갑작스러운 태세전환?

아니었다.

최고참으로서 먼저 말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을 잃었을 뿐이었다.

“낼 경기에서 내 앞에서 어슬렁거리면 다 뒤진다.”

그는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다.

“형. 만약 순신이가 어슬렁거리면 어떡해요?”

김혁규가 물었다.

“얜 괜찮아. 내 옆에 있는 애니까.”

“와- 형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야! 인생은 줄을 잘 타야 해. 안 그렇습니까? 주장님? 딸랑딸랑.”

이기지의 기지로 긴장됐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예민했던 이순신도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결승에서 지면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이광인도 거들었다.

순간 눈빛이 미친놈 같았다.

결승전에서 선제골을 넣고도 역전패를 당했기에 그 분함을 이광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맞아. 그때 며칠 동안 잠도 못 잤어.”

같이 뛰었던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올림픽에서는 더는 이룰 목표가 없도록 만들자! 우리가 살아있는 리빙 레전드가 되자고!”

리빙 레전드란 단어가 선수들의 가슴에 박혔다.

흔히 말하는 뽕이 제대로 차올랐다.

선수들의 눈빛이 변했다.

하나의 목표로 향해 달려가는 팀은 절대 지지 않는다.

***

“대한민국 축구 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남자 올림픽 축구 결승전이 열리는 요코하마 도쿄 종합경기장입니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다.

관중석에는 관중들이 꽉꽉 찼다.

무려 7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이었다.

전날 열린 3~4위전에서는 멕시코가 브라질을 2:0으로 꺾었다.

압도적으로 이길 거라고 생각한 여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역시 일본의 조직력을 알아줘야 한다니까.”

“이러면 일본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이순신도 경기장에서 몸을 풀었다.

김혁규가 다가왔다.

“순신아. 이거 장난 아닌데?”

이순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장은 일본의 유니폼과 색깔이 똑같은 파란색으로 꽉 찼다.

“이래서 홈그라운드 이점은 무시하지 못하나 봐.”

관중들은 일본과 오쿠보의 이름을 번갈아 가면서 불렀다.

“재팬. 오쿠보! 재팬. 오쿠보!”

일본 시민들은 굳게 믿었다.

오늘 일본 축구계의 새로운 역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몸을 푼 양 팀의 선수들이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미 은메달은 확보했다. 너희들이 흘린 땀의 대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욕심이 조금 난다.”

“그럼요. 은메달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금메달 도전해보겠습니다!”

안태리는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선수들이 긴장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대와는 다르게 한일전에 대한 부담감도 크지 않은 듯했다.

“그래. 내가 너희들에게 요구하는 건 딱 하나. 다치지 마라!”

“넵!”

“아- 그리고 혹시 독도는 우리 땅 이런 거 준비한 사람은 없지?”

과거에 한 선수가 관중석에서 플래카드를 받아서 흔들다가 심사가 뒤틀린 일본의 항의 때문에 메달을 박탈당할 뻔했다.

“없습니다!”

“그래. 그런 거 안 해도 우리 땅인 거 다 아니까 이기더라도 흥분하지 말고!”

“하하하.”

안태리는 마지막까지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선수들은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경기장에 나섰다.

***

삐이이익-

주심의 신호와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공격은 일본이 먼저 시작했다.

오쿠보를 중심으로 짧은 패스를 하며 경기를 풀어나갔다.

엄청난 중압감이 일본 선수들을 짓눌렀다.

과도한 기대감이 되레 독이 되었다.

“후웁.”

일본 선수들은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괜찮아. 우리는 우리의 축구를 하면 돼.”

오쿠보는 형들을 격려했다.

일본의 공격수와 이순신이 마주쳤다.

‘이렇게 컸었나?’

그는 예전에도 이순신과 경기를 가진 적이 있었다.

신체적인 변화는 크게 없었다.

달라진 건 이순신의 위상과 실력뿐이었다.

이순신은 그에게서 공을 빼앗아서 이광인에게 줬다.

이광인과 정대건의 패스가 이어졌다.

“대한민국! 역습 찬스입니다!”

정대건에게 리턴패스를 받은 이광인은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긴장이라도 한 것일까?

일본 수미에게 그만 공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는 이번에 와일드카드로 선발된 선수로써 나름 유럽 무대에서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었다.

“윽.”

그는 공을 빼앗아서 전방에 있는 오쿠보에게 연결했다.

오쿠보는 공을 잡아서 미드필더에게 연결했다.

4-5-1 포메이션을 쓰는 일본은 미드필더를 많이 가져가는 전술을 썼다.

역습보다는 아기자기한 패스를 주축으로 대한민국의 수비를 뒤흔들었다.

“확실히 선수층은 탄탄하단 말이지.”

이순신은 일본 선수들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봤다.

예전과는 다르게 유니폼이나 팔기 위해 해외 진출하던 시기가 지났다.

군 면제 이점, 마케팅적인 측면을 떠나서 일본 선수들의 실력이 크게 향상된 건 사실이었다.

이순신은 빠르게 공을 걷어냈다.

그러고 나서는 확신했다.

‘오늘 우리는 무조건 이긴다.’

몇몇 일본 관중들 때문에 그들은 대참사를 겪게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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